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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V «장례식»
2차/old 2019. 10. 24. 19:17

 1.

 그곳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코를 훌쩍이며 회사를 뛰쳐나온 그가 조금 민망해질 정도의 분위기였다. 마당엔 어림잡아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활짝 열린 현관문 안쪽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태리 커트는 그 사실에 다소 침울해졌다. 미스 메텔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 할 거야. 그는 단지 그녀가 도서관에서 근무할 적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던 보조사서에 불과했다. 기억 속의 미스메텔이 활짝 웃는다. 태리, 이것 좀 도와줄래? 태리는 사다리를 잘 탔다. 높은 곳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어 알파벳순으로 정돈했다. 메텔은 사다리 아래를 단단히 쥐어 잡고 태리에게 한 권씩 건네받는다. 두꺼운 책을 받을 땐 무게 때문에 상체를 조금 숙여야만 했고, 그럼 스웨터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도금 목걸이가 흘러내렸다. 언젠가 태리는 물어본 적이 있다. 나비를 좋아하시나 봐요. 미스 메텔은 온화하게 웃기만 했다. 특별히 더 좋아해본 적은 없어. 미스 메텔은 태리 커트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 도서관의 사서로 남아있었다. 명예로운 퇴직을 하지 못 했다고 들었다. 그녀는 암으로 예순 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 일을 그만두었다. 입원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태리 커트입니다.”

 태리는 방명록에 붙은 숫자를 읽어보았다. 52. 그러니까 미스 메텔은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던 셈이었다. 거실에선 누군가 재즈를 틀어놓았다. 잔을 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조곤조곤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태리는 서명을 했다. 쉰 세 번째였다.

 미스 메텔은 침실에 있었다. 관을 침대처럼 꾸며놓았다. 조문객들은 국화만 가지고 오지 않았다. 안개꽃과 장미, 러넌큘러스…… 꽃들은 키가 달라서 들쑥날쑥했다. 태리 커트가 가지고 온 건 두껍고 무거운 <시간여행의 역설>이었다. 미스 메텔이 그 책을 좋아했다.

 방문 앞에서 태리 커트는 머뭇거렸다. 그는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서 타인의 관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의 메텔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시체도 있을까? 죽음은 세계에 분명히 붙어있으면서도 이 세계의 모든 것과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이든 죽음이 붙으면 공포스럽기만 했다. 죽은 사람의 미소. 죽은 메텔의 목걸이. 죽은 그녀의 재즈. 죽은 그녀가 좋아하던 책. 책을 껴안은 태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텔은 관에 그저 얌전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등 너머에서 누군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실례합니다.”

 태리가 허겁지겁 통로 쪽으로 비켜섰다. 남자는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엉거주춤 선 태리의 옆을 매끄럽게 지나쳤다. 긴 코트를 걸치고 안엔 체크 양복을 빼입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스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인 얼굴이 굉장히 앳되어보였다. 그런데도 어딘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특별히 미남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그랬다. 태리 커트는 멍하니 자리에 서서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걸 지켜보았다.

 남자는 줄기가 무성한 꽃 한 다발을 미스 메텔의 위에 얹어놓곤, 잠시 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마침내 어떤 결론을 내린 듯 했다. 그는 똑바로 서서 손을 뻗은 후, 관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렸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태리 커트는 그의 손에서 반짝이는 금빛 물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도 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태리 커트는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압도적이고 굉장한 느낌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공포와 경외심으로 응축된 힘이 명치 아래를 가격한 것만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그러나 남자가 시선을 거두고 걸어 나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고양되었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상한 우울감이 남았다. 태리 커트는 몸을 돌려 저를 스쳐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입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아 뻐끔거렸다. 남자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태리 커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품속에 들린 책의 표지를 훑었다. <시간여행의 역설>, professor V. 남자의 표정이 일순 씰룩거렸다.

 “개정판을 읽어요.”

 남자는 비웃는 것도 그렇다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것도 아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오래 전에 써서 헛소리가 된지 오래거든요.”

