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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물결 «당신의 공방»
1차/new 2021. 1. 19. 02:12

칼베가에 도착하자마자 위에나는 복잡한 도시 생활이 그리워졌다. 슈텐에는 어디를 가도 최소 2층짜리 건물이 세워져있었고 길도 편리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칼베가에도 포장된 도로가 있기는 했지만 가장자리 군데군데가 깨져있어 마차가 활발히 지나다니기 힘들고 도시 자체가 구식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위에나는 도시 입구까지 도보로 30여분 정도 걸어온 상태였는데, 마차사고가 있어 그녀를 태운 마차가 진입할 길목이 완전히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나는 너무 피곤한 상태로 이곳에 도착한 나머지 모든 게 나빠 보이기만 했다. 아무리 애써도 이 도시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무의식이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도시의 풍경을 둘러보는 동안 주변은 점차 어두워지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위에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얼른 숙소로 가야해.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위에나는 준비해둔 우산을 펼쳤다. 기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면서 경쾌한 팡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우산머리와 대가 분리되었다. 위에나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주우려는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우산은 그녀의 손아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거리를 데굴데굴 구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붕 떠올라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방금 벌어진 일이 너무 황당한 나머지 위에나는 한 손에 우산대를 쥔 채 망연히 서있었다.

시발.’

그녀는 물을 먹기 시작한 가죽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온이 놀랄 만큼 떨어지고 있었다. 슈텐에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바람이 몸을 에워싸자 덜컥 겁이 났다. 아무튼지 간에 재빨리 숙소로 가야할 듯싶었다. 슈텐을 떠나기 전에 칼베가에 위치한 숙소를 찾아서 편지를 부쳐두고 답장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면 무엇이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나가 추위로 덜덜 떨면서 물건이 쏟아지지 않게 트렁크를 조금만 열고 손목을 집어넣어 짐을 뒤지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등 뒤로 다가왔다. 그녀는 동작을 멈췄다. 그녀의 상상력이 가장 음습하고 위협적인 지점에 떨어졌다가 튕겨져 올라왔다. 다음 순간 위에나는 쏜살같이 구부정한 몸을 일으키면서 팔꿈치로 뒤편의 사람을 가격했다.

어이쿠.”

남자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벼락처럼 움직였던 위에나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별로 아파보이지도 않았고 위에나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에 싸인 남자를 어떻게든 식별하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이 충분히 눈에 익은 것 같은데도 남자의 머리통은 새까맣게만 보였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도와드릴까요?”

남자가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웠다. 자기도 모르게 얼떨떨한 목소리가 위에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처럼 위에나가 중얼거렸다.

, 그래요. 아니, 괜찮아요. 저는,”

그 순간에 운명이 마지막 주사위를 굴린 듯했다. 당황한 나머지 뒤로 물러나던 그녀의 허벅지에 부딪쳐 중심을 잃은 트렁크가 활짝 열리면서 짐이 쏟아졌다. 머리 위로 굵어진 빗방울이 빠르게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아니요.”

이번에 위에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트렁크를 눕히고 재빠르게 짐을 주워 넣기 시작했다. 남자는 한동안 우산을 들어주더니 결국 허리를 굽히고 물건을 함께 주워 넣었다. 이제 위에나는 정말로 창피해져서 그에게 매정하게 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몸을 숙이고 짐을 주워들던 남자의 어깨에서 뭔가가 굴러 떨어지더니 위에나의 구두코에 부딪쳤다. 위에나는 손을 더듬어 그 물건을 주웠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익숙한 촉감이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반듯한 상자였던 것이다.

위에나는 그에게 상자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당신 거예요.”

, 고마워요.”

상자를 돌려받으며 그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런 게 습관인 듯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곤경을 알아차리고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는 남자의 호의는 슈텐의 공방 근처에서였다면 그러려니 넘겼을 테지만 이곳은 너무나 춥고 낯선 도시여서 위에나는 그를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트렁크를 닫은 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여긴 처음이라 잔뜩 곤두서있었어요.”

공교롭네요. 저도 그래요.”

그렇군요.”

위에나는 거리를 둘러보고 트렁크를 들었다.

