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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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었는데...”
“...양파 썰다가!...”
“왜 울었냐고?”
“양파때문이라고 대답했어.”
“...내가 양파냐...”
-개기면죽는다 中- 

 

 1. 

 섬에서 귀환한 이후 한동안 바르바라는 아주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허비했다. 일주일 정도는 해변을 걸으면서 수평선을 응시하고, 나중에는 숙소에 처박혀서 잠을 자고, 좀 더 나중에는 기사단 본부를 돌면서 다른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고통과 분노와 슬픔과 자책이 담긴 신음소리들이 바르바라를 꿰뚫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복도를 걷다 말고 멈추어 서서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오즈월드가 부랴부랴 다시 써네스 섬으로 배를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종종 바다를 보면서 해변을 걸어본 것도 그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수평선에서부터 나타날 배 한 척의 소식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써네스섬 탐사 임무가 끝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에는 써드빌에 보슬비가 내렸다. 바르바라는 어두컴컴해진 수평선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죽음을 이해시키고 현재의 상황과 타협하고는 바다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악몽이 시작되었다. 바르바라는 몽유병 때문에 종종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축축하게 젖은 채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이 상황을 실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바르바라가 남은 사람들과 번갈아가며 대화를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 그건 바르바라 뿐만이 아니라 살아 돌아온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숙소와 본부를 번갈아 드나들며 바르바라는 살아남은 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대화가 항상 죄책감과 상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주제는 항상 바뀌었고 때때로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대체로 듣는 쪽이었지만 누군가가 질문할 때에는 피하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자신 역시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르바라는 상대로부터 고통을 이끌어내어 입으로 그것을 실토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건 해독解毒의 과정과 비슷했는데, 그들이 삼키고 있는 괴로운 물질을 토하게 만들어 그 물질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만이 바르바라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절반의 죽음에 압도당하기보다 절반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죽은 자를 기리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서 움직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2. 

 주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르바라의 행동반경이 전보다 넓어졌다. 원래 그녀는 숙소의 개인 방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복도를 걷거나 휴게실 소파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의미 없이 쓰고는 했다. 그 무렵에 바르바라는 테사와 종종 마주쳤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모여앉아 십자말풀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르바라가 문제를 냈지만 곧 문제를 내는 쪽은 테사로 고정되었다. 

 바르바라는 써네스섬 탐사 이전까지 테사와 특별히 엮여본 적이 없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인사를 나누고 이따금씩 안부를 묻고 함께 보초 근무를 서고는 했지만 특별히 어딘가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나누어 마신 적은 없었다. 테사는 동료였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바르바라의 관록을 생각하자면 테사는 아직 그녀에게 있어 신참에 가까웠다. 영특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능력이 발휘되는 걸 눈앞에서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바르바라는 테사가 멈추지 않고 종이 위에 그어놓은 검은 선과 알파벳을 들여다보았다. 테사는 문제를 만들고 단어를 배열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펜을 잡는 순간부터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르바라는 펜을 들고 테사가 비워놓은 단어를 하나씩 맞추어 나갔다. 

 주로 곡선이고, 흔적이기도 해. / 궤도(orbit). / 반복되는 거야. / 그리고? / 그런 구조를 말하기도 하고. / 프랙탈(fractal). 

 테사의 단어가 바르바라의 무언가를 건드려왔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테사를 응시했다. 추상적인 단어들이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와 곡선. 흔적과 반복. 바르바라는 테사의 목구멍에 걸린 게 자신과 동일한 그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게임을 계속했다. 테사는 막힘없이 단어를 생각하고 그 자리를 비워서 바르바라에게 돌려주었다. 바르바라는 빈 사각형의 박스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를 닮았구나.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결국 단어에 얽힌 기억을 나눈다는 것과 비슷했다. 다음 날에도 바르바라와 테사는 휴게실에 앉아 게임을 계속했다. 테사가 쓰는 단어는 갈수록 단순하고 뜻이 모호해졌다. loss, syndrome, empty…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두 명료한 단어였다. 결국 하나의 이야기에 도달하기 위한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기억을 복기하고 있었다. 잃어버렸고, 비관적인 징조만을 포착했으며, 결국 빈자리를 마주하고 있는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졌다. 바르바라는 제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리온과 메이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길리언과 트윙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세이런과의 있었던 이야기를 조용히 되짚어보거나 이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이선의 습관을 이야기하거나  제인이 낚은 물고기들,  알렉스가 업무로 절절매던 광경 혹은 칼리오페가 걸어가던 길가에 남은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우리가 두고 왔으며 여전히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불가항력적인 그 힘들. 그 힘들은 점점이 분해되어 바르바라와 테사의 목구멍에 흩뿌려져 있었다. 미세한 독처럼 두 사람의 힘을 조금씩 앗아갔다. 바르바라는 진작부터 그 독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그 증거였다. 테사는 어떠할까. 테사는 어떤 방식으로 그 독에 노출되어 있는가. 