 그런 후… 그는 떠났다. 인파에 부딪히거나 스며드는 법 없이 유연하게 틈 사이를 흘러 다니는 것처럼 걸어서, 마침내 거실로부터 종적을 감추었다. 입구에서 조문객 한 명이 그와 부딪히기는 했으나 거의 고의처럼 보였다. 어머, 죄송해요. 검은 스웨터를 갖춰 입은 여인이 은근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의 것을 마주하고 있을 여인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좀 전에 태리 커트가 겪었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분명 자신 역시 저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자 태리는 조금 착잡해졌다. 남자는 화를 내거나 대화를 이어나가는 법 없이 짧게 고개를 숙인 후 현관 너머로 사라졌다. 재즈의 곡이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 재생되었다. 조문객들의 소곤거림이 아주 커졌다. 갑자기 세상이 굉장히 시끄러워진 것 같았다. 태리 커트는 급작 굉장한 조급함에 사로잡혀 왼손에 책을 쥐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조문객들과 마구 부딪히고 떠밀려 자꾸만 주춤거렸다. “죄송합니다. 아, 죄송해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만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인파 사이를 “흘러 다니던” 남자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누구의 인연일까? 메텔의 “누구”였을까? 태리 커트는 현관 문턱에 발이 걸려 거의 넘어질 뻔했다. 마당엔 여전하게도 어림잡아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칠이 벗겨진 흰 울타리 너머로 차 한 대가 매끄럽게 출발했다. 태리 커트는 우두커니 서서 검은 승용차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뒤에, 누군가 툭 어깨를 쳤다. 화들짝 놀란 태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캐시가 있었다.

 “태리, 와줬구나. 누가 소식을 전해줬던?”

 “마담 앙졸라가요.”

 태리가 어색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캐시, 메텔에게 애인이 있었나요?”

 “글쎄.”

 캐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애는 원래부터 내게 그런 말은 잘 하지 않았거든. 비밀이 많은 애였지. 특히 서른 살 이후부터는. 메텔에게 인사는 했니?”

 “아뇨, 아직…….”

 “그럼 들어와.”

 태리는 다시 현관 문지방을 넘다말고 조금 주춤거렸다.

 “저, 캐시. 미스 메텔은 꽃 대신 책을(그것도 개정판도 아닌 구판을) 들고 와도 괜찮다고 말해주셨을까요?”

 “내가 알겠니.”

 캐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니. 그 애는 비밀이 많은 애였다고.”

 메텔은 기억 속의 얼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고 왜소했으나 여전히 편안하고 귀품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먼 여정을 떠난 것처럼 보였다. 혹은 영혼이 어딘가로 잠시 긴 외출을 떠난 상태고, 몸은 여전히 보존된 채 새 보금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허연 입술과 핏기 없는 얼굴이 산발한 꽃들 사이에서 보다 도드라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태리 커트가 직전까지 두려워하던 죽음의 기미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품에 줄기 무성한 그 꽃이 안겨져 있었다. 태리 커트는 한 눈에 그 꽃을 알아보았다. 광장 화단에 빼곡하게 심어진 글라디올러스였다. 여름이 아닌데도 활짝 피어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이상하긴 했으나, 온실의 존재를 생각하면 꼭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만개한 꽃망울이었다. 노랗고 싱그러운데다가 줄기가 젖어있었다. 꽃망울 아래엔 바싹 마른 메텔의 목덜미가, 그리고 얌전히 걸린 금색의 나비목걸이가 있을 테였다. 남자가 그것에 입을 맞췄다. 들어 올리고 경의를 표했다. 모두의 경외를 받아야 마땅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남자가.

 그 애는 비밀이 많은 애였지. 캐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태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예순이 넘은 미스 메텔의 곁을 지키는 젊고 어린 청년을 떠올리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를 메텔의 리틀 핑거-젊은 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리는 생각을 접어놓았다. 고인의 앞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상상하는 것도 다소 경거망동한 행동이다. 죽음과 고인이라는 단어는 결말과 비슷한 냄새를 가지고 있어서, 이야기를 그 이상 이어나가는 것을 지나친 행위로 만든다. 태리 커트는 책을 내려놓곤 잠시 고개를 숙인 후, 작게 중얼거렸다.

 “미스 메텔, 안녕하세요.”

 저녁으로 접어드는 햇빛이 커튼 사이로 노랗게 반짝였다. 탁자에 놓인 책의 표지로 내리쬐었다. 저자 이름이 다만 무심하게 번들거렸다. professor V. 남자는 방명록을 적지 않았다.

 

 2.

 백작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마당을 나온 V가 차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언제 왔어요?”

 “한참 전에.”

 “쫓아왔어요?”

 “계속 타고 있었어.”

 V는 신경질적으로 차문을 닫곤 운전대를 잡았다.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다. 지역뉴스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메텔의 장례식에선 내내 재즈를 틀어주었다. 장례식만도 못 한 라디오 방송이라니. 소리 내어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는데 백작은 눈길을 돌려 라디오에 시선을 주었다. 곧 팍, 소리를 내며 전원이 꺼졌다. 차는 정적에 휩싸였다. V는 시동을 걸었다.

 “꺼달라고 한 적 없어요.”

 “지루해했잖아, 달링.”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요.”

