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HWMH «열 번의 계절» 비밀글
1차/old 2019. 10. 30.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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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not found «목요일»
1차/old 2019. 10. 30. 01:04

땅이 흔들리고 진동이 점차 구멍에서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매캐하고 텁텁한 연기가 바닥에 내려앉고, 진동이 서서히 멎을 무렵, 'D역'은 눈을 감았다. 몸을 밟고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 무쇠로 된 뱀의 열차와 곳곳에 깔린 노란 안전 보도블럭. 이곳은 역이다. 하루 수십 명이 지나는 이곳은 작은 세상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진풍경이었으리라. 개미처럼 제 위를 걷는 사람들의 파도를 'D'역은 언제나 관조하고 있었다. 실로 흥미로운 관찰이 아닐 수 없었다. 제 안에는 바닥을 보고 걷는 사람이 있고, 바쁘게 뛰는 사람이 있고, 길을 잃은 미아가 있고,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소매치기와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들이 있었다. 걸인이 있고, 흥에 취해 기타를 퉁기는 거리의 연주가들이 있고, 잡상인이 열차 곳곳을 돌아다니며 목청을 높였다. 제 위를 흐르는 열차들은 대게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말을 걸 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사람들을 싣고 빠르게 그를 스쳐가곤 했다. 'D역' 은 제 안을 흐르는 모든 소음을 작은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작은 세상이었기 때문에 'D역‘ 은 그리움과 쓸쓸함을 알지 못했다.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에 알맞게 알림을 울리거나, 승객의 돈을 냉큼 삼켜버린 심술궂은 자판기를 달래주거나, 잔뜩 골이 난 채 터널을 달리는 지하철들에게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것을 빼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D역‘ 은 이내 많은 부분을 그저 버려두는 것이 습관이 된다. 그것마저 성에 차지 않았을 때, ’D역‘ 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부터 쏟아져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전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구나, 라던가, 혹은, 저 조그만 사람들은 얼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양복을 입고 하이힐을 신는 어른이 되는 걸까? 라던가, 그런 질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저 피곤한 표정을 달고 그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버리는 것일까. 생각이 자랄수록 배수관의 쥐들은 늘어나고 조금씩 커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표정을 뒤집어쓰고 열차에 올라 사라졌다가 돌아왔다가 쏟아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D역’ 은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사람들의 세계에 녹아들었다. 언어를 터득하고 짐작했다. 저것은 저것이고, 이것은 이것이고, 그래, 오늘도 당신들은 출근을 하는구나. 피곤함을 달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으레 선심을 쓰며 온몸을 판판하게 펼치곤 했지만, 사람들이란 둔하기 짝이 없어서 ‘D역’의 말과 행동을 알아듣지 못했고, 대게는 그 위를 구둣발로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위안이었다. 그래도 ‘D역’ 은 정해진 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그 피곤한 얼굴들을 좋아했다. 재미있던 것은 요일마다 달라지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D역’ 은 목요일의 그들을 안쓰러워했다. 부쩍 지쳐 보이는 사람들은, 그러나 내일은 주말을 앞둔 평일의 마지막 요일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이 반짝이는 눈으로 열차에 올랐다. 동시에 수요일을 거쳐 피로에 찌든 몸뚱이가 옮기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제 위로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D역’ 은 일주일을 셌다. 가장 무거우면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D역’ 의 머리 위로 무게가 꾹 꾹 짓누르면, 아, 목요일이구나, 했다.

‘D역’ 이 유심히 살피던 청년이 있었다. 잔뜩 움츠리고 긴장한 표정의 그는, 그러나 어딘지 희망차보였고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둥그스름한 안경 아래로 반짝이는 눈이 있었다. 단정히 손질한 머리에 어정쩡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청년은 초조한 듯 시계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그 익어가는 청춘의 냄새를 ‘D역’ 은 맡을 수 있었다. 첫 출근이구나! 행운을 빌어, 라고. 제 위를 밟고 안전선을 겅중겅중 뛰어 열차에 오르는 청년의 아래에서 그는 힘껏 몸을 펼쳐 배웅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그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궁금해서 기다렸고,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어서 자꾸만 기다려야 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지하철이 수상한 냄새를 달고 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네게서 피 냄새가 나.”