그럼 안녕히.”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뒤 그녀는 재빨리 비를 맞으며 거리를 빠져나왔다. 아까보다 기운이 났고 머릿속으로 숙소 주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남자가 우산을 씌워준 덕분인 것 같았다.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니 내심 안도하게 된 듯했다. 어둠이 깔린 광야가 펼쳐진 도시 뒤편의 풍경이 운치 있게 느껴졌다. 비정할 만큼 날카로운 바람을 뚫고 그녀는 무사히 숙소를 찾아냈다. 현관에서 물기를 털어내고 보니 손등이 딱딱하게 얼어있었다.

방에는 낡은 침대와 창문을 마주보며 배치된 작은 책상이 있었다. 위에나는 램프에 불을 붙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풀었다. 반쯤 젖은 옷가지와 장신구, 손톱을 다듬는 우드파일(위에나가 만든 것이었다)을 침대에 늘어놓던 손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뻗어나갔다. 위에나는 낯선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세로 길이가 팔뚝만하고 가로 길이가 한 뼘만 한 크기로, 집어 들자 안에서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위에나의 상자가 아니었다. 아까 그 남자의 것과 자신의 상자가 뒤바뀐 거였다.

위에나는 책상에 앉았다. 상자를 바닥부터 모서리까지 훑어보았다. 손바닥으로 표면을 쓸자 마감이 잘 된 나무가 반드시 선사하는 특유의 시원한 촉감이 느껴졌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짜여 경첩에만 슬쩍 못질이 된 상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만을 사용해 퍼즐처럼 짜 맞추는 위에나의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물건이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자의 제작자는 분명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일 것이다. 아까의 남자가 만든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 장인에 대해 많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상자를 흔들던 위에나가 뚜껑을 열었다.

황당하게도 거기엔 당근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위에나는 상자를 기울여 안쪽을 살폈다. 작은 깃털 하나가 당근에 눌려 있는 게 보였다. 깃털을 치우자, 짙은 갈색으로 번지듯 눌러쓴 누군가의 이름이 나타났다. , , ,라고 읽혔다. 저거 피로 쓴 건가? 그렇다면 아마 이 상자는 기적을 부르는 장인의 상품일 것이다.

무엇이 깃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에나는 턱을 괴고 나머지 손으로 깃털을 돌렸다.

, 그러고 보니.’

내 상자를 가져간 그 남자는 어쩐다?

호신용 상자였는데, 큰일이네.”

캄캄한 어둠에 감싸인 낡은 도시가 끝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 순간 위에나는 일종의 예언적인 기분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다렸다. 장인으로서, 그녀는 미안함을 느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짐승의 무시무시하고 우렁찬 사자후가 도시 저편에서부터 솟구쳤다. 강력한 파동이 웅웅 소리를 내며 도시 곳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거리 전체를 장악했다. 당황한 남자가 상자를 닫아버린 듯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뚝 끊어졌다. 창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위에나는 보이지 않는 파동이 다음 골목으로 지나갈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 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깃털을 주워든 그녀가 말했다.

이거 맷비둘기의 깃털이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의 공방은 숲속에 있겠구나. 머릿속으로 상자를 맞추고 경첩을 매달고 있는 엘피스라는 장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그는 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한 채였다. 그녀는 자신의 무의식이 아까 그 남자의 모습을 끼워맞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자를 만드는 자들이 그렇듯, 마지막 나무 조각을 짜 맞출 때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모든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었다는 기분 좋은 확신을 경험해본 이들에게만 주어진 그러한 직감이 위에나를 사로잡았다-그것은 예언적이지 않았다, 성실한 생활에 깃든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시하긴 했으나 훨씬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위에나는 그 직감을 존중하기로 했고, 그리하여 그녀의 기억 속에서 엘피스라는 그 남자는 우산을 접고 어둠에 싸인 거리를 빠져나와 빛이 드는 아름다운 숲속의 공방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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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물결 «황금벌판»
1차/new 2021. 1. 19. 02:12

어느 화창한 9월의 오후, 겐나디는 내가 일하는 공방으로 뛰쳐들어왔다. 나는 키 낮은 책상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작년부터 일하기 시작한 조수 갈리나는 재료에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큰 소리에 놀라 동시에 현관을 쳐다보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새의 지저귐, 바람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사귀 소리가 벌컥 열린 문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 같았다.