 V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

 “백작, 저에 관해서 그렇게 확신을 가져주지 말아줄래요.”

 “달링에 관해서가 아니면 어디서 확신을 가지지?”

 “부탁한 적 없다고 했잖아요.”

 “장례식만도 못 한 라디오 방송이라니.”

 “…….”

 V가 매서운 눈으로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는 방금 V가 마주하고 온 시체보다도 핏기가 없어 창백한 얼굴을 하곤 V의 시선을 받아치며 미묘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매혹적이고 유독한 미소였다. V는 작게 신음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페달을 밟자 차가 앞으로 이동했다.

 “조금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해서,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세요.”

 V는 으르렁거렸지만 아까보단 한풀 꺾인 목소리였다. 흐렸던 날씨가 개어 햇빛이 나오고 있었다. 두껍게 선팅된 차는 온통 캄캄해서 한밤중 같았다. 백작은 무심하게 턱을 괸 채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당을 뛰쳐나온 청년이 엉거주춤 서있었다. 백미러에 비쳐 반대로 뒤집혀 보였다. 차가 앞으로 이동했으므로 청년은 조금씩 줄어들고, 줄어들고,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는 대로변을 지나 도로로 들어섰다. 둘은 끔찍할 만큼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속도가 붙어 차가 노을 아래를 달리기 시작했다.

 “달링을 닮았던데.”

 사차선 도로에 접어들었을 무렵 백작이 건조하게 던졌다. V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선을 갈아탔다. 가로등이 켜졌다. 사위는 놀랄 만큼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V는 앞을 보는 채로 대답했다.

 “아뇨, 저보다 멍청해요.”

 “달링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겠어.”

 “끔찍한 책을 들고 있던데요.”

 “장례식에 본인이 읽을 책을 들고 오는 사람은 없어, 달링.”

 V는 입을 다물었다. 도로에 차가 없어서 자꾸만 가속페달을 밟았다. 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녁이 끝나가고 있었다.

 “메텔이… 제 책을 읽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어요.”

 운전대를 쥔 V의 손이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너무 어렵고 쓸데없는 책이라 그녀가 읽을 만 한 게 못 돼요.”

 “상징적 의미의 독서도 있는 법이지.”

 “알고 싶지 않아요.”

 이제 차는 거의 최고 속력을 내고 있었다. 운전대를 쥔 V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백작은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선텐한 차창 너머엔 더 이상 침투할 햇빛이 한 움큼도 남아있지 않았고 차는 미친 듯이 어두웠다. 바깥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 가로등 불빛만이 희끄무레한 점처럼 뭉개져 보였다. 그런데도 차는 차선을 침범하는 일 없이 매끄럽게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밤은 이전의 세계보다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다가오곤 했고 흔들리지 않는 차는 그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트렁크 안엔 밤보다 낮의 세계에 익숙했던 사람의 시체가 들어있었다. 피가 다 빨려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아주 가볍고 바싹 마른 여인의 시체가.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일 터였다.

 “슬프진 않았어요.”

 V는 관 속에 놓여있던 메텔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순 살이 넘었어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V는 주름살과 죽음의 그림자를 아주 손쉽게 걷어내고 언젠가의 메텔, 그러니까 마당 앞에서 처음 만났던 어느 여름날의 그녀를 힘들이지 않고 상상할 수 있었다. 나와 우주여행을 떠날래요? 그 무렵의 V는 초라하고 미숙했으며 볼품없고 너절했다. 주변 사람은 어머니 한 명뿐인데도 도무지 간수하지 못 해 절절매고 울음을 터뜨렸다. 메텔은 V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V가 V임을 포기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돌려 사랑에 대해 논해주었다.

 “정말로… 슬픈 건 아니었어요.”

 차가 최고 속력을 찍었다. 어둠 속의 도로를 요란하게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백작의 몸이 희미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서 관성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V는 몸을 둥글게 말고 앞을 쏘아보고 있었다. 백작은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달링, 후회는 없잖아.”

 세상이 침묵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길을 잃지 마.”

 순간, 그들 앞에 펼쳐진 가로등이 한순간에 점멸했다. 도로는 순식간에 無에 휩싸였다. V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속력을 줄이지 못 한 차는 가드레일을 박고 빙글빙글 돌았다. 도로와 타이어가 끔찍한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조수석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풍경이 정신없이 맴돌았다. 이곳저곳을 부딪치며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졌고, V의 얼굴을 마구 할퀴며 무너져 내렸다. 차는 요란하게 가드레일을 한 번 더 박곤 천천히 회전을 멈췄다. 보닛이 직각으로 우그러지다말고 펑, 소리를 냈다. 엔진으로부터 불이 솟아올랐다. 폭발음과 함께 사방이 불바다로 변했다. 어두컴컴한 도로 위에서 소름끼치도록 밝게 타올라 허공으로 번졌다. 찌그러진 차체 때문에 벌어진 차문으로 V의 손이 흘러내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미동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길을 뚫고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구둣발 소리가 선명했다. V의 손이 움찔거렸다. 백작은 긴 몸을 접어 허리를 숙이고 차 안쪽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V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달링, 대답해.”