 어느 날 테사는 마침내 감정에 대한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공백의 사각 칸에 차분하게 그것들을 써내려갔다. 슬픔, 우울, 고통, 죄책감, 후회, 번민… 궤도와 프랙탈은 사실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짚어내기 위해 만든 단어다. 하지만 감정에 대한 단어는 결이 다르다. 그것들은 오로지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바르바라는 조용히 테사를 불렀다. 

 “루시엔.” 

 “응.” 

 “넌 영리하구나.” 

 테사가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난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보다 받아들인 이후가 더 쓸쓸해…,” 

 바르바라는 다시 십자말풀이 칸으로 시선을 내렸다. 

 “영리한 사람들은 미신을 믿지 못 하지. 우리는 그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믿는 게 아니라…,” 

 “되짚는 것뿐이야.” 

 “맞아.” 

 바르바라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고통스럽게 웃었다. 

 “맞아, 루시엔. 우리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들을 잃었다. 고통으로 몸이 절절 끓었다. 마음이 녹아내리더니 그 위로 알 수 없는 독성물질이 점점이 흩어져 끈적끈적한 액체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핏줄을 타고, 뼈를 감싸고, 피부 바로 아래에서 꾸준하게 흘러 다닌다. 바르바라를 악몽에 들게 하고 테사가 자꾸만 써드빌 바깥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게 한다. 그 때, 테사의 단어가 그 끈끈한 액체 속으로 빠지는 것이다. 모호하고 덩어리져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점점이 흩어진 독성의 물질들이 그곳으로 몰려든다. 테사의 단어는 자석처럼 새까만 점들을 이끌어 당긴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던 고통의 감정들이 흐물흐물한 테사의 단어와 함께 융합된다. 의미가 명확하고 단단해진다. 바르바라가 십자말풀이에 그것을 쓴다. 슬픔, 우울, 고통, 죄책감, 후회, 번민… 고통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 바르바라와 테사는 상처를 짚어서 복기하고 수복의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그런 게임을 십자말풀이라고 불렀다. 

 

 3. 

 왕명을 받은 후에 바르바라는 방으로 돌아와 숙소를 정리했다. 책상에 쌓인 잡동사니를 버리고 옷장을 비웠다. 침대보를 치우고 의자를 집어넣고 가방을 챙겼다. 

 숙소를 나왔을 때, 바르바라는 잠시 기사단 본부를 천천히 걸었다. 발자국의 모양을 따라 닳아 헤진 층계와 계단, 테라스 난간과 2층 창문, 식당과 휴게실, 빈 복도와 숙소의 샤워실을 천천히 거닐었다. 지난 십일 년 간 그녀가 꾸준히 지켜온 장소를 눈으로 쓸고 매만졌다. 그 장소에 머물렀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정말 모든 이들을. 그런 후에는 해변으로 나왔다. 

 파도가 치자 하얀 거품이 튀어 올랐다. 갈매기는 없었고, 모래사장은 황량했다. 바르바라는 해변을 따라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추어 서서 길고 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남풍이 불어와 바르바라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파도가 밀려들었다 빠져나가면서 그녀의 구두코를 적셨다. 

 바르바라는 주머니에서 수정조각을 꺼냈다. 수정조각은 바르바라의 손아귀에 들어오자마자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써네스섬에서 가져온 마법의 조각이었지만 큰 조각들은 모조리 왕에게 전달되었고 남은 건 한 손에 들어오는 조각 두어 개뿐이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바르바라는 그것을 제대로 꺼내보지도 않았다. 해변 가에 어슬렁거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써드빌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 할 지도 모른다. 수정 따위 알 게 뭔가. 마법이 살아있다면 어째서 나의 동료들은 죽었는가.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정말로 의미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더 이상 그런 생각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바르바라는 수정 한 조각을 분리해서 두 손에 쥐고는 작게 이름을 외웠다. 

 록웰. 

 레밍턴. 

 르윈. 

 리온. 

 드와이트. 

 길리언. 

 트윙클. 

 이반. 

 세이런. 

 이선. 