겐나니는 늑대에 쫓기다 헛간으로 몸을 던진 새끼 사슴처럼 잔뜩 경직된 허벅지와 번쩍이는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 애는 잠시간 안절부절 못하더니 내가 웅크리고 있는 책상까지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그러더니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지금 당장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 애가 거칠게 나를 끌고 나가는 동안 갈리나는 어쩔 줄 모르고 우리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겐나디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놔달라고 했지만 겐나디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나를 질질 끌어 당겼다. 정신이 나갔거나 조금의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엉거주춤 끌려 나가면서 갈리나에게 동생네 조수와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비록 내가 이 꼴로 외출하게 되었지만 일만큼은 똑바로 해두라고 했다. 그런 뒤에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고 겐나디는 나를 대로변으로 끌고 나왔다.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내 눈으로 떨어지면서 순간적인 착란 현상이 왔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론가 나를 이끌며 중얼거리던 사투리 섞인 말투를 기억해냈다. 아버지의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서 옷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팔뚝은 크게 베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는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자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버지는 우악스럽게 내 입을 틀어막으면서 입 닥치라고 했다. 아버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순간, 우리 앞으로 마차가 쌩 하고 지나갔다. 마부가 겐나디에게 욕지거리를 하자 나도 겐나디도 잠에서 깨어나듯 소스라치게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겐나디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 애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허연 손자국을 문지르며 물었다.

무슨 일이니?”

유리 씨가 얼른 데리고 나오래서요.”

내 표정에 겁을 집어먹은 겐다니가 사과했다.

엄청 큰일이래요. 직접 말하겠다고 레스토랑에 있겠대요.”

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동생네 조수의 분별력 없는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생 유리가 분명 주의를 주었을 텐데도 괜히 겁을 집어먹은 겐나디 때문에 오후에 예정되었던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작업책상에 덩그러니 놓고 온 도면과 끌려나오느라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스무 살도 먹지 않은 겐나디에게 손찌검을 하는 상상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씩 올려치는 상상을 하면서 말했다.

다음번에는 이러지마.”

화를 삭이느라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

나는, 나는 이런 식으로 구는 걸 아주 싫어해.”

, 정말 죄송해요.”

겐다니와 헤어진 뒤 나는 공방에서 다섯 골목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 테라스가 있고 면 요리를 주력으로 하는 가게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도 종종 외출을 하면 이곳에 오곤 했다. 동생 유리는 가격 때문에 매번 펄쩍 뛰었지만 나는 그러한 반응 때문에 더 아무렇지 않게 굴곤 했다. 나는 유리가 포크로 면을 말아 숟가락에 놓고 휘휘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말했다.

사과해.”

누나도 하나 시켜. 내가 사줄게.”

유리는 면을 집어넣고 천천히 씹어서 삼켰다.

끌고 나온 건 미안.”

다음번에 또 이러면 죽는다.”

유리의 입술이 왼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재수 없는 위에나.”

나는 내 음식이 나올 때까지 분을 삭이면서 거리를 지나는 수십 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직접적으로 화를 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유리가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가 슈텐에 올라왔다고 했다. 채무 관련으로 지나 씨를 만나러 온 것 같은데 겸사겸사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긴 만나기 싫어서 잠시 올라가 있을 건데 누나만 여기 내버려두는 것도 못할 짓인 듯해서 언질이나 줄까 하고 부른 거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황금빛 벌판이 떠올랐다. 어릴 적에 헛간으로 올라가 보았던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 눈에 새겨진 듯 서서히 윤곽이 잡히며 떠올랐다. 땀에 젖은 셔츠와 헤진 바지, 새카만 굳은살 같은 건 뒤늦게 조각조각 떠올라 의식적으로 맞추지 않으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 나이가 다 되도록 나나 유리는 아버지와 거리감이 있었다. 우리가 슈텐에 올라왔을 때가 열여덟, 열여섯 살 때였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줄곧 우리의 어떤 부분을 수치스럽게 했다. 교육을 받고 장인으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하자 그는 우리의 감추고 싶은 약점처럼 자리 잡았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가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다리를 쭉 뻗은 채 손바닥으로 의자를 짚고 발바닥을 달랑거리면서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번에 나는 슈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일단 일정이 있었다. 최근 나는 거래처에 납품할 상자의 개수를 두 배로 늘렸다. 조수 갈리나의 업무 속도가 늘었기 때문이다. 밤을 새서 한 번에 도면을 그리고, 하루 쉬었다가 또 남은 하루를 몽땅 매진해서 상자를 짜고 맞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갑자기 공방을 비우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가 건방을 떨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걸. 누나는 표정 관리를 못하니까.”