 V의 가슴이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얼굴은 이미 아물어 피가 멎어가고 있었다. V가 헐떡거리며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백작의 얼굴을 보곤 헛웃음을 터뜨렸다.

 “백작, 짜증나요.”

 “확신을 가지지 말라고 한 건 달링이었어.”

 “……씨발.”

 V는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 화염이 쉿쉿거리며 타올랐다. 트렁크 안으로 번진 불이 시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누린내가 났다.

 “후회하지 않아요.”

 V는 실토했다.

 “그러고 싶어요.”

 백작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거면 됐어.”

 백작이 깊게 수그렸다. V는 얌전히 누워있었다. 백작의 뺨을 잡아끌거나 밀치지도 않았다. 다만 누워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불은 시체를 태우고 있었고 오늘의 V는 일생을 바쳐 사랑한 여인의 장례식을 다녀왔다. 감히 입을 맞추지도 못 하고 목걸이에 입술을 눌렀다. 최고 속력으로 달려 자살했고 실패했다. 화염 때문에 모든 건 완벽범죄가 되었다. 죄는 이런 식으로 청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V는 지옥의 문 앞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식사와 살인을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다니. 죽음과 키스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니. 죽을 수 없다니. 이런데도 죽을 수 없다니. 백작이 입술을 뗄 때, V는 눈을 감는다. 눈가가 축축했다.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달링, 길을 잃지 마. 백작은 속삭였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길을 잃어선 안 돼. V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어요. 구태여 입으로 대답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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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해석으로 절절매던 글이라 끝낸 후에는 들춰보지 않았다.
이제는 마마돈크라이 뮤지컬 같은 거 그만 팔아줘야 된다고 생각함..

20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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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현수 «불한당»
2차/old 2019. 10. 24. 19:16

 1.

 고병갑의 아버지는 복어를 먹고 죽었다. 회사가 막 세워진 참이었다. 전날 회식에서 경영권을 두고 고병철과 짧은 다툼이 있었다. 그의 쪽에서 먼저 공동 회장 소리에 발끈해 병철의 멱살을 잡았다고 주변 사람이 증언했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병철은 눈물을 보였다.

 “병갑아, 이제 우리 둘뿐이다.”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도 꿋꿋하게 울음을 참던 병갑은 그 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모로 쓰러져 울면서 병철의 어깨를 붙잡았다. 삼촌, 아부지가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병철의 크고 투박한 손이 병갑의 팔을 토닥였다. 병철의 목소리에는 영악하면서도 다정한 면이 있었다.

 “사업 때문에 우리가 당분간 바쁠 거야. 넌 어리니까 뭘 모를 테고, 그 때까지 좀 내려가 있어라.”

 병갑이 조금만 더 나이를 먹었더라면 “우리”가 누구인지 한 번 더 곱씹어 보았을 테다. 그러나 병갑의 아버지는 복어를 먹고 죽어버렸다. 수산업을 시작한다는 사람의 최후치곤 지나치게 희극적인 면이 있었다. 생선 한 번 제대로 접해보기 전에 비린내 나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 냄새는 지독하기 짝이 없어서 음모와 의심을 덮어놓았다. 경영권을 잃은 회사에는 당장 노르웨이 선박과 계약한 고등어 2톤과 오징어 몇 백 박스가 있었다. 키 잃은 배를 버리기엔 너무 많은 화물이 실려 있던 셈이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경영권을 넘겨받은 병철은 마치 준비되어있던 선장마냥 모든 인수인계를 빠르게 마치고 진행 중인 사업의 맥을 이어나갔다. 누구도 그 과정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못했던 걸지도 몰랐다. 고병철의 결백은 그렇게 얼렁뚱땅 증명되었다. 얼마 후 병철은 병갑 아버지의 이름을 붙였던 수산 회사의 이름을 오세안으로 정정했다. 그리고 병갑을 경기도 구석에 박힌 고아원으로 보내버렸다. 배웅은 없었다. 병갑을 그곳에 데려다준 것은 아버지 시절부터 그를 실어주던 운전기사였다. 병갑은 장례식 때와 똑같이 울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병철이 기약 없이 예고한 “좀”을 믿었다. 좀만 있으면 삼촌이 데리러 오겠지. 좀만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니까 좀만 버티자. 그것은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알려진 복어의 맹독처럼 병갑을 조이는 맹독이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됐으나 병갑은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일에도 서운함을 느끼는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 성장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복수 대신 용서를 구하는 법뿐이었다. 그러니까 종국에 병갑은 그 독에 죽게 될 운명이었다.

