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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케이 «세습 (世襲)»
2차/old 2019. 10. 24. 19:18

현대au 의사가 된 케이와 재회한 카이의 이야기

 

1

에리코는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있는 카이토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 했다. 기억 속의 카이토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헐렁한 나시를 걸쳐 입은 카이토의 왼팔과 오른팔이 뜨거운 여름 햇발 아래에서 번갈아 타 까무잡잡했다. 손에는 잠자리채를 들고 있었다. 카이토는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당시의 에리코는, “카이 오빠,”하고 그를 부르다 말고 멈추어 선다. 기억은 이때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에리코의 죄책감 때문이다. 에리코가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에 카이토에게 그 뒤의 말을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었든, 중요한 것은 에리코가 반드시 그에게, “오늘은… 케이 오빠가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을 곱씹을 때마다 카이토가 고개를 돌리고 “그래, 어제 전화 받았어.”라고 중얼거린 것, 그리고 연이어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삼키던 것을 상기했고, 그 눈물이 흘러내리던 뺨과 비극적인 상황에 무색하게도 빽빽 울어대던 매미소리의 잔상을, 카이토의 울음소리를 추월한 여름의 순환적 요소들을 필연적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때를 골라야만 한다면, 이렇게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2

나가이 케이는 시계를 보며 사망시간을 읊었다.

“2018년 7월 2일 오후 5시 21분.”

방금 사망한 환자의 몸뚱이를 붙잡고 남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입니다. 그는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케이는 심전도 모니터에 떠오른 한 줄의 녹색 선을 응시하는 것으로 그 말에 대처했다. 사망소식을 전달하는 목소리는 인간보다 기계 쪽이 더 요란하다. 심정지를 의미하는 삐-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우며 남자의 흐느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죽게 되는데, 죽음의 마지막 과정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가장 먼저 벌어지는 일은 왼쪽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근육질의 순환 기관이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성인 기준 약 팔만 km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혈관을 달리던 혈액이 일순 정지되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던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서 세포들이 죽기 시작한다. 뇌 역시 이 때 사망한다. 죽음은 심장이 기능을 상실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삶을 압도하거나 후퇴하며 온다.

나가이 케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읊고 흰 가운을 입은 순간부터 삶이 죽음과의 레이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로지 심장이 기능할 때까지 이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며, 죽음은 어느 날 느닷없이 이를 추월해 산 자를 죽은 자로 돌려놓는다. 병원은 시각적으로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거대한 장례식장이다. 의사들은 잘 정돈된 시스템처럼 복도를 흘러 다니며 곳곳에서 누군가의 사형선고를 읊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거나 살리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업무였다. 달리고 있던 생의 등을 떠밀어 가까스로 죽음으로부터 추월하게끔 도와주거나, 혹은 방금 막 추월당했다고 선고하는 것. 나가이 케이는 마치 달리기의 중계방송대본을 읊듯이 그 사실을 읊었다. 2018년 7월 2일 오후 5시 12분. 그 이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환자의 시신으로써 육화(肉化)되어 나타난 죽음의 진부한 형태를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의 비탄과 통곡소리는 개인의 불행이며, 그가 해줄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 환자 가족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병원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틀이다.

케이가 가운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병실을 나왔을 때, 등 뒤에서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만요! 잠시 만요, 의사 선생님. 케이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환자의 침대 봉을 붙잡은 채 반쯤 고꾸라져 있었다. 그의 얼굴이 눈물과 고통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케이는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남자와 자신 간의 거리를 셌다. 케이와 남자는 일곱 발자국 정도 떨어져있었다.

선생님, 정말로, 죽은 겁니까? 라고 남자는 물었다. 선생님, 드라마에서 보면, 전기충격으로 이미 멈춘 심장을 어떻게 살리던데, 우리 어머니는 그게 안 됩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죽은 겁니까? 봉을 잡은 채 무너져 내린 남자의 나머지 한 손이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나가이 케이는 그의 오른손이 붙잡을 수 있는 다른 봉을 자신의 어떤 말로부터 찾고 있음을 알았다.

케이가 대답했다. “네, 사망하셨습니다.”

케이는 그를 지탱할 그 어떤 봉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남자가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므로 케이는 그를 버려둔 채 재빨리 복도를 벗어났다. 링겔대를 끌고 천천히 복도를 걷던 환자들이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기는 하였으나, 곧 익숙한 듯 가던 길을 마저 걸어 나갔다. 케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간호조무사 한 명만이 케이의 얼굴을 무감하게 훑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3

케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매미가 빈틈없이 울고 그림자가 울창해지는 계절의 어느 날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거실에 앉아있다 말고 그를 불러 세웠다. 케이, 휴대폰 줘봐. 그 명령조에서 부정적 징후를 읽어낸 케이는 어머니에게 휴대폰을 내밀던 순간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케이는 앞으로의 일들을 알 수는 없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능하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카이토하고 놀면 못 쓴다.”라고 그의 어머니가 말했을 때, 케이는 “왜?”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 케이가 요구하자,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카이토는 범죄자의 자식이야.” 그런 후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날 케이는 어머니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어머니는 케이의 휴대폰에서 카이토의 번호를 지웠다.

케이는 방으로 돌아온 후에 휴대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놓고 오랫동안 문제집을 풀었다. 해가 지고 그림자가 식별되지 않는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수학 문제를 풀고,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했다. 한 개를 제외한 모든 문제가 정답이었다. 단 한 개의 오답을 내려다보면서, 케이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속으로 읊어보았다. 카이는 알고 있었을 거야. 케이는 자신이 카이토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를 모두 맞췄더라면 카이토가 생각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답이 발생했으므로 케이는 카이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케이는 자신이 카이토를 생각했기 때문에 오답이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케이는 문제집을 덮었다.

창밖은 음지와 양지의 구분이 사라진 어둠의 세계였다. 그 어둠은 케이에게 일종의 계시감을 안겨주었다. 무엇을 느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었다. 이를테면 배신감이나 분노, 괴로움과 슬픔 같은 것들. 그것들은 어둠, 그 깊은 것을 닮아있었고, 형체가 없는 대신 날카로웠기 때문에 케이의 가장 연약한 지점을 꿰뚫어버릴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는 자신이 곧 끔찍할 만큼 슬프거나 괴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지는 동안 케이는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 오지도 않을 심판의 시간을 기다렸다.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상태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났을 즈음이었다. 케이는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확인한 후에야 자신이 아무 성과도 내지 못 하고 한 시간을 무용하게 흘려보냈음을 알았다. 마당의 나뭇가지가 세찬 바람에 흔들리며 케이의 이층 창문을 툭 툭 두드렸다. 케이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 한 시간 동안 무엇을 곱씹었냐고 묻는다면, 케이는 오답을 곱씹고 있었노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자신의 오답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공식을 써넣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상상 속의 케이는 반드시 오답을 극복한다. 죽 그어진 빨간 빗금에 두 변을 더해 삼각형을 만드는 장면은 어딘지 강박적인 부분이 있었다. 빗금은 동그라미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삼각형으로 수복된다. 한 번 틀렸다고 판별 받은 것은 올바르게 고쳐져도 흔적이 남는다는 이야기였다. 케이는 어머니의 색연필이 카이토의 존재 위로 커다란 빗금을 그었음을 깨달았다. 카이토의 번호가 잘못된 답안을 지우듯 그렇게 삭제되었다. 오늘 케이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숙제처럼 어머니에게 건넸다가 막 돌려받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캄캄한 방 안에 앉아 보낸 이 한 시간가량의 공백은 오답을 수복하기 위해 정답을 골몰한 과정이 된다. 케이는 어머니가 그어놓은 빗금을 삼각형으로 만들기 위하여, 올바른 답을 찾았다는 확신을 위하여 카이토와 완전히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케이는 카이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4

쥰페이는 탕비실에 들어오는 케이를 한 박자 느리게 알아차렸다. 그는 잘못된 일을 하다 발각된 사람 특유의 몸짓을 숨기지 못 하고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나가이, 인기척 좀 내라….”

케이는 무관심한 얼굴로 인스턴트 커피봉투를 뜯었다. 쥰페이의 앞에는 물이 담긴 종이컵과 빈 주사기, 그리고 액상 약을 보관하는 플라스틱 약통 몇 개가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쥰페이는 주사기를 통해 약을 나누어 담고 빈 부분에 물을 타고 있었을 것이다. 약의 용량을 늘이기 위한 불법행위였다. 양성종양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투입되는 사후 관리용 의약품은 시중가가 몹시 비쌌다. 병원 내부의 운영과 유지비용 절감을 위해 물밑에서 진행되는 범법행위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양성종양 사후관리 약품에 물을 타 양을 조금씩 늘리는 것도 이에 속했다. 대학병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 처음 쥰페이의 범법행위를 목격했을 때, 케이는 이 행위를 고발하지 않았을 때 추후 자신이 부담할 지도 모를 위험과 이를 고발했을 때 당장 자신에게 떨어질 피해를 저울질했다. 당시 케이는 인턴이었고, 병원은 두 명의 교수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케이는 사수 쥰페이가 어느 줄을 붙잡고 있는지 고려했다. 쥰페이는 병원장의 사촌에게 빌붙어 살길을 도모하는 여우같은 놈이었다. 저울이 후자로 기울어졌다. 케이는 침묵함으로써 공모에 가담했다. 그리고 방관자가 되었다.

“너도 내일 수술실 들어가던가?”

쥰페이가 슬그머니 약품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화제를 돌렸다.

케이는 커피를 마시며 대꾸했다. “아뇨, 쉬어요.”

“그러냐.” 쥰페이는 케이의 눈치를 보며 주사기를 마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럴 거면 대체 왜 탕비실에서 저 지랄인데? 케이는 쥰페이의 허술함과 안일함이 짜증났다. 애초에 네가 잘만 숨겼으면 병원에서 이런 짓거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 했을 텐데. 물론 사수에게 이런 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케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케이가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자, 쥰페이는 다시 한 번 화제를 돌렸다.

“아까 시끄럽던데?”

“아,” 케이는 종이컵에서 입을 떼어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304호 환자 사망했어요.”

많은 정보가 함축되어 있었지만 쥰페이는 일련의 소란스러움이 누구로부터 기인했는지 제대로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드님분이 좀 극진하시긴 했지.”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 내가 수술 들어가는 502호 환자도 아들 한 명 있잖아, 그 왜. 극진한.”

쥰페이는 커피를 타며 중얼거렸다.

“세 달 입원했는데 종양 때문에 돈이 꽤 들었다지? 입원초기에 수술 받았는데 이번에 재수술 들어가서 비용이 장난 아닐 거야. 남편이 죽었나, 해서 아들 한 명뿐인데 그 아들 혼자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 뛰면서 병원비를 다 대고 있단다.”

“아… 그 사람이요.”

케이는 오며가며 그 아들을 멀리서 어렴풋하게나마 본 적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간호사들이 그를 두고 양아치라고 언급하던 것을 제외하면 아는 바가 없었다. 케이는 무미건조하게 의례적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안 됐네요.”

쥰페이는 커피를 후루룩 마시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제 엄마 챙기는 걸 보면 싹수는 나가이 너보다 낫다.”

“시비 걸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케이는 별로 열 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쥰페이가 낄낄거리며 케이의 어깨를 쳤다. “왜, 넌 네 동생 제대로 찾아가지도 않잖아.”

“바쁜데다가 에리코가 절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변명은.”

쥰페이는 코웃음을 치곤 한 모금 남은 커피를 털어 넣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케이의 어깨를 쳤는데, 이번엔 힘 조절이 잘못됐다. 장난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났다. 케이는 악, 소리를 내려다 말고 입술을 다물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쥰페이를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쥰페이는 케이의 어깨를 성의 없이 몇 번 주무르다 말고 이죽거렸다.

“나중에 보자, 나가이.”

“…….”

쥰페이가 탕비실을 나간 뒤, 케이는 그가 버려두고 간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5

그 해 여름에는 카이토만이 삭제된 것이 아니었다.

나가이 케이의 아버지는 그 해 초여름 대서특필되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의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경찰차로 향하고 있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뽑혔다. 기증, 장기매매, 의사, 대학병원, 외도…. 케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희미하게 기억한다. 그는 흰 가운을 입고 정갈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단정한 남자다. 외과의였던 아버지는 환자들의 개인사와 친족교우간의 관계를 전공지식처럼 읊어대며 곧잘 웃곤 했는데, 그 얼굴이 에리코와 똑같았다. 에리코가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정이 많고 눈물도 잦았다. 그러나 케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체로 이중적이다. 그는 케이의 만점짜리 시험지를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케이를 끌어안다 말고 받은 병원전화 한 통에 표정이 돌변하는 남자였다. 가정은 갑자기 붕괴되지 않고, 영리한 아들과 딸은 지나치게 건강하고 왕성해서 일주일 단위로 1mm씩 키를 키우지만, 그를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눈을 뗀 순간 갑자기 쇼크를 일으키며 죽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그가 가정보다 직장을 중시한 이유였다. 케이의 아버지는 7월에 접어든 어느 여름 장기기증을 8개월 째 기다리며 방치된 25살의 대학생을 위하여 장기매매에 손을 댔다. 그리고 몰락했다. 언론은 그에게 장기매매 의사라는 딱지를 붙였다가 떼어내곤, 곧이어 외도라는 낙인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케이조차 그 사실을 궁금해 했다. 젊은 여성 환자를 위하여 장기매매에까지 손을 댄 남의사. 그것은 모로 보나 외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읽히기는 어려웠다. 언론의 세계에서 개인과 개인 간의 고차원적인 감정은 사랑 혹은 증오 이 두 가지로 축약되었고, 이 이분법적인 시각 속에서 케이의 아버지가 환자에게 가졌던 극단적 책임감과 직업의 숭고함은 오독되었다. 언론은 케이 아버지의 선택을 외도로 확신했다. 케이는 신문과 뉴스를 번갈아보며 아버지가 살리고자 했던 여자가 그래서, 살아남기는 했는지, 그렇다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가능하다면 살아남은 소감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냐고도.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케이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버지의 외도로 축소되거나 교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버지의 선택은 오로지 아버지의 구질구질한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 인간을 그렇게도 추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인간성을 어느 정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을 해선 안 된다거나,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케이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아버지가 케이에게 남겨준 그의 유산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예감했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를 만나게 되던, 혹은 이미 관계 맺고 있는 누군가들이라도, 그 유산을 건드리거나 종속하게끔 만드는 욕망을 부추기는 존재들이라면 기꺼이 지우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인간을 잘라내고야 말겠다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가이 케이는 결심해버렸던 것이다.

그 해 여름, 기자들은 곧잘 나가이 집안의 현관을 두들기거나 새벽 내내 전화를 걸어댔다. 한 말씀만 해주시죠. 남편 분과 평소 사이는 어땠죠. 남편 분이 이전에도 해당 환자 분을 언급한 적이 있었나요. 그 때 어떤 기분이셨죠. 어머니를 앉혀놓고 반강제에 가까운 인터뷰를 따낸 인터뷰어들은 방송국으로 돌아가 입맛에 맞는 짜깁기 기사를 내보냈고, 거리에서 케이와 에리코를 알아본 사람들은 둘의 팔을 붙잡고 힐난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니.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니. 너희가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니. 그 때마다 케이는 에리코를 자신의 등 뒤에 숨겨놓고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 질문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다만 아버지를 증오할 필요성에 대해 거듭 고민했다. 한 번쯤은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죽여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정말 죽이지는 못 했다. 상상 속 아버지는 증오하기에는 너무 모자라고 동정하기에는 무척 추한 사람이다. 케이는 아버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인간이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증오하지 않았다.

 

6

오전 1시 12분 무렵 수술복을 입은 의사 한 명이 피로한 얼굴로 병원 복도를 가로질렀다.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두 손은 찬물로 박박 씻어내 뻣뻣했다.

케이는 가운을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갑작스럽게 교대를 부탁하여 미안하다고, 나이트 쉬프트 담당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케이는 그녀의 낯빛을 살피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당직실 가서 좀 쉬세요. 그녀는 수술 도중 코피를 쏟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온 참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팔뚝까지 세정제로 박박 씻어내고 수술실로 들어섰다. 장장 3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서있던 쇼우-병원장 사촌 그놈-와 쥰페이, 그리고 두 명의 간호사들은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고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계속했다. 케이는 원래부터 이 수술실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미끄러지듯 들어와 일에 합류했다. 쇼우는 수술담당의고, 쥰페이와 케이는 보조의사였다. 케이를 제외한 그곳의 네 사람은 체력적으로 몹시 버거운 상태에 들어서 있었다. 침묵 속에서 석션기가 돌아가는 소리, 매스와 매스가 부딪히는 소리, 간간히 쇼우가 매스 종류를 읊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케이는 쇼우가 절개를 앞두고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드는 것을 목격했다. 선생님, 하고 쥰페이가 눈치를 주면 쇼우는 그제야 눈을 치켜뜨며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위험한데. 케이는 불길함을 느꼈다. 차라리 절개는 쥰이나 내가 하는 편이….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만큼 케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단지 보조를 맞추며 이따금 쇼우를, 아니 보다 자주 쇼우를 흘끔거릴 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케이가 수술에 합류한지 12분이 지났을 때, 갑자기 심전도 모니터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이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극심한 변화폭을 보였다. 석션, 석션부터. 석션부터. 쇼우가 중얼거리듯 명령했다. 잠이 다 깬 얼굴이었다. 케이는 쇼우가 환자의 복부에서 천천히 가위를 빼내는 것을 보았다. 장갑이 손가락 두 마디 아래부터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쥰페이가 심전도 모니터와 환자의 상태를 번갈아 바라보며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환자의 복부 안쪽에서부터 발생한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석션기를 들이대며 혈액 팩을 매달았지만 심전도 모니터의 오싹한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환자의 심박 수가 급박하게 추락했다. 환자의 다리가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케이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다 말고 절개부위로부터 솟구쳐 오른 혈액을 정통으로 뒤집어썼다. 쥰페이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드레싱 카트가 쥰페이에게 밀려 뒤쪽으로 굴러가다 말고 벽에 부딪혔다. 쇼우가 쥰페이에게 고함을 쳤다. 케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이를 악물며 환자에게 매달렸다. 간호사 한 명이 혈액 팩을 수송하기 위해 수술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나머지 한 명은 쥰페이가 밀친 드레싱 카트를 끌어와 쇼우의 지시를 기다렸다. 쇼우는 지시 없이 모스키토(*Mosquito Frcep : 혈관을 잡아 지혈하는 홀딩 도구)를 들고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수술실 바깥에서 간호사가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혈액 RH+B형, 혈액 RH+B형 세 팩 준비해주세요, 혈액 추가청구 바랍니다. RH+B형 혈액 팩 세 팩 준비해주세요! 간호사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말고 뚝 끊어졌다. 그러자 석션기가 맹렬하게 분출하여 고이기 시작한 혈액을 빨아들이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남았다. 그들은 잠시 침묵하며 취하던 모션 그대로 굳어있었다. 어떤 싸늘한 공기가 순간적으로 수술실 내부를 꿰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들은 심전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떠오른 녹색의 평행선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곳에 있던 모두가 불현 듯 아까부터 귓가에 어떤 소리가 지속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였다. 삐-소리가 방의 모든 소리를 압도했다.

케이는 숨을 몰아쉬며 환자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혈액을 피가 비교적 덜 튀긴 장갑의 왼 손등으로 훔쳐냈다. 쥰페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간호사는 매스를 내려놓았다. 케이를 포함한 세 명의 의료인이 쇼우를 바라보았다. 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2018년,”이라고 쇼우가 말했다. “2018년 7월 3일 오전 1시 38분.”

 

7

오빠는 쓰레기야. 에리코가 처음으로 그 말을 내뱉었을 때, 케이는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오후 4시 무렵의 방은 밝고 깨끗한 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마당의 나무 그림자가 케이의 방을 반쯤 둘러싸고 있었고, 케이는 스탠드를 켜지 않은 채 어제 풀다 만 수학문제집을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케이는 긴팔 셔츠차림이었다. 에리코는 케이의 방문 앞에 서서 케이를 매서운 기세로 쏘아보았다. 케이는 에리코가 잠자리채를 들고 나갔다가 도로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에리코가 카이토와 만나고 돌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카이 오빠를 배신했어.” 에리코가 주먹을 쥐었다. “카이 오빠가 나무그늘에 앉아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에리코의 눈가는 이미 눈물이 한 번 고였다 빠져나간 흔적 때문에 새빨갰다.

“오빠는 오지 않았어.”

“카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야.” 케이는 문제집을 넘기면서 대꾸했다.

“그래, 전화했다며?” 에리코가 씩씩거렸다. “그런 식으로 카이 오빠를 취급해놓고 번호는 기억하고 있다는 거, 치사해.”

케이는 빨간 색연필을 들고 문제집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카이는 내가 오늘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어.”

“알고 있었으니까 기다린 게 아니야.”

“기다리고 있었어!” 에리코가 소리를 질렀다. “알고 있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어!”

문제집을 채점하던 손이 멈추었다. 케이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에리코는 쥐고 있던 주먹을 놓고 헐떡이며 눈물을 닦아냈다. 에리코는 다시 울고 있었다.

“오빠는… 오빠는 몰라.” 에리코가 훌쩍였다. “알고 있어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어.”

“에리코.” 케이가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의무적인 몸짓처럼 보였다.

“진정하고 숨 쉬어. 흥분하면 몸에 무리가 와.”

“치워.” 에리코가 역겹다는 듯 뒷걸음질 쳐 케이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오빠가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이 위선자. 쓰레기.”

“화내지마, 에리코. 몸에 좋지 않아.”

“오빠는 지금도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잖아!”

에리코는 분통을 터뜨렸다.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고, 세상에서 제일 큰 벌을 받을 거야. 오빠는 오빠가 배신한 사람들 마음 그거 다 돌려받게 될 거야. 카이 오빠 얼굴을 오빠가 봤어야 했는데. 카이 오빠 표정을 오빠가 봤어야 했는데. 이 못된 놈, 그 얼굴을 봤어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겠지? 오빤 쓰레기니까.”

“에리코.”

“오빠는 카이 오빠를 죽인 거야. 카이 오빠가 언젠가 죽거나 다치면, 그건 전부 오빠 때문이야. 오빠는 한 번 카이 오빠를 죽인 거야. 카이 오빠를 버려놓고 갔으니까 그 책임은 전부 오빠 거야.”

거기까지 말하던 에리코가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케이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에리코의 낯빛이 창백했다. 에리코의 숨소리는 시큰거림에 가까워져 있었다.

케이는 에리코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에리코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케이의 손을 밀어냈다. 케이는 에리코의 의사를 무시했다. 그는 강압적으로 에리코의 이마에 다시 손을 얹었다. 에리코가 케이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죽어버려,” 에리코가 헐떡이며 저주를 퍼부었다. “저리 꺼져버려.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에리코, 진정하라니까!”

케이가 에리코의 어깨를 붙들었다. 에리코는 케이의 팔을 붙잡아 있는 힘껏 밀었다. 케이는 제대로 밀리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가 되돌아왔다. 에리코와 케이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에리코는 케이의 손목을 붙잡아 반대쪽으로 밀어내려 애쓰고, 케이는 그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 케이는 에리코의 분노에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는 단지 에리코가 진정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길 거라고 염려하는 것 같았다. 에리코는 자신의 몸에 손대는 케이보다 자신의 마음에 손대지 않는 케이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케이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케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그가 사과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카이가 슬퍼할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케이 오빠가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야만 했던 자신의 괴로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에리코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리코의 몸은 물먹은 종이처럼 쓸모없고 약했다. 그녀의 주먹은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상처 입힐 만큼 위협적이지 못 했다. 그 사실이 에리코는 몹시도 분했다.

있는 힘껏 케이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에리코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뒤로 밀리지 않으려 애쓰던 케이와 밀기 위해 애쓰던 에리코 간의 균형이 무너졌다. 에리코의 손이 케이의 와이셔츠 손목 단추에 걸려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팔이 훤히 드러나자마자 케이는 에리코를 밀쳐내고 황급히 셔츠소매를 내렸다. 그 짧은 순간, 에리코는 케이의 팔에 난 작은 생채기와 멍 자국을 보았다. 어제는 없었던 것이다. 에리코는 오늘 나무에 기대어 있던 카이토의 종아리를 떠올렸다. 그늘 아래로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보였던 작은 생채기와 멍 자국들. 케이와 카이토는 각각 팔과 다리에 엇비슷한 상처를 달고 있었다. 둘 다 어제는 없었던 것.

“뭘 한 거야?” 에리코가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카이 오빠랑 뭘 한 거야?”

“아무 것도.” 케이는 시선을 피하며 방으로 물러났다.

“거짓말 하지 마.”

“이제 끝난 일이야.”

“어제 카이 오빠랑 만난 거지?”

“이제 돌아가.” 케이는 대답 대신 에리코를 밀어냈다.

“오빠!”

“너도 언젠간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케이는 에리코의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8

이건 명백한 의료 과실 사고였다. 간호사가 시신을 봉합하고 위에 흰 천을 덮어씌우는 동안 쇼우와 쥰페이와 케이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절개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마취과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환자에게 쇼크가 왔으므로. 혈액의 추가청구가 늦어진 탓도 있었다. 복합적으로 여러 문제가 존재하던 수술이었다. 사방에 지뢰가 깔려 있었는데 쇼우가 그곳에 불씨를 던져 넣은 꼴이었다. 케이는 쇼우가 가위를 꺼내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던 장갑, 귀를 후벼 파던 심정지를 알리는 삐-소리.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환자가 죽었다. 수술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 건 쥰페이였다.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쥰페이는 뚫린 입으로 여러 번 반복했다.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선배, 저희 입 닫고 있겠습니다. 약속해요. 쥰페이의 ‘저희’에는 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케이는 이미 그들의 공범자가 되어있었다. 원하던 원치 않던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쥰페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앵무새처럼 거듭 중얼거렸다.

“저희만 믿으세요. 나중에 병원장님이 아시더라도 외부 노출만 안 되면 넘어가주실 겁니다.”

떨리던 목소리에 차츰 안정감이 실렸다. 쥰페이가 말했다.