‘D역’ 은 불쾌한 듯이 움츠렸다.

“내가 사람을 먹었거든.”

지하철이 킬킬거렸다.

“한 남자가 내 발 밑에 떨어진 애를 구하고 깔려죽었어. 그래서 내가 그를 먹어버렸지.”

지하철의 발밑에서는 채 다 익지 못하고 터져 죽은 청춘의 냄새가 났다. ‘D역’ 은 그 냄새의 주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분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를 미워할 거야."

나는 진작부터 너를 미워하고 있었어. 그 말을 끝으로 지하철은 입을 다물고 만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지하철은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내달렸다. 피 냄새가 흐릿해지고 진동이 다시 멀고 먼 어둠 속으로 사라질 무렵, 분노한 역은 더 이상 알림을 울리지 않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의 목소리를 삼킨 지하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미움을 배운 ‘D역’ 은 끝이 없는 꿈을 꾸었다. 지하철이 하염없이 그의 안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여전히 쏟아져 내렸지만, 'D역‘ 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안에는 매일 밤 운행이 중지된 제 안의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청년이 있었다. 너는 죽어버린 거니? 지하철 역 ’D‘ 는 되물었지만 그것은 또한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매일 꿈을 꾸고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D역’ 이 폐쇄된 것은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판기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 역을 만들었다더군. 새로운 ‘D역’ 으로 사람들이 쏟아질 거야.

그럼 나는 버려진 건가. ‘D역’ 이었던 그는 대답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지. 나는 아주 오래된 역이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까.”

조금 서글펐다. 다시는 제 위를 지나는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고, 사람들의 거무죽죽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 많던 하이힐과, 운동화와, 음악소리와 자판 소리가 들리지 않을 작은 세계의 종말을 ‘D역’ 이었던 무언가는 슬픔으로 천천히 받아들인다. 자판기는 희극적으로 키득거렸다. 그거 참 서글픈 일이군.

“앞으로 무엇을 할 거지?”

'D역‘ 이었던 그는 생각한다. 눈을 감자 제 안으로 떨어지는 죽은 청년이 있었다. 둥그스름한 뿔테 안경, 어쩐지 움츠린 어깨와 초조한 낯빛, 그럼에도 희망이 있던 눈과 두툼한 서류철. 익어가는 청춘의 냄새를 품고 돌아오던 지하철. ’D역‘ 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을 꿀테지.”

‘D역’ 은 피곤한 목소리였다.

“내내 꿈을 꿀거야.”

그 날은 목요일이었다.

 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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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졸업»
1차/old 2019. 10. 30. 01:02

1.

작년에는 온도가 무려 영하 5도까지 내려갔다. 강당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놨는데도 입김이 나와서 학생이며 학부모며 할 것 없이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난다. 기재는 그 때, 졸업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추워 뒤지겠다. 그게 기재가 기억하는 자신의 졸업식이다. 눈물콧물 빼거나 아련한 기억 같은 건 없었다. 그게 교복 입고 맞이하는 마지막 졸업식이라고 해도.

김기재가 낙대부고로 돌아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한 번은 근처 사는 친구가 불러서, 또 한 번은 후배 졸업식 때문이다. 부르는 녀석들이 많았다. 과연 마당발이란 말이 민망하지 않을 만큼은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갈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학교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다. 그러니까 기재는 지금 낙대부고에 있다는 소리다.