 경기도 구석에 박힌 고아원은 평당 육십 제곱미터 정도 되는 모래밭과 녹슬어 가는 놀이기구를 방치한 채 서서히 부식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버려지고 또 그 와중에도 살아남아 벌레처럼 자라는 존재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고아원이 운영하는 건물은 총 두 채였다. 한 채는 신생아부터 영유아기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라 병갑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가 배정받은 곳은 소년기부터 성인을 앞둔 청소년들의 쉼터였다. 이름과 달리 그곳은 수용소에 가까웠다. 감옥처럼 설계된 방에 서너 명의 아이들이 몸을 욱여넣은 채 서로를 증오하며 지냈다. 그들에겐 특별한 사춘기 없이 매일이 격동기였다. 걸핏하면 싸움이 났고 그럼 주먹질을 했다. 병갑은 가능하면 조용히 지내고자 노력했다. “좀” 머물다 가는 놈으로 서열에 의미를 두고 싶지도 않았고 괜히 덤벼들어 몸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지옥에 “좀” 머물기만 하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건 병갑뿐인 것 같았다.

 방을 배정 받은 지 일주일째에 찾아온 한 무리의 소년들이 이유도 없이 병갑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병갑은 얼굴을 맞으면 얼굴을, 복부를 맞으면 복부를 가렸다. 무엇이든 가리고 방어해야 했으나 종국에는 무엇 하나 가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너덜너덜해지는 와중에 병갑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면서도, 병철에 의해 철저히 버려지면서도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였다. 서럽게 울면서 구질구질하게 외쳤다. 이 씨빡 새끼들아, 나한테 왜 그래. 씨발, 나한테 왜 그래 이 개새끼들아. 그들은 멈추지 않고 주먹질을 했다. 병갑이 욕을 할 때마다 입을 걷어찼다. 병갑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입에서 자꾸만 침이 왈칵왈칵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병갑이 더는 비명을 지르거나 꿈틀거리지 못 할 때까지 그를 짓밟고 무력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병갑이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모든 폭력을 멈추고 침을 뱉었다.

 “야. 좆만아.”

 그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놈이 입을 열었다. 병갑은 비실비실 간신히 눈을 떠 그를 응시하려고 노력했다. 놈은 남색 후드를 입고 병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을 밝힌 형광등의 불빛이 흐릿하고 붉게 보였다. 피가 흐르다 딱지가 앉은 모양이었다. 병갑이 눈을 자꾸만 끔뻑거리는 것을 후드가 킬킬거리며 바라보았다.

 “앞으로 우리 보면 인사해라. 너가 첨 와서 여를 잘 모르는 모양인디, 원래 우리한텐 인사를 딱 해야 하거등. 너 같은기 눈깔 딱 뜨고 복도 지나다니니까 좆같잖아.”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그들에게 병갑이 인사하지 않았다. 인사하지 못 하고 지나쳐버렸다. 지나침으로써 그들을 짜증나게 했다. 그런 이유로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였다. 병갑은 이 좁아터진 지옥에 적용되고 있는 사회를 철저하게 이해했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병갑은 혼자였고 그들은 셋이었다. 병갑이 머뭇거리면서 천장을 응시하고 있자, 후드 옆에 서서 껌을 씹던 소년 하나가 힘껏 옆구리를 걷어찼다. 억, 소리가 절로 났다. 병갑은 웅크린 채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 침 흘린다, 하고 그들이 와르르 웃어댔다.

 “잘 해라, 알겠지?”

 그런 후 그 묻지 마 폭력범들은 방을 나갔다.