, 그래.”

나는 기름이 적당히 버무려진 기분 좋은 무게의 면을 포크로 들어 올렸다. 테라스 아래로 가게로 뛰어 들어오는 겐나디의 금발 정수리가 보였다. 나는 문득 깨닫고 말했다.

저 애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그것이 적잖이 충격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저 애는 아버지를 닮았네.”

그래, 쟤가 좀 호구 같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지 혼자 살겠다고 배신할 애론 안 보이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 날 밤, 나는 갈리나가 사포질을 해둔 나무 조각을 손끝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며 앉아있었다. 작년 이맘때에는 우물쭈물 실수를 하던 갈리나가 이제 가시 같은 건 도무지 참아줄 수 없다는 듯 박박 사포질을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갈리나는 원래 내 조수가 아니었다. 네 달 뒤에는 원래 자신을 가르쳐주던 마이스터에게로 떠날 것이다. 나는 임시로 그녀를 맡은 것에 불과했다.

갈리나가 없으면 이 넓은 공방도 사실은 쓸모가 없었다. 자는 곳과 일하는 곳을 분리하는 것만 포기하면 내 아파트로 돌아가서 이 크고 작은 상자들을 수십 개, 수백 개는 만들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수십 개, 수백 개를 팔아서 돈을 벌고 나면. 자유로워지고 나면. 물론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내 인생은 짜 맞춰진 상저처럼 반듯하고 단정하게 흘러갔다. 오늘 오후처럼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겐나디의 방문 같은 건 더는 내 삶에 찾아와서는 안 됐다. 그런 건 이미 한 번으로 족했다.

엎드린 채 몇 번이고 나무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다가 눈을 감았다. 잠결에 누가 벌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나는 끙끙거리면서 점차 의식의 아래로 떨어졌다. 묵직한 어둠이 추처럼 내 발 끝에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잠이 들었는데도 꿈이 시작되지 않는 내 상태에 조금 겁을 먹었다가 불현듯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것은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겐나디의 방문과 비슷했다. 내 의식 속으로 뛰쳐 들어온 겁에 질린 새끼 사슴 같은 걸 다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첫 번째 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꿈이 찾아들기 전에 먼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어둠 속에서 막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내 육신과 정신이 먼저 그것에 호응해, 그들의 계획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도록 일찍부터 내 의식을 준비 상태에 두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예정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듯 내 의식을 어둠 속에 준비해두고 꿈이 찾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던 것 같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내 두 번째 꿈을 기다리며 불 꺼진 의식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이었다.

꿈은 씨앗이 움트는 것처럼 작은 점으로써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곳에서 시작되었다. 새까만 천에 구멍을 뚫어 태양을 보듯 빛이 놀랄 만한 속도로 쏟아지면서 점차 공간을 팽창시켜 나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풍경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빛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점점 거대해졌다. 물결은 어느덧 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꿈인 줄 알았다. 내 눈앞으로 펼쳐진 무한한 황금의 물결은 아무리 보아도 벌판의 그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키가 다 자란 곡식들은 바람이 불 때면 물결처럼 넘실거리며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파도치듯 무언가를 꾸역꾸역 밀어내면서 자유롭게 내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결이란. 아니, 다 자란 황금의 곡식들은 그런 자유와는 또 다른 성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끝이 정해진 깊이, 힘껏 뛰어들면 사람의 형체도 짐승의 형체도 모조리 삼켜버릴 듯하면서 결국 땅 위에서 숨겨주는 게 고작인 그 한정적인 깊이였다. 물결처럼 다 숨겨주지도 못하고 빨려 들어가지도 못하는 무용한 황금의 물결그것이 물결치며 우짖는 소리들쏴아아하는, 그 흉흉함이란.