쌀쌀하긴 했지만 또 무지막지하게 추운 것도 아니었다. 나갈 때 어플을 확인하니 영하 3도였다. 작년보다 고작 1도 올라간 건데, 작년보다 이렇게나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하지만 작년에 기재는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조금 다른 걸지도 모른다. 학생인 것과 학생이지 않은 것의 차이. 학교에 소속된 자들은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요란하게 반응하게 되니까 말이다. 요컨대 맛있는 급식이 나오는 날이면 짧은 경주가 벌어지고, 작은 추위에도 금세 오들오들거리고, 히터를 틀면 금방이고 곯아떨어지고. 치열한 인생. 치열한 일상. 기재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교는 몹시 크고 왁자하지만 다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맛있는 학식이 나온다고 몰려가지 않는다. 추우면 아무 옷이나 더 걸치고, 더우면 아무 곳에서나 훌렁훌렁 벗어둔다. 교복을 입는 사람도 없다.

강당에는 일렬로 의자가 늘어서있고, 아이들이 빠짐없이 앉아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예전엔 뒤통수만 보고도 이름을 부를 수 있었는데 고작 일 년 만에 그 뒤통수가 그 뒤통수가 됐다. 아는 후배들이 적어도 저 틈바구니에 스무 명은 될 텐데,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뒤통수를 긁다가 엉거주춤 벽에 기대어 섰다. 학부모도 아닌데 학부모 석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어른들 틈에 껴있는 건 아무리 기재라도 불편하다. 차라리 어색한 애와 한 시간 동안 밥을 먹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강당 문이 닫혀서, 아 졸업식 시작하네. 하고 앞을 보았다. 교가가 울리면 기재가 고개를 빼고 뒤통수들을, 그 많은 뒤통수들을 바라본다. 김기재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

기재는 사실 보러온 사람이 있었다.

 

 

2.

김기재는 3학년이 되자마자 육상부를 그만두었다. 특별히 붙잡거나 설득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재는 2년 간 열심히 뛰었고, 프로가 될 만큼 잘 뛰지는 않았고, 스스로도 프로가 될 마음은 없었으며, 슬슬 대학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실제로 대다수의 아이들이 3학년에는 부 활동을 그만두었다. 부활동 미지망에 동그라미를 치고 종이를 제출하고 돌아오던 날, 중앙계단에서 소성단을 보았다. 성단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겨울 방학동안 머리카락이 길어서 말꼬리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기재는 성단이 겨울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겨울방학에 너는 뭘 하고 지냈냐고 묻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질문이 끝난 후 성단이, “선배는요?”라고 묻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색해지고, 그럼 또……. 그러는 사이에 성단은 계단 끝까지 내려갔고 난간을 따라 방향을 바꿨는데, 하필 기재가 너무 눈에 띄는 곳에 서있던 모양인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이런 타이밍은 보통 로맨스의 시작인데 말이야… 기재는 어째 죄지은 사람처럼 굳었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안녕?”

“네, 안녕하세요.” 성단은 덤덤한 표정으로 반쯤 고개를 숙이곤 기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제 기재가 뭔가를 말할 차례인가? 그런데 무엇을 말해야 저 애와 덜 어색하게, 덜 이상하게, 그러니까 덜… 애써보이도록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 보통 애들하고 뭐하고 떠들더라? 진짜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기재가 뭘 더 시도하기도 전에 성단은 반대편 계단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탕탕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바짝 굳어있던 어깨도 풀렸다. 정신을 차린 후에야 기재는 제 손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위로 솟구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론 절대 반사적으로… 인사하지 말아야지. 손바닥을 교복 바지에 문지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3.

“헐.”

기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A가 입을 벌렸다. A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잘 지냈냐.”

기재가 히죽 웃자 A가 달려와 기재의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뭘 웃어, 뭘 웃어.”

“야, 뭘 때리고 그르냐, 정 없게…….”

기재는 움츠리는 척하면서도 A의 발길질을 다 받아주었다. 맞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A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지 벌써 두 달은 다 된 것이다. 그럼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내자. A가 그렇게 말했는데 기재는 그 카톡에 답도 안 했다. 그러다 졸업한다고 찾아오기나 하고. 여하튼 자기가 생각해도 좀 개새끼였다.