“솔직히 선배가 절개하다 실수한 것만 문제는 아닙니다. 아까 수술 들어가기 전에 마취과에서….”

그 때였다. 쇼우가 쥰페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케이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쥰페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신음을 내뱉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쇼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왜 맞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쇼우는 주먹을 털면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진짜….”

쇼우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선배? 저희?”

“…….”

“너 구분 확실하게 한다. 절개한 건 나고, 니네는 눈감아주고?”

쇼우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야, 수술 나 혼자 해? 니네가 옆에서 잘했어야 할 거 아냐, 이 새끼들아. 이제 와서 잘못한 건 나 혼자고 너희는 빠져서 입 닫아주겠다, 나한테 베풀어주겠다. 지금 이러는 거 아냐.”

“아닙니다.” 쥰페이가 벌벌 떨며 일어났다. 자신이 한 말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쇼우가 위협적으로 쥰페이를 노려보다 말고 케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니네 잘 들어. 이 수술 들어온 사람들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어.”

쇼우의 목소리는 회유와 협박을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이거 내가 손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어떻게 더 될 거란 생각 절대 하지 마. 괜히 겁먹고 떠들면 다 골로 가는 거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쥰페이가 대답했다.

쇼우는 고개를 돌려 케이를 응시했다. 케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케이 역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쇼우 선생님, 바깥에서 환자 가족 분 기다리십니다.”

간호사가 수술실 문을 열다 말고 냉랭한 분위기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케이 앞에 서있는 쇼우와 케이의 뒤통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좀 더 기다리라고 할까요?”

“아니, 됐어. 갈게.” 쇼우가 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쇼우는 케이에게 명령했다.

“네가 다녀와.”

케이는 쇼우의 시선을 피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전 담당의가 아닌데요.”

“내가 지금 상황이 안 되잖아. 옷 갈아입고 가서 수술경위 설명해.”

알아서 잘 둘러대란 소리였다. 케이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어떤 말을 더 얹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일은 무용한 짓이다. 케이는 쇼우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케이가 우리, 혹은 저희, 라는 집단어를 쓰지 않았던 데다가 침묵하겠노라 자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가 그에게 내비친 것이라곤 마지못한 “알겠습니다.”뿐이었다. 쇼우는 방금 명령으로 케이를 이 일과 어떻게든 더 엮어놓겠다는 의지를 은근하게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케이는 이번에도 마지못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쇼우가 칭찬하듯 케이의 뺨을 두들겼다.

 

9

오후 9시 49분, 창밖이 온통 어두컴컴한 여름의 밤.

그 때, 케이는 완전히 끝내기 위하여 카이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카이토가 받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알고 있었던 거지?”

 

10

케이는 대기실 복도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늦은 새벽이었으므로 복도에는 케이와 남자를 제외하곤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케이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대기실로 다가갈수록 남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멀리서 본 남자는 밝은 금발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본 남자는 금발이라기보다 탈색물이 빠져나간 브루넷으로 보였다. 어두컴컴한 머리뿌리가 뒤통수를 타고 자라고 있었다. 남자는 피어싱도 했다. 양아치라고 했지. 양아치지만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양아치. 그게 양아치인가. 케이는 속으로 생각하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서 케이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케이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었는지를 궁금해 했다. 숨을 의식적으로 쉬지 않고선 곤란할 만큼 몸이 뜻밖의 자극에 놀라 잔뜩 움츠린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말문을 잃은 케이를 올려다보며, 카이토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케이.”

한 박자를 쉰 후, 카이토가 말했다.

“…정말로 의사가 됐구나.”

케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케이의 손이 동그랗게 말리다 말고 맥없이 늘어졌다. 케이는 카이, 하고 입을 열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옷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냄새를 카이토가 맡게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카이와 케이는 고작 두발자국 정도밖엔 떨어져 있지 않았다. 원한다면 카이토는 어머니의 피가 튀겼다 급하게 씻겨나간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케이가 들어갔던 수술실에서 카이토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케이는 카이토의 앞에 당도한 것이다.

쥰페이는 수술실을 빠져나오다 말고 대기실 복도에 서있는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는데, 스르르 빼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금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환자의 아들이었다. 수술이 들어갈 땐 없었는데 연락을 받고 중간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대기실에 앉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가 먼저 케이에게 말을 걸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대화 직후 케이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가 이내 숙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케이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는 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는 시선을 피했다. 대화가 몇 번 더 오고 갔으나 케이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 말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케이가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서있었다. 남자는 곧 복도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쥰페이는 케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야.”

“…….”

쥰페이는 고개를 기울여 케이의 표정을 확인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케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쥰페이를 응시했다. 표정이 무감했다.

“아뇨,” 라고 케이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인두겁을 벗어던진다고 해도 그런 표정은 못 지을 것 같았다.

 

11

처음에 카이토에게는 휴대폰이 없었다. 케이는 그에게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가 그 사실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휴대폰이 없는 사람도 있구나. 그러나 곧 잘 교육된 사람의 얼굴로 그렇구나, 라고 대답했다. 그 어투에는 나는 너의 가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은근한 메시지가 숨어있었다. 그러나 카이토가 가난하기 때문에 휴대폰이 없다고 단정한 자신의 판단부터가 오답이라는 걸 케이는 알지 못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토는 이미 허공을 올려다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 필요할까? 카이토가 묻자 케이는 어정쩡하게 눈을 굴리다 말고 카이토가 보고 있는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둘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멀리 떨어져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케이가 대답했다. 카이토는 흐음, 소리를 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오기 한 달 전의 일이다.

어쨌든 휴대폰은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걸어서 20분이면 서로의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집과 집 사이에는 작은 신사가 지어진 산이 있었고, 그 뒤로는 숲이 펼쳐졌다. 카이토와 케이가 곧잘 그곳에서 놀았다. 10분이면 서로를 만났다. 그러니까 그 여름에는, 카이토도 케이도, 설령 당장 전해야만 하는 간절한 말이 떠오르더라도 난처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에 대한 화제를 꺼낸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케이의 휴대폰으로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막 하교하여 옷을 갈아입고 있던 케이가 옷을 벗은 것도 입은 것도 아닌 채의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웃음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누군가 케이, 하고 그를 불렀다. 케이는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카이?

“응!”

“휴대폰이 생긴 거야?”

“아니, 하지만 내일부터 생길 거야.”

“그럼 이 번호는….”

“이건 우리 아빠 것. 잠깐 빌렸어. 케이한테 얼른 말해주고 싶어서….”

“학교에서 해도 되잖아.”

“당장 말하고 싶었어.”

카이토는 몹시 즐거운 기색이었다. 휴대폰을 뺨과 어깨에 붙이고 옷을 고쳐 입던 케이의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카이토의 기쁨이 고스란히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케이는 그 전까지 사적으로 만나는 친구와 전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경험은 케이에게도 처음이었던 셈이다. 잘 됐네, 라고 케이가 대답했다.

“그럼 이제 밤에도 전화 할 수 있겠다.”

“그렇겠네.” 카이토가 대답했다.

“밤에도 언제든 케이의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휴대폰을 늘 가지고 있어야겠다.”

전화를 끊은 후, 케이는 옷을 주섬주섬 꿰입곤 휴대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번호는 080으로도 090으로도 시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덟 자리인 것도 아니었다. 통화목록에 찍힌 것은 휴대폰 번호도 집 전화도 아니었다. 이상한 번호, 라고 케이는 생각했다.

다음 날 카이토는 정말로 휴대폰을 들고 학교에 왔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은 채, 케이는 카이토와 번호를 교환했다. 케이의 휴대폰 번호가 카이토의 새 휴대폰에 가장 먼저 저장되었다. 카이토는 그 사실을 무척 기뻐하였다.

“케이는?”

“음… 나는 에리코의 번호랑 부모님 번호가 있어. 아, 선생님 번호도.”

“다른 아이들은?”

“음… 얼마 전에 숙제 때문에 겐이 전화했었는데… 저장은 안 했으니까.”

케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친구를 저장한 건 카이가 처음이야.”

첫 번째에 의미를 붙이는 건 어떤 의미의 행동일까. 케이는 궁금해하면서도 처음을 고민해주었고 카이토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필 카이토가 가져가서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여름방학에도 언제든 불러서 놀 수 있겠다. 그건 분명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12

카이토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하루 뒤의 일이었다. 카이토는 502호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유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5층 순회 진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케이가 그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눈이 마주쳤다.

케이의 입이 벌어지다 말고 다물렸다. 카이토는 케이가 주변을 곁눈질하곤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케이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연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케이는 적어도 병원에서 자신과 아는 사이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카이토는 시선으로 인사하곤 고개를 돌렸다. 케이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속히 케이로부터 멀어져 엘리베이터를 탔다.

병원 로비를 나설 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카이! 머뭇거리다 말고 황급히 내뱉은 목소리였다. 카이토는 케이를 돌아보며 멈추어 섰다. 이번에는 카이토가 먼저 주변을 곁눈질했다. 케이와 자신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케이는 더 이상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막 에스컬레이터를 달려 내려온 참이었기에 오직 숨이 가빴을 뿐이었다. 케이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어떤 혼탁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저기, 라고 케이는 입을 열다 말고 다시 빠끔거렸다. 카이토는 케이가 어떤 감정을 정리하고 말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저기….”

“…….”

“저기, 그러니까….”

케이는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침을 삼키곤 고개를 들었다.

“잠깐 이야기 좀, 괜찮을까?”

카이토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괜찮아.”

그런 후 덧붙였다. “언제든.”

병원 근처의 카페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 병원의 방문객들과 의사들로 붐볐다. 케이는 흰 가운에 손을 집어넣은 채, 카페 출구에 위치한 작은 기둥에 몸을 기대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보도블록 틈새로 솟은 잡초와 작은 풀꽃이 보였다. 케이는 블록의 개수를 세고 또 셌다. 그리고 카페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시선을 들어 누가 나왔는지 확인했다. 카이토가 아니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블록을 셌다. 그것 외엔 달리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카이토는 카페에서 커피 두 개를 테이크아웃 주문한 후 밖으로 나왔다. 기둥에 서있던 케이가 고개를 들다 말고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흘렸다. 케이는 기둥에서 몸을 떼어냈다.

둘은 병원 인근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햇볕은 따뜻하고 청정해서 다소 버거웠다. 산책로는 나무 그늘이 져있어서 괜찮았지만 그럼에도 조금 덥게 느껴지는, 초여름이 끝나고 한여름이 들어서기 일보직전의 날씨였다. 일주일 뒤면 더 무더워질 것이다. 여름이었다. 공원을 걷던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름이구나.”

케이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게.”

그런 후 둘은 침묵했다. 둘의 곁으로 반팔 운동복 차림의 한 여자가 조깅하며 지나쳤다. 이어폰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일순 가까워졌다가 차츰 멀어졌다.

잠시 뒤 케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제, 놀랐어.”

케이는 카이토 대신 다른 곳을 보았다.

“그 환자가 카이의 어머니인 줄 몰랐거든….”

“아.” 카이토는 어떤 감정을 포착하기 어려운 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알아. 우리 엄마, 케이는 본 적 없으니까.”

“성이 똑같았는데, 왜 몰랐을까.”

“내 성은 흔하니까.” 카이토는 신경 쓰지 말라는 투였다.

“케이, 어제 설명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런 건 잘 모르니까… 사실 설명을 들어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어. 그래도 케이가 설명해줘서 조금 편했던 것 같아. 전에 수술하고 다른 의사로부터 설명을 들었을 땐, 정말 하나도 알아듣지 못 했거든.”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응….”

카이토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케이는 예전부터 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서 알려주곤 했었지…. 어제 수술에 케이가 있었던 거,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는 케이가 알려준 덕분에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적어도 이유를 알 수는 있었으니까.”

“저기,” 케이가 고개를 들다 말고 입을 빠끔거렸다. “…카이는, 괜찮아?”

카이토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머니가….” 케이는 머뭇거렸다. “돌아가셨잖아.”

바람이 불어서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무척… 안 된 일이라고 생각해.”

“…….”

카이토는 시선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옆으로 아까 조깅하던 여자가 여전히 음악소리를 단 채 지나갔다.

잠시 뒤, 카이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도, 이미 돌아가셨는걸.”

“…카이는, 슬프지 않아?”

케이의 물음에, 카이토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슬프지만, 어떻게 울어도 돌아오지 않아.”

그것은 슬픔을 포기했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둘은 몇 분 더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어떻게 지냈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것인지. 그런 말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둘은 과거 혹은 과거의 줄기를 건드릴 수도 있을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기피했다. 사실 케이가 기피하려고 노력했고, 카이토가 그것을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던 걸지도 몰랐다. 케이는 그 날 카이토가 쥐어준 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한 채, 오로지 갑갑한 기분으로, 바싹 타는 목마름으로 병원까지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로비에 들어섰을 땐 이미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로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13

카이토의 아버지는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

카이토는 싹수가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 했으나, 카이토의 할아버지가 곧잘 그런 말을 뱉어 아버지를 일컬을 때마다 그것이 부정적인 말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정평이었다. 큐슈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12가구 모두가 카이토의 아버지를 이루마 시에 사는 싹수가 노란 그놈이라고 불렀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번듯한 직업도 없는데 어디선가 느닷없이 꽤 큰돈을 벌어오는 수상한 남자였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그가 하는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두 사람은 카이토의 방문을 닫아놓고 말싸움을 벌였다. 그 때마다 카이토는 방 안에 앉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이토는 단지 문밖의 세계가 격양되어 있다는 것, 아버지가 어머니를 겁쟁이로 취급하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불안을 토로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어느 날 카이토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식탁 위에는 카이토 몫의 밥과 국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밥그릇 위에 쪽지 한 장에 붙어있었다. 카이토는 쪽지를 떼어내 읽은 후 안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의 옷이 한 벌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토는 서랍과 장식장을 모조리 열어보았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쪽지 한 장을 남겨둔 채 그렇게 집을 떠났다. 카이토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나는 공모자가 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쪽지에 그렇게 썼다.

아버지는 크게 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굴었다. 카이토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어머니로부터 무언가를 듣지는 않았냐고 캐묻거나 다그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카이토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을 때, 그러니까 느닷없이 많은 돈을 벌어온 날이면 아버지는 카이토를 상 앞에 앉혀두고 고기만두나 비싼 생선을 구워주기도 하고, 사탕이나 과자를 사먹으라고 천 엔짜리 지폐를 몇 장씩 쥐어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제외된 카이토의 인생은 그 수상쩍은 공백을 제외하곤 별다른 문제없이 굴러갔다. 카이토는 아버지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으므로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기에 아버지는 태연한 것이라고.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어머니가 없어지더라도, 그건 슬프겠지만 괜찮을 것이라고. 빈자리가 발생해도 문제는 없다는 것을 아버지가 카이토에게 알려주었다. 이런 빈자리쯤은 괜찮다고 알려준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알려준 건 그게 고작이었다. 카이토의 할아버지 말따마다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1년 365일 중 320일 정도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근방 시내로 나가 빠칭코를 돌거나 낯선 이들과 술을 나누어 마셨다. 때때로는 집안을 뒹굴며 TV를 보았고, 밤에는 편의점에 나가 술과 담배를 샀다. 낮에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었던 아버지가 늦게까지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카이토는 반드시 편의점으로 나갔다. 그러면 편의점 테라스에 기대어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던 아버지가 여어, 카이토, 하고 그를 불러주었다. 그럼 카이토는 아, 아버지는 역시 사라지지 않는 거지, 하고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날 때까지 이불 속에 드러누워 청각을 곤두세우다, 밤잠에 쏟아질 무렵 희미하게 들려오는 현관문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카이토가 케이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의 일로, 그전까지 카이토는 특별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학교의 아이들은 카이토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다소 껄끄럽게 여겼다. 한량 아버지로 인해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카이토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을 날랐다. 카이토는 그 모든 것을 해명하지 않았는데, 이미 사라진 어머니에 대해 무엇을 변명해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의적이고도 타의적인 따돌림 속에 익숙해져 있을 무렵, 나가이 케이가 카이토의 인생을 방문했다. 그 때 케이는 카이토와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둘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카이토는 나중에, 케이가 카이토의 옆에 앉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단지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 하는 자신을 신경 쓴 담임의 조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아무렴 어떤가 생각하게 됐다. 케이가 카이토와 노는 것을 지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자리로 남아 껍데기조차 유지하지 못 하고 사라져버린 어머니보다 단단한 껍데기를 가지고 자신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케이 쪽이 카이토에게 훨씬 이로웠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존재를 되찾는다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카이토는 그 때 알게 되었다. 케이, 하고 부르면 응, 하고 케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카이, 하고 되돌려 호명해주었다. 카이토는 그 주고받음에 금방 매료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둘은 항상 붙어서 놀았다. 케이는 아는 것이 많아 때때로 카이토의 수학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어려운 공식을 풀어놓고 참을성 있게 카이토에게 설명해주면, 카이토는 케이의 눈치를 보며 답을 적었다. 하지만 대체로 틀렸다. 그러나 케이가 풀죽은 표정을 지으며 역시 안 되나, 라고 중얼거릴 즈음에는 제대로 풀 수 있게 되었다. 숙제가 끝나면 그들은 햇볕 아래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마룻바닥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카이토의 용돈으로 과자나 음료수를 사먹었다. 여름이 오면 카이토의 집에서 자주 놀았다. 대체로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카이토는 냉장고에 요구르트를 얼려놓고 케이와 함께 커피 수저로 그것을 퍼먹었다. 케이가 돌아가고 나면 카이토는 집안을 치우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오늘 하루 케이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떠들어 댔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그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건성으로, 그래그래, 그렇구나,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해주었다. 첫 친구를 사귀어 들뜬 아들의 기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야말로 싹수가 노란 아버지였다.

 

14

다음 날에는 병원에 짧은 소동이 있었다. 로비에서 대기표를 뽑지 않은 남자가 한 손에 12L 플라스틱 통을, 다른 한 손에 라이터를 들고 유유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남자는 구깃구깃한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고 표정은 딱딱하고 비장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한 바퀴 돌다가 이내 로비로 되돌아 왔다. 대기 중인 무수한 환자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인들, 그리고 실무처리에 여념이 없는 프론트 직원들로 들어찬 로비는 남자가 들어올 때나 돌아왔을 때나 똑같이 혼잡했다. 아무도 남자에게 집중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그 앞에서 12L 플라스틱 통 뚜껑을 열고 머리 위로 뒤집어엎었다. 바닥을 타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쏟아졌다. 비명소리와 함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기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얼어붙었다.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다 말고 라이터를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넋이 나가있었다. 이봐! 라고 남자가 고함을 내질렀다. 잘들 지내고 계셨는가? 남의 아픔에 좆도 관심 없는 이 빌어먹을 사람들아.

나가이 케이는 4층 당직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말고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로비에서 누군가 케이를 찾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수술실에서 2시간 내내 서있었던 케이는 당직실에 엉덩이를 붙인지 3분 만에 일어나 1층 로비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려야만 했다. 남자분이시래요. 누구요? 그, 이번 주에 사망한 304호 환자분 아드님이요. 케이는 정확한 소식은 듣지 못 했으나 그가 난동을 부리고 있음은 알았고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정보를 전해들을 수는 있었다. 케이는 그가 칼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 엇비슷한 날붙이를 들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간호사를 인질로 잡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고민했다. 아마 의료 과실을 운운할 것이다. 사망한 환자의 가족들이 이따금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 항의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의학 드라마의 폐해라고 볼 수 있었는데 실제 드라마와는 달리 병원에서 진행되는 응급 기술들은 매체에서 보여 지는 것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가 심어준 환상일 뿐 의료인들의 게으름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하지만 의료과실이 될 수도 없다. 케이는 자신이 로비로 내려가기도 전에 어쩌면 상황이 끝나있을 지도 모른다고, 경찰이 케이보다 먼저 도착해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상황을 기대했으나 그가 로비로 내려갔을 때 상황은 눈곱만큼도 진전되어 있지 않았다. 케이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로비 한복판을 적신 휘발유와, 축축하게 젖은 채 불붙지 않은 라이터를 들고 서서 숨을 시큰거리며 내쉬고 있는 남자를 응시하며 멈추어 섰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케이를 향해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로비의 모두가 빳빳하게 굳은 채 케이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케이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곧 평정을 되찾은 냉랭한 얼굴을 했다.

“진정하세요.”

케이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저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무슨 용건이시죠?”

“너…,” 남자가 헐떡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름으로 푹 젖은 남자는 한 발짝씩 걸음을 뗄 때마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너, 이 자식,”

케이의 몸이 긴장과 경계로 바싹 곤두섰다. 케이는 차분한 얼굴로도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숨기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케이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자, 남자가 라이터를 눈앞으로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움직이면 다 태워버릴 거야.”

“…….”

케이는 숨을 들이쉬면서 그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시선으로 빠르게 로비를 훑자 병원 입구에 서있는 경찰차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경찰들이 문 근처에 서서 상황을 살피며 무전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고를 받았으나 남자의 방화 문제로 인하여 쉽사리 병원 내부로 접근하지 못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케이는 남자의 손에서 라이터를 빼앗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때, 남자가 격분한 듯 손을 뻗어 무서운 기세로 케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케이는 흑, 소리를 내며 손길에 따라 난폭하게 앞으로 떠밀렸다. 케이는 성인남자의 몸집이 무색할 만큼 가볍게 남자의 한손아귀에 들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버둥 칠수록 멱살을 틀어쥔 남자의 주먹이 단단해졌다. 케이는 컥컥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나는 오늘 사과를 받으러 왔어.” 남자가 중얼거렸다. 

“알겠어, 선생? 나는 오늘 당신에게 사과를 받으러 왔다고.”

케이는 대답 대신 헐떡이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케이를 제 얼굴 앞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케이는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다 말고 늘어졌다. 남자는 케이한테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 나한테 사과해.”

무엇을 사과하란 것일까? 케이는 알지 못 했다. 당신 어머니에게 제세동기를 쓰지 않은 점? 더 빠르게 조치를 취하지 못 한 점? 요컨대 살려내지 못 한 점?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케이의 잘못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어찌 케이 혼자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에 어찌 한 사람의 몫의 책임만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케이가 고개를 비틀며 남자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컥컥거리는 숨과 숨의 틈으로 무엇이든 말하려고 했다. 무엇이든 변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같은 개인적이고 깊은 재앙 앞에선 올바른 말도 변명이 되는가. 케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든 하란 말이야!”

케이의 눈꼬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축축해진 눈동자로 남자를 올라다보자 남자가 라이터를 흔들며 애원했다.

“무슨 말이든 하라고!”

그 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두어 번 도약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남자의 뺨을 걷어차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케이를 놓쳤다. 케이는 컥컥거리며 비틀대다 말고 기름으로 끈적끈적한 바닥에 엎어졌다. 철퍽, 소리와 함께 험하게 구겨진 백색 가운이 빠른 속도로 물들기 시작했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대며 고개를 숙였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케이는 숨을 고른다고 주변이 요란해진 것도 의식하지 못 했다. 로비의 사람들이 어어, 소리를 내며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케이는 고개를 들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카이토가 케이를 등지고 서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발차기를 맞은 남자가 기름바닥에 엎어져 허우적거리다 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남자가 악착같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어 손을 뻗자, 카이토는 눈치 빠르게 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구석으로 차 넣었다. 라이터가 빙글빙글 돌다 말며 로비를 가로질러 벽에 부딪혔다. 경찰들이 무전소리와 함께 병원 문을 열고 밀려들었다. 카이토는 경찰들이 남자를 연행하기 직전까지 그를 기름덩어리로부터 밀어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으므로 어떻게든, 무엇이든 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자가 경찰들의 손아귀에 붙잡히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카이토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고개를 돌리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의 안전을 확인하는 일. 카이토는 케이를 확인했다. 그는 케이를 구하기 위하여 이 난장판에 덤벼든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케이는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카이토가 진득진득한 기름을 밟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

“케이.”

카이토가 케이의 시야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괜찮아?”

“…….”

등 뒤에서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와 카이토가 동시에 병원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기름을 뒤집어쓴 남자가, 어머니를 잃은 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죽었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되지…. 사람 살리겠다고 옷 입은 사람이!”

남자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그 어떤 봉도 잡지 못 한 채로 무너져 있었고, 그 얼굴은 오로지 절망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잡을 수 있는 그 어떤 지지대도 없었다. 그를 제대로 살게 할 수도 있었던, 어떤 선의의 거짓말이나 최소한의 예의는 그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케이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케이는 단지 사망시간을 읊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미안해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적어도 그렇게 가볍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의사가! 의사가 사람을 살리려다 실패했으면 실패한 이유를 제대로 말해줘야지!”

그러니까 그 날 케이는 남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것이다. 어떤 존재가 당신의 삶에서 박탈됐다고 말하는 일이 개인의 빛을, 희망을, 의지를 말살시킬 수도 있다는 것. 케이는 사형집행인이 아니었기에 단지 당신이 어떻게 죽어갈 것인지 만을 읊으면 그만이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 누구도 케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니었다.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면.

카이토가 떠올랐다. 카이토는 어두컴컴한 새벽복도에 앉아있었다.

케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카이토가 고개를 숙여 케이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듣지 마.” 카이토가 말했다. 

“케이, 들을 필요 없어. 듣지 마.”

“…….”

“케이.”

케이가 고개를 들어 카이토를 올려다보았다. 카이토는 케이의 눈꼬리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보았다. 케이의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카이토가 케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케이는 비틀거리다 말고 다시 주저앉았다. 카이토가 케이의 팔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케이는 몇 번 더 비틀거리다 말고 카이토에게 기대어 일어섰다. 그리곤 중심을 잡자마자 카이토를 밀어냈다.

“괜찮아.” 케이가 중얼거렸다. 

“괜찮으니까 이제 가.”

“씻는 게 좋겠어.” 카이토가 엉망이 된 케이의 옷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케이, 가서 씻자. 병원에도 샤워실은 있지?”

“괜찮다고 했잖아.” 케이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케이, 너 다쳤어.”

“괜찮다고…,”

케이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카이,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케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 너 지금 얼굴이 창백해.”

“…….”

케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카이토는 완강했다.

“케이.”