 병갑은 그 날 갈비뼈가 나갔다. 쉼터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엔 아무도 마주칠 일이 없어 인사를 할 일도 없었다. 불 꺼진 병실 천장 위로 솟아오르는 낡은 가습기의 물줄기를 보며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사회와 규칙에 대한 일들이었다. 쉼터에도 나름의 사회와 규칙이 있었다. “곧”을 위해 병갑이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몇 가지가 그를 두들겨 팬 그들에겐 중요했을 게 분명했다. 그들, 그중에서도 후드는 아마 그 사회의 기득권자일 테였다. 세금이 없는 대신 인사와 공포를 거둬가고 있었다. 병갑은 의도치 않게 위법 행위를 저지른 걸지도 몰랐다. 조용하게 살기 위해선 성공적으로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마침내 병갑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병실을 나온 병갑에게 굴욕적인 나날이 이어졌다. 병갑이 자진해서 몇 명의 아이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평소 주먹을 쓰지 않던 패거리까지 그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못된 계산을 하고 말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디서든 시비가 걸려왔고 어디서든 맞았으며 어디서든 너덜너덜해졌다. 쉼터의 사회는 약육강식이란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들이 소유하고 건설한 바깥사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사회를 유지하고자 마련된 안전망과 규칙, 최소한의 시민의식과 도덕성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무법지대에 가까웠다. 병갑은 폭력에 대한 인내를 배웠지만 그것은 울분을 삭히는 일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 못 했다. 맞을 때는 울음 한 번 나오지 않다가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울음이 터져 나오는 식이었다. 괜찮아 보였으나 점점 곯아가고 있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병갑은 밑바닥이었다. 버려졌고 비참했다. 아버지도 없었고 고아들보다 못난 처지였다. 영영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병철에겐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병갑은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계절이 바뀌어 배정받은 방과 생활하는 아이들의 짝이 바뀌었다. 병갑에게 그것은 새롭게 배정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한동안 돌아가며 맞고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대는 없었다. 방을 빼면서 물건 몇 가지를 조용히 챙겼을 뿐이었다.

 복도로 나왔을 때 아이들의 낌새가 이상했다. 하나같이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을 보고 있었다. 병갑은 감히 그들 사이에 낄 생각은 못 하고 얼핏 보이는 창문 틈을 기웃거렸다. 누군가 서서 부원장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이었고 병갑보다 몇 살 더 많아보였다. 쉼터로 찾아올 나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완전히 혼자였다. 신입은 저렇게 오지 않는다. 경기도 시에 소속된 봉고차를 타고 임시 쉘터에서 이쪽으로 마치 죄수처럼 이송되어 온다. 그게 아니라면 병갑처럼 타인의 차를 타고 와 쓰레기를 투기하듯 버려진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차에서 내려 원장실로 보내진 뒤, 다시 병실로 옮겨져 간단한 신체검사와 성의 없는 건강 검진을 거친 후 이곳으로 “투하”된다. 그러나 이 고아원의 아이들이 집중하고 있는 소년은 딱히 버려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차로부터 투기된 쓰레기도 아니었으며 배가 고픈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꾀죄죄하거나 가난에 삭혀진 몸뚱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부원장이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행색은 더욱 특별하고 기묘하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자면 그 첫인상은 많은 소년들에게 일종의 각인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남았다. 소년의 서열은 올 때부터 어느 정도는 점쳐져 있던 셈이었다.

 부원장과 간단한 대화를 마친 소년은 곧장 창문에 벌레처럼 달라붙은 아이들을 시선으로 훑었다. 창문 너머에 있는 병갑은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쪽을 바라보았을 때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그 많은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창가에 붙어 있지도 않았고 그저 등 뒤에 서있기만 했을 뿐인 자신에게 그 시선이 닿았을 리가 만무했으면서도 분명 소년은 병갑의 존재를 놓치지 않고 포착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년이, 한재호가 고아원으로, 득실거리는 쉼터로, 그 지옥으로 걸어 들어왔다.

 소년 고병갑은 그 날을 영영 잊지 못 했다.

 

 2.

 여기 사미터 담벼락 안에는 딱 두 가지 종류 새끼들밖에 없어.

 건드려도 되는 새끼들. 그리고, 건들면 안 되는 새끼들.

 나는 그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다.

 

 3.

 한재호는 산을 넘어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 발로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개장수와 있었다. 적은 월급 대신 먹이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그곳에서 이 년 정도를 일했다. 열세 살 때부터 열다섯 살 때까지 산 중턱에 있는 작업장에서 살았던 셈이다. 개장수의 자택은 일층 옥상에 좁은 다락이 있는 구조였는데, 그 위에 서면 병갑이 수용되어 있는 지옥 같은 쉼터가 얼핏 보이곤 했다. 맑은 날에는 좁아터진 모래밭에서 냄새나는 소년들이 주먹다짐을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개장수는 재호가 작업장에서 개를 한 마리씩 놓칠 때마다 그곳에 보내버리는 수가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특별히 몸집이 크지도 않고 유달리 잘 싸울 것처럼 보이지도 않던 재호에게 협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물론 작업 초반에 있던 일이었을 뿐 정말 그가 재호를 그곳에 보내는 일은 없었다. 재호는 일을 잘했다. 망설이지 않고 개의 모가지를 치고 매달아 가죽을 벗겼다. 몇 달이 지나자 재호가 끌고 들어간 개새끼들 중에서 작업장을 탈출하는 놈들이 없게 되었다. 깽깽거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재호에게 언젠가는 개장수가 물었다. 너 여기 오기 전까지는 무슨 일 했니. 재호는 무뚝뚝하게 열두 살에 부모를 잃고 하릴없이 거리를 전전하며 뻑치기를 했다고 대답했다.