“나 진짜 올 줄 몰랐다고…….”

A가 얼굴을 붉히며 우는 시늉을 했다.

“나도 안 올까 하다가 온 거야.”

기재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애들한텐 오늘 온다구 말했어? 다들 선배 안 오는 줄 알아. 메시지 다 씹었다며?”

“그러니까 그게 씹은 게 아니고 고민을 한 거라니까….”

“여하튼 김기 선배 대학가더니 완전 매정해졌어.”

A는 투덜거리다 말고 언제 그랬냐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나보러 온 거야?”

기재는 세 달 전에 A의 고백을 걷어찼다.

“…좀 미안해서.”

기재는 돌려서 대답했다.

“염치는 있네, 그래!”

A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나 오늘 선약 있어서 같이 밥은 못 먹어준다? 애들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밥 먹고 갈 거면 말하구.”

“됐어. 밥까지 같이 먹을 생각으로 온 거 아니야.”

“아 그렇다고 그냥 보고 가게? 그것도 좀 웃기잖아. 뭐라도 같이 먹어.”

A는 기재의 대꾸도 없이 몸부터 돌렸다.

“나 애들한테 말하러 간다?”

붙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인데 순식간에 뛰어갔다. A가 인파속으로 사라지자마자 학생들이 대거 우르르 이동했다. 각자 가족을 찾거나 일행을 찾는 것이다. 기재는 꽃다발과 약간의 울음, 사진 플래시 속에서 엉거주춤 서있다 말고 다시 한 번 뒤통수를 긁었다. 진짜 얼굴만 보다 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그대로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뒤통수. 기재는 뒤통수를 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기재 옆을 스쳐갔다. 순간 얼이 빠졌다. 생각과 함께 정신이 마치 길게 늘어난 고무줄이 결국 탄성을 이기지 못 하고 되돌아오는 것처럼 한꺼번에 퉁겨져 왔다. 쾅, 한 대 맞은 기분으로 기재가 눈을 끔뻑였다. 어? 진짜 그 소리밖엔 안 나왔다. 어?

어라?

그 뒤통수는 분명 파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4.

그러니까 이건 한참 오래 전의 이야기다. 다시 기재의 고3 첫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육상부를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등교할 시간이 아닌데도 번쩍 번쩍 눈을 뜨고 그랬다. 연습도 없고, 일찍 등교할 필요도 없는데도 괜히 밖을 나와 쏘다니다가 등교하고, 또 쏘다니다가 하교했다. 담벼락 앞에서 멈추어본 적도 있다. 여전하게도 낙대부고 담벼락에는 가방과 학생들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도 땡땡이치는 사람들은 영원할 테지. 이건 역사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그 애들을 오래 보고 있었다. 솔직해지자면 조금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기재는 육상부를 그만둘 때까지 단 한 사람과 친해지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다. 뭐라고 부르지 그걸. 마지막 기회? 딱히 뭘 더 해보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딱 한 번만 더 마주치면 좀 덜 어색하게 인사하고, 좋게 끝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소성단과 마주칠 수가 없었다. 육상부를 나온 것뿐인데 무슨 얘가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이런 게 운명인가? 아, 신이시여. 저는 정녕 그 무뚝뚝한 후배랑은 망한 관계로 남는 건가요?

그러자 신이 기재를 가엾게 여겨 작은 기회를 하나 만들어주었다. 담벼락에 서서 실없이 땡땡족들을 구경한지 일주일 째 되는 날, 기재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던 성단을 마주치게 되었다. 이번에 기재는 준비되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올라가던 손을 내리곤 잠시 주먹을 쥐었다가 타이밍 좋게 웃었다. “안녕.”

성단도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 후에 성단은 잠시 멈췄고, 기재는 고민했다. 잠시 후 기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연습 없어?” “아, 자율이에요.” “그러냐.” 그리고 침묵이었다.