카이토가 케이의 손목을 꽉 쥐었다. 버거울 만큼의 힘이 실리자 케이는 끙,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카이토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케이는 카이토와 이 이상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한 번 가까워졌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사라졌으므로. 이제 둘은 남보다도 못 한 사이였다. 카이토는 그 사실을 다 잊은 것일까?

그들은 숲속에서 뒹굴며 싸웠다.

그리고 이제 케이는 카이토의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그 죽음의 책임을 추잡한 의사들과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케이가 버겁게 입을 열었다.

“카이… 나는,”

그 때였다.

“나가이, 거 친구 말대로 해라, 응?”

케이가 고개를 돌렸다.

쥰페이가 거기 있었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카이토를 더 멀리 밀어냈다. 밀어낸 후에야 늦었다는 걸 알았다. 오히려 밀어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판단이 뒤늦게 들었다. 케이답지 않게 뇌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리게 굴러가고 있었다. 쥰페이는 팔짱을 낀 채 히죽 웃곤 고개를 까딱였다.

“가서 당직실에 남은 옷 얻고, 샤워실 가서 몸 좀 씻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

“…….”

“응?”

케이는 카이토와 쥰페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카이토가 작게 케이, 하고 그를 불렀다. 케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케이는 비틀거리며 카이토를 마저 밀어내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눅진눅진한 의사 가운이 버겁게 느껴졌다. 케이는 곧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휘발유에 젖은 채 얼굴에 생채기를 달고 있는 얼굴이 덤덤한 표정이 된다고 멀쩡해 보일 리는 없었다. 프론트로 몰려든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이 케이를 보며 수군거렸다. 케이가 쥰페이를 지나칠 때, 쥰페이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속삭였다.

“모르는 사이라며?”

케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

“…남보다 더 못한 사이에요.”

케이는 앞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신경 끄세요.”

 

15

그 해 여름 카이토와 케이가 이따금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따뜻한 거실 마룻바닥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났을 때, 얼린 요구르트를 파먹으며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나무에 붙은 매미를 잡다 놓쳤을 때, 졸졸 흐르는 맑은 고랑의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도중에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카이토가 먼저 시작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 케이가 먼저 시작하기도 했다. 최초의 시작은 아마 카이토가 했을 것이다.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자주, 오래, 반복해서 했다. 이따금 벌어졌던 일 같기도 하고 매일 같이 벌어졌던 일 같기도 했다.

어쨌든 카이토는 때때로 고개를 기울여 케이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붙였다. 소년들은 일순 세상을 멈추고 숨죽이게 만드는 순간을 알고 있었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세상은 오로지 침묵하면서 그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케이는 카이토가 다가올 때마다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은 케이를 따라 함께 눈을 감아주었다. 케이가 눈을 감을 때면, 쏴아아 소리를 내는 나무들도, 시끄럽게 우는 매미도, 윙윙거리며 날갯짓 하는 벌레들도, 능청스러운 TV예능의 MC도 모두가 약속한 듯 눈을 감아주었다. 카이토와 입을 맞출 때마다 케이는 자꾸 자꾸 세상의 눈을 감겼고 종국에는 카이토와 자신만을 세상에 남겨놓았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그곳에 남아있는 건 오로지 케이뿐이었다. 케이는 그 완벽한 정적의 완벽한 고독 속에서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에선 나를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것으로 언제든 명명할 수가 있겠구나. 카이가 이 세상을 침범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히려 이 세상을 나에게 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카이토와 케이가 특별히 고백을 주고받았던 사이는 아니었다. 연인관계도 아니었고, 친구 이상으로 각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케이 쪽에선 그러했으며, 단지 이 일은 일종의 놀이처럼, 그들이 낮잠을 자고 나면 반드시 얼린 요구르트를 먹고 TV를 시청해야 하는 것처럼 어떤 일과로써 다루어졌다. 케이는 카이토와 키스하는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카이토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친구관계였으므로, 절친한 친구끼리 이런 걸 해선 안 된다던가, 하지 말아야 한다던가 같은 최소한의 선도 없었다. 케이의 안에는 오로지 진심이 되는 순간 인간이란 인간을 모조리 밀어내겠다는, 아버지가 남겨준 인간성을 티끌만큼도 상속받지 않겠다는 의지만이 존재했을 뿐 타인이 자신에게 간섭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자기 방어적 선과 태도가 부재했다. 케이는 자신의 외부적 상황을 돌보는데 예민했을 뿐 그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할 기회는 조금도 마련하지 못 한 어린 애였다. 카이토와는 정반대였다. 카이토가 외부적 상황, 자신을 두고 떠난 사람의 빈자리와 상처를 돌보는데 둔감한 데에 비해 그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고민하고 보살필 기회만을 확보했다면, 케이는 오로지 남을 잘라내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카이토는 케이가 돌보던 외부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그 애의 가까이에 존재할 수 있었다. 케이는 카이토가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애를 친구로 삼을 수 있었다. 카이토와 함께 있어도 인간이 될 위험성이 없었기 때문에, 케이는 카이토와 입술을 맞추거나 눈을 감는 순간마다 오히려 홀로 있음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나가이 케이가 인간으로부터 안정을 얻는 방식이었다. 다만 보편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케이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그저 특수한 인간이었으므로.

특수한 인간이란 상처를 받은 개인을 뜻한다.

 

16

카이토의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다. 카이토의 아버지가 가출하여 돌아오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카이토의 어머니는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물건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밥을 지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카이토는 부엌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며 우뚝 멈추어 섰다. 어머니는 카이토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 하고 카이토가 불렀다.

카이토는 아버지의 존재를 찾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돌아온 거야?”

“그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제 쭉 여기 있을 거야.”

카이토의 아버지는 집을 뛰쳐나간 지 한 달 만에 경찰에게 붙잡혀 연행되었다. 브로커로 범죄조직과 개인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다 덜미를 잡힌 것이다. 대포폰을 다섯 대나 가지고 있어서 추적이 쉽지 않았으나 종국엔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부터 쭉 여기 있을 거라는 어머니의 선언은 더 이상 집안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던, 그러나 본인은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그에 침묵할 수밖에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가담하게 된 범죄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확신이었다. 카이토는 하루아침에 교체된 아버지의 자리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였다. 부모는 원래부터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또는 돌아오는 것. 아버지가 카이토에게 가르쳐준 인간관계의 군상이란 그런 법칙에 따라 굴러갔고, 그의 두 부모는 몸소 번갈아 사라지면서 카이토에게 이 법칙을 거듭하여 알려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이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바닥으로 내치고 있으며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 했다. 다만 부모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밥, 용돈, 잠자리 제공-을 충실히 이행하며 카이토의 살을 붙이고 키를 키웠을 뿐이었다. 어쨌든 카이토는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가이 케이를 번갈아 잃은 채로도. 사람들은 원래부터 그를 머물지 않고 스쳐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이토가 할 일은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사는 동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는 도중에 카이토는 케이가 의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러나 그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다. 카이토는 졸업하자마자 일자리를 구했다. 그리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많은 일을 건드려보았다. 때때로 케이 생각을 했고, 아주 가끔은 아버지 생각도 했다. 케이를 생각할 때면 괴로움을 느꼈다. 카이토는 케이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고, 실제 조금은 그럴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용서를 제대로 구하지 못 했다는 부채감 속에서 허덕였다. 그는 케이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났고, 케이는 카이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카이토는 남겨진 채 다만 지나가는 시간을 손바닥 사이로 흘려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카이토는 슬픔과 고통에 집중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

카이토는 일을 늘렸다. 양성종양을 떼어내는데 꽤 많은 수술비용이 들어갔고, 카이토의 현재 벌이로써는 꽤 버거웠다. 어머니가 입원을 하면서 비용은 좀 더 불어났다. 카이토는 일을 더 늘렸다. 어머니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고, 어머니가 죽는 것을 내버려둘 만큼 그녀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미워할 만큼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깊게 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토는 그저 보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녀를 부양했고 그녀의 병원비를 책임졌다. 그리고 때때로 일찍 퇴근하는 날에 간신히 병원에 들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링거를 달고 주사를 맞는 어머니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카이토는 어머니에게, “오늘은 손님이 저에게 음료수를 사주었어요.” 따위의 시시콜콜한 말을 한두 마디씩 던지며 그녀의 존재가 제대로 그곳에 누워있음을 확인했다. 그럼 그녀는, 바짝 갈리진 목소리로 언젠가 카이토의 싹수 노란 아버지가 그러했듯, 그래그래, 그렇구나,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하곤 했다. 그러면 카이토는 본인의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양성종양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카이토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군요, 라고 대꾸하면서 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택배 상하차, 포대 나르기, 자제 옮기기와 운전 따위로 부르트고 갈라졌다가 몇 번이고 돋아난 새살들이 허연 흉터 속에서 번들거렸다. 카이토는 몇 가지의 일을 더 늘려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덤덤하게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이번에 어쩌면 어머니는 살아남지 못 할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어머니는 카이토의 인생에서 한 번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이다. 부재의 빈도가 잦아질수록 빈자리에 대한 확신은 강력해지는 법이다. 그 어두컴컴한 새벽의 대기실 복도에 앉아 몇 시간동안 어머니의 수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카이토는 알 수 없는 막막함과 아득함을 느꼈다. 본인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에 아무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는 자신에 대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았더라. 언제부터 이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뛰쳐나와 카이토에게 결과를 통보했다. 그런 후에 나가이 케이가 도착했다. 카이토는 고개를 들어, 완전히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빈자리, 한 때 아버지의 것이었으며 또 아주 오래 전에 또 한 번 어머니의 것이었으며 동시에 케이 역시 거쳐 간 그 빈자리에, 카이토의 유일한 공백에 다시금 도착한 나가이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유감이라고, 너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카이토는 대답했다. 괜찮아, 알려줘서 고마워.

처음부터 카이토는 케이를 원망한다는 선택지 자체를 염두 해두고 있지 않았다.

병원에서 케이에게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순전 우연이었다. 카이토는 그 때 일을 막 마치고 2시간 뒤에 있을 작업장 근무지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점검하고 있는데 매장 안으로 병원 복을 입은 중년의 환자가 혼비백산하며 뛰어 들어왔다. 로비에, 글쎄, 로비에. 그녀는 연신 그 말을 반복하다 말고 손가락으로 병원을 가리켰다. 간간히 끊어지는 말 속에서 스치듯 나가이, 라는 성이 오르내렸다. 카이토는 오토바이에 앉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나가이 케이요? 그녀가 카이토 쪽으로 몸을 틀곤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그 의사선생… 그 의사선생 말이야. 학생, 아는 사람이야? 케이가 왜요? 카이토가 되물었다. 케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녀는 어쩌면 좋아, 이를 어쩌면 좋아,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그 선생에게 불을 지르려 하고 있다니까, 글쎄.

카이토가 병원에 들이닥쳤을 때, 로비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남자가 케이를 틀어쥐고 올린 채 한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감히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 말릴 생각을 못 하고 입을 틀어막거나 허옇게 질려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기름을 뒤집어쓰고, 운이 나쁘면 불이 붙을 수도 있었다. 말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붙잡힌 케이와 지켜보는 군중의 영역을 분리시켰다. 카이토는 머뭇거리다 말고 창백하게 질린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카이토는 케이의 손이 남자의 손목을 붙잡다 말고 힘없이 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카이토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만이 남았다. 그는 앞으로의 벌어질 지도 모를 불운의 일과 최악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가이 케이가 그 순간 행위의 절대적 이유가 되었다. 카이토는 남자를 고꾸라뜨리고 케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막아섰다. 땅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반사적으로 걷어찬 후에야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상황이 종료되었다. 카이토는 케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몸을 돌렸다.

케이는 오로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이 내제된 눈동자가 카이토를 불길한 징조처럼 올려다보았다. 카이토는 케이가 자신을 병원에서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사실을 뒤늦게 생각해냈다. 자신이 케이를 곤란하게 만들었음을 알았다. 케이를 도우려 하였으나 그것이 전혀 케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카이토는 물러나려고 했고, 실제 그렇게 하던 도중이었는데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케이가 눈을 깜빡였기 때문이다. 케이의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리는 것을 카이토는 보았다. 케이의 가운은 휘발유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멱살을 쥐어뜯긴 셔츠는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가있었으며, 케이의 목 언저리는 새빨갰다. 케이는 생리적으로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간단한 사실이 카이토를 꿰뚫었다. 케이의 모습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불행이 찾아왔는데, 그게 전부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케이에게 벌어지는 모든 안 좋은 일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았다. 케이는 이렇게 고통스러워서는 안 됐다. 고통스러운 것은 카이토로 충분했다. 그런데 왜 네가 우는가. 카이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케이에게 손을 뻗었다.

“케이.”

“…….”

“괜찮아?”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로비를 쩌렁쩌렁 울리는 처절한 목소리였다. 케이와 카이토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도중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는 케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동시에 통곡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그는 애원하고 있었다.

“죽었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되지…. 사람 살리겠다고 옷 입은 사람이!”

“…….”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미안해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적어도 그렇게 가볍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의사가! 의사가 사람을 살리려다 실패했으면 실패한 이유를 제대로 말해줘야지!”

아니다, 너는 제대로 말해주었다. 앞으로 내게 빈자리가 생겼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너는 저런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카이토는 고개를 숙여 케이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듣지 마.” 카이토가 말했다. 

“케이, 들을 필요 없어. 듣지 마.”

“…….”

“케이.”

그 때, 케이가 고개를 들어 카이토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케이의 손목을 쥐고 있던 카이토의 손에 힘이 실렸다. 카이토는 케이의 표정이 아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 눈동자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케이는 한 번도 카이토에게 이런 표정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케이는 카이토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걸 거부했다. 그러나 카이토는 케이를 그대로 이 진득진득한 휘발유 속에 앉혀둘 생각이 없었으므로 재차 케이를 바닥에서 일으켰다. 케이는 결국 힘없이 그 손길을 따라 일어났다가 카이토를 밀어냈다. 카이토는 개의치 않고 밀려났다.

“괜찮으니까 이제 가.”

“씻는 게 좋겠어.”

카이토는 이 난장판에 케이를 내버려두고 갈 생각이 없었다.

“케이, 가서 씻자. 병원에도 샤워실은 있지?”

“괜찮다고 했잖아.”

“케이, 너 다쳤어.”

“괜찮다고…,”

케이가 소리를 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카이토는 케이가 고개를 돌려 로비 복도 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케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오로지 케이에게 곤두서있던 카이토는 그 누군가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한 채로, 케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똑같은 의사였다. 가운을 입고 있었고 안경을 썼으며 케이보다 키가 좀 더 컸다.

“가서 당직실에 남은 옷 얻고, 샤워실 가서 몸 좀 씻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케이는 카이토를 뿌리치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케이가 그를 스쳐 지나기 전에, 그가 케이의 손목을 붙잡고 무언가를 말했다. 케이는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카이토는 드문드문 들리는 그들의 대화에서 케이가 뚜렷하게, 남보다 못 한 사이,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카이토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복도 끝으로 절뚝이며 멀어지는 케이를 응시했다. 그리고 케이가 더 이상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있었다.

 

17

나가이 케이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케이의 아버지가 외도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차라리 뚜렷하게 알게 되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케이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파멸시킨 것이 외도였을 수도 있고, 혹은 환자에 대한 극단적인 책임감과 직업적 의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으므로, 그 모호한 두 가지의 선택지에서 케이는 갈팡질팡했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정확하게 알아야 기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죽일 수가 있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모호해지는 것이고, 모호해진 형태는 언제든 케이를 인간 혹은 그 무엇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아버지를 끔찍한 실패로 취급한 나머지 그를 증오하는 일조차 관둔 케이에게 있어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아버지 자체가 재앙이었다.

그 해 여름의 입구, 이제 막 매미가 울어대고 바람이 텁텁해질 그 무렵, 현관을 지겹도록 두드렸던 기자들과 인터뷰어들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흐지부지 자리를 떠났다. 국회의원의 스캔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케이의 아버지는 과거의 일이 되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들이 필요한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조사를 끝낸 경찰이 케이의 자택으로 몇 가지 물품을 돌려보냈다. 물품은 마치 방사선이라도 쐰 위험물질 마냥 지퍼락에 담겨 밀봉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청색 만년필과 시계, 그리고 휴대폰이 그렇게 2주 만에 집으로 되돌아왔다. 케이는 식탁 위에 그 봉투를 올려놓고 어머니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다 말고 문득, 어떤 생각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력하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케이는 지퍼락을 열고 아버지의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절반 정도 남아있었다. 전원이 켜지길 기다리면서 케이는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오르내린 환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25살의, 대학교를 다니다 말고 갑작스럽게 쓰러져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자의 이름. 휴대폰 전원이 켜지자마자 케이는 전화번호부로 들어가 통화내역을 확인했다. 버튼을 누르며 맨 아래까지 내려간 후 밑바닥에서부터 차례차례 위를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의 이름을 찾았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가 거의 없었다. 다 케이가 아버지로부터 한 차례 들어보았던 동료의사들의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뿐이었다. 가끔 케이의 이름도 있었고, 에리코의 이름도 있었다(에리코의 이름이 더 잦았다). 그러나 하나자와 카나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개의 하나자와 카나도 없었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부는 외도로부터 결백하였다. 단 한 개, 수상쩍은 번호가 있기는 했다. 가장 최근에 발신된 것이었고 맨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휴대폰 번호, 080 혹은 090으로 시작하지 않았던 데다가 여덟 자리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았으므로 하나자와 카나의 번호일 가능성이 낮았다. 외도를 하는 것이었더라면 이 번호가 더 자주 보였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저장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하는 티를 내지 않고는 버티지 못 하였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케이는 아버지의 휴대폰을 닫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파멸시킨 이유를 사랑이 아닌 그의 구질구질한 인간성에서 찾기로 결론지었다. 그러자 마음이 몹시도 홀가분하였다. 이 때 케이는 인간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나를 인간으로 만드는 그 어떤 누군가도 밀쳐내고야 말겠다는 절박한 냉정함, 철저하게 지어진 견고한 사고방식이 비로소 완성된 순간이었다.

 

18

카이토는 병원입구에 오토바이를 대고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는 축축한 머리카락으로 병원을 빠져나오다말고 카이토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카이토가 오토바이에 타며 대꾸했다.

“타. 데려다줄게.”

“필요 없어.”

케이가 재빨리 대꾸하곤 황급히 카이토를 지나쳤다. 카이토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그것을 손으로 끌고 케이를 쫓아왔다. 케이는 곁눈질로 자신을 쫓아오는 카이토를 흘겨보곤, 혀를 차며 더욱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절뚝이는 다리 탓에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 했다. 카이토는 오토바이를 끄는 채로도 금방 케이를 따라잡았다.

“고집부리지마. 다리 다쳤잖아.” 카이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집이 싫다면 그 근처까지만 바래다줄게.”

케이는 멈추어 섰다. 카이토가 따라서 멈추어 섰다. 케이는 뒤를 돌았다.

“카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케이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있었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차라리 아까 그 놈처럼 내 멱살을 틀어쥐고 협박이나 하는 게 어때? 어차피 그 남자나 너나 똑같은 처지면서.”

“…친구가 다쳤는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 카이토가 대답했다. 카이토는 케이가 확인하고 싶어 던진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와 케이를 당혹스럽게 했다. 친구…. 여기서 그런 단어를 들을 줄은 몰랐다. 케이는 그 단어를 쓰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 단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가이 케이는 친구라는 단어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의사가 되었다.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고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그거 관뒀었어.”

“알아.” 카이토는 무감하게 덧붙였다. 

“남보다 못 한 사이가 된 것도.”

“…….”

케이의 표정 위로 다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당황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들었나? 들렸나? 케이는 스스로가 그렇게 뱉어서 단정지어놓고도 카이토가 그것을 들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죄를 지은 기분이 케이를 붙잡고 바닥으로 내팽겨 쳤다. 카이토는 케이의 당황한 반응이 다소 어리둥절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악의나 어떤 저의가 티끌만큼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건…,” 케이가 떠듬떠듬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냥…,”

“케이, 나는 괜찮아.”

카이토는 케이의 변명을 의도 없이 찍어 눌렀다.

“그러니까 가자, 바래다줄게.” 카이토가 말했다.

“…….”

케이는 입을 꾹 다물고 카이토를 응시했다. 둘 옆으로 자가용 몇 대가 빵빵거리며 지나쳤다. 매연이 날릴 때마다 불쾌한 온기가 케이를 덮쳤다가 빠져나갔다. 한참 후,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케이가 졌다.

“…응.” 

케이가 중얼거리듯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카이토는 케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시내를 달렸다. 빨간불에 걸리기도, 걸리지 않기도 했다. 케이가 주소를 말해주고 카이토가 알겠다고 대답한 후에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는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사거리 한복판에 걸린 커다란 전광판이 끊임없이 숙취해소 음료 광고를 내보내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내내 젖은 머리카락이 조금씩 말라, 케이의 집근처에 가까워졌을 즈음엔 거의 건조해져 있었다. 카이토가 그쯤에, 아, 하고 화두를 꺼냈다.

“옷은 어떻게 했어? 엉망진창이 되었었잖아.”

케이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버렸어. 세탁이 안 된대서.”

“아깝네.” 카이토가 중얼거렸다. “흰 가운, 잘 어울렸었는데….”

“그거 버렸다고 이제 못 입는 거 아니야. 당직실에 여분 있어.”

“그럼 앞으로도 쭉 흰 가운 입고 있는 거야?”

“…응.”

“그렇구나, 다행이네.”

바람이 마구 흩날려 둘 사이의 목소리를 아까보다 멀리 밀쳐놓았다. 케이는 카이토의 등과 바싹 붙어있는데도 어쩐지 카이토가 멀게 느껴졌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참 뒤에나 답을 발신하는 외계인이 된 것 같았다. 케이는 속도감에 따라 뭉개지는 가로수의 형체를 응시하다 말고 말을 꺼냈다.

“카이는…, 병원 근처에 살아?”

“나?”

오토바이가 좌회전을 했다.

“나는 네가 살고 있는 곳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살아. 거기 정류장 근처에 소바집이 있는데,”

“아, 거기.” 케이는 그곳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

“응, 먹어보진 않았지만…,”

“거기 나쁘지 않아. 여하튼, 소바집이 있는 상가 2층에 방이 하나 있는데,”

카이토는 오토바이의 속도를 줄였다.

“일단은 거기서 신세지고 있어.”

“…그렇구나.”

가로수길이 이어지다 말고 뚝 끊어지더니 주택가가 나타났다. 카이토는 오토바이 속도를 더욱 줄였다. 넓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드문드문 전봇대가 서있는 풍경이 늘어졌다. 카이토는 오토바이를 세웠다.

케이의 집은 골목을 돌아 두 번째에 위치했다. 카이토는 전봇대 앞에 오토바이를 대고 헬멧을 벗었다. 케이는 헬멧을 벗지 않았다. 카이토는 오토바이에서 내리려다 말고 케이가 내릴 기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동작을 멈췄다. 케이가 안장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이 허옇게 될 정도로 세게 잡고 있었다. 골목은 한적해서 주변이 무척이나 고요했다.

케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카이.”

“응.”

“…평균적으로 양성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은 2시간 반 정도 소요되거든.”

카이토의 어머니의 수술은 세 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응.”

“그리고 수술이 끝나면 수술경위는 반드시 담당의가 설명해줘야 해. 수술을 총괄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케이는 안장을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손가락이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었다. 카이, 하고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곤 손을 움츠렸다.

“…나는 그 수술의 담당의가 아니었어.”

“…….”

카이토는 잠시 침묵하다가, 하아, 하고 흥미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소리를 내며 시큰둥해 했다.

“그렇구나.”

“…….”

“원래부터 케이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의미가…,”

“케이.” 카이토는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케이의 말을 잘라냈다.

카이토는 케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은연중에 고백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자신에게 알려주려고 하는지 어렴풋하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카이토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 했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시시비비를 따지기엔 너무 늦었다. 따진다한들 카이토에게 돌아오는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카이토에게 가지는 의미가 없었으므로 카이토가 그녀를 통해 수복할 수 있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카이토는 케이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 역시 없고, 네가 쌓아올린 것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어느 날 휘발유와 라이터를 들고 찾아오지도 않을 거란 사실을.

그래서 카이토는 말했다.

“케이, 나는 정말로 괜찮아.”

“…….”

등 뒤에서 케이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오토바이가 기울어지더니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케이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그는 헬멧을 벗어 뒷좌석에 얹어놓았다. 케이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쥐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케이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바보.”

케이는 쌀쌀맞게 쏘아붙이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카이토는 백미러를 통해 멀어지는 케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케이가 절뚝이며 신경질적으로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오토바이에 기대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다.

 

19

요즘 아빠가 우울해, 라고 케이가 말을 꺼냈을 때, 둘은 얼린 요구르트를 퍼먹고 있었다. 카이토가 고개를 들어 케이를 바라보자, 케이는 담담하고 무감한 표정으로 전자레인지 사용설명서를 읽듯 다시 한 번 더 아빠가 우울해해, 라고 말했다.

“좀 더 우리한테 신경써줬으면 좋겠는데.”

“케이 때문에 우울한 게 아니야?”

“환자 때문에 우울한 거야.”

케이는 요구르트의 바닥을 깔짝이며 대꾸했다.

“장기기증을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이 없어서 죽을 지도 모른대.”

“케이네 아버지 환자가?”

“응.”

케이는 요구르트 얼음덩어리를 수저로 떠 넣고 입안에서 조용히 굴렸다.

“좋게 풀리는 쪽이 모두에게 좋겠지만 어느 쪽이든 결정되어서 더는 아빠가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야?”

케이는 카이토의 물음에 잠시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딱히,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잘 될 거야.”

그런 후, 카이토는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케이에게 이마를 붙였다. 케이가 작게 읏, 소리를 내다 말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둘은 잠시 동안 요구르트로 끈적끈적하고 달큰해진 입술을 붙인 채 그렇게 멈추어 서있었다. 커피 수저를 쥔 케이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수저가 떨어져 마룻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떨어졌다.

케이는 시선을 내리깐 채 혀로 입술을 핥다 말고 허리를 숙여 수저를 주웠다. 카이토는 요구르트를 마저 퍼먹었다. 그들은 그 뒤에 과자를 까먹고 숙제를 몇 문제 풀다가 평소처럼 헤어졌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그 날도 다소 늦게 귀가했다. 카이토는 이불 속에 몸을 구겨 넣다 말고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깨어있는 카이토를 보곤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어, 카이토, 안자고 있었냐.”