 작업장은 좁고 지저분하고 똥냄새가 났다. 반 평 남짓 되는 철창 안에 똥오줌으로 파리가 날리는 개들이 여섯 마리씩 갇혀 있었다. 개장수는 매주 주말마다 트럭을 끌고 나가 시장과 골목 곳곳에서 개를 스물 마리 정도 데리고 돌아왔고 매주 스물 마리 정도씩을 잡아 고기로 만들었다. 그가 데려오는 놈들은 대체로 늙고 지친 잡종견들과 패배한 투견들이었지만 가끔 재수 없게 잡혀온 애완견들도 섞여 있었다. 새로 들어온 개들은 물 먹인 개 사료를 들고 마당으로 나올 때마다 날카롭게 짖어댔다. 밤이면 목청을 높여 우우, 컹컹컹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일주일 쯤 지나게 되면 좁은 공간 속에서 오줌과 똥을 지리며 순순해졌다. 한재호는 종종 이유 없이 밖으로 나가 개새끼들을 구경하곤 했다. 투견들은 대체로 짖는 법이 없었다. 재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으르렁거리기를 반복할 뿐 경박스럽게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내거나 침을 튀기지도 않았다. 곧 죽어 가죽이 벗겨질 몸인데도 불구하고 출신의 남다름을 자랑하고 싶어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한재호가 투견들로부터 얻은 세상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패배한 자들이 흘러들어오는 세계에서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던 얼마나 화려하게 싸워 이겨왔던 간에 몽둥이로 대가리를 때리면 똥개도 투견도 애완견도 다리를 벌린 채 실금하며 기절하고 말았다. 요컨대 죽음 앞에는 무엇이든 공평했다.

 한재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는 일거리가 늘어났다. 개장수는 자택 뒤편에 작은 터를 마련해두고 풀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열 갈레의 자잘한 잎사귀를 가진 듣도 보도 못한 과부털이란 풀이었다. 뿌리가 깊지 않아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뽑혔다. 첫 재배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겪은 개장수는 재호를 끌어들여 밭 관리를 시켰다. 일은 많지 않았다. 물을 주고 검은 천막으로 위를 덮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가끔 개장수는 시험 삼아 몇 잎을 개한테 먹여보기도 했다. 며칠 말린 과부털의 풀잎을 감기약 몇 알과 함께 가루로 빻아 물에 타면 개들은 혀로 조금만 찍어먹었을 뿐인데도 자지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한재호는 개장수가 불법과 합법의 선을 드나들던 지난한 날들을 벗어나 마침내 완전히 법망 바깥에 서있게 됐다고 예감했다. 과부털이 대마의 은어였음을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에의 일이었다.

 한재호는 자진해서 산을 내려왔다. 개장수가 따로 연락을 취해주었지만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 효력이 없었다. 부원장이 직접 재호의 얼굴을 확인하러 내려왔다. 한재호는 자신을 보기 위해 창문 곳곳에 다닥다닥 날파리 떼처럼 붙은 아이들을 눈으로 무심하게 훑었다. 소년들은 철창에 갇힌 개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짖고 밤에는 울면서 언젠가는 몽둥이에 맞아 다리를 뻗고 죽을 운명들처럼 보였다. 한재호는 이 년 동안 개들의 지옥에서 도살과 살육을 도맡은 심판관이었다. 인간세상으로 돌아왔다면 그 룰을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한재호가 원한 것은 오직 심판관의 자리였다.

 

 4.

 한재호가 배정받은 방은 스무 개의 방 중에서도 제일 좁고 작은 스무 번째 방이었다. 병갑은 열아홉 번째 방이었고 룸메이트로 둘이 배정되었으나 재호에겐 세 명이 배정되었다. 첫 날, 주먹을 휘두르거나 시비를 붙일 기미가 없는 한재호에게 그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패로 밀어붙이는 일은 이 고아원의 유구한 정통인 모양이었다. 한재호는 주먹으로 그 셋을 완전히 때려눕혔다. 병갑이 한밤중에 비명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복도로 나온 소년들이 문밖으로 얼굴을 기웃거리는 동안 지도감독이 달려와 피투성이가 된 패거리 한 명을 짐짝처럼 끌어냈다. 열린 문으로 난잡하게 뒤엉킨 운동화 몇 켤레와 혈흔이 틘 이불가지가 보였다. 옆방이었던 병갑은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다가가 그 앞에 섰다. 한재호는 쓰러진 소년들 틈바구니에서 시큰거리며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표정은 서늘했고 놀랍도록 차분했다.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자신의 몸속에 켜켜이 쌓아온 폭력의 역사에 비하면 이 모든 일은 야만의 시대에 멈춰 있을 뿐이란 듯이, 한재호는 단 한 구석도 훼손되지 않고 자리에 똑똑히 박혀 있었다. 병갑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병갑은 화들짝 불에 덴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재호는 피를 뱉으며 문 앞으로 다가왔다.