둘은 천천히 내리막길을 함께 걸었다. 성단은 말수가 많은 후배가 아니기 때문에 대체로 기재 쪽이 일방적으로 열심히 떠들어야 했는데, 대체로 날씨와 취향, 계절과 색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육상부였으니까 연습이나 달리기 이야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기재는 육상부가 아니고, 성단과 할 시시한 이야깃거리는 동이 났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은 정말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없이. 언덕을 내려왔고, 도로변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신호등 옆에 포장마차가 열려 있었다. (이게 바로, 신이 기재를 가엾게 여겨 내려주신 기회였다.) 기재가 고개를 돌려 포장마차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성단아, 너 타코야끼 좋아하냐?”

“타코야끼요?”

성단도 기재가 바라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포장마차는 녹색이었다.

성단이 대답했다.

“네, 좋아하는데요.”

“사줄까?”

“아…….”

“사줄게.”

성단은 아주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흔쾌히 대답했다.

“네, 그래요.”

그래서 둘은 타코야끼를 먹게 되었다. 3월 중순의 어느 날. 아직 날씨가 다 풀리기도 전이라 쌀쌀하고, 벚꽃전선이 유독 느리게 확산되던 그 해에,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선배와 후배가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타코야끼를 주문했다. 성단은 타코야끼를 잘 먹었다. 기재는 두 판이나 더 주문했다. 둘은 도합 24개의 타코야끼를 먹어치웠다.

“너… 진짜 잘 먹는다.”

기재가 그렇게 말하자 성단이 타코야끼 접시를 들다 말고 기재를 바라보았다. 기재는 금세 머쓱해졌다.

“아니… 눈치 주려고 그런 게 아니고……. 많이 먹어. 잘 먹어서 좋다고.”

성단이 딱히 뭐라고 한 게 아닌데, 늘 이런 식이었다. 왜 얘 앞에선 긴장하게 되지? 로맨스 텐션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과… 극도로 잘 안 맞는 사람 앞에서 잘 보이고 싶게 되는 뭐 그런 거? 하지만 기재가 뭘 어쩔 수 있을까? 기재는 여태까지 대부분의 유형의 사람들과 잘 지내올 수 있었다. 성단과는 잘 안 됐다. 농담을 하다가 오히려 백만 배는 멀어진 느낌이다. 학기 말까지 그런 식으로 빙 거리를 두다가 완전 어색해졌다. 적어도 기재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성단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의식하거나 애쓰지 않아야 한다는 걸,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에 맡기며 그 애의 일상에 놓여 져야 한다는 것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전략도 실패했고 시기도 놓친 기재는 그러니까, 이대로 영영 후배와 멀어지게 되는 건가?! 하지만 신이 기재에게 타코야끼를 내렸으니, 지금 그 후배는 옆에서 따끈따끈한 문어 빵을 맛있게 먹고 있다. 성단을 흘끔거리던 기재는 갑자기 배가 더부룩해져서 접시를 내려놓았다. 가쓰오부시가 소스와 함께 접시 벽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소성단, 너도 3학년에는 육상부 그만둘 거야?”

성단은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냐는 얼굴이었지만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왜요?”

“그냥. 궁금해서…….”

기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대학 가면 너랑은 아예 못 보겠네.”

“그렇겠죠.”

성단은 마지막 타코야끼를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타코야끼는 맛있었지?”

기재가 맥락 없이-그러나 엄밀하게 맥락이 있는 것처럼-물었다. 성단은 왼쪽 볼로 타코야끼를 옮겨서 꼭꼭 씹어 먹더니(귀여웠다) 다시 한 번 대답했다.

“그럼요. 타코야끼는 맛있었죠.”

그 말에 기재는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성단이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기재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덤덤해졌다. 성단도 이제는 기재가 실없이 웃어대는 게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트렉 앞에서 끝낸 참이었다.

“어디가 재미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성단이 말했다.

“괜찮아.”

기재는 성단의 파란 목도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늘 네가 재미있었어.”