카이토의 아버지는 그 인사 이후 카이토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벗고 곧장 거실을 가로지르더니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창백한 모니터 빛이 쏟아졌다. 카이토의 머리 위로 모니터 화면의 빛과 아버지의 실루엣이 번갈아 일렁였다. 카이토는 이불 속에서 손을 꼼질거리다 말고 아빠, 하고 그를 불렀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카이토는 여느 때와 똑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배웠으며 케이와는 무엇을 했는지(물론 카이토는 케이와 입을 맞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설령 카이토가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도 카이토의 아버지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제대로 듣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케이가 들려준 이야기도 했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세 번에 한 번 꼴로 그러냐, 응, 하고 건성으로 대꾸해주었다. 카이토는 케이와 요구르트를 퍼먹으며 나눴던 이야기도 했다. 케이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케이의 아버지가, 요즘 힘들대. 케이가 신경 쓰고 있었어.”

아버지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 아버지는 의사인데, 돌봐주는 환자가 곤란한가 봐.”

아버지가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기기증을 기다리고 있는데, 케이 말로는 그게 남이 줄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하는 거래.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면, 죽기도 한 대.”

“씨바, 죽지, 그럼. 뱃속에 있는 거 꺼내는 건데.”

아버지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꾸했다.

“환자 뱃속에 있는 걸 꺼내는 거 말고, 남이 꺼내주는 걸 받는 거야.”

카이토가 정정해주었다. 키보드를 두들기던 소리가 일순 멈추었다.

아버지는 의자를 뒤로 빼며 누워있는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장기기증 이야기야.” 카이토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네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말하고 있었어.”

“걔네 애비가 뭘 하시는데.”

아버지의 실루엣 너머로 모니터의 빛이 따갑게 쏟아졌다. 카이토는 얼굴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케이네 아빠는 의사야. 전에 말했잖아.”

며칠이 흘렀을 즈음인가. 카이토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이토는 시계를 들여다보다 말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동화를 고쳐 신고 동네 편의점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늦으면 항상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당연하지만 편의점 테라스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카이토는 편의점에 다가가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아버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잔뜩 쏠려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나누는 모든 이들이 나누어 가지는 경계와 기대감의 표정으로 눈앞의 상대를 회유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대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라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카이토는 한가한 편의점 테라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 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 했으므로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상대는 대화 중간에 벌떡 일어났다.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카이토의 아버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들겼다. 카이토는 아버지가 악당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보스몹을 죽이러 내려간 던전에서, 효과가 굉장히 좋은 포션을 팔며 등장하는 수상쩍은 상인처럼 보인다고도 생각했다. 카이토는 그 날 아버지에게 인사하지 않고 집으로 되돌아왔고 아버지는 그로부터 1시간 뒤에나 귀가했다. 그는 귀가하면서 카이토의 머리맡에 과자와 음료수를 잔뜩 놓아주었고 옷을 꿰입은 뒤 몇 번의 전화통화를 하곤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그날 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일본 전역을 뒤집었던 장기매매 의사가 언론 앞에 끌려나오고, 이루마 시는 그 이야기로 온통 들썩였다. 케이는 한동안 카이토와 만나지 못 했는데, 집 앞으로 몰려든 기자들 때문이었다. 카이토는 아버지가 도주하기 전날 밤 자신의 머리맡에 두고 간 봉투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모조리 꺼냈다. 그리고 요구르트만 따로 분리하여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카이토는 혼자 TV를 보았다. 오랫동안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뉴스마다 보여주는 화면 속에 존재하는, 경찰차로 끌려가는 몰락한 한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그럼 편의점의 일이, 그 날 밤의 일이,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버지의 수상쩍은 일들, 어머니의 쪽지 따위가 전부 떠올랐고, 그럼 손에서 땀이 났다. 카이토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없던 일이 되거나 혹은 지나간 일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 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그것을 없던 일이나 지나간 일로 만드는 행위가 오히려 더 무시무시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카이토는 그것이 죄책감임을 알았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한 달 남짓 만에 검거되었다.

 

20

죄책감은 용서받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 나 때문에 아팠던 타인에게 어떻게든 보상해주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데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중요한 건 죄책감의 존재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완벽하게 무지하지 않다는 뜻이고,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곧 주변을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며, 주변을 인식한다는 것은 누군가와 만날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 즉 구원의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으나 동시에 수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수복이란 되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빼앗기기 이전과 빼앗긴 이후는 같지 않다. 한번 그어진 빗금이 동그라미가 될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는 몇 개의 삼각형이 존재하는가.

나가이 케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카이토의 어머니에 대하여 생각했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위에 2.6cm짜리 양성종양을 달고 있었다. 양성종양의 재발 가능성은 악성종양에 비하면 반의 반절도 채 되지 않는다. 수술 이후 처방되는 사후 첨단약물이 안 그래도 낮은 가능성을 극하로 줄인다. 쥰페이가 물을 타던 바로 그 약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뒤집어 말하자면, 양성종양의 재발은 불확실성에 기반 한 개인의 불행이며, 약물의 투여 여부는 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쥰페이도 케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쥰페이가 겁도 없이 그런 짓거리를 저지른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케이 역시 그 불확실성을 이유로 이 모든 비리사실을 묵인했다. 병원의 의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내부비리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동참하고 있었고, 의학적 지식에 기초한 몇 가지 가능성을 들어 그들의 책임감을 상쇄하고 이를 합리화했다. 의사들은 단지 가벼운 환절기 마냥 어설픈 죄책감을 단 채로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입원 한 달 만에 양성종양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양성종양이 재발하는 불행을 겪었다. 두 번째 수술이 진행되었고, 그녀는 사망했다. 쇼우는 절개부위를 가르는데 실수했고, 마취과는 약물 투여량을 계산하는데 실수했고, 쥰페이는 돌발 상황을 대처하지 못 했고, 혈액의 청구는 늦어졌다. 그리고 케이는 이 모든 사실을 묵인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 그 수술실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아니다, 그렇다고 한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케이는 너무 오래 전부터 이 병원에 존재하는 폐해와 불길의 징조를 방관했다. 사소하고 작은 우발이 모여 누군가를 죽였다. 케이는 그 사실을 여태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살인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케이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살리지 못 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럼 고하면 그만이었다. 2018년 7월…, 누군가가 당신의 인생 속에서 막 사라졌노라고 선고하는 일을, 나가이 케이는 여태까지 계속해왔던 것이다.

‘죽었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되지…. 사람 살리겠다고 옷 입은 사람이!’

케이는 그 때, 자신에게 호소하던 눈앞의 남자에겐 눈곱만큼도 마음을 쏟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의사가! 의사가 사람을 살리려다 실패했으면 실패한 이유를 제대로 말해줘야지!’

케이는 카이토를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는 카이토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카이토를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의 내면 속 카이토는 어머니의 수술결과를 기다리며 텅 빈 새벽 복도에 홀로 앉아있었다. 케이는 언제든 그 복도를 걸어 카이토에게, 시시때때로, 앞으로 언제든 어느 때라도, 거리를 걷거나, 환자를 진찰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거나, 물을 마시거나, 탕비실에 웅크려 자다가도 찾아가게 될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의 어머니가 죽었으므로 무척 유감이다.

인간이란 간사하기 때문에 영원히 타인으로 남을 타인의 불행 속에서 단지 내 이웃의 불행을 걱정할 뿐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름을 뒤집어썼던 남자는 케이의 단면을 찢어발기고 죄책감을 꺼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그것이 남자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카이토에게 돌아갔다. 이제 케이는 카이토에게 결코 해갈될 리 없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케이는 카이토가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은 청산이지 용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케이는 카이토가, 자신의 부채감을 모두 청산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원망하거나 탓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변명과 자책의 기회라도 마련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이토는 그렇지 않았다. 카이토는 단지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케이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냥 그곳에 두었다. 케이 스스로만이 느끼고 판단한 감정이 침범되지 않도록 그곳에 두고 보호했다. 케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젠장.’

케이는 묵묵히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일들이 없던 일이 되거나 지나간 일이 될 수 있는지 궁리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없던 일이나 지나간 일로 만드는 행위가 오히려 케이를 더 옥죄어 올 거란 사실을 예감했다. 가슴 위로 거대하고 붉은 올가미가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 위로 빗금이 그어진 것만 같았다. 케이는 자신이 오답처럼 느껴졌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수복할 수 없다.

케이는 현관 앞에 아주 오래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여름의 밤을 생각했다.

 

21

케이는 어머니로부터 휴대폰을 돌려받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확인했다. 카이토의 번호는 정말로 지워져 있었다. 번호를 외우고 있지만. 케이는 생각했다. 이제 쓸모가 없어졌네. 통화내역조차 깨끗했다. 어머니는 카이토의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카이토가 남겨놓은 모든 이력을 삭제했던 것이다. 그러자 카이토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케이는 통화내역을 열다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주 오래 전의 발신수신 기록이 최신의 이력으로 올라와 있었다. 번호가 있었다. 080으로도 090으로도 시작되지 않는 이상한 번호. 카이토가 아버지의 폰을 빌어 걸었던 최초의 전화. 케이는 그 번호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방으로 올라가려던 케이의 발걸음이 그대로 서재로 향했다.

케이는 아버지의 서랍을 열어 지퍼백에 들어있던 아버지의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과 아버지의 휴대폰을 들고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케이는 생각했고, 영리했음에도 그만큼을 생각해야했고, 결론을 내렸고, 어머니가 왜 자신으로부터 카이토를 제거하려고 했는지를 재차 받아들였다. 케이는 이 모든 사건의 고리를 이해하였다.

방으로 돌아온 케이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문제집을 풀었다. 하염없이 문제집을 풀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랐다. 방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문제를 풀면서 카이토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거듭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였다. 나가이 케이는 묻고 싶었다. 카이토에게, 지금 떠오른 생각 한 가지를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물어본다면 끝나는 일이었다. 카이토에게 물어보고 모든 것을 정리한다. 그리고 끝낸다. 카이토를 인생에서 떼어낸다. 없던 일로 만든다.

그래서 나가이 케이는 전화를 걸었다.

 

22

카이토는 케이를 데려다 준 후에 곧장 매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잔업을 하고 청소를 끝냈다. 매장 창고에서 무거운 냉동박스를 나르고, 포장을 벗긴 후에 몇 봉투씩 분리해서 다시 냉동 창고에 넣어놓았다. 카이토가 주로 맡는 일은 힘을 쓰는 단순노동이었다. 몇 시간 동안 냉동 창고와 하역장과 매장을 번갈아 드나들며 일을 하다 보면 저녁이 됐다. 그럼 퇴근했다. 카이토는 시간을 다 채운 후에 장갑을 벗고 카드를 찍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 10시를 넘긴 여름밤이었다. 캄캄한 도로 위로 가로등이 늘어져 거리는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빌딩건물 유리창을 밝히던 빛의 조각들은 사라지고, 골목을 돌자 어둠만 남았다. 카이토는 오토바이를 소바집 근처 전봇대에 대고 입구로 들어섰다. 계단통은 불빛이 없어 온통 캄캄하기만 했다. 카이토는 벽을 손으로 짚어가며 한 계단씩 올랐다. 2층 자취방까지 이어지는 계단은 어둠속에서 유독 길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긴 하루였던 것이다.

카이토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현관문 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카이토는 어둠 속에 가려진 누군가를 마주보았다. 실루엣이 카이토 쪽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어둠이 눈에 익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전부터 카이토는 눈앞의 방문객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케이?”

카이토가 다가섰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묻고 싶은 게 있어.”

케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제대로 말하면, 카이는 제대로 들을 거야?”

“…….”

카이토는 케이가 무엇을 물어보고자 하는지 알아들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내가…,”

케이가 중얼거렸다.

“내가 카이의 어머니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설명하면, 카이는 제대로 듣고 슬퍼할 거야?”

“케이, 그건 안 돼.” 카이토가 대답했다.

“할 수 없어.”

“카이, 사실은 내가 아까 말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

“케이….”

“아니면 나랑 다시 만난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

“…….”

“다 알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걸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내가 고통스럽게 내버려두는 거지. 다 알고 있으니까.”

“고통스러웠어?”

케이는 카이토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상냥한 거지?”

카이토는 케이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케이가 손을 치우며 카이토를 노려보았다.

“상냥하게 굴지 마.”

“반대야.” 카이토가 케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야.”

케이는 대답 대신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1층 소바집에서 손님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토는 시선으로 복도 난간을 흘끔거리다 말고 현관문을 열었다.

“케이,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

“케이.”

“…카이는,”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알고 있어?”

 

23

오후 9시 49분, 창밖이 온통 어두컴컴한 여름의 밤.

그 때, 카이토는 휴대폰을 든 채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24

그로부터 오랫동안, 카이토는 죄책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가이 케이로부터 용서를 받고 싶은 것인지 고민해보았다. 잘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개인적인 죄의식이었다. 카이토의 의지로 이루어진 사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토는 어떤 책임을 느꼈기에, 케이에게 개인적인 불행을 안기는데 조금은 일조하였기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케이에게 전화를 받고 한밤중의 거리를 걸어 나가는 동안 11살의 카이토는 케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카이토는 케이가 차라리 자신에게 욕을 내뱉고 흠씬 때려주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네 잘못이라고 탓하고 분노하기를 바랐다. 케이가 고통스러웠거나 혹은 신경 쓰였던 만큼을 어떻게든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이가 얼마만큼 분노했는지를 토로해서, 자신이 얼마만큼 그 애에게 봉사해야 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카이토는 괴로워 한 것이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 할 거라는 막연함 때문이다.

“내가 고통스럽게 내버려두는 거지. 다 알고 있으니까.”

카이토는 케이의 눈동자로부터 언젠가 자신이 가졌던 그 충동을 읽었다.

“고통스러웠어?”

대답 대신 케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상냥한 거지?”

“…….”

“상냥하게 굴지 마.”

“반대야.” 카이토는 단지 케이가 괴롭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야.”

카이토는 그제야 병원 로비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케이의 얼굴을 이해했다. 그 위로 떠오른 표정을 이해했다. 그건 카이토가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얼굴이었다. 죄책감의 얼굴이었다. 케이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카이토는 케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했다. 케이가 당장 무엇을 위하여 카이토를 찾아온 것인지 알아야했다.

“케이,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 하자.”

손을 뻗으려 했지만 케이는 뿌리쳤다.

“카이는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알고 있어?”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는 케이야 말로 무엇을 원해?”

카이토가 말했다.

“케이가 용서받길 원한다면 나는 용서할 거야.”

케이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케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째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야….”

“…….”

카이토는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거기서 나를 타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케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어.”

“…….”

“카이를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

“카이를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카이토는 중얼거리는 케이를 말없이 응시하였다.

케이는 손등으로 몇 번 뺨을 문지르곤 재차 고개를 들었다. 카이토는 케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침묵이 있었다.

카이토는 케이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어냈고, 케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해줄 자신이 없었다. 없었지만.

케이의 숨소리가 조금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카이토의 주먹이 동그랗게 말렸다. 차라리 자신에게 욕을 하거나 흠씬 패주길 바랐던 순간들. 청산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부채감을 어떻게 다루게 되는지에 대하여.

카이토는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25

그러나 그 날, 그 밤에, 그 어두컴컴하고 막막한 세상 속에서 카이토와 케이는 만났다. 한밤중의 숲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깊고 어두웠다. 케이는 신사 앞에 서서 카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토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케이를 보았다. 케이의 표정은 어둠 속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카이토는 케이를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케이가 먼저 카이토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두 소년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숲 어딘가에서 쓰르라미가 울었다.

카이토는 천천히 케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케이 앞에서 두 팔을 벌렸다. 그렇게 하는 데도 몸이 조금 후들거렸다. 카이토는 케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케이,” 카이토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카이토가 말했다. “화가 난다면 나를 때려도 좋아.”

“…….”

쓰르라미가 울고, 바람이 불었다. 두 소년이 등진 숲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울었다. 쏴아아…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혀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며 여름 달이 드러났다. 달빛이 두 소년 사이로 떨어지며 희끄무레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카이토는 케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케이는 주먹을 쥔 채 카이토를 응시하고 있었다. 잔뜩 굳은 표정에 입술을 꾹 다문채로. 낯빛이 창백했다. 카이토는 눈을 깜빡거렸는데 어른스러운 케이가 평소와는 달리 어린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움과 배신감이 내제된 혼탁한 눈동자가 반들반들해지더니, 곧이어 케이가 카이토에게 주먹을 날렸다.

 

26

카이토는 케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케이가 카이토의 주먹에 떠밀려 그대로 벽에 등을 박았다. 카이토는 주먹을 풀고 물러났다. 케이가 헐떡이며 손등으로 인중을 쓸었다. 카이토는 참담한 심정이 됐다.

“…이제 돌아가.”

카이토가 얼굴을 쓸었다.

“케이, 이제 됐어. 그만하자.”

“…….”

케이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까지 아픈 주먹이 아니었다. 카이토가 힘 조절을 한 것이다. 카이토는 케이가 부탁하면 무엇이든 해줄 것처럼 구는 이상한 놈이다. 심지어는 어머니를 죽이는데 가담했다고 고백했는데도 너만 괜찮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먹질을 해주지는 못 한다. 왜일까. 케이는 카이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인지조차 제대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용서를 바라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다만 오답을 수복하고자 찾아왔다. 정답을 찾는 과정을 알고 싶었다. 한 인간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땐 어떤 과정을 거쳐야 오답을 지우고 새로운 답을 쓸 수가 있는 걸까. 카이토가 그만하겠다는 듯 현관문을 열자, 케이는 비틀거리며 카이토에게 덤벼들었다. 카이토는 그대로 떠밀려 현관 바닥으로 쓰러졌다. 등 뒤로 문이 쾅 닫혔다. 케이는 카이토에게 주먹을 질렀다. 카이토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그 주먹을 맞았다. 카이토가 얼굴을 찡그리곤 케이를 올려다봤다. 케이는 카이토의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입가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

카이토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한 번 더 카이토에게 주먹을 질렀다. 카이토가 윽, 소리를 냈다. 케이가 한 번 더 주먹을 들자, 카이토는 케이를 떼어내곤 주먹을 휘둘렀다. 케이가 떠밀려 문에 등을 박았다. 카이토는 케이의 뒤통수가 문에 부딪히기 전에 제 손바닥으로 케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시선이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케이가 얼굴을 찡그리곤 이를 악물고 카이토에게 재차 덤벼들었다. 카이토는 몇 번은 맞고, 몇 번은 때렸다. 케이의 주먹은 카이토가 맞아온 어떤 주먹보다도 힘이 약했다. 케이가 힘 조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토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상처 입히기 위하여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정말로 상처 입힐까 봐 거리를 두었다. 단지 공격이라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힘만을 서로에게 행사하면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케이가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카이토를 떠밀자, 카이토가 집안으로 뒷걸음치다 말고 케이를 내팽겨 쳤다. 케이는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튕겨져 올라 카이토에게 주먹을 질렀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시작했다.

 

27

두 소년은 신사 앞마당에서 뒹굴다 말고 엎어지기를 반복했다. 카이토는 케이에게 연거푸 맞으면서 뒤로 밀려났다. 케이가 카이토 위에 올라탔다. 카이토는 케이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짜증인지 변덕인지 알고 싶었다. 케이의 표정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케이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 채로 카이토에게 달려든 걸지도 몰랐다. 케이는 시큰거리는 숨을 내쉬며 카이토에게서 떨어져나갔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러다 곧 벌떡 일어났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몇 번 더 비틀거리다 말고 경사에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숲 쪽이었다. 그 순간 카이토의 몸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 케이를 감쌌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두 소년이 서로에게 엉긴 채 숲의 경사 길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돌부리와 떨어진 나뭇가지 따위가 소년들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축축한 흙냄새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케이가 카이토의 품에서 작게 신음했다. 뒤늦은 생채기의 화끈거림이 카이토의 두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카이토가 끙, 소리를 내자 케이가 고개를 쳐들고 카이토의 다리를 확인했다. 그러나 곧이어 본인의 행동 자체를 나무라는 것처럼 비틀거리며 카이토를 떼어냈다. 카이토는 눈을 반쯤 뜬 채 케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케이가 시큰거리는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이제 됐어.”

케이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됐어, 충분히 이해했어.”

“…….”

케이는 고개를 들고 카이토를 한 번 흘끔거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로 숲을 빠져나갔다. 바람이 불어 케이의 뒤통수를 마구 흔들었지만 케이는 몇 번 더 손등으로 얼굴을 훔쳐냈을 뿐 돌아보지 않았다.

카이토는 자신의 상냥함이 케이를 상처 입혔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케이와 헤어진 것은 카이토가 그 애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임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28

케이가 카이토를 벽으로 떠밀었다. 카이토가 케이의 멱살을 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기자, 케이는 이를 악물고 그를 떼어냈다. 카이토가 주먹을 지르자 케이는 얼굴을 비틀어 피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카이토는 케이를 뒤집어 벽에 내다꽂았다. 좁은 자취방을 모조리 때려 부수면서 두 사람은 당기고 밀치고 지르고 휘둘렀다. 케이가 신음하며 카이토의 허리에 매달려 앞으로 내달렸다. 카이토는 뒤로 밀리다 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케이가 튕겨져 나왔다가 카이토의 멱살을 쥐었다. 둘의 위치가 다시 한 번 뒤바뀌었다. 케이는 카이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카이토는 고개를 비틀어 그것을 피하다 말고 멈추어 섰다. 카이토의 좌측에 거울이 있었다. 카이토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케이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카이토의 손바닥에 받친 케이의 주먹이 그대로 거울이 메다 꽂혔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거울 파편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 순간 케이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카이토의 손등에서부터 선명한 피가 흘러내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선혈이 바닥을 선명하게 찍어 눌렀다. 케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케이.”

“…아,”

“케이!”

케이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카이,”

케이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말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꼬리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카이토의 어깨를 쥐고 있던 케이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팔이 툭 떨어졌다.

“…….”

“…….”

“…미안.”

“…….”

“그 때,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케이가 중얼거렸다.

“그 때 그러지 말 걸.”

“케이.”

“그러지 않는 거였는데, 내가.”

“케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케이가 고개를 들어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답을 찾지 못 해 불안함으로 가득 찬 표정이 여전히 창백했다. 카이토의 손등을 따라 뚝 뚝 선명한 선혈이 떨어졌다.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화끈거림이 별개의 감각처럼 느껴지고, 오로지 케이의 문제만이 카이토의 머릿속에 남았다. 카이토는 케이의 뺨을 감쌌다.

“생각하지 마.”

카이토가 케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이며 중얼거렸다.

“케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게 나라면 나를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카이토의 얼굴이 다가왔다. 버릇대로 케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맺혀있던 물기가 반쯤 흘러내렸다. 축축해진 케이의 뺨으로 카이토의 피가 번졌다. 케이는 입술을 벌렸다. 카이토가 손바닥을 벌려 케이의 뒤통수를 완전히 제 손 안에 들였다. 케이의 입으로 카이토의 혀가 들어왔다. 케이가 입술을 떼어내다 말고 헐떡이며 얼굴을 붙였다. 카이토의 혀가 케이의 입 안을 쓸며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축축한 살이 습윤해지면서 열이 올랐다. 카이토가 케이의 혀를 빨아 당기며 손끝으로 케이의 귓바퀴를 문지르자, 케이의 목울대가 작게 신음했다. 일순 카이토가 몸을 앞으로 더 기울였다. 케이는 뒤로 떠밀리다 말고 카이토의 손에 그대로 붙잡혔다. 케이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하고 연거푸 헐떡였다. 입술이 짧은 틈을 두고 떨어졌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더운 숨이 두 사람의 입을 번갈아 드나들었다.

“아……,”

케이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카이토가 케이의 뒤통수를 주무르며 뺨을 비볐다. 케이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케이가 헐떡이며 몇 번 더 짧게 숨을 토해냈다.

“…제발,”

케이가 흐느끼듯 중얼거리며 카이토를 끌어당겼다.

“그만해.”

케이가 카이토를 붙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하지 마…,”

카이토가 다정하게 굴수록 케이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머릿속이 허옇게 물드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카이토의 손길을 느꼈다. 카이토의 손이 뒤통수를 주무르며 등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케이의 허리를 붙잡았다.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케이의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카이토는 케이의 손을 붙잡아 제 허리에 감았다. 둘의 하반신이 바싹 붙었다. 열이 몸 구석구석에 팽배했다. 주고받는 타액이 늘어지며 입술을 축축하게 적셨다. 카이토가 하반신을 비비며 케이를 뒤집어 벽으로 밀어붙였다. 케이는 달아오른 뺨을 맞대며 카이토의 허리를 꽉 쥐었다. 카이토가 조급한 손짓으로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케이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케이의 손은 카이토의 가슴팍을 몇 번 더듬거리다 말고 어쩔 줄 모르며 늘어졌다. 카이토는 케이의 셔츠를 반쯤 벗겨내자마자 케이의 맨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쪽쪽거리며 입술이 케이의 목덜미를 따라 어깨선까지 이어졌다. 케이는 카이토가 닿는 족족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이 좌우로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케이는 신음할 때면 꼭 눈을 감고 발끝을 갈퀴처럼 오므렸다.

“아……,”

케이가 흐느꼈다.

카이토가 낮은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렸다.

“케이.”

“아…!”

“케이.”