 “뭐, 왜. 구경하러 왔어?”

 고개를 숙인 병갑에게 재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재호의 발은 넓게 벌어져 쓰러진 소년 둘을 넘고 천천히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병갑 앞에 섰다. 병갑은 재호가 저를 한 대쯤 갈겨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폭력에는 그 어떤 이유도 붙을 수 없었기에 동시에 그 어떤 이유든 붙일 수 있었다. 병갑이 맞을 이유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지만 재호가 원한다면 수백 가지의 이유가 생겨날 것이었다. 그러나 몸을 잔뜩 움츠리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 하는 병갑을 내려다보며, 한재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쫄았니?”

 바람이 잔뜩 든 발음이었다. 병갑은 머뭇거렸다.

 “아니, 나는…….”

 재호의 발이 조금 움직이자 병갑이 반사적으로 힘껏 어깨를 움츠렸다. 몹시 굴욕적인 순간이어야 마땅했으나 병갑은 굴욕감 대신 호기심을 느꼈다. 때릴 생각이었다면 진작 맞았을 것인데 한재호는 아직도 주먹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야야, 안 때려, 안 때려.”

 한재호는 병갑의 머리 위에서 낄낄 웃었다.

 “야, 뭘 그렇게 쫄고 그러냐. 주먹도 안 쥔 사람 민망하게……. 여, 고개 들어봐.”

 병갑은 한참 눈치를 보았다. 불신과 불안 속에서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한재호는 병갑과 키가 비슷했다. 눈높이도 나란했으나 어쩐지 크게 느껴졌다. 비율이나 분위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병갑이 눈을 끔뻑거리는 동안 재호의 눈이 병갑의 얼굴을 이곳저곳 뜯어보았다.

 “야, 넌 맞고 사나보다.”

 재호가 심심한 감상을 내놓았다. 병갑은 입술을 쭈그리며 머쓱하게 제 뺨에 진 멍과 얼룩을 훑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맞지도 않았는데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병갑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넌 왜 나 안 때리냐.”

 “나?”

 등 뒤가 소란했다. 소식을 듣고 몰려든 고아원의 소년들이 벌떼처럼 이십 번 방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재호는 걸작을 보는 관람객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들 전부를 훑었다. 그리고 다시 병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리를 떨면서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이제 한재호의 관객은 병갑 한 사람이 아니라 고아원 전체가 되고 있었다.

 “야, 난 원래 저기 산에서 살았거든? 개 잡고 고기 쑤시고 살았다 이거야.”

 병갑이 훌쩍였다.

 “근데?”

 “개장수들도 나름 규칙이라는 게 있어요. 뭐, 우리가 아무 때나 아무 개나 잡으면, 그게 직업이냐? 소명의식이 또 나름 있어야 할 거 아냐.”

 “씨바 뭔 소리야, 진짜…….”

 “무식한 새끼… 소명의식이 뭔지도 몰라가지고, 에이그.”

 재호는 어깨춤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문 앞에 빽빽이 선 고아원의 소년들을 훑으며 혀를 찼다.

 “야, 니들도 소명의식이 뭔지 모르지. 내가 좀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이거는 내 규칙이야. 잘 들어.”

 모두가 한재호를 보고 있었다. 한재호의 눈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번들거리는 흰자위가 재호의 웃음에 반쯤 접혀 올라갔다.

 “난 꼬리 말고 있는 개새끼는 안 팬다.”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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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한당 보고 온 날부터 재호현수 생각하며 썼던 것. 장편으로 연재하려고 했는데 금방 식어서 관뒀다. 한재호가 지배하는 밤에서 조현수가 원하지 않는 새벽으로 넘어가는 방향의 큰 플롯과 고병갑의 개인서사에 대한 날조를 계획했었다. 콘티가 있길래 뒤져보니 마지막 문장이 적혀있다. '조현수의 새벽이 오고 있었다.'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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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콥스콧 «빛의 장막» 비밀글
2차/old 2019. 10. 2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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