나는 갑자기 열여덟 살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내 뒤로는 겁에 질린 유리가 헐떡이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우리는 벌판을 가로질렀지만 벌판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멀리 가지 못했다. 우리의 현실은 땅처럼 우리 발밑에 있었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좀 더 촉각적이면서 청각적인 것이었다. 나는 어음과 동전에서 나는 냄새를 혐오했으나 동전이 떵그렁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것은 좋아했고 자라면서 그 둘 다에 점차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멈추어 섰다. 반사적으로 내 손을 매만지면서 정신을 차렸다. 발밑이 축축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자 차갑고 축축하면서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금빛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황금의 물결이 내 발을 적시며 아득히 먼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벌판이 아니었구나.’ 나는 생각했다. ‘바닥이 없는 꿈이었구나.’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과 먼 꿈이다. 나만의 꿈이다.

나는 축축해진 뺨을 문지르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깨어나면 공방을 비우고 갈리나를 맡아줄 새 장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 다음에는 튼튼한 신발과 조금의 돈을 챙기는 것이다. 지나 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거래처와 계약을 조율하는 것이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일들은 항상 내 삶을 더 나은 쪽이 아니라 더 불길한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변화가 싫었다. 장인으로 있는 게 즐거운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이 꿈도 그러하기를. 나는 의식이 점차 위로 솟구치는 것을, 내 영혼이 내 어두운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위로 훅 잡아끌렸다. 나는 점점 내 몸의 형태가 감각으로써 되살아나고 재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으로 늘어진 왼 손, 뺨을 대고 있는 매끄러운 나무의 재질, 벌어진 입술에 고인 미지근한 침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식이 도착한 곳을 받아들였다. 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꿈에서 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실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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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다르, 들었어? 푸른 매의 히라이드가 아드리나를 좋아한대. 벌써 우리 중 절반은 알고 있을 걸. 사르다르는 잠자코 듣다가 되물었다. 어느 아드리나?

 바람거미의 아드리나. 사르다르의 시큰둥한 반응이 비난처럼 느껴졌던 건지 도도나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놀리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그냥, 언젠가 걔네 둘이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기분이 뭔지 궁금했거든.

 사르다르는 수평선을 응시했다. 뭐, 둘만 좋다면 결혼하는 거지. 그는 바람거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청혼을 하게 되려나.”

 “글쎄, 모르지.”

 사르다르가 꿩을 세며 대답했다.

 “우리 중 하나를 좋아하게 된다니, 상상이 잘 안가.”

 “음,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도도나는 벌렁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

 “난 누구랑 결혼하게 될까?”

 “오아시스에 물어보는 건?”

 흔한 주술이었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정확히 걸렸을 때 나무 아래 흙을 한 줌 집어다 오아시스에 뿌리고, 물이 다시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비추면 되는 것이다. 아무도 깨지 않은 낮이어야 한다는 점이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기는 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정말로 성공했다고, 그래서 수면에 비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아.” 도도나는 질색하다가 되물었다. “넌 해본 적 있어?”

 “아니.” 사르다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건이 까다롭잖아.”

 “그건 그래.” 도도나는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우리 중 하나랑 결혼한다면 누가 좋을까?”

 “글쎄….” 사르다르는 꿩을 전부 셌다. “이다이라?”

 도도나가 벌떡 일어났다.

 “뭐?!”

 “예쁘잖아.”

 사르다르는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스물일곱 마리 전부 있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다음 날 사르다르가 일어났더니 마을 아이들 절반이 그가 이다이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확인 차 찾아온 몇몇 아이들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사르다르는 부정 대신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며칠 뒤 이스니야의 모든 아이들-심지어는 일부 어른들까지도 사르다르가 이다이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한낮에 일어나 노나임을 짜고 있으니, 누워서 잠을 자던 사르다르의 어머니 자드나가 웅얼거리며 물었다.

 “이다를 좋아한다며?”

 “음, 네.”

 사르다르가 입으로 직접 인정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백했니?”

 “아뇨.”

 “그럼 이미 늦은 것 같구나.”

 자드나가 하품하며 말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잖니….”