원래 목도리는, 목도리라는 것은 따뜻하기 위해 두르는 것인데 그렇게 차갑고 진한 색을 목에 두르고 서있다니.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5.

소성단! 하고 불렀더니 파란 목도리가 뒤를 돌았다. 진짜 소성단이다. 기재는 인파를 헤치고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다. 성단이 겨울의 햇살 앞에서 멈추어 섰다. 기재는 강당 차양의 그림자 앞에서 멈추어 서서 그 애를 바라보았다. 쌩글거려도 될까?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둘은 연락도 안 하고 더 이상 같은 학교를 다니지도 않는다. 기재는 그래서 활짝 웃었다.

“야, 간만이네.”

“아, 안녕하세요.”

성단은 기재를 (다행스럽게도) 알아보았다. (다행인 일인가?)

“야 이 년밖에 안 됐는데 왜 이렇게 그것보다 오래 전에 봤던 애 같냐, 너는.”

기재가 실없이 말했고, 성단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집 가는 거야?”

“일단 하교하는 거죠.”

“야, 나도 가는 길인데 같이 내려가자.”

“집 다르잖아요.”

“매정한 녀석. 언덕만 같이 내려가자는 거야.”

성단은 기재가 이사한 줄 알고 있을까? 어쨌든 이사를 한 거나 이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는 거나 성단에게는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만나지 못 한다는 것도 똑같고,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렇다. 기재와 성단은 거의 이 년 만에 같이 언덕을 내려갔다. 그 담벼락을 지나쳤다. 겨울이라 담쟁이 넝쿨이 다 죽어서 시뻘겋게 줄기만 매달린 그곳을. 올해는 작년보다 따뜻했다. 제작년보다 따뜻한 것도 같았다. 졸업식이라 담을 넘는 사람은 없었다. 기재나 성단이 도중에 멈춰서 그 애들의 가방을 받아주거나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둘은 천천히, 그러나 동시에 한없이 빠르게 그 언덕을 내려가면서 몇 가지 실없는 대화를 했는데, 역시 기재 쪽이 물어본 것이고 성단은 대답을 한 것이다. 그래도 무척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냥 간만에 본 선후배 같았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올 즈음에는 할 말이 다 떨어져서, 약속이나 한 듯 기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사실 기재가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한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기도한 적도 없다. 그래도 이 언덕의 신은 기재가 구제하기 힘든 상황에 막혔을 때, 가끔 이렇게 기적을 내려주는 법이다. 기재는 그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 포장마차를 보았다.

타코야끼!

기재가 성단을 바라보았는데, 소성단은 시선을 느끼곤 덤덤하게 기재를 마주보았다. 기재는 웃을까 말까 고민하다가-그렇다, 다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그냥 또다시 웃어보였다.

“야, 소성단. 타코야끼 먹을래?”

마법의 주문을 불러요~

“사주시려고요?”

어색한 후배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해주세요~

“당연하지. 내가 후배한테 얻어먹겠냐? 그것도 막 졸업한 애한테.”

랄랄라~

그래서 둘은 이 년 만에 타코야끼를 먹게 되었다.

포장마차의 가격이 작년보다 한 접시 당 300원 올라있었다. 하긴, 이 년이면 물가도 오를 수 있다. 요즘은 일 년만 지나도 세상이 뒤집어 지는 시대다. 기재는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300원의 물가 상승쯤이야 거뜬하다. 기재는 시작부터 두 접시를 주문했다.

“많이 먹어, 야.”

“감사합니다.”

성단은 예나지금이나 타코야끼를 잘 먹었다. 기재는 타코야끼를 먹으며 생각했다. 예전보다 맛있는 것 같은데? 이 년간 사장님이 스킬을 올렸나? 하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었고 사장님께 저기요, 혹시 새 비법을 손에 넣으신 건가요? 라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그것은 영영 시시껄렁한 의문과 비밀로 남았다. 여하튼 둘은 비밀의 타코야끼를 ‘예전에도’ 그랬듯이 ‘오늘도’ 맛있게 먹어치웠다. 성단은 정말로 잘 먹었다. (귀여웠다)

“졸업식 때 울었어?”

