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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재는 스타팅 라인에 섰다. 등판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미적지근했다. 여름이 끝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겨운 더위가 끝나고 에어컨을 끌 때가 돌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질 않았다. 어떤 계절들은 가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기재에겐 재작년 겨울과 올해 여름이 그러했다.

 “김기!”

 “왜!”

 겨운이 소리를 높였다.

 “너 멍 때리다간 넘어진다!”

 “정겨운, 걱정도 많아.”

 기재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낄낄 웃었다.

 “야, 이래봬도 이 년째 무사태평한 몸이거든.”

 김기재는 재작년 봄에 육상을 시작했다. 순전히 W의 부추김 탓이었다. 김기, 한 번 달리자. 너 잘 달리잖아, 축구도 잘하고. W의 입 바람은 사실 그렇게까지 애원조는 아니었다. 그렇게 매혹적인 제안이지도 않았다. 기재가 거절했다면 W는 다른 놈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기재는 육상부에 들어가게 됐다. 넌 W가 하는 건 다 오케이해주더라. 나중에 기재와 자주 어울리던 친구 한 명이 심심한 감상을 말해주었다.

 햇발이 강해지고 바람이 조금 불기 시작했다. 겨운은 앞에서 타이머를 쥐고 있었다. 기재, 잘해라! 누군가 외쳤다. 호각이 불렸다.

 기재의 몸은 유연하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람과 맞서며 다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아주 빠르지는 않았다. 달려야 할 거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지치면 힘내지 못 한다는 사실을 기재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W가 물었다. 야,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 하냐. 기재는 그게 아주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넌 달리면서 생각도 하냐?

 하지만 김기재는 오늘 W를 생각하고 있다. 재작년 여름의 일이고 아직 기재의 어머니가 불 때문에 죽기 전의 일이다. 상상 속의 W가 머쓱하게 웃는다. 야, 김기 넌 집중을 존나 잘하나 보다. 난 그런 게 잘 안 되거든. W는 작년 겨울 전학을 갔다. 가기 전에 머쓱하게 기재의 어깨를 툭 쳤다. 잘 지내라. 연락 자주 하고. 기재는 W가 조금 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호각 소리가 들렸다. 기재는 헐떡이며 멈춰 섰다. 정겨운이 스타팅 라인 쪽에서 기재의 지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재는 흐르는 땀을 닦았다. 티셔츠를 잡아 마구 흔들었다. 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었다.

 “김기재 너 제대로 안 뛰지!”

 “왜, 기록 많이 나빠?”

 겨운은 대답 대신 기재의 엉덩이를 찼다. 기재가 악,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냐!”

 “에이, 친구 때문에 들어온 것치곤 꽤나 근성 있는 놈에게 너무 눈물겨운 취급이다 이거.”

 “하여튼 김기… 콱 관둬버리던가.”

 “안 돼, 나 여기 좋아해.”

 “그럼 잘해 바보야.”

 “알겠어.”

 겨운이 다시 스타팅 라인으로 돌아가는 동안 기재는 고개를 숙여 운동화 끈을 묶는다. 묶으면서 생각한다.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 하냐? 기재는 W가 무슨 생각을 하며 뛰었던 걸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 했다. 그 땐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W 때문은 아니었지만 기재는 이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생각하면서 달린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의 길을 가지고 달리는 동안 그것을 생각하고 만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 아닌지. 네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기재는 천천히 라인 앞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트랙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있는 것 같았다. W가 떠나고 어머니는 죽었는데 이 계절이 다시 돌아왔으며 다시 떠나고 있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다. 어떤 계절들은 가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기재에겐 재작년 겨울과 올해 여름이 그러했는데, 이번 가을은 어떠할지 묻는다. 그러니까 김기재, 너는 이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달리는가.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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