케이가 카이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손끝부터 얼굴 전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이토의 손이 케이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바지를 벗기는 내내 케이는 카이토에게 매달려 끙끙거렸다. 카이토가 케이의 뒤통수를 달래듯 감쌌다. 케이가 품에서 울음소리를 냈다. 카이토는 그대로 케이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카이토는 케이의 축축해진 뺨과 콧잔등, 이마와 입술에 입을 맞추며 피 묻은 손바닥으로 케이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당황한 케이가 시선을 피해도 개의치 않고 입술을 밀어붙였다. 케이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고 쓸고 주무르는 손이 점점 조급해졌다. 카이토가 케이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케이. 케이. 케이. 케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이토가 케이의 허리를 붙잡아 제 앞으로 당기자, 가벼운 몸이 그대로 끌려갔다. 케이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카이토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카이토와 케이의 뜨겁고 축축한 뺨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케이의 눈꼬리에 다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카이토와 케이는 뒤엉긴 채 좁은 자취방을 뒹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케이를 품에 안고 카이토가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케이뿐인 것처럼, 혹은 눈앞의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처럼. 실제 그렇게 보였다. 케이는 눈을 감은 채 홀로 앉아있는 어둠 속의 세상을 상상하려 애썼다. 잘 되지 않았다. 카이토가 무척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런 온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카이토가 바르작거리며 단단한 가슴팍을 맞붙이자 케이는 허리를 비틀며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무엇을 부탁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카이토가 들썩일 때마다 흔들리면서 케이는 아주 오래 전에 카이토를 버리고 떠났던 일을 생각했다. 기억 속의 카이토는 상처투성이지만 어쩐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오히려 무너져 있는 것은 케이다. 케이는 피를 흘리면서 엉엉 운다. 카이토는 울지 않는다. 케이가 떠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케이는 자신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자신이 아주 오래 전부터 카이토에게 빚을 져왔다는 사실을, 카이토에게 무언가 잘못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린 시절의 나가이 케이가 고개를 젓는다. 틀렸어. 이 문제를 고칠 수가 없어. 카이토가 괜찮다고 한들 사라지는 일이 될 수는 없다. 오답은 케이였기 때문이다. 카이토에게 다가가서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카이토를 만나게 된 이상 케이는 완전한 비인간이 될 수 없었다. 카이토를 끊어낸다고 해서 비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카이토만큼이나 케이 역시 카이토를 필요로 했다. 케이는 카이토에게 또 다시 잘못한 이후에야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카이토가 케이를 바싹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케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케이는 혼자의 세상을 빠져나왔다.

 

29

너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상냥하기로 작정한 거지?

 

30

카이 오빠 얼굴을 오빠가 봤어야 했는데.

카이 오빠 표정을 오빠가 봤어야 했는데.

이 못된 놈, 그 얼굴을 봤어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겠지?

오빤 쓰레기니까.

 

31

너도 언젠간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32

“알고 있었던 거지?”

 

33

…고통스러웠어?

 

34

“…응.”

 

35

카이토와 섹스하면서 케이는 울었다.

 

36

다음 날 케이는 정상 출근했다. 복도를 거니는 동안 대다수의 의료인들이 그를 흘끔거리며 지나쳤다. 몇몇이 괜찮냐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케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괜찮아요”혹은 “문제없어요”라고 대꾸했다. 지극히 케이다운 반응이었으므로 케이의 대답을 들은 모두가 납득했다. 어제의 일이 케이를 무너뜨린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위치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떠들어댔고 그럼 동료들은 또 제각각의 위치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다른 동료들에게 떠들어댔다. 그 결과 점심시간 무렵엔 온 병원 사람들 전부가 케이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쥰페이는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는 탕비실에 들어서다 말고 쥰페이와 마주쳤다. 쥰페이는 커피를 타고 있었고, 케이 쪽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비꼬듯 중얼거렸다.

“몸은 좀 괜찮냐?”

케이는 허리가 아팠다.

“네, 괜찮아요.” 케이가 대답했다.

쥰페이는 케이를 돌아보았다. 눈동자가 형형했다. 케이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덤덤한 얼굴을 했다. 쥰페이는 한동안 케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고 혀를 찼다.

“미친놈이 참 많은 것 같아, 그렇지?”

쥰페이가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케이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는 쥰페이의 손을 응시했다.

“네, 뭐….” 케이가 말끝을 흐렸다. “이제 별로 상관없어요.”

“상관이 없으면 어떡해, 그 난리를 쳤는데.”

쥰페이가 커피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문제가 될 만한 새끼들은 여하튼 싹이 보여. 환자에게 집착하는 놈들은 다 병이 있어.”

“언제는 극진하다면서요?”

케이가 대꾸하자, 커피를 젓던 쥰페이의 손이 멈추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쥰페이가 입을 열었다.

“이런 문제 또 터지면 병원 평판도 나빠져. 조심해야지.”

케이는 쥰페이가 어떤 화제를 돌려 말하고 있는지 눈치 챘지만 그가 내린 낚싯줄을 물어줄 생각은 없었다. 케이는 쥰페이에게 대꾸하는 대신 찬장을 열고 인스턴트 커피봉투를 뜯었다. 쥰페이가 계속 떠들어댔다.

“나가이, 너도 명심해. 잘 새겨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잘라내고 관리도 해야 병원이 굴러가는 거야. 가족이든 친구든 구분 없이 다 잘라내고 프로답게 행동해야지.”

케이는 커피를 탔다.

“너는 꼭 잘 나가다가 한 번씩 삐끗하거나 이상한 사람한테 휘말리더라. 너 그거 처신 잘 해야 돼. 선배 조언 다 피가 되고 살이 돼. 병원이라고 뭐 다른 줄 아냐.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아. 좀 구린 일도 있고, 좀 말도 안 되는 일도 있는데, 그걸 네 선배들이 다 덮어주고 희생해서 네가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니까 잘 좀 하라고. 응?”

케이는 커피를 마셨다.

“그건 그렇고 쇼우 선배가 나중에 너 좀 보자더라. 수술 건으로 할 말 있단다.”

케이는 종이컵에서 입을 떼어냈다.

“선배가 왜요?”

“내가 아냐?”

쥰페이는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케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피차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은 건드리지 말죠.” 케이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왜, 남보다 못 한 사이라면서 네 손에 애미가 죽은 건 신경이 좀 쓰이든?”

“선배가 알 바에요?”

“알 바지, 씨발. 난 신경 쓰이거든.”

쥰페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르는 사람 백 명 죽어도 눈 깜빡 안 하던 주제에 아는 사람 한 명 죽으면 질질 짜는 게 바로 인간이야.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케이는 쥰페이를 노려보았다.

“제 선에서 정리할 거예요.”

“그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

쥰페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가이, 뭘 그렇게 쫄고 그래. 그냥 선배랑 가서 밥 한 번 먹고 와. 그럼 끝이야. 그렇게 뺄 거 없어. 선배가 알아서 다 해주실 거 알면서 왜 갑자기 둔하게 굴어.”

개소리다. 나가이 케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계산해보았다. 아마 쇼우는 케이를 개인실에 불러 몇 가지 사실이 ‘조율’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케이의 의사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쇼우는 당직실의 출입 이력과 수술실에 들어간 이름의 순서가 조금 조정되었다고 케이에게 통보할 것이다. 케이는 카이토의 어머니의 수술에 들어갔던 담당의가 될 것이고 쇼우는 보조의가 될 것이다. 쇼우가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는 행위는 권력으로 조작된 불유쾌한 사건 통보에 대한 긍휼이었다. 쥰페이도 겪었던 것이다. 쇼우가 쥰페이에게 처음 약물 조작을 지시했을 때, 쥰페이는 그에게 밥을 얻어먹고 나왔다. 적극적으로 반항하는가 아니면 가담하는가가 앞으로의 일들을 결정했다. 쥰페이는 후자를 선택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케이는 후자를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자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담당의가 바뀌었다는 말은 그 날 있었던 수술실의 모든 과실이 케이의 잘못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케이의 목에 줄을 채우겠다는 심보였다. 케이가 함부로 입을 놀렸을 때, 불이익을 받는 것은 오로지 케이뿐일 것이며 그들은 건사할 것이란 뜻을 이 모든 결정을 통해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얍삽하게 혀를 놀린 쥰페이가 머리를 굴린 쇼우나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이성적인 관점에서 그들은 충실히 자기보호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성적인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것은 사실 케이의 인생에서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를 도출했다. 대체로 그런 편에 속했다.

케이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대꾸했다.

“저를…먹이셨네요.”

쥰페이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다 말고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뭘 그렇게 말하고 그러냐.”

“이도저도 못 하게 만드는 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해요. 수틀리면 찌를 상대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 건 무척 안심되는 일이죠.”

케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약점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고,”

케이는 남은 커피를 흔들었다.

“있으면 언젠가를 위해 허를 찌를 만큼 구체적으로 모아두는 게 좋겠죠.”

케이는 고개를 들고 쥰페이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신나셨네요.”

“뭔 소리야.” 쥰페이가 이죽이며 커피를 들이키자, 케이가 말했다.

“저는 지금 쇼우 선배 라인이 해온 약물 비리 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순간 쥰페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31

개개인에겐 사형선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을 경험한다고 해서 느닷없이 왼쪽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근육질의 순환 기간이 기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지난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다. 심장은 제대로 팔만 km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혈관 곳곳으로 혈액을 순환시킬 것이고, 뇌도 제대로 동작하며 사물을 인식하고 상황을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그 순간을 지나기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내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드시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상처는 사랑을 상실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삶을 압도하거나 후퇴하며 온다.

에리코는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있는 카이토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 했다. 기억 속의 카이토는 나무 그늘에 앉아있고, 오지 않을 친구를 기다리며 고개를 쳐들고 있다. 에리코는 그에게 “그 사람은 오지 않아”라고 통보한다. 카이토는 울게 된다. 하지만 에리코는 카이토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매미소리가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에리코는 카이토가 상처를 받아 내는 소리를 듣지 못 해서 다행이라고, 그것을 들었더라면 자신 역시 분명 크게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이토의 울음소리야말로 에리코의 사형선고였던 셈이다. 요컨대 에리코의 공포는 누군가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때 동시에 우리 자신이 상처 입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에리코는, 누군가 울어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그것이 들리지 않을 만큼 요란하고 시끄러운 계절이 존재해야 한다고, 여름이어야만 한다고 반드시 생각하였다.

 

32

다음 날 오후 4시 23분 경. 귀를 찢어발기는 앰뷸런스 소리가 병원 입구를 울렸다. 응급실에서 대기 중이던 의사 셋과 간호조무사 전원이 밖으로 뛰쳐나와 구급차 앞에 대기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 한 명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시트가 온통 피로 흥건했다. 간호조무사가 산소 호흡기를 그의 입에 매달고 산소를 주입하면서 침대와 함께 달려 나갔다. 응급 대기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구급대원으로부터 침착하게 상황을 전달받았다. 병원 인근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가용 하나가 남자가 탄 오토바이를 정통으로 들이받고 도주했고, 그 결과 탑승자였던 남자에게 장 파열과 내부출혈이 발생해 쇼크가 왔다. 바닥으로 떨어질 당시 남자는 이미 의식불명인 상태였으며, 행인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발견하고 신고했다. 흔한 뺑소니 사고였다. 중상이었기에 남자는 이송되자마자 곧바로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신원조회가 있었다. 뺑소니가 벌어진 곳은 사각지대였기에 CCTV자료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토바이에 탔던 남자의 신원은 금방 파악되었다. 이름을 전달받은 나가이 케이는 돌고 있던 순회 진찰을 때려치우고 곧장 1층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자신이 그놈의 쇼우의 만찬을 거절해서 발생한 일인지 아니면 권력욕구와 자리보존에 급급한 쥰페이를 협박한 것인지를 저울질했고 그럼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현실성도 없고 서로에게도 지극히 멍청한 행동이니 이 모든 것들이 우연에 의한 사고라고 스스로에게 연거푸 중얼거렸다. 그러나 수술실 앞에 당도했을 땐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케이는 자신이 저질러 왔던 모든 과오를 눌러 담은 신음소리를 내며 대기실 의자 앞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카이토에게는 찢어진 장기를 봉합하고 부러진 뼛조각을 제거하는 응급수술이 시행되었다. 수술이 끝난 이후에는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의식회복을 기다리는 긴 시간이 이어질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카이토의 수술을 담당했던 동료의사가 내장 파열이 심해 장기 하나를 교체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출혈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장기기증이요? 케이가 마치 그 단어를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물었다. 동료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그래, 사실상 가망이 없지. 그건 카이토의 예고된 사망선고였다.

대기실을 나온 케이는 쥰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쥰페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케이는 쥰페이를 찾아가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갔지만 대신 쇼우와 마주쳤다. 쇼우는 케이를 보자마자 반갑게 두 팔을 벌렸다.

“나가이!” 그가 말했다.

“마침 할 말이 있는데 밥이나 한 끼 먹으면서 대화하지.”

케이는 말없이 쇼우를 응시했다.

쇼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응?”

“여기서 하세요.”

케이가 대답했다.

“개인실로는 안 가요. 여기서 하세요.”

쇼우는 케이를 빤히 응시하다 말고 히죽 웃었다.

“하긴, 뭐 그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네.”

쇼우는 케이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전에 들어간 수술 있잖아. 왜, 나가이 선생이 집도한 거.”

“…….”

케이는 쇼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거 보고서에 좀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감찰을 나온다네? 별 건 아니고 같이 수술 들어갔던 간호사 진술이 있었나 봐. 큰 일 아닐 테니까 어깨에 힘 풀고. 나가이 선생도 그냥 아는 대로 진술만 해.”

케이의 주먹이 동그랗게 말렸다. 쇼우가 케이의 뺨을 두들겼다.

“나중에라도 시간되면 밥 한 끼 하자고. 응?”

쇼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케이를 스쳐지나갔다.

 

33

여름이구나.

그러게.

 

34

케이는 1층으로 돌아와 중환자실 입구 앞에서 얼굴을 묻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케이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실감하였다. 병원에서 발생한 답안의 오류가 카이토뿐만이 아니라 케이라는 것, 혹은 케이뿐만이 아니라 카이토 역시라는 것을 케이는 깨달았다. 그들이 삭제될 예정이라는 데에 이견을 둘 수가 없었다. 세상은 거대한 문제집이고 사람들은 제각기의 문제를 풀어나가거나 서로의 문제에 간섭하는 법. 케이의 어머니가 케이에게 그렇게 했고 케이가 카이토에게 그렇게 했듯이. 그러나.

나가이 케이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게 둘까 보냐.’

 

35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알고 있어?

 

36

카이토는 침대에 누워 심전도 모니터에 일정한 심박 수를 띄우고 있었다. 케이는 거즈를 붙였음에도 가리지 못 한 상처를, 엉망진창이 된 카이토의 맨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카이토에게 벌어진 모든 좋지 않은 일들이 자신이 언젠가 카이토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일종의 계시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징벌 받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가. 잘못했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잘못한 쪽이 아니었나. 너는 삭제되어야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알려주고 정답을 고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역할로 충분하지 않았나.

케이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37

이상한 번호,

를 나가이 케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38

080으로도 090으로도 시작하지 않는 이상한 번호에 발신하는 동안 나가이 케이는 시선을 떼지 않고 눈앞의 카이토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전화는 그 누구도 받지 않을 지도 모르고 혹은 누군가 받아도 케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가이 케이는 어쩌면 전화가 걸릴 것이고 또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죄책감으로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방금 막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이토와 만났기 때문에 케이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가 물려준 어떤 마음들을.

누군가 전화를 받았으므로 케이는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음지와 양지의 구분이 사라진 어둠의 세계다. 케이는 그곳에서 홀로 남겨진 사람의 고통 따위를 생각하며 창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마주친 채 저기요,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것이 외도였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201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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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치이 «야망의 시대»
2차/old 2019. 10. 24. 19:18

댄스스포츠 만화 <볼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나오카 시즈쿠 x 히야마 치나츠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유명 개그맨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읊은 후 자서전에 한 번 더 인용한 것이다. 다자키, 라고 불리는 그는 흔히 말하는 개천의 용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어렵게 공부하여 대학을 나온 후, 어렵게 어렵게 대성공을 거둔 사람이라고 한다. 소년이여… 그것은 그의 책상에 항상 붙여둔 문구였다. 마법의 주문처럼, 힘들 때마다 중얼거리며 높은 대학을 지망하고 방송국 입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다자키는 멸치처럼 생겼고, 그의 개그코너에선 언제나 뚱뚱한 개그우먼이 함께 나왔다. 만담의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비가 온다. 둘은 차양 아래에 서서 하늘의 동향을 살핀다. 다자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일자형 우산이고, 그의 파트너 개그우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접이식 우산인데, 그녀의 우산은 고장이 났는지 좀처럼 펴지질 않는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서 둘은 기다리기를 관두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다자키가 자신을 ‘당연히’ 두고 갈 것이라 생각해 고장 난 우산을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다. 그 때, 다자키가 우산을 펼치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객석에서 사랑스러운 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 모습에 몹시 감동을 받은 개그우먼이 과장된 몸짓으로 빗줄기를 뚫고 다자키를 향해 돌진한다. 놀란 다자키가 피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몸집으로 인해 총알처럼, 우산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이 때 다자키의 뒹굴거리는 모습이라던가, 바둥거림이라던가, 그런 일들이 아주 심혈을 기울여 극대화 된다. 객석도 시청자들도 뒤집어지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우산에 남겨진 건 개그우먼이고, 쫄딱 젖은 건 다자키가 되는 것이다. 만담은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가, 이런 식으로 웃겼다가, 이런 식으로 막을 내렸다. “아키코는 저의 좋은 파트너라고 할 수 있죠.” 유명 잡지사 인터뷰에서 다자키는 그렇게 말했다. 좋은 파트너라. 그게 뭘까? 그것은 분명, 연인이나 부부 같은 거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화면 속의 다자키는 다음 질문에서 펄쩍 뛰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아키코는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죠.” 아시잖아요, 다들? 황급히 붙이는 뒷말에서 나는 그의 저열함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어서 TV를 껐다. 아홉 살 때다.

 어쨌든,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는 변함없이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디오가 방송되고 자서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무렵, 동급생 남자아이들 모두가 그 문장을 입에 달기 시작했다.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를 꺼내 칼싸움을 하다가도, “소년이여!” 담장에 오줌을 갈기다가도, “소년이여!” 주번을 농땡이 치고 도망갈 때도, “소년이여!” 그 해의 야망에선 치졸한 냄새가 났다. 얼굴을 찡그린 채, “그 바보 같은 말 좀 그만 할 수 없어?”라고 면박을 주면, 으레 이런 대꾸가 돌아왔다 : 사실 부럽지? 치나츠는 소년이 아니니까!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그렇다. 나는 소년이고 싶었다. 소년들은 하잘 것 없다. 세계의 소년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소년들에게 한정된 사항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게 다 다자키 때문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무엇이 야망인 줄도 모르는 소년들에게 넘어가버린 세상의 어떤 가치가, 그런 식으로 차차 망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다소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자키는 여러모로 저열했다. 목소리 큰 멍청이들은, 세상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좋은 것들을 어떤 집단의 것으로 한정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야망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누구만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의 것이 되어버린 이상, 내가 어찌해볼 틈도 없이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가 되어버린 것이다.

 멍청이들의 주장은 오래 가지 않는다. 역사책을 보건데 길어도 한 세기를 넘는 일이 없다. 시대는 영리해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 반드시 그런 유물들을 처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빼앗긴 야망 역시 언젠가 모두의 것으로 돌아올 텐데,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한 세기까지는 너무 길다. 일본의 소년들이 마구 망쳐서 돌려준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선, 제대로 보존할 수 있는 소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소년들을 믿을 수는 없으므로, 그렇다면 그 중대한 일을, 내가 해야겠다.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소년이 되는 수밖엔 없지 않는가. 소년이 되고 싶다…… 그렇게 믿던 때도 분명 있었다. 지금은 믿지 않는다.

 내 책상에는,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가 높게 붙여져 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치나츠는 소년이 아니지만,” 이라고 아버지가 머쓱하게 말하며 회사에서 얻어온 슬로건을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처음에는 그대로 그것을 걸고 있었다. 소년이여, 를 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치나츠, 부럽지? 넌 소년이 아니니까!’ 나는 혀를 깨물었다. 당연하지. 너희에게 주기엔, 야망이 너무 아까워죽겠어! 아홉 살의 나는, 다자키가 일본 전역에 뿌려놓은 그 포자들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유순한 성격이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세계에 대한 근심을 보다 덜어놓고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만 되었어도, 나는 청소도구함 빗자루로 먼지를 날리는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담장 앞에서 바지춤을 붙잡는 녀석을 무안하게 하거나, 주번을 도망간 녀석을 두들겨 패지도 않았을 텐데. 아마도… 그랬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역시 망아지인 편이 좋았다. 

 그게 좋다.

 

 야망을 쫓는 자

 그 해에는 우후죽순 되새김질 되는 캐치프레이즈만큼이나 일등이 많았다. 산수 일등, 받아쓰기 일등, 문학, 수학, 과학 부문의 우수자들… 사실 어느 해에든 일등은 숱하고 줄어드는 법 없이 자꾸 늘어나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댄스만 해도 그렇다. 아홉 살 때만 해도 크고 작은 현 대회를 제외하면 JDSF 그랑프리와 전국 선수권 대회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도민 대회라던가, 모금 행사를 위해 제단에서 설립한 특수 대회라던가, 여러 가지가 있다. 덕분에 중학교 때는 나도 작은 대회에서 몇 번 시상대에 올라가 보았다. 파트너인 아키와 틀어지는 바람에 모두 나쁜 기억이 되었다고 화를 낸 적도 있지만, 결국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나중엔 곱씹게 되었다.

 하나오카 시즈쿠와 효도 키요하루를 본 것은 바로 그 아홉 살 때다. 도민 대회가 벌어진 작은 볼룸(ball room)장에 누구보다 꼿꼿하고 우아하게 서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플로어로 들어오는 그 애들을 보았을 때, 아…… 저 아이들이 일등을 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애쓰지 않아도 예전부터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나는 눈도 좋고, 감은 그보다 더 좋다. 센스라고 생각하고,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 덕분에 늘 즐겁게 춤을 출 수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높은 곳에 도달한 누군가들을 마주하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쉽게 괴로워진다. 어중간한 우수함 따위 노력하면 재칠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높은 곳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굉장한지 백 퍼센트 깨달아버려서, 노력이나 일정한 센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해버리고 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일등이었다. 사실, 언제나 꼭대기에 있었다. 과거형과 미래형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현재형의 “우수함”을, 그 애들은 늘 가지고 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앗, 야망이 아깝지 않은 소년을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찾아내고 말았다니, 정말 이상한 말이다. 아쉬웠냐고? 물론이었다.) 효도 키요하루는 굉장히 크고 빠르게 움직였다. 공들이지 않아도 그렇게 보이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쓸모없는 힘을 쓰지 않아서 과하지 않게 느껴졌다. 노력은, 노력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겁고 진중한 것인데, 센스는 그렇지 않다. 센스는 가볍고 경쾌하며, 부드럽고 온화한 것이다. 그리고 효도 키요하루의 춤은 때때로 백 퍼센트의 센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노력을, 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는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하는, 그것을 앞서서 꿈틀거리고 싶어 하는, 그런 힘이 키요하루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맹수 같았다. 다 잡아먹어버리고 싶어서, 다 잡아먹은 주제에, 무언가를 더 노리고 있었다. 스탭을 밟다가 그를 마주친 순간, 나는 하마터면 홀드를 놓칠 뻔 했다.

 ‘잡아먹힌다!’ 

 …고 생각했던 그 때, 아키가 내 발을 꾹 밟아 눌렀다. 그 애는 겁을 먹고 있었다.

 ‘치이, 뭐 하는 거야!’

 벼락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아차, 싶었다.

 아키가 나보다 더 겁을 먹고 있었기에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췄었는지, 그 날의 기억은 도무지 선명하지가 않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엔트리 넘버 17번이 가장 마지막에 호명되었던 순간이다. 하나오카 시즈쿠와 효도 키요하루는 단상 위에 올라서서 객석을 바라보았다. 효도의 표정은 다소 지루해보였다. 그렇게나 멋진 춤을 췄으면서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게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효도의 표정에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오카 시즈쿠가 고개를 숙였을 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나오카였다면 완전히 겁을 먹었거나, 압도당했거나, 혹은 효도를 ‘버텨냈다’는 것에 다소 우쭐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닌 하나오카 시즈쿠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오카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쫓고 있었다. 야망을… 쫓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자를,

 가지고 자꾸 멀어지는 자를,

 효도 키요하루를,

 쫓고 있었다.

 어쩌자고 나는 고작 아홉 살에, 그런 엄청난 것을 시선으로 처음 획득해버린 것일까.

 춤을 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그 날, 집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온 나는 이 세상에서 야망을 가져간 누군가들을 끊임없이 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비디오를 보았다. JDSF 그랑프리 플로우 위에서, 리더의 움직임을 쫓는 파트너들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무수한 하나오카 시즈쿠들이 거기 있었다. 야망을 돌려줘!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찔해졌다. 방바닥으로 드러눕자 시선이 핑그르르 돌면서 책상 위에 붙여둔 캐치프레이즈가 눈에 들어왔다. 음악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벌떡 일어나게 됐다.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그것을 떼어냈다. 화이트로 잔뜩 힘을 주고 벅벅 그어서 지웠다. 소년(少年)을, 少를 가로지르는 그 막대기 하나만 지우면 누구든 괜찮았는데. 어째서 그것을 한 세기동안이나 기다리려고 했을까……. 아니, 한 해(年)도 채 걸리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데. 그랬을 텐데.

 깔끔하게 지워진 자리에, 나는 매직으로 힘주어 썼다.

 소녀(小女)여, 야망을 가져라!

 캐치프레이즈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그 날은 하나오카 시즈쿠의 꿈을 꾸었다.

 

 파트너

 코모토 아키라는 동급생으로, 아홉 살에 댄스를 시작한 나의 파트너다. 같이 시작한 것은 아니고, 동네 유일의 댄스홀 강습에서 마주쳤다. 아버지의 권고로 시작한 것이라 진지하게 임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우아하고 예쁘잖아, 잘하면 여자력 있어 보이고. 그렇게 말하며 아키는 바비인형 같은 웃음을 지었다.