기재가 물었다. 성단은 타코야끼 한 알에 푹 꼬치를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 아뇨.”

“하긴, 나도 그랬어.”

기재가 타코야끼를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말했다.

“나도 내 졸업식 땐 진짜 덤덤했거든. 게다가 졸라 추워서. 뒤지는 줄 알았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어.”

“아, 저도요.”

성단이 공감했다.

“강당이 좀 추웠죠. 히터가 한쪽이 고장 났대요.”

“진짜? 난 따뜻했는데.”

“선배는 코트 입고 있잖아요.”

성단이 지적했다.

“전 추웠어요.”

“그러냐.”

기재는 타코야끼 한 판을 더 주문했다. 성단의 접시에는 타코야끼가 두 알 남아있었다. 새 타코야끼 판을 받자마자 기재는 성단의 접시에도 타코야끼를 추가해주었다. 성단은 군말 없이 따뜻한 타코야끼를 받아서 또다시 먹기 시작했다.

“근데 난 아까 교가 다시 부를 때 말이야. 식 시작할 때 말고 끝날 때. 그 앞에 슬픈 노래 나오고 나서 니들 다 같이 일어나서 다시 부를 때 말이야.”

성단이 기재를 바라보았다. 기재는 실없이 웃었다.

“난 그 때, 진짜 웃긴데, 좀 슬퍼서 눈물 나오더라. 내 졸업식도 아닌데.”

“그러게요, 웃기네요. 선배 졸업식도 아닌데.”

성단이 맞장구를 쳤지만, 진짜 웃기다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기재는 그게 우스웠다. 우습다고 한 건 소성단인데 왜 또 기재가 웃어? 하지만 둘의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근데 진짜 왜 슬펐어요?”

성단이 드물게 질문을 했다.

기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성단의 파란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몰라, 나는 그렇더라. 멀리 떨어진 것들에게 아쉽고 절박해지나봐.”

성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 후에 둘이 포장마차를 나왔더니 글쎄 벚나무마다 꽃봉오리가 올라와 있었다. 역시 오늘날은 지난날들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모양이었다. 졸업식에는 담벼락에서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고, 제작년에는 히터가 고장 나지 않았지만 추웠으며, 기재는 자기 졸업식보다 남의 졸업식이 더 슬펐다. 그래도 성단은 여전히 파란 목도리를 하고 있었고, 포장마차에서는 타코야끼를 팔았다. 변하는 것들과 함께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성단과 기재의 사이는 변했지만 둘은 변하지 않았고 그건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변하지 않고도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 있는 관계라는 것도 분명 있는 것이다.

기재는 또 실없이 벚나무를 올려다보다 말고 신호 앞에서 성단을 돌아보았다. 횡단보도가 초록 불이었다. 기재는 건너가야 하는데 성단은 그대로 직진이었다. 기재는 뒤통수를 긁다가 먼저 작별했다.

“나 가야 돼. 잘 있어.”

성단은 노란색 시작장애인 안내 보도블록을 밟고 서서 기재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졸업 축하해.”

“네, 타코야끼 감사해요.”

“건강하고.”

“네, 선배도요.”

그리고 기재는 길을 건넜다. 신호가 끊어지기 전에 길을 건너서 뒤돌아보니 성단도 직진으로 걷고 있었다. 쟤는 뒤돌아보지 않겠지? 언젠가 언덕을 내려오면서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기재는 뒤돌아보는 사람이니까 가끔은 타코야끼가 먹고 싶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이 징징 울려댔는데 기재는 그냥 받지 않고 마저 걸어 나갔다. 벚꽃 아래를 걸으면서 어떤 나날들을 상상했다. A나 A의 친구들이나 기재의 여타 후배들에게 몰매를 맞게 될 앞날도 모르고.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성단과 기재가 그렇게 헤어졌다.

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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