 실을 너무 잡아당기고 있어. 사르다르는 생각했다. 여길 잡아당겨도 다른 실이 딸려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었네. 다 엮여 있는 부분이었구나. 하지만 그는 실을 끊어버리는 대신 손에서 놓아버렸다. 노나임을 망친 사르다르는 자드나를 바라보았다. 그새 잠에 빠져든 자드나는 몸을 뒤척이며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음 날 계시처럼 이다이라가 찾아왔다. 물 항아리를 얹은 채였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한 손으로는 항아리의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로 카프탄의 끝자락을 들어 올리더니 중심을 잡으며 천천히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렸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다이라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침착했고, 사르다르는 엉망으로 꼬인 노나임을 떠올렸다.

 “안녕, 이다이라.”

 사르다르가 인사했다.

 “안녕, 사르다르.”

 이다이라는 사르다르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어서.”

 어쨌든 자드나가 사르다르에게 충고하는 대부분의 일은 들어맞는다. 관계에 관한 문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사르다르는 돌아서는 이다이라에게 나중에 보자고 대답했다. 이다이라의 옷자락이 모래에 끌려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사르다르는 그것을 쫓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떠들썩하던 소문은 금방 잠잠해졌다. 아이들은 평상시처럼 맥 빠진 표정으로 “어, 그래. 난 이다이라를 좋아하지.”라고 대답하는 사르다르에게 오히려 질린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다가 그만두는 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아이들은 이다이라에 대한 사르다르의 기호가 그의 표정처럼 흐지부지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다이라와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엄숙한 얼굴로 사르다르의 표정을 감시하던 마지막 아이까지 뿔뿔이 흩어지자, 사르다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다이라에게 말했다. “끝난 모양이야.”

 그 뒤에도 사르다르와 이다이라는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지냈다. 어느 순간에는 이다이라조차 사르다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구만 구천 걸음의 날에도 다를 바는 없었다. 마주쳤을 때에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혹은 거절하고 거절받은 날처럼, 혹은 그 뒤의 나날들처럼 “안녕”하고 서로 인사를 건넸다. 이다이라는 물 항아리 대신 짐을 이고 있었고, 그녀가 걸어온 길에는 옷에 끌린 모래 위에 희미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보따리 틈에 짐을 끼워놓고 탑을 쌓기 위해 오아시스를 빙 돌았다. 호수를 반 바퀴쯤 돌았을 때 이다이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게 뭐지?”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경사진 길을 매끄러운 자세로 내려갔다.

 이다이라가 발견한 것은 오아시스 가장자리 한 구석의 움푹 파인 발자국이었다. 그 일대에 뿌옇게 흙이 올라와 수면이 자욱했다. 누군가가 삶을 걸고 마음을 빼앗기게 될 얼굴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말고 포기해버린 흔적이었다. 뒤따라 내려온 사르다르는 발자국을 살폈으나 오르막길에서 느닷없이 뚝 끊어져 시선으로는 추적할 수가 없었다. 사르다르는 이다이라에게 주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봤을까?”

 이다이라는 무릎을 접고 앉아 심각하게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음, 흙이 가라앉기 전에 떠났으니까 못 봤을 걸.”

 “우리 소리를 들었나봐.” 이다이라가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누군가 깨어있으니까 어차피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사르다르는 이다이라의 옆에 서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흙이 가라앉고 있었다. 수면이 점점 투명해지는 동안 바람이 불었다. 물 위로 부서지는 수십 개의 빛들이 찰랑이며 땅과 부딪쳐 흩어졌다. 이다이라처럼 마음을 편안하고 충만하게 하는 적요한 평화였다. 사르다르는 깨끗한 수면 위로 떠오른 이다이라의 얼굴을 보았다. 이다이라의 보랏빛 눈이 스스로를 바라보다 말고 사르다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순간 움찔거렸다. 이다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사르다르는 뽀얗게 먼지가 묻은 이다이라의 카프탄 끝자락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래.”

 화들짝 놀라거나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해야하나? 그건 어쩐지 이다이라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모래 위 희미한 한 줄기의 자국처럼 남아서 사르다르를 그 안으로 이끄는 것이 있다. 마음을 어떠한 태도로 다루고 말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면 이다이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걸어들어간다면 좋을 것이다. 탑을 쌓고 집으로 돌아가서 노나임을 짜야겠다고 사르다르는 생각했다. 꼬인 실을 풀고 원래 계획했던 문양을 짜 넣는 일이다. 그 문양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실을 끊지 않았다.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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