 주니어로 텐페이 배에 출전할 기회가 있었을 때, 우리를 제외하곤 엔트리를 희망하는 아이들이 없어서 그녀와 조를 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쭉 연습에서도 홀드를 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파트너가 되었다. 효도-시즈쿠 커플을 마주친 건 우리의 노비스 스탠더드 전이 있은 후 바로 그 다음 경기에서였다. 막 아마추어를 벗어나 랭크를 달고 들어온 우리에게 그들의 존재가 자못 크고 묵직하게 느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재미로 하는 것뿐이니까, 하고 코웃음을 치던 아키가 연습 내내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던 건 분명 그 때가 처음이었다. 치이, 좀 더 잘 추고 싶어. 열심히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아키는 물었다. 우리는 그 경기에서 입상은커녕 순위권 근처에 랭크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아주 프로의 세계인 것도 아니었는데, 아주 프로인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성적은 자신감도 자존심도 짓눌렀다. 그 애의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손을 잡으며, 나는 하나오카 시즈쿠를,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도 고개를 숙였던 그 애를 떠올렸다. 글쎄.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쫓아가봐야지.

 아키는 솔직히 말해서, 실력이 좋지 않았다. 아주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아니, 때때로는 나빴다. 키도 작았고, 손발도 짧았다. 그 애와 움직이려면 보폭을 평소의 삼분의 일만큼은 줄여야 했다. 아키에 맞춰 리드를 하는 건 꽉 끼는 옷을 입고 팔을 휘두르는 것처럼 불편했다. 강습소에 좀 더 크고 널널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키 같은 거, 당장에 벗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 당시의 나는 막연히 조급하기만 해서, 눈앞의 파트너를 따라가기보다 스스로의 실력을 발휘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하나오카 시즈쿠는 착실히 랭크를 올려가고 있었다. 하나오카 뿐만이 아니다. 하나오카들, 세상의 무수한 하나오카들도 마찬가지다. 야망을 돌려달라고 하기엔, 나 역시도 믿음직스럽지 못 해서 분했다. 빨리 나가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플로우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 전장을… 하나오카 시즈쿠를, 다시 본다면.

 그 애가, 더는 분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면,

 그 순간을 반드시 같은 플로우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급해졌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아키는 분명 나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와 부딪혀야만 하는 파트너였으니까. 때로, 춤은 섹스 같다. 어쩌면 섹스보다 더 굉장한 섹스일 지도 모른다. 몸도 마음도 격렬하게 부딪히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움직이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래서 흔히 파트너 사이를 부부사이 혹은 결혼에 견주는 걸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나라도 아키가 다른 파트너와 춤을 춘다고 상상하면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키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좋은 부부 사이는 아니었다.

 중학교 내내 우리는 많이 싸웠다. “무섭단 말이야!” 어느 날 연습실에서 아키가 내 손을 뿌리쳤다. 그 무렵의 나는 아키가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움직이고 싶은 곳으로 그녀를 힘껏 휘두르곤 했다. “치이는 너무 난폭하고 제멋대로 굴기만 해. 여성스럽지도 않고, 상냥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리드만 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키는 화를 낼 때도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할퀴는 법이 없었다. 상대를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비꼬거나 조롱하는 투로 치부를 거침없이 찔러댔다. 그 애는 몸을 섬세하게 움직이지는 못 했지만, 마음을 섬세하게 움직일 줄은 알았다. 연약한 부분을 금방 알아차리고 사납게 뜯어냈다. 내가 몸으로 그녀를 휘둘렀다면, 아키는 마음으로 나를 휘두른 셈이다. 불공평한 싸움 같은 거, 우리 사이엔 없다. 어차피 엔트리를 하면 여자-여자 파트너는 대체로 우리 둘뿐이었다. 둘뿐인 세상이다. 소년 따위가 없어서 오히려 그 때는 편했다. 죄의식도 두려움도 없이 서로를 힐난하고 물어뜯을 수 있었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는 중이었다. 아키가 비웃었다.

 “설마 본인이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니지?”

 우리는 으르렁거리면서도 홀드 자세를 취해 손을 붙잡았다.

 “치나츠, 뭐라도 된 듯 굴지 마.”

 “어머, 그래?”

 나는 터뜨릴 것처럼 그녀의 손을 쥐고 거칠게 허리를 꺾었다. 악! 소리 없이 아키가 내 품에서 고통스러워한다. 눈으로 놓치지 않고 조소했다.

 “어차피 네가 이 랭크로 엔트리 할 수 있는 건 나 덕분이면서.”

 삐걱거리는 몸으로 아키가 나를 쏘아보면서 입술을 물었다. 솜씨 좋게 휘두르는 사람이 없으면 아키는 바보 같이 움직인다. 짜리몽땅하고 형편없다.

 “으스댈 거면 실력으로 눌러봐, 아키라.”

 그리고 난 분명 아키를 휘두를 수 있는 굉장한 리더였다.

 늘 이겼다.

 아키는 고교생으로 진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내게 팔로우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내가 부탁한 적도 있지만, 거절했다. 엔트리를 할 땐 늘 내가 선수 이름을, 그리고 아키가 그 옆에 파트너 이름을 써넣었다. 선수 번호를 등에 달고 플로우를 누비며 아키를 휘둘렀다. 다음 히트를 준비하면서 매일 같이 싸웠다. 아키가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신장의 간소한 차이 같은 건 파트너 댄스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화를 냈다. 그럼 아키는 언젠가, 내 앞에서 지어보였던 그 바비 인형 같은 반들반들한 미소로, “어머, 싫다. 치이, 이런 식으로 내숭 떠는 거 진짜 성격 나빠 보이는 거 알지? 나도 내가 키가 작은 것쯤은 자각하고 있는 걸.”이라고 대꾸했다.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을 보면, 치가 떨리면서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어도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을 다 알게 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원하는 부분도, 원하지 않는 부분도 춤을 추다보면 전달된다.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다음 히트에서 플로우로 나왔을 때, 아키는 말했다. “짜리몽땅한 사람이 어떻게 키 큰 사람을 휘두르겠어, 안 그래?” 홀드를 잡은 아키의 손에서 짙은 복수심이 느껴졌다. 춤을 추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이 나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감각은 비에 젖는다거나,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피부를 통과하지 못 하는 외부세계의 유물들과는 달리, 감정은 내부세계로부터 왔으므로 내부세계로밖에 이동하지 못 하고 핏줄을 따라, 심장을 따라, 목구멍으로 숨구멍으로 뇌로 흘러들어온다. 언젠가부터 그 마음이 마치 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만다. 휘젓고 지배한다. 아키는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넌 내가 어디 쪽으로 가던 네 멋대로 출 거잖아.

 그리고 춤이 끝날 무렵, 나는 믿어버리고 말았다.

 맞아. 너를 휘두르는 감각이 좋아.

 나는 그 날, 아키에게 졌다.

 

 Channel

 좋은 파트너라. 그게 뭘까? 그것은 분명, 연인이나 부부 같은 거겠지…….

 “아니요, 아키코는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죠.”

 “으스댈 거면 실력으로 눌러봐, 아키라.” 

 아시잖아요, 다들?

 “치나츠, 뭐라도 된 듯 굴지 마.”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치이, 좀 더 잘 추고 싶어. 열심히 하면,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아닌 하나오카 시즈쿠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어서 TV를 껐다.

 늘 이겼다.

 

 타타라

 고교생을 준비할 무렵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키가 새 파트너를 구해서, 나 역시도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아키를 비난할 수는 없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고교생이 된다는 것은, 주니어 그랑프리를 졸업한다는 뜻이다. 설령 우리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함께 엔트리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춤을 가능한 오래, 멈추지 않고 추고 싶다면, 플로우로 돌아가고 싶다면, 새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소년이 필요하다. 분하지만, 춤의 세계에도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맥락의 힘이 존재한다.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키 덕분에 의식적으로 자각을 미루고 있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춤을 추면서 ‘파트너를 찾는다’는 개념을 실감해본 적이 없다. 아키라가 아닌 다른 사람과 춤을 춰야 한다는 불안도 분명 존재했지만, ‘정말 댄서가 되는 구나…….’라는 두근거림으로 잠들 수가 없었다. 모순적이고 납득 불가능한 질서로 유지되는 세계였기에, 모순과 납득 없는 일들을 겪게 되는 자신이, 세계에 제대로 편승하고 있구나, 하고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첫 맞선을 잡은 날, 몇 번이고 잠들지 못 해 자리를 벅차고 이불 밖으로 나왔다. 책상 위에 높게 붙은 캐치프레이즈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거울 앞을 서성거리다 씩 웃어보았다. 익숙하고, 어딘지 기분 나쁜,

 바비 인형 같은, 미소였다.

 나는 운이 나쁜 게 아니다. 센스도 있고, 눈도 좋고, 팔다리도 길다.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우아하게 걷는다. 힘들이지 않고도 날렵하게 다리를 뻗고, 리듬에 빠르게 반응한다. 누구나가 나를 돌아보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시선에 대한 욕심도 있다. 나는 춤을 출 때 완벽해진다. 아름답기 때문에, 분명한 자신이 있다.

 그래서 파트너를 찾는 게 더 힘들었다. 효도 키요하루 같은 소년은 많지 않다. 소년들은, 일본의 소년들은 자존심이 쓸모없이 센 주제에 실력은 형편없었다. 자신이 우습게 보일까 봐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신경 썼다. 춤에 도무지 집중하지 못 한다. 어떤 소년은, 심지어는 스탭 도중 내 발을 밟기도 했다. 그들은 우습게 여기지 않아야 우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진지하지도 못 하면서 실력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들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야망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비로소 야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진작 프로의 길을 찾아 떠났고, 나는 이제 막 프로가 되기 위하여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포기하기 않으려 애썼지만, 마지막 맞선 상대가 탱고 도중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웃는 순간 모든 걸 관두기로 결심했다. 겁쟁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가장자리에서조차 이런 세계라면 중앙으로 나아갔을 때 버텨야 할 부조리함이 두려웠다. 동시에 그런 세계에조차 들어가지 못 하고 헤매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내가 헤매는 건, 이런 세계기 때문이 아닌가. 여자끼린 엔트리 할 수 없고, 여자에겐 등번호를 주지 않고, 선수로 등록되지도 않고, 요컨대 소년이 없으면 야망 같은 거 꿈꿀 수도 쫓을 수도 없는, 이 세계가 오히려 동떨어진 게 아닌가.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는 이미 지나갔는데. 지나갔는데도.

 ‘그렇다면 댄스 같은 거, 촌스럽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관뒀다.

 방학 내내 춤추지 않는데 성공한다.

 후지타 타타라와 만난 것은 고교생에 진학한 첫 날로, 내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파트너가 되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파트너로 삼을 생각조차 없었다. 나는 춤추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리고 있었을 때였기 때문에, 그 세계가 내 기분을 풀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온몸으로 시위하고 있었다. 봐, 그만두기엔 아깝지 않아? 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나중에 타타라가 내게, “사실 치이가 경험자라는 걸 알았을 때,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놓치고 싶지도 않았어. 파트너가 간절해서라기 보단, 좀 더……. 아깝다, 고 생각하게 되었던 마음 때문이라고나 할까.”라고 실토했을 때, 나는 결국 댄스가 나의 것이고 그 세계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음을, 그러니까 나 역시도 부정하거나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아키라 때와 똑같이, 그저 어쩌다보니 파트너를 맞이하게 된 거라고 생각했지만, 타타라가 그렇게 말해준 후로는 진심으로 이 아이와 댄스를 하자… 고 매순간 다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자주 부딪혔지만, 타타라는 좋은 애다. 미련하기도 하고, 또 미련하기 때문에 낯설 만큼 강해지기도 한다. 댄스를 우습게보지 않아서 초심자임에도 결코 우습게 보이지 않는다.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 역시 야망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그렇게 느껴진다.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다루거나 획득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은 조금 불만이다. 겨우 맞춰갈 상대를 찾았는데, 아직 다가가야 할 세계가 너무 많이 남은 것이다. 일본의 소년들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효도 키요하루처럼 “발휘되는 천재”도 아닌 그가 나를 어떻게든 다뤄보려고 할 때면 언짢아서 심술을 부리고 싶다. 그의 리드는 지배보다 권고에 가까워서, 응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응하기에도 시원찮은 느낌이 있었다. 타타라 본인은 그것을 실력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HSDA 효도 소셜 댄스 아카데미(조금 억울하다. 어째서 타타라는 이런 사람들과 가까운 거야?)로 자진해서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타타라의 억지가 있기는 했지만, 시즈오카 그랑프리에도 엔트리 했다. 한 달 전에 막 D급을 받은 사람치곤 너무 조급하다고 느꼈다. (심지어 마리사 선생님은 말리셨는데도!)

 그래도 타타라가 그렇게 하자, 고 하면 따라주게 된다. 왜일까……. 그것은 아키와 같고 싶지 않은 내 자신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 아이가 조급해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휘둘리다 편할 대로 손을 놓아버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타타라의 억지는 기분 나쁜 느낌이 아니라 기껍게 따라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타타라가 좋으니까 파트너로서 가능한 만큼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타타라에게 집중해버리고 만 것이다. 스스로의 조급함을 잊고 타타라의 조급함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었다. 하나오카 시즈쿠의 분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그 무렵의 나는 거의 잊고 있었다. 팔로우가 어렵지 만도 않을 때까지. 이 세계가 어렵지 만도 않을 때까지.

 어려워지지 않을수록 잊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길 만큼은 못 했다.

 

 카루이자와

 하나오카 시즈쿠를 다시 마주친 것은, 카루이자와에서였다. 첫 그랑프리를 엉망으로 마친 후 떠난 합숙 훈련이었다. 하나오카는 거기 있었다. 독일에 있는 줄 알았는데.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나오카의 말은 미묘하게 나를 고양시켰다. 먼 곳으로 자꾸만 나아갈 것처럼 보여도, 결국 우리는 언젠가 근원점으로 돌아온다. 쉬고, 적당히 먹고, 실력을 키운 후 다시 날아간다. 세상 모든 만물이 ‘어쩔 수 없이’라도 닮은 점이 있다면 우리는 철새를 닮았을 것이다. 하나오카의 둥지가 일본이라서 감사했다. 만약 그녀가 해외 선수였고, 그것도 가까운 한국이나 중국 같은 곳이 아닌 유럽, 영미권 국가에서 왔다면 나는 애초부터 우리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실감하고 오기조차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오카를 만만하게 본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엔 많은 캐치프레이즈가 있을 테니까. 그것뿐이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방으로 돌아갈 무렵, 하나오카가 따라왔다. 얇은 원피스 안으로 희미하게 실루엣이 비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복도 끝만 보았다. 무슨 말이 좋을까. 걷는 내내 생각하다가, 역시 춤 이야기가 좋겠다. 하고 말을 꺼내려던 참에 하나오카가 먼저 말을 붙였다.

 “그랑프리 예선 두 종목에서 올체크를 받았다는 소리 들었어.”

 “아…….”

 나는 당황해서 조금 삐질거렸다.

 “응, 그렇지. 마리사 선생님은 나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타타라가 원했어.”

 “나가지 말라고 하셨구나.”

 하나오카는 무언가 납득한 듯 음,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데도 나갔다니, 타타라는 가끔 무모해지는 면이 있네.”

 “그래서 종종 말려들고 말아. 싫은 기분은 아니지만 제멋대로 일을 벌였다면 그에 응해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하나오카에게 타타라가 저지른 어이없는 실수를 이야기했다. 한 종목이 더 있는 줄도 모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만 있었던 일에 대해서다. 이름이 잘못 등록되어 타타라가 아니라 요시요시가 되어버린 것도, 제멋대로 끌고 간만큼 제멋대로 춤을 추다가 멍청하게 멈추어 섰던 것도, 실격처리 되어 대회장을 나설 때조차 얼이 빠져있었다는 것도. 하나오카가 중간부터 웃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남몰래 안도했다. 하나오카를 무서워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마리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빌려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승하지 않으면 출전의 의미가 없는 거니까.”

 내 이야기처럼 으스대기 시작하니 목소리가 과장되어 흘러나왔다. 아마추어 톱의 파트너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평소의 텐션보다 훨씬 고양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리사 선생님이 마지막 기회를 주신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럼 치나츠는 다음 경기에서 꼭 우승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니까!”

 방은 깔끔하고 넓었다. 시트를 벗겨내는 동안 하나오카는 장을 열고 시트를 차례로 개어 넣었다. 이제 나는 타타라에 대해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진심은 아니었고, 투정에 가까웠다. 반은 농담이었다.

 “지금 루틴은 오래 췄으니까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타타라는 기분에 따라 댄스가 바뀔 때도 있고 해서…….”

 일체감에 대한 것이다. 타타라는 나보다 춤을 못 춘다. 못 춘다, 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지극히 단순하게 실력과 체형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경험에 있어서는 타타라나 나나 거기서 거기였고, 견줄만한 차이는 없다. 내가 팔로우 경험이 없어서, 안 그래도 리드 경험이 적은 타타라와 삐걱거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내가 타타라에게 백퍼센트 응해주지 않는다. 위로 올라갈수록 심사는 까다로워 질 텐데, 타타라는 여전히 기분에 따라 나만큼이나 제멋대로 군다. 그럴 때면.

 “불안해.”

 “응, 응. 리더가 멋대로 춤추면 파트너는 곤란하지…….”

 하나오카는 나의 칭얼거림은 건성으로 달래는 것 같으면서도 문제를 적확하게 지적했다.

 “‘리더의 홀드 범위 안에서 얼마나 표현할 수 있느냐’가 파트너의 실력을 가르잖아.”

 뜨끔, 했다. 난 그렇겐 못 한다. 하지도 않았다. 실력보다는 성격의 문제다. 빠르게 대답하지 못 하는 나를 등지고 섰던 하나오카가, 소리 나게 장문을 닫았다. 쾅,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나오카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얼굴을 했다. 장문에 기대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커플 사이의 일체감을 추구하는 건, 댄스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일 거야.”

 나는 갑자기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응.”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지…….”

 그 날은 결국 하나오카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게 되었다.

 부끄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타타라와 싸우게 되었다. 대회는 다가오는데 바리에이션은 고사하고 족형 연습부터 난관이었다. 타타라는 많이 조급해하고 있었고, 조급한 만큼이나 빠르게 늘었다. 타타라의 조급함에 맞추어 춤을 추던 나는 어느 순간 타타라의 갈피를 잡지 못 하게 되어서, 자꾸만 어긋났다. 팀워크는 최악이었다.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싸웠다. 하나오카도 거기 있었다. 부끄러워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커플 사이의 일체감을 추구하는 건, 댄스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일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 영원의 테마를 완성하기는커녕, 일체감조차 추구하고 있지 않았다. 타타라가 미웠다. 타타라가 미웠다. 정말 미웠다. 그렇지만 정말 미운 것도 아니었다.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못 하는 건 비겁하다. 제대로 마주보고 있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도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있었다…….

 합숙이 중간으로 접어들었을 무렵부터, 나는 타타라와 춤을 춰주지 않았다. 타타라는 필사적이었다. 어디든 따라오며 커플 연습을 하고 싶다고 졸랐다. 어떻게든 기분을 내거나 풀어보려고 애써주었지만, 문제는 타타라에게만 있는 게 아니어서 그만두었다. 타타라가 이런 식으로 내게 맞춰주려고 하는 것에 화가 났다. 우습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내 팔로우를… 믿지 않는 것처럼 굴면서 본인의 춤에도 확신이 없어서,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타타라. 그런 주제에 조바심을 내면서 어떻게든 내가 응해줬으면 하는 것이 보인다. 한 번 그렇게 멋대로 끌고 가서 어처구니없이 실격을 당해놓곤,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타타라를 믿기 이전에 내 자신을 믿지 못 하게 되어서, 설령 응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응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타타라에게 진지한 만큼이나 제대로 부딪히고 싶었다. 형편없이 추면, 보이게 될 테였다. 하나오카는 스튜디오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춤을 추지 않을 때마다 매번 보고 있었다. 타타라를, 보고 있었다.

 ‘분하지만, 네가 잘해야 한단 말이야, 타타라!’

 타타라가 잘하지 못 하면 내 자신이 ‘보여지지’ 않는다. 댄스는 그래서 치사하다. 그래도 그 치사함 속에서조차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결코 보여지지 않을 세계에서, 나는 춤을 추고 있다. 보이고 싶다. 나 역시도 춤을 추고 있노라고 모두에게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를 봐줘. 봐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춤추고 있는 내가, 타타라만큼이나 보여 질 수 있다면.

 소녀여, 야망을 가져라!

 그러니까, 내내 상상해본 그림이 있다. 나는 어쩐지 무엇이든 불평하고 있고, 불평하지 않는 하나오카에겐 아마추어의 정상급인 선수가 리더로 서있다. 하나오카를 쫓기 위해선 뒤쳐진 타타라와 앞서가는 효도를 성취해야한다. 어째서 그런 일이? 타타라는 답답하고 효도는 까마득하다. 둘 다 어려운 벽이고 난관이다. 투덜투덜. 투덜투덜거리는 것이다. 그럼 갑자기, 하나오카가 쾅, 문을 닫으며 팔짱을 낀다. 나를 보지도 않고 말한다. 타타라는 가끔 무모해지는 면이 있네. 그리곤 뒤이어 묻는다. 히야마, 넌 어디쯤 왔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한다.

 하나오카 시즈쿠와 춤을 출 기회가 있었다. 타타라와의 팀워크가 완전히 붕괴되어서, 따로 연습을 하고 있을 때다. 각자 섀도 연습을 하다말고 하나오카가 다가와 내 어깨를 만졌다. 멀리서 볼 땐 날씬하고 부드러워 보였는데 직접 내려앉은 손은 단단하고 제법 묵직한 감이 있었다. 긴장으로 동작이 뻣뻣해졌다. 하나오카는 내 어깨를 주무르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여기선 이렇게 하는 편이…….”

 손이 미끄러지듯 선을 훑다 말고 멈추어 섰다.

 “좋아…….”

 시선이 마주쳤다. 곧 천천히 떨어지면서 손의 감각이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좋아.”

 그리고 거울을 통해 하나오카를 보았다. 그러자 하나오카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 속의 하나오카는 여섯 발자국도 넘게 떨어져있었다.

 “고마워.”

 그 뒤에도 우리는 종종 손을 잡거나 바싹 붙어서 춤을 출 수 있었다. 섀도 연습에선 어김없이 하나오카가 자세를 봐주었다. 힘주어 누르거나 미끄러질 때마다 거울을,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오카를 보았다. 이렇게 가까우면 안 돼, 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좀 더 멀리 있어야만 할 것 같단 말이야. 다시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이렇게 나에게 오면 안 돼.” 그러니까,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줘.”

 억지인 건 나도 안다.

 

 혼자의 세계

 히야마, 그게 뭐야? 하나오카가 시선으로 물었을 때, 나는 트렁크를 뒤지고 있었다. 옷가지들 사이에 누렇고 퀴퀴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조차도 모르는 물건이었다. 티와 속옷을 한쪽으로 치워내자 모습이 드러났다. 화이트로 조잡하게 지워놓은, 그 해의 빌어먹을 슬로건. 소년이여, 아니 소녀(小女)여, 야망을 가져라!

 “악, 아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황급히 옷을 주워 넣는데, 하나오카가 무릎을 접고 앉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별 거 아니야, 라고 조금 둘러댔다.

 “책상에, 붙어있던 건데, 댄스 합숙 훈련이 있대서… 응원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 …아빠는 이걸 굉장히 좋아하거든.”

 “히야마가 만든 거야?”

 하나오카는 캐치프레이즈를 빼내어 즐겁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화이트로 긋고 매직으로 쓴 걸 손가락으로 훑으며 후후, 웃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아니… 왜 있잖아. 하나오카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유명했던 개그맨.”

 “아, 알아. 확실히 다자키, 라는 이름이었지. 유명한 코너를 했다고 들었어.”

 “그래, 그거야.”

 “아……. 알아들었어.”

 하나오카가 턱을 괴고 슬로건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즐겁다는 눈치였다.

 “캐치프레이즈, 그 해에 이런 슬로건으로도 나왔던 거구나. 정말, 희미했는데 다시 기억났어. 맞아, 그런 캐치프레이즈도… 있었지.”

 “주변 남자애들이 다들 꽥꽥거리며 읊어 대서 난 싫었어.”

 “응, 응. 알아, 그 기분. 어째서 소년인 걸까, 라고 생각했지.”

 하나오카는 다시 한 번 후후, 웃었다.

 “그래서 히야마는, 소녀여, 로 고쳐버린 거구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라서 어색하게 웃었다. 한쪽 입 꼬리만 성공적으로 올라갔다.

 “응, 분해서 말이야…….”

 헤집어놓은 옷을 정리하는 동안, 하나오카는 계속 슬로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히야마는 그래도 다자키의 팬이었구나.”

 나는 의중을 몰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나오카는 나를 보고 있었다.

 “고쳐서라도 슬로건을 걸어놓았으니까. 코너, 재미있었나봐.”

 “본 적 없어?”

 “TV는 댄스가 아니면 잘 안 봐.”

 “형편없어. 하나도 재미없어.”

 얼굴을 찡그렸다. 빗소리와 우스꽝스러운 우산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팬이라서 걸어놓고 있던 건 아니야.”

 “어떤 점이 형편없었는데?”

 나는 하나오카를 바라보았다.

 “그 코너엔 늘 함께 나오던 개그우먼이 있어. 누군지 이름 기억해?”

 “음…….”

 하나오카는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 어렴풋하지만 기억 안 난다.”

 “응, 모두가 그래.”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점이 형편없어.”

 하나오카는 동조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하나오카의 손에서 누렇고 구깃구깃한 슬로건을 빼냈다. 접어 넣는데, 하얗고 단단한 손이 시야의 정중앙으로 들어왔다. 내 손등을 덮었다가 약하게 쥐었다.

 “히야마는, 그게 분해서 고친 슬로건을 걸고 있던 거야?”

 하나오카를 가까이서 볼 자신이 없었는데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나는 전등에 비쳐 희미하게 반짝이는 하나오카의 매끈매끈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기억하려고 그랬어.”

 나는 나머지 한 손으로 내 손등을 덮은 하나오카의 손등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눈동자가 새까맣고 빛을 받아 윤기로 반들거렸다. 이런 얼굴로 분한 표정을 짓고 야망을 쫓는다. 그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잊지 않았어.”

 하지만 난 분명 하나오카를 한 번은 잊어버렸다.

 “그러려고… 노력해.”

 “좋은 일이네.”

 하나오카가 손등을 빼냈다. 나는 슬로건을 정돈해 가방으로 집어넣었다. 열린 창문으로 밤공기가 쏟아졌다.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각자의 할 일을 한다고 조용해졌다. 캐리어를 닫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하나오카는 창문을 닫았다.

 “후지타와는 좀 어때?”

 나는 침대에 쓰러지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싫어!”

 “정말 싫은 거야?”

 “사실, 정말 싫은 건 아니야.”

 “그럴 것 같아. 치이, 하고 부르니까 사이 좋아 보여.”

 “절대 그렇지 않아!”

 “좋은 파트너 같아?”

 “잘 모르겠어.”

 베개 위로 쓰러지면서 숨을 토해냈다.

 “좋은 파트너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댄스계에선 보통 연인이라 부부 사이 같은 거라고들 하잖아?”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잖아.”

 “맞아.” 하나오카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야.”

 나는 하나오카의 표정이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하나오카는, 좋은 파트너란 뭐라고 생각해?”

 “음.”

 하나오카는 창밖을 보았다. 먼 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대에게 의지하는 것보단 자극을 주는 존재 같은 거라고 생각해.”

 “이를테면?”

 “라이벌… 같은 거야.”

 나는 단숨에 감을 잡았다.

 “효도가 그렇게 말했어?”

 “응. 그래서 굉장히 놀랐어.”

 하나오카는 몹시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봐선 안 될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도,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할 수 없어서 자꾸만 보게 되었다. 불가항력이랄까, 그 눈은… 내가 결코 닿거나 쟁취할 수 없는 지점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세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 어쩌면 평생을 노력해도 난 저곳에 닿을 수 없을 지도 몰라… 하고, 더 막연해지는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베개 위로 얼굴을 쏟았다.

 “부럽다. 하나오카는 효도와 춤추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히야마는 그렇지 않아?”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니까.”

 “나도 효도와 춤추는 게 즐겁기만 한 건 아니야.” 

 하나오카가 말했다.

 “하지만 사로잡히는 한순간이 있어.”

 “이를테면?”

 “이를테면…….”

 하나오카는 언젠가, 있는 힘껏 허리를 젖혔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 2히트, 왈츠. 효도는 컨디션이 좋았다. 결승이었고 사람이 많았다. 플로우 위의 커플 수가 줄어들수록 객석이 찬다. 심사위원들의 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추고 싶은 만큼 추면서 즐겼다. 효도가 재능과 노력으로 무장하여 ‘날뛰고 있었다.’ 사로잡혀서 평소보다 더 크게 움직이게 되었다. 리듬이 돌아왔을 때 머릿속이 새하얬다. 발을 뻗으며 빙그르르 돌았다. 효도가 지탱했다.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게 해주었다. 그래서…… 힘껏 허리를 젖혔다.

 “히야마… 그 때 나는, 완벽히 거꾸로 뒤집어진 세상을 처음 보았어. 비뚤어지거나, 기울어지는 법이 없이, 객석의 사람들은 공중에 있고, 댄서들은 허공에서 몸을 움직이는 거야. 정작, 나를 받쳐주고 있는 효도는, 그 세계에 온데간데없는데도.”

 하나오카는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나만이 제대로 서있었어.”

 숨을 죽였다.

 “나는, 오롯이 나만이 뚜렷이 남아있던, 그 외로운 세계가 좋았어.”

 이야기가 끝났지만 어떤 대답이 올바를지 몰라서 머리를 굴렸다.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나는 이런 쪽으로 머리가 나쁘다.

 “난 그런 걸 경험해본 적은 없어.”

 솔직하게 말했다.

 “질투나.”

 “어느 쪽을 질투해?” 

 하나오카, 너무해!

 “비밀이야.”

 “너무한 걸.”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알고 싶어.”

 하나오카가 다가왔다. 일어나서 올려다보자, 하나오카가 여러 의미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자가 드리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오카 시즈쿠는 내게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위압감이 있었다.

 “춤추지 않을래?”

 “그래도 돼?”

 새벽 1시였다. 마지막 레슨이 끝난 참이고 모두는 푹 자고 싶을 테다. 아침에는 모두가 돌아가야만 한다.

 “스튜디오는 방음이 잘 되는 걸.”

 “와아, 글쎄. 나는 무서워.”

 “손 같은 건 온천에서 거침없이 잡아줬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하나오카가 손을 내밀어서, 나는 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새침해 보였을 지도 몰라. 그러나 나에게는 거절할 이유 같은 게 없다. 말했지만 나는 이런 쪽으로 머리가 나쁜 사람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밀어붙이는 면이 있다. 따지자면 나의 주 종목은 마음보단 몸이다. 하나오카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키과일지도……. 마음속으로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거, 진짜 약오르단 말이야!

 나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난 몰라!”

 하나오카는 말없이 후후, 하고 웃었다. 대답하는 대신 깍지를 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미지근한 것도 아니었다. 온도의 문제가 아닌 감각의 문제다.

 그런 건 언제고 중요하다.

 

 릴리스, 릴리스

 우리는 새벽의 빈 스튜디오 불을 밝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넓고 깨끗하고 땀 냄새가 없다. 하나오카가 연습용 루틴을 고르는 동안 머리를 묶었다. 왈츠가 나왔다. 하나오카는 나와 스탠다드 왈츠를 출 생각인 모양이다. 타타라와 자주 연습하는 곡이라는 걸 알고, 나를 배려해준 걸지도 모른다. 다른 걸 못 추는 건 아니었지만, 제일 익숙한 걸 고르자면 왈츠다. 그 히트는 자신이 있었다. 하나오카는 머리를 올리며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음 다음 마디에서 들어가자.”

 하나오카는 내 홀드 자세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히야마, 리드를 할 셈이야?”

 나는 프로포즈를 앞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인 걸.”

 하나오카가 내 손을 쥐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 이래봬도 자신 있어.”

 나는 하나오카의 허리를 감았다.

 “이때까진 쭉 리드를 했었는걸.”

 타타라에게조차도.

 “히야마.”

 하나오카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움직여.”

 그 말은 채찍처럼 엉덩이를 후려쳤다. 리듬에 맞춰 물살처럼 몸이 미끄러졌다. 하나오카를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몸을 부드럽게 흔들면서 제자리에서 팔을 휘둘렀다. 하나오카의 손이 어깨를 짓눌렀다. 고양되었다. 아키라와는 달랐다. 하나오카는, 원하는 만큼 휘두르면 그만큼 응하여 따라왔다. 원하는 곳으로 가, 라고 온몸이 말하고 있었다. 타타라가, 어디로 가고 싶어? 라고 묻는다면 하나오카는, 가야할 곳으로 가야 해, 라고 못을 박는 것 같았다. 팔로우의 힘이란 이런 걸지도… 딴 생각을 하다 한 번 박자를 놓쳤다. 아차, 하고 하나오카의 얼굴을 마주보자 하나오카는 엄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여유 부리는 거야?”

 템포가 빠르게 바뀌었다. 나는 힘주어 하나오카의 손을 고쳐 잡았다.

 “아니야!”

 우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뒤집어졌다가 뒤섞였다. 템포가 느리게 바뀌었을 때, 갑자기 중심이 바뀌면서 하나오카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나오카는 발을 끌면서 느리게 걸었다. 리듬이 끈적끈적해졌다. 당혹감에 휩싸였다. 하나오카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았다. 아까처럼 산뜻하게 휘두를 수 없었다.

 ‘어라?’

 그리고 갑자기, 아주 갑자기.

 하나오카가,

 ‘들어올렸다.’

 나는 허공에 떠있었다. 몸이 굉장히 가벼워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육신이 풍선처럼 붕 떠있다. 디디고 있는 스튜디오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오카가, 하나오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숨겼고, 타이밍에, 방출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오카는, 내 모든 무게를 자신의 것으로 취한 채, 발끝으로 우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릴리스,

 릴리스…….

 빠른 템포가 돌아왔다. 허공의 세계는 연장되지 못 한 채 마치 빠르게 움직이는 차창 너머의 풍경처럼 뒤로 접혀 들어갔다. 움직이자, 하나오카가 리드를 바라고 있다. 발을 뻗으며 의도적으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쿵, 쿵, 하고 리듬이 쏟아져 들어왔다. 땀이 났다. 사라지지 않는 서늘한 공포감이 남아있었다. 나는 하나오카의 손을 쥐어 터뜨릴 것처럼 잡아챘다. 하나오카가 얼굴을 찡그렸다. 상관없다, 고 생각했다. 리드하는 건 나다.

 리드는 내가 한다.

 조급함이 밀물처럼 들이닥쳐서 눈을 감았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해졌다. 묻고 싶었다. 죽고도 싶었다. 하나오카에게. 파트너도, 라이벌도 될 수 없는 우리는, 하다못해 너의 야망도 될 수 없는 나는, 도대체 어떤 세계를 목적으로 춤을 춰야만 하는 걸까……. 대답해줘. 아니, 하지 말자. 네가 대답해버리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말아……. 구석구석으로, 하나오카에게 스며들기 위하여, 나는 묻거나 죽거나 안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썰물처럼 마음이 통째로 빠져나갔다. 손끝이 찌르르 떨렸다.

 눈을 뜨려는데, 하나오카가 소리를 쳤다.

 “뜨지 마!”

 우리는 동시에 춤을 멈췄다. 이명이 찾아왔다. 나는 눈을 뜨지도 못 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나오카의 손바닥이 홀드를 풀고 사라졌다가, 되돌아와서 손가락을 얽는 게 느껴졌다. 느슨한 깍지를 꼈다. 나는 실눈을 떴다. 하나오카는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들켰다. 전부 전해버렸다. 그런 느낌에 견딜 수가 없어져서, 나는 그만 하나오카를 껴안고 앞으로 넘어졌다. 하나오카는 쓰러져주었다. 하나오카의 가슴 위로 엎어지면서, 축축한 몸으로 헐떡이며 뒤척거렸다. 하나오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히야마, 하나도 모르겠어.”

 “거짓말.”

 “음.”

 하나오카는 즐겁다는 미소로, 스튜디오 천장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눈을 했다.

 “히야마, 넌 정말 망아지 같구나.”

 “흥.”

 “키요하루의 말이 뭔지 알겠어.”

 “효도가 그래?”

 “마리사 선생님도 그러는 걸.”

 “나도 알아.”

 나는 하나오카를 힘껏 끌어안았다. 끌어안을수록 하나오카는 투명하게 느껴졌다. 형체를 또렷하게 느끼거나 붙잡을 수가 없었다. 신기루 같고 말랑말랑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거기서 더 힘껏 끌어안으면,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하나오카의 몸. 부들부들한 과일 속에 단단히 숨겨진 씨앗을, 막 채굴한 느낌으로…… 나는 하나오카를 힘껏 끌어안았던 것이다.

 “앗.”

 “왜?”

 “하나오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잊고 있었어.”

 “뭔데?”

 나는 몸을 떨어뜨렸다가 얼굴을 기울였다.

 “체지방, 몇 프로야?”

 하나오카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음악이 꺼졌다. 그래도 스튜디오는 시끄러웠다. 정말 큰 웃음이었던 것이다.

 그 날, 새벽에 돌아와 꿈을 꾸었다. 나는 춤을 추고 있었는데,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타타라도 효도도 아니었다. 플로우엔 사람이 적고, 객석은 가득차서 새까맸다. 빠른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점점 고양되었다. 나는 허리를 자꾸만 젖히고, 또 젖혔다. 완벽히 뒤집어지게 되었다. 나는, 세계를 한순간에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그 세계 속에서, 나는 등번호들을 보았다. 드레스 위에 붙은 선명한 숫자들을 보았다. 소녀들은, 야망을 돌려받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내 손을 잡은 파트너가 익숙한 목소리로 묻는다. 히야마, 넌 어디쯤 왔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대답한다. 여기.

 돌아오기 전에는 하나오카와 번호를 교환했다. 메일할게, 그렇게 말하며 하나오카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보다 더 많이 흔들어주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카루이자와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짐을 풀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재즈가 나오고 있었다. 음악 프로그램은 인기가 좋다. 왈츠나 탱고식 음악도 가끔 흘러나온다. 듣다보면 절로 몸이 반응해서, 마구 움직이게 되었다. 빨아야할 옷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나니 힘이 빠져서, 옷은 아무 곳에나 널브러뜨려 놓았다. 나중에 정리하면 되겠지. 그리고 나는 트렁크 속에서 접어놓은 슬로건을 발견한다. 정리할 때보다 더 난장판이 되어버린 방을 겅중겅중 뛰어넘어서, 의자를 밟고 책상으로 올라갔다. 노래가 끝나고 토크 코너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아키코 씨는 새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는 거군요.”

 “요리는 언제나 쓸모가 있으니까요.”

 “이미 다른 프로그램을 하나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슬로건을 붙여두었던 자리는, 묘하게 벽지가 헐어있어서 슬로건이 사라져도 아, 이곳에 분명 무언가 오래도록 붙어있었다, 는 인상을 준다. 나는 슬로건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펼쳐서, 그 자리에 도로 잘 붙여놓는다. 자, 되었다. 이제 도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최종 목표는 아니었던 셈이군요.”

 “최종 목표랄까, 그런 걸 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휴대폰이 울려서, 급하게 책상을 내려온다. 하나오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히야마, 내일이네. 드레스는 정했어? 후지타와의 호흡이 잘 맞기를 응원하고 있어.」

 나는 하나오카에게 벽에 걸어둔 드레스 사진을 보내준다.

 “그렇다면 아키코 씨, 그런 의미를 담아서 진심의 각오 한 마디를 부탁드립니다.”

 “각오의 한 마디라, 일종의 응원인 거겠죠?”

 “캐치프레이즈라고도 할 수 있네요.”

 휴대폰이 울린다.

「아름답다. 굉장히 강해보이네.」

 나는 웃으며 휴대폰을 닫는다. 코너가 끝날 시간이 다 되어서,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면서 책상에 주저앉는다. 마지막 곡은 왈츠였으면 좋겠다.

 “그럼 엔딩 곡을 소개하기 전에, 다자키와의 콤비 결별을 선언하고 새 프로그램을 향해 나아가는 아키코 씨의 야망의 한 마디, 올해의 캐치프레이즈를 듣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부끄럽네요.”

 아키코의 큼큼, 소리는 시구를 앞두고 허공으로 배트를 스윙하는 타자의 그것과 닮아있다.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벽에 도로 붙여둔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를 바라본다. 영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마침내 캐치프레이즈가 방송되는 순간, 우스워서 그만 책상에 엎어지고 만다. 라디오에선 탱고가 흘러나오고 있다.

 눈물을 닦아내며, 기분 좋게 중얼거린다.

 “표절이야!”

 노을이 지고, 탱고가 흐르고, 여전히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그런 시대가 온다. 그러니까 소녀여. 세상의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한 시대가 접혀 들어간다.

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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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에구치 «유토의 언덕»
2차/old 2019. 10. 24. 19:17

 중학교 2학년 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카에구치 유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라운드에서 연습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사카에구치는 외야수로 뛰는 칸타와 벤치를 지키는 타쿠미와 함께 시니어 여름 합숙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이기기 위하여 연습을 하고, 새벽에는 그라운드를 뛸 생각이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분명했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사카에구치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아버지가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나무 그늘 속에 숨어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벚나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나쁜 예감이 들어서였다. 아버지가 이름을 부르거나 손을 흔들지 않았다. 사카에구치는 주먹을 쥐고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앞에 멈추어 섰을 때, 바람이 불어서 꽃잎이 후두둑 떨어졌다. 벚나무 가지에 꽃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아버지의 눈 밑에 유난하게 고인 분홍색을 보았다. “유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물기로 반들반들 했다. 사카에구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때까지 사카에구치는 어른이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리사가.” 아버지는 거기서 잠시 멈추었다가, 헐떡거리며 뱉어냈다. “…죽었다.” 쏴아아, 매달린 게 많은 나무여서 바람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리사가 / 죽었다. 아버지는 아주 짧은 문장을 두 토막 냈다. 그건 아주 다른 이야기처럼 들렸다. 사카에구치가 이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리사가 누구였더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머리 위로 벚꽃이 흩날리는 동안 아버지는 다른 말도 했다. “미안하다.” “유토, 정말 미안하다.” 아버지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죽음은 누군가를 미안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네 엄마가 죽어서 미안하다. 내 아내가 죽어서 미안하다. 모든 것을 이해한 사카에구치의 어깨에서 스포츠백이 흘러내렸다.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중학교 1학년 언젠가에 타쿠미가 물었다. 8회 말을 마친 벤치에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곤 사카에구치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대답했다. “난 없어.” 타석으로는 3학년 료타 선배가 올라갔다. 선배는 배트를 휘두르면서 기합을 질렀다. 그 경기는 료타의 시니어 마지막 무대였다. 이번 경기가 끝나면 선배는 그라운드를 내려와 고교 입학시험을 준비할 테였다. 선배가 떠나면 공석이 생겨서 만년 벤치였던 타쿠미가 배트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좀 더 기뻐하고 있을 줄 알았다. 사카에구치는 타쿠미를 바라보았다. “료타 선배 때문에 슬퍼?” 타쿠미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타쿠미가 대답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벤치를 바라보아도 더는 료타 선배가 없겠지.” 깡, 배트에 맞은 공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료타 선배가 안타를 쳤다. 바깥으로 떨어지는 포물선을 보고 벤치의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타쿠미는 벤치에 매달려 고함을 질렀다. 공이 떨어지자 관중석에서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료타가 있는 힘껏 1루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카에구치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이 시합은 이길 거야. 타쿠미의 등을 바라보면서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그래도 타쿠미는 울게 될까.

 그런 일이다.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사카에구치는 생각해본 적 있다. 타쿠미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타석에 오른 타쿠미가 이따금 벤치를 바라본다는 것을 사카에구치는 알게 되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타쿠미와 료타 선배는 연습이 끝난 후에도 그라운드에 남아 종종 타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외동인 타쿠미를 외동인 료타 선배가 동생처럼 생각했을 것이라고 가정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타쿠미는 료타 선배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벤치의 빈 공간에 세워두고 그려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구나. 남의 일처럼,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떠나보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구나.

 중학교 2학년 봄. 장례식을 치른 후 사카에구치는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배트를 휘두르거나 앞으로 내밀어서 날아온 공을 치거나 굴린다. 그런 식으로 상대편을 벤치로 더 많이 돌려보내면 이기는 게임을 했다. 사카에구치의 타율은 특별히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감독은 걱정했다. “정말 괜찮은 거냐. 힘들면 언제든…….” 그럼 사카에구치는 아. 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 말은 평소보다 한 박자 느리게 나왔다. 중학교 2학년 여름 초에는 현 대회를 나갔다. 사카에구치는 8번으로 타석에 섰다. 배트를 만지작거리다 관중석으로 몸을 틀었다. 습관이었다.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사카에구치는 어머니가 앉아 있지 않은 관중석을 보았다.

 공백. 공석. 空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무엇이든 떠올랐다. 사카에구치는 챙을 쥐고 모자를 눌러썼다. 햇빛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바보 같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렇게나 휘둘렀는데 깡, 소리가 나서 마구 달렸던 기억이 난다. 루를 코앞에 두고 한바탕 뒹굴었다. 입으로 흙이 잔뜩 들어갔다. 사카에구치는 입을 꾹 다물고 심판을 올려다보았다. 판정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마침내 심판이 손을 저었다. “아웃!” 반대편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졌다. 사카에구치는 입가를 훔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푸, 하고 흙을 뱉어냈다. 맞은편 관중석에서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분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발밑이 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사카에구치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올라서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있을 여름 시합과 연습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도 사카에구치는 배트를 잡고 그라운드에 서있거나 타석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린다. 타쿠미가 벤치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사카에구치도 분명 그렇게 할 것임을 알았다. 사카에구치는 관중석에서 빈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놓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의미로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타쿠미와는 달랐다. 타쿠미가 가진 구멍은 상실이 아니라 부재였다. 그러나 사카에구치의 구멍을 부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존재를 안고 살아나가야 한다. 앞으로 그런 야구를 해나가야만 한다. “유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타석을 내려오면서, 사카에구치는 아버지가 어째서 미안해했는지 깨달았다. 미안하다. 그 말은 사카에구치의 마음을 끝없는 오목함으로 짓눌렀다. 혼자 있게 된다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벤치로 돌아왔다. 그 날의 경기는 콜드로 졌다.

 사카에구치는 그 해 여름의 절반을 방구석에서 보냈다. 합숙을 불참하고 그라운드로 나가지 않았다. 한동안 팀메이트들로부터 메일을 받기도 했다. 칸타와 타쿠미도 메일을 보냈다. 다들 사카에구치를 걱정했다. 둘은 사카에구치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이 길어지면서 연락도 끊겼다. 사카에구치는 야구를 그만두었고, 그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들은 바빴다. 사카에구치는 바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거실에 앉아 TV를 보았다. 아버지는 사카에구치에게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 퇴근 후 거실 소파에 앉은 아들과 마주치게 되면, 도무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전까지 사카에구치는 연습을 한다고 자주 저녁에 집을 비웠었다. 거실에 얌전히 앉아있는 사카에구치는 어딘지 어색했다. 여름방학 동안, 사카에구치는 울거나 떼쓰지 않는 대신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보였다. TV를 보다가도 고개를 숙이고 다른 생각을 했다. 엉엉 울면서 직장에 있는 아버지에게 시시때때로 전화를 거는 동생과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는 울지 않고, 떼쓰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카에구치를 많이 걱정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도무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 사카에구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해 여름.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아가기 위하여, 남은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나갔던 것임을 사카에구치는 이제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다 함께 울어도 좋았을 거야.’ 사카에구치는 종종 생각하곤 한다.

 방학이 끝날 무렵, 사카에구치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려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그러자 야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예전과 똑같아졌다. 누나는 기숙사에 들어가고, 아버지와 사카에구치는 돌아가며 아침을 했다. 파를 썰어서 말랑말랑한 계란말이를 하고, 무를 얇게 친 맑은 된장국을 올린 후 따뜻한 밥을 가득 퍼 담았다. 가끔 생선을 굽기도 했다. 사카에구치는 동생 옆에 앉아서 가시를 발라주었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어머니가 사카에구치에게 해주었던 것이다. 보드랍고 하얀 생선살을 발라서 따뜻한 밥 위에 얹어주면, 사카에구치는 맛있게 먹고 야구를 하러 나갔다. 어머니는 반투명한 생선가시를 접시 끄트머리에 잘 모아두고, 알은 가장 마지막에 젓가락으로 골라냈다. 사카에구치가 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나 세게 쥐어서 알이 터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생선에 젓가락을 사용하는 데에도 스킬이 있단다. 엄마의 스킬이지.”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카에구치는 알을 품은 부분만 빼고 살만 싹싹 발라 먹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사카에구치와는 달리 알을 잘 먹었다. 그래서 ‘엄마의 스킬’은 엄마의 스킬로 남았고, 사카에구치는 그것을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야구부를 그만둔 사카에구치는 연습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과 함께 등교하고 하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저녁을 만들고, 남은 시간동안 동생과 놀거나 공부를 하면서 가을을 보냈다. 벚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학교와 집을 오락가락 했다. 성적이 많이 올랐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반에서 상위권에 들어 깜짝 놀랐다. 소식을 들은 칸타가 반으로 찾아와 사카에구치를 불렀다. 방학식이 막 끝났을 때였다. 교실이 빌 때까지 기다리던 칸타는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이제 정말로 야구는 안 하는 거냐.” 그 말에 사카에구치가 하하,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칸타는 잠시 욱하는 기색이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우리, 마지막 여름 경기에서 콜드로 이겼다. 우리도 콜드로 이기기도 한다. 우리 팀은 앞으로도 이길 거야. 유타, 그만두지 마. 남은 일 년은 같이 하자.” 사카에구치는 칸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칸타의 어깨는 사카에구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칸타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미안.” 손이 차가워서 주먹을 쥐었다. “괜찮아, 나는 이제 관둘 거야.” “진심이야?” “응, 미안해.” 사카에구치가 말했다.

 칸타는 인사도 없이 쿵쾅거리며 돌아갔다. 그 애가 화가 나있다는 걸 알았다. 사카에구치는 계단을 내려가는 칸타의 어깨를 내려다보면서 축축한 손바닥을 허벅지에 비볐다. 그리고 입으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려보았다. 이제 나는 야구를 관둘 거야. 가슴이 자꾸만 오목해지는 것 같았다. 사카에구치는 손바닥을 펼쳐서 심장에 대보았다. 그곳에 구멍이 나있었다. 무엇이든 빨아들이고 없애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공백이 그곳에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몹시 슬프고 화가 났다. 어째서 나는 어머니도 야구도 잃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야구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칸타도 사카에구치도 그것을 조금씩은 알고 있었다. 분노와 슬픔의 방식으로밖엔 대응할 수 없는 공백이었기에, 화를 내거나 슬퍼하던 소년들. 사카에구치는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에서 내려 벚나무 아래를 걸어 나갔다. 꽃잎 대신 낙엽을 맞으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 보려 애썼다. 그러자 야구를 하지 않는 자신이 야구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자꾸만 땀이 배어나왔다. 야구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난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사카에구치는 눈물을 흘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었다. 울어야 하는 순간을 오래 전에 놓치고 만 것 같았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사카에구치의 자전거에 펑크가 났다. 수리를 받으러 근처 철물점에 다녀오는 동안 공터를 지나게 됐다. 원래 빌라를 짓기 위해 마련되었는데, 공사가 미뤄지면서 주민들의 체육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사카에구치의 동생이 친구들과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자전거를 세우고 그것을 잠시 구경했다. 아이들은 잘 던지지는 못 했지만, 즐겁게 던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동생도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동생은 언젠가부터 더는 울지 않았다. 아마 여름방학이 끝날 쯤 부터였을 것이다. 사카에구치가 정신을 차리고 원래대로 굴기 위해 애쓰자, 동생도 씩씩해졌다. 동생은 어머니가 있었을 때도 캐치볼을 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없어도 캐치볼을 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어찌되었든 내가 잘해야 해.’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이듬해에도 동생의 저녁을 챙겨야 한다.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다음 해에도. 동생이 조금 더 크면 함께 챙기게 될 것이다. 누나나 아버지가 가끔 돕기도 할 것이다. 사카에구치는 생각에 잠겨서 집을 지나치고 말았다. 어머니와 야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야구를 생각하면 어머니가, 어머니를 생각하면 야구가 떠올랐다. 사카에구치는 계속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카에구치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이었다. 가장자리에 하수도로 이어지는 홈이 나있고, 그 홈 안에 얼음이 얼어 있었다. 길 양옆으로 앙상한 나무들이 몇 그루씩 이어졌다. 벚나무인 것 같았다. 사카에구치는 멈추지 않고 벚꽃동산을 올랐다. 언덕이 높지 않아서 길이 금방 끝났다. 그러자 학교가 나왔다. 교문이 열려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교문에 붙은 학교 이름을 읽었다. 현립 니시우라 고등학교. 입구에 도서관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현립 건물이라서 방학이면 주민들을 위하여 도서관을 개방하는 모양이었다. 사카에구치는 자전거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도서관에 들어가 보았다.

 도서관은 크지 않았지만 몹시 깨끗했다. 난방 덕분에 따뜻한 대신 건조했다. 창가에는 하얀 블라인드가 달려 있었고, 사서 테이블에는 작은 가습기가 놓여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문학 코너와 과학 코너를 빙글빙글 돌았다. 열람실에는 학생들 말고도 주민들이 드문드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 바퀴 째 돌던 사카에구치는 사서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들었다. 과학 코너 앞에서였다. 사카에구치가 펼친 장에 커다란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까맣고 거대한 구덩이처럼 보였다. 사카에구치는 사진 옆에 붙은 주석을 읽었다. 그것은 블랙홀이었다. 사카에구치는 책을 뒤집어 보았다. <코스모스의 비밀>.

 니시우라 고교에서 내려오는 길에, 사카에구치는 그라운드를 보았다. 제 1그라운드는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미식축구…인가. 이곳에는 미식축구부도 있구나.’ 그런 후에 조금 더 지나쳤더니 제 2그라운드가 나왔다. 사카에구치는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는 그라운드 입구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여자인 것 같았고, 키가 크지 않았다. 사카에구치보다 조금 작아보였다. 왜 저기 서있는 걸까. 사카에구치는 정돈되지 않은 제 2그라운드를 흘끔거리다 그녀를 지나쳤다.

 그 날은 꿈을 꾸었다. 사카에구치가 유체이탈을 했다. 눈을 떴을 때, 사카에구치는 둥둥 떠있었고, 자신의 몸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자신의 팔을 꼬집어보았다. 고통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쩐지 남의 몸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언젠가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였더라. 기시감을 더듬어가던 사카에구치가 그 해 여름의 마지막 경기를 기억해냈다. 8번 타석으로 안타를 치고, 내야수에게 잡혀서 아웃을 당했다. 격려의 박수를 쏟아내던 관중석. 그 때, 사카에구치는 막연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관중석을 앞으로 평생 등에 지고 살아가는 거야.’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야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보냐.’ 이전에는 앞으로의 일들을 떠올리는 게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없는 미래를 떠올리는 게 두려워졌을 때, 사카에구치는 막막함이라던가 막연함이라던가. 감히 그런 말로도 일컬을 수 없는 공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가 너무 거대해서 현재를 멀리 밀쳐놓았다. 자신의 몸이 꼭 남의 몸처럼 느껴지던 계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여름, 사카에구치는 내내 유체이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나는 무엇에 밀쳐진 것일까.’ 영혼의 상태로 사카에구치는 생각하였다. 사카에구치의 몸은 뒤척이지도 않고 얌전하게 정자세로 누워 있었는데, 두 손을 가슴 위에 가만히 포개고 있었다. 꼭 관에 들어간 사람처럼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사카에구치는 몸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목을 붙잡아 두 손을 내렸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었다. 깜짝 놀란 사카에구치의 영혼이 튕겨져 올라오다 말고 천장에 부딪혀 데굴데굴 굴렀다. 쩍 쩍 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쑤셔놓았던 프린트물과 얇은 파일이 마구 팔락거렸다. 방 안의 가구들이 모두 들썩이고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까맣고 거대한 구멍을 보았다. 사카에구치 유토는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거대한 블랙홀을 보았다. 그 구멍은 <코스모스의 비밀>에 나온 한 장면과 똑같았다. 무엇이든 빨아들이고,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시공간이 방의 모든 것을 삼키려 들고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없애고 싶은 것을 떠올려 보았다. 잊거나 없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것……. 사카에구치는 벽장으로 날아가 문을 열었다. 배트와 오래된 미트, 실밥이 조금 터진 야구공이 구석에 박혀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그것을 차례차례 자신의 블랙홀 속으로 던져 넣었다. 가장 먼저 배트, 그리고 미트였다. 공을 던질 때는 캐치볼을 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힘껏 던졌다. 블랙홀은 사카에구치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꿈속에서 사카에구치는 야구를 한 적이 없는 소년이 되었다.

 다음 날, 사카에구치는 다시 니시우라 언덕을 올랐다. 이번에는 자전거를 끌고 가지 않았다. 도서관은 따끈따끈했고 어제보다 사람이 적었다. 이번에 사카에구치는 빙글빙글 돌지 않고 곧장 과학코너로 갔다. <코스모스의 비밀>을 펼쳐서 블랙홀에 대하여 읽어보았다. 네 문단부터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새로운 도면이 나왔다. 블랙홀의 도면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사카에구치는 블랙홀과 블랙홀이 어떤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도면 끝에 매달린 주석이 그것이 웜홀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끝에 매달린 또 다른 블랙홀은 사실 블랙홀이 아니라 화이트홀이었다. <코스모스의 비밀>에 따르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것들은 사실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라, 웜홀이라는 통로를 지나 언젠가 화이트홀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 건 우주도 할 수 없는 건가. 죽음만이 할 수 있는 건가. ‘떠나보내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라고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도서관을 나오며, 어제처럼 그라운드를 지났다. 오늘은 두 그라운드 다 텅 비어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제 2그라운드의 자물쇠가 사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 날에도 사카에구치는 니시우라 도서관에 나갔다. 그 다음 날도 나갔고, 그 다음 날도 나갔다. 겨울 동안 사카에구치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코스모스의 비밀>을 읽고, 하나도 이해하지 못 한 채 그라운드를 지나 집으로 돌아갔다. 이따금 그라운드 앞에 멈춰서 무언가를 구경하기도 했다. 주로 미식축구였지만 좀 더 다른 것을 볼 때도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텅 빈 제 2그라운드에 누군가 남겨놓고 간 흔적 같은 것을 보았다. 자물쇠가 떨어진 이후로 누군가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것 같았다. 눈이 내렸을 때는 제 2그라운드 위에 한 쌍의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기도 했다. 아마 그 여자일 것이다. 사카에구치는 언젠가 보았던 뒷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굳게 닫힌 그라운드 앞에서 무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던 사람. 혹은 무언가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사카에구치와는 달랐다. 그는 떠돌고 있었지만 그녀는 심지가 강해 보였다. 니시우라에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면 필연적으로 그 뒷모습을 떠올리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봄. 사카에구치는 고교 견학 신청서에 니시우라를 적고 다시 한 번 그 언덕을 올랐다. 이번에는 도서관에 가지 않고 곧장 그라운드로 걸었다. 제 2그라운드에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펜스 앞에 멈추어 섰다. 정비되지 않은 경기장의 가장자리는 이미 제법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했다고 하기엔 믿기 어려운 분량이었다. 아마 땅이 녹자마자 시작했을 것이다. 사카에구치는 손을 호주머니에 욱여넣고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그렇게 강렬한 욕망은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막연했다. 가슴이 텅 비어있었다. 사카에구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 사카에구치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유체이탈을 했다. 같은 꿈이라는 걸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 난 거대한 블랙홀이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버리고 싶은 게 없는데.’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벽장은 텅 비어 있었고, 사카에구치는 이제 버리는 대신 채우고 싶었다. 바람이 마구 불었다. 사카에구치는 블랙홀이 고오오 우는 소리를 들었다. 고오오. 사카에구치는 귀를 기울였다. 고오오, 하고 울던 블랙홀의 울음소리가 중간에 자꾸만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있었다. 고오. 메응. 네.

 ごめんね.

 ‘유토, 미안해. 미안하다.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사카에구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몸이 붕 떠올라서 양수에 담긴 것처럼 부유하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고, 어디로든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사카에구치는 아버지가 울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 사카에구치는 너무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어떤 말을 해야만 했을까. 사카에구치는 아버지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 후에도 자신이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이 있기는 했다. 감독이 괜찮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칸타가 다시 야구를 하자고 말했을 때다. 사카에구치는 괜찮다는 말을 자신에게만 사용하였다. ‘네, 계속 야구를 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나는 이제 야구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감독이나 칸타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괜찮아요, 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감긴 눈이 뜨거워져서 사카에구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공중에서 벚꽃 잎이 되었다. 사카에구치는 눈을 떴다. 방 안이 꽃잎으로 가득 차서 눈이 부셨다. 그것들은 소용돌이치며 침대 위에 누운 사카에구치의 몸으로, 가슴을 누르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블랙홀이 사카에구치가 흘린 눈물을 모조리 빨아들여 없던 일처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꿈속의 사카에구치는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꿈속의 사카에구치는 벚꽃이 되었던 것이다.

 봄이 끝나기 전, 사카에구치는 니시우라 언덕을 다시 오르기로 결심했다. 그라운드가 보고 싶어서였다. 제 2그라운드 주변에는 학생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그곳에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방수용 스포츠백을 메고 있었는데, 아마 수영부 같았다. 그들은 정비 중인 그라운드를 한 번 바라보곤 수영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한 사람이 중학교 교복을 입은 사카에구치를 흘끔거리긴 했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사카에구치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엉거주춤 서 있다가, 천천히 펜스 앞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은 거기 있었다. 그라운드는 이미 삼분의 일 정도 보수가 끝나 있었다. 그라운드의 잡초는 반쯤 뽑혀 있고, 설비 시설이 반들반들 닦인 채 햇빛에 천천히 데워지는 중이었다. 사카에구치는 그녀가 꾸준히 ‘혼자’ 일하고 있음에 놀랐다. 그 때, 그 사람이 기합을 지르며 몸을 힘껏 일으켰다. 사카에구치는 주춤거리며 물러나다 말고 딱딱하게 굳었다.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잠시 정적이 있었고, 새가 울면서 날아갔다.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갑자기, “와!”하고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안녕!” 사카에구치가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안녕, 하세요.” “들어와!” 그녀가 말했다. “들어오라고요?” “일을 시키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이야. 이 때까지 혼자서도 잘 해왔는 걸.”

 사카에구치는 그라운드로 들어와 엉거주춤 섰다. 그녀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다른 손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중학교 교복이네. 전철에서 본 적 있어. 견학 온 거니?” “음, 그런 셈이에요.” “니시우라에 올 거니?”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그렇구나.” 사카에구치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그라운드를 훑어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아직 뽑지 않은 잡초의 뿌리가 흙을 들어 올리며 흔들리고, 깨끗해진 그라운드 위로는 흙먼지가 불었다. 가까이서 본 그라운드는 굉장히 깨끗해지고 있고, 제대로 갖춰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가꿔온 사람의 애정과 기대가 느껴졌다. “이곳에서 무엇을 할 건가요?” 사카에구치가 물었다. “야구.”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야구를 할 거야.” 그녀의 이름은 모모에 마리아였다.

 돌아가기 전, 사카에구치는 그녀와 짧게 캐치볼을 했다. 모모에는 공을 잘 던졌다. 마지막으로 던질 때는 전력투구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사카에구치는 미트를 벌리고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모모에가 한 발을 들어 올리고 투구 폼을 취한 후, 굉장한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사카에구치는 하얗고 거대한 구멍을 보았다. 그것은 모모에의 등 뒤에 있었다. 그 다음 순간, 모모에의 손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공의 잔상만 남았다. 사카에구치는 화이트홀의 정중앙을 뚫고 돌진하는 야구공을 보았다. 야구공의 실밥이 터져 있었다. 사카에구치는 그 공을 본 적이 있었다. 꿈속의 사카에구치가 그것을 던져 넣었다.

 공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미트를 쳤다. 마법 같은 순간이 끝나고, 현실이 그를 복귀시켰다. 가슴으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쿠.” 모모에가 손바닥을 털어냈다. “괜찮니?” “괜찮아요!” 사카에구치는 미트를 벗고 얼얼해진 손바닥을 쥐락펴락 해보았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손가락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찌릿찌릿하고 좋은 기분. 사카에구치는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야구를 할 거야.’ “저도 야구를 하고 싶어요.” 사카에구치가 말했다. “그래, 그거 좋겠다.” 모모에는 기분 좋게 웃었다. “너는 니시우라에서 야구를 하게 될 거야. 여차하면 마음 놓고 비빌 언덕이 됐으면 좋겠네.”

 니시우라 언덕에는 벚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벚꽃동산을 내려오면서, 여차하면 비빌 언덕이란 무엇일까에 대하여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있다면 자신은 한 번 잃어버렸던 것일 테다. 바람이 불자 우수수 벚꽃 잎이 떨어졌다. 사카에구치는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들었다. 나무가 마구 흔들리며 꽃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아도 니시우라 언덕이 환히 그려졌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넓은 언덕 입구는 좁은 통로처럼 줄어들었다가, 교문 앞에 다다라서 다시 넓어졌다. 꼭 웜홀 같이 생겼다. 그게 정말로 통로였다면, 사카에구치는 결국 돌려받은 걸지도 모른다. 버리고 싶었지만 야구를 버릴 수 없었다. ‘그렇구나.’ 사카에구치는 생각했다. 나는 잊고 싶고, 없던 일로 하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나고 슬펐던 거다. 엄마의 죽음을 없던 일로 할 수 없어서, 야구를 하던 자신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는 견딜 수 없었던 거야. 사카에구치는 또 생각했다. ‘그렇지만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야.’ 마찬가지로 야구를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화이트홀이 둥그런 비행접시처럼 떠올랐다. 사카에구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쳐들고, 화이트홀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 잎을 맞았다. 세상이 사카에구치에게 무언가를 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사카에구치 유토는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엄마…. 옴폭 들어간 가슴의 구멍으로부터 무엇인가 솟아오른 것 같았다. 블랙홀이 닫히고 무한한 에너지가 소멸되더니, 바람이 마구 흩날렸다. 쏴아아, 하고 엄마가 응답하였다. 사카에구치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녕….” 그러자 눈물을 흘리는 법을 돌려받은 기분이 들었다. ■

 

 

(리디북스 e북 캡쳐본)

엄마를 잃고 야구를 그만둔 사카에구치 유토가 모모에 감독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 사카에구치가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방학 때 홀로 그라운드를 정비하던 모모에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면서 썼음. 후리전력봇의 '언덕'을 주제로 쓰다보니 비빌 언덕이라는 표현을 빌리게 됐음.

 

이 글의 테마곡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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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크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 사무소 (넷플릭스 드라마 중에 정신나간 거 하나 있음)

에 나오는 똥멍청이1 (더크 젠틀리) x 똥멍청이2 (토드 브로츠먼)

 

 아주 오랫동안 불행과 고난에 시달려온 더크 젠틀리에게 있어 성기 사이즈란 오랜 고민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2차 성징을 거치는 동안 그가 기대한 것은 180이 넘는 장신과 쭉쭉 뻗은 다리, 멋진 가르마와 빛나는 미소였건만 정작 막대한 성장을 시작한 것은 다리 사이에 서식하는 친구였던 것이다. 젠틀리 주니어는 그가 16살을 돌파할 무렵 거의 두 배가 되어 있었고, 역시 이대로 대책 없이 길어지는 것은 주인 분께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18살을 돌파할 무렵 두께를 늘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성인이 된 더크 젠틀리는 대물이 되어 있었고 그의 주니어는 전혀 “Gently”하지 않은 방식으로 위용을 과시하며 팬티 안에 엉거주춤 수납되어 있었다.

 더크 젠틀리는 자신이 가진 훌륭한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 했다.

 토드 브로츠먼은 대학교 시절에 대해 결단코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특히 밴드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했는데, 단순히 자신이 저지른 횡령 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왕년에 베이스를 연주하며 깨달은 것은, 인간도 적당히 연주할 만한 부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토드는 훌륭한 베이스 기타였다. 때때로 베이스보다 더 높은 음을 낼 수도 있었다.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낼 수 있는 음의 한계는 달라졌다.

 토드는 어릴 적부터 얼굴까지 불쌍하게 생겨먹었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던 데다가, 바로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정말 찌질이 찐다 머저리로 자라나게 됐다. 그의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의 앞날이 썩 순탄치 못 할 것이며 평생을 얼굴대로 살아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응집성이 있었다. 세상의 불행과 고난을 다 짊어진 것처럼 보이는 처연함과, 그럼에도 동정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동시에 존재했다. 한 마디로 더럽게 재수가 없어 뵈는 눈이었다. 어쨌건 그 따위 눈동자는 설령 잘생긴 남자가 가지고 있더라도 상당히 흠결인 부분이다. 그리고 토드 브로츠먼은… 유감스럽게도 핸섬가이는 아니었다. 자지도 작았다.

 특히 윗 문단의 마지막 문장으로써 명확해진 사실이지만, 토드 브로츠먼은 한 번도 여자와 잘 되어본 적이 없었고, 16살부터는 스스로도 의기소침해져서 자신은 원래부터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살 무렵에는 베이스를 시작했는데 사실 밴드에 들어가면 여자에게 고백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조언 때문에 은근하게 시작한 것이었고 물론 다들 아시겠지만 토드는 인기가 없었다. 자지가 작은 남자는 베이스를 쳐도 안 된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토드는 게이였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이유를 왜 늘어놓았는지는 필자도 잘 모르겠다. 여하튼 스무 살이 된 토드는 대학 밴드에 들어갔고 그 때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소위 말하자면 아다를 뗐다고 저속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상대는 드럼을 치던 조던이었고, 그는 자지가 컸다. (더크보단 작았음) 토드는 조던 밑에서 질질 짜며 이딴 게 섹스라면 평생 안 하고 사는 게 낫겠노라고 외쳤다. 그 다음 날에도 그들은 봉고차에서 즐겼다. 조던은 토드의 대학 첫 학기 내내 낮에는 창고에서 드럼을 두들기고 밤에는 밴드 봉고차에서 토드를 연주했다. 조던이 학기 말쯤에 토드에게 질린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무 질질 짠다는 것이다. 조던은 섹스를 할 때 상대가 지나치게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조던 이후에도 토드는 봉고차를 자주 이용했다. 밴드의 멤버들과 전부 자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다들 한 번쯤은 토드에게 박아본 경험이 있었다. 카섹스가 편안한 건 아니었지만 토드도 밴드 멤버들도 돈이 없었고 마땅한 공간도 없었던 데다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일을 벌일 만큼 체면을 상실한 것도 아니었다. 봉고차는 곧 악기를 실어놓는 용도에서 점차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어찌 보면 여전히 새로운 악기를 실어놓고 있는 셈이었으니 그 의무를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멤버들 몰래 봉고차를 중고시장에 팔아넘기면서, 토드는 봉고차의 새로운 주인이 시트를 갈지 않는다면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지옥에 “누군가에게 비위생적인 상황을 제공했음”리스트가 있다면 자신은 아마 10위 안에 들 것이라고. 당시 토드는 봉고차를 팔아넘겼다는 사실보다는 바로 그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돈을 챙긴 토드는 임시 숙소를 떠나 야반도주했고 휴대폰 번호도 바꿨다. 그리고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으로 밤에는 섹스 파트너를 찾아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고 낮에는 맛대가리 없는 시리얼과 콩을 처먹었다.

 토드 브로츠먼이 훌륭한 자지 감별사라는 데에 이견을 두는 사람은 없겠다. 그는 쓰레기였지만 단 한 가지 경험만큼은 그 누구보다 풍부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어지간하면 삽입도 전에 늘어진 꼬라지를 보고 “오늘 섹스는 글렀구나” 판단할 눈썰미도 있었다. 그가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그만둔 건 아만다 브로츠먼이 투병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만다는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 그 방향을 처음 틀어놓은 건 토드 브로츠먼이었는데도 말이다. 토드는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론적으로 더크 젠틀리가 해낸 일이었다.

 어쨌든 토드와 더크는 섹스를 할 운명이었고, 우주가 그렇게 정한 이상 이 세계의 질서는 두 멍청이들을 위하여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둘의 거사는 아주 오래 전, 그들의 16살 이전부터 계획되어 온 우주의 빅픽쳐였으므로, 이 모든 일들-더크의 불온한 인생과 토드의 난잡한 이십대는 바로 이 이유 하나만으로 계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크 젠틀리는 결코 알지 못 했지만, 토드 브로츠먼과 섹스하기 위하여 그의 자지는 남들보다 몇 인치는 굵고 거대하게 성장을 거듭하며 운명에 대한 대비를 톡톡히 해낸 것이다. 심지어 젠틀리의 주니어는 우주가 기대한 것 이상의 사이즈로 기염을 토해내며 삽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더크는 자신의 자지가 기성 남성용 속옷에 수납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 또한 우주가 부여한 또 하나의 시련 혹은 재앙인 줄로만 알았다는 점에서, 인생이란 아이러니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우리 모두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토드 쪽이 먼저였는데, 엄밀히 말해 “낌새”를 보인 건 더크가 먼저였다. 그러나 더크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으므로 자신이 어째서 토드 브로츠먼의 앞에서 자주 침을 삼키게 되는지, 손에 나는 땀 때문에 허벅지를 자꾸 문지르는지 알지 못 했다. 리디아 스프링 건이 종료되고 모두가 아직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때, 더크 젠틀리는 자신이 토드 브로츠먼을 향해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있고, 그게 좀… 원초적이란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토드가 먼저 이렇게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더크, 우리말인데.”

 “오.” 더크는 처음에 방어적으로 나왔다.

 “나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는데 이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아직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거든.” 토드는 기막히단 얼굴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거 말하려는 거잖아!”

 더크가 오두방정을 떨었다.

 “뭐?”

 “그거!!!”

 “더크,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토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더크는 입을 빼죽거리며 손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토드, 방금 반응은 좀 서운했어… 어쨌든 너도 내가 요 근래 좀 이상하게 구는 거 알잖아. 말 꺼내놓고 갑자기 빼려고 하니까 오히려 내 기분이 이상한데. 물론 내가 방금 방어적으로 군 건 사실이야. 어쨌든 우린 이제 막 화해했고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뒤로 제쳐두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주니까 나도 한 마디 하겠는데, 내가 너한테 이렇게 긴장하는 건, 그러니까…….” 더크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러니까…….”

 “너 지금 되게 이상한 거 알아?” 토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열여섯 살짜리 애가 고백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고백이라고!”

 더크가 튕겨져 나와선 미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헐떡거렸다.

 “토드,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니, 내 말은 네가 꼭…….”

 “배려심 없이 이상한 말 좀 갑자기 꺼내지 말아줄래?!”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토드가 열 받은 얼굴을 했다.

 “이봐, 더크. 내가 하려던 말은 그냥…….”

 “하지 마!!”

 더크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토드가 얼빠진 얼굴로 그 꼴을 바라보자, 더크는 손을 극적으로 떨며 “어으으” 하고 끓는 소리를 냈다.

 “좋아. 말할게. 좋아, 난 말할 수 있어.”

 “나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데.”

 “좋아, 더크. 넌 말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더크, 나랑 보고 이야기 해줄래?”

 “토드, 조용히 좀 해줄래?”

 “그러니까 너 지금 왜 그러냐니까!”

 토드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더크 젠틀리가 결연한 얼굴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비장미 넘치는 그의 찐따펀치는 완전히 무효화 되었다. 뺨을 감싼 더크의 손이 너무 소심해서 밀쳐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토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의 두꺼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더크는 꼭 초등학생처럼 입을 맞췄고, 도장을 내려찍듯 꾹 토드의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더크가 헉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토드는 완전히 충격에 빠져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토드가 생각의 파도에서 헤엄쳐 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

 한참 뒤 토드가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더크는 입을 다물고 벌 받을 준비를 하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입 을 빼죽 내밀고 있었다.

 “너 지금…….”

 “우리 친구지?”

 “뭐라고?”

 “그러니까.” 더크는 마른 침을 삼키다 말고 이내 포기했다.

 “아니, 됐어. 그냥…할 말 해.”

 “너 지금 나한테 키스했어!”

 “그렇게까지 크게 말하지 말아줄래?”

 “너 지금 나한테 키스했다고!”

 “알겠는데, 어쨌든 우린 친구야.”

 “씨발 너 지금 장난해?”

 “그럼, 친구 아닌 걸로.”

 “너 지금 나한테 키스했다니까?!”

 “알겠는데 나도 나름 창피함을 아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시끄럽게 광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토드.”

 “이것도 우주의 질서라고 주절거릴 건 아니지?”

 “장난하지 마!”

 이번엔 더크가 발끈했다. (하지만 정말 우주의 질서 맞음)

 “shit. 더크, 너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그래.” 더크가 인정했다.

 “그러니까 빨리 뭐라도 해봐.”

 “언제부터 이런 거야?”

 토드가 얼굴을 찡그렸고, 더크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모르겠는데… 아마 지프차 타고 삽질하던 때부터?”

 “Oh, god.”

 더크는 토드가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마른세수를 하고 초조하고 턱을 매만지는 걸 지켜보았다. 잠시 후, 토드는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이 보였고 그 결심을 내린 후부터 빠른 속도로 안정감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더크는 토드가 친구를 그만두자고 말하거나 방을 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했고, 둘 중의 답 이외에는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토드가 이렇게 말했을 때, 더크의 머릿속은 잠시 암전되었다.

 “너, 그럼 나랑 섹스하고 싶은 거야?”

 뭐라고?!!

 더크는 이 직후 바닥으로부터 3m 정도 펄쩍 뛰어올라 천장을 부수고 돌아왔다. 석회가루에 휩싸인 채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고, 토드는 자신의 오래된 서랍 안쪽에 듀렉스 콘돔 한통이 남아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마치 머릿속에 환한 불을 켠 것처럼, 요컨대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에 영감을 얻는 셜록홈즈처럼, 토드 브로츠먼의 쓸모없는 대가리가 처음으로 해낸 유용하고 멋진 일이었다.

 우주의 질서가 마침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퇴고 안 함

201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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