 그런 후 그녀는 수정을 그대로 바다에 던졌다. 수정은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파도치는 물결 사이로 사라졌다. 바르바라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반대로 불어서 이번에는 바다를 향하여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머리카락 때문에 자꾸만 눈앞이 가려졌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빈 기사단 본부가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그곳에 차례로 메이지와 리온, 알렉스와 칼리오페, 제인과 길리언, 트윙클과 이반, 세이런과 이선을 세워놓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하게 서있다 말고 바르바라를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든다. 바르바라는 인사하지 않는다. 잘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순간, 파도치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이닥치고 바르바라는 눈을 뜬다. 동료들의 환영은 사라지고 광활한 수평선만이 남는다. 

 바르바라는 비틀거리며 뒤돌았다.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면서 기억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표정이 더욱 단단하고 비장해졌다. 죽으러 가야겠다. 혹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 바르바라는 자신이 완전히 타인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소실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로 죽어야 할 때가 온다면 죽을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르바라는 해변의 반대방향을 향하여, 북쪽을 향하여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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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밤 바르바라는 손님과 함께 창가에 앉아 우이드린 호수를 보았다. 너에게 들려줄 괴담이 있어. 그러니까 오래 머물다 가줘.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손님은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바르바라는 등불을 올리고 커튼을 걷었다. 문을 닫고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들고 왔다. 잘 썰린 부드러운 양고기였다. 시종일관 침묵하던 손님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축제음식이네.”

 “맞아. 오늘은 축일이잖아.”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먹어봐.”

 손님은 포크를 들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바르바라는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두 팔을 포개고 손님의 턱관절이 움직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어떤 정보를 포착하려는 바르바라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가 손님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웃음과 함께 접혀 들어갔다.

 “맛있네.”

 손님이 웃었다. 바르바라도 가볍게 웃었다.

 “신경 썼으니까.”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리면 주머니 사정이 곤란해지는 거 아냐?”

 “내 주머니 사정이 곤란했던 적이 있을 것 같아?”

 “남에게 베푸는 도둑이라니.”

 손님은 다시 포크를 움직여 한 점을 마저 입에 넣었다. 바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반쯤 치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다른 요리를 내왔다. 테이블에 접시가 하나 둘 늘어났다. 수프와 생선, 야채와 빵테이블이 가득차서 더는 아무 것도 올릴 수 없을 때까지 음식이 차려졌다. 손님은 끊임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조용한 오두막집에서 식기가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르바라는 손님이 음식을 집어넣고 천천히 씹은 후 삼키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손이 창백하네. 춥니?”

 식기를 움직이던 손님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후 손님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는걸.”

 “음식은 어때?”

 “아주 맛있어.”

 “다행이네.”

 손님은 천천히 공들여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가 먹는 동안 바르바라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이름을 묻거나 타지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자신의 아들 이름을 물어보기도 했다. 손님은 전부 대답했다. 그 사실이 바르바라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바르바라는 손님이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판단했다. 손님은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축제음식을 먹어치웠다. 빈 접시가 늘어날 때마다 바르바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수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수면이 달빛을 받아 윤기가 흘렀다. 검은 거울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비추고 흉내 내기 위해서는 상이 필요한데 세상이 어둠에 잠겨있다면 과연 누구를 비추고 흉내 낼 것인가.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식사를 반쯤 마쳤을 때 손님이 말을 걸었다.

 “괴담 이야기를 해준다며?”

 바르바라는 식탁에 촛대를 얹고 촛불을 켰다.

 “맞아, 개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야.”

 “들개에 대한?”

 “들개에 대한.”

 바르바라는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켈커스 북동쪽에 살고 있는 개의 형상을 한 괴물의 이야기였다. 눈 속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설견이 있었는데, 모두가 그 개의 이름을 버나디라고 불렀다. 버나디는 온몸이 하얗고 두꺼운 털로 덮여있었다. 그래서 멀리 있으면 몸통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아주 희지는 않은데, 버나디의 털도 그런 설산의 눈처럼 침침한 하얀색이었다.

 하지만 나그네들은 멀리서도 버나디를 알아볼 수 있었다. 버다니의 얼굴이 안과 밖이 뒤집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죽이 피부 대신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버나디가 나타나면 새하얀 설산 한가운데에 새빨간 얼굴만 동동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버나디의 눈은 사람처럼 좌우로 길게 찢어져 있었는데, 검은자가 아주 선명하고 또렷했다. 밤에 마주치면 어떤 주술을 위해 만들어진 시뻘건 가면이 허공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버나디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을 잃고 죽어가는 인간을 좋아했다. 버나디는 설산을 헤매다 밤을 맞이한 나그네의 앞에 반드시 나타났다. 나그네가 추위로 몰려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나무에 주저앉으면, 저 멀리서부터 새빨간 얼굴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얼굴이 고개를 돌리거나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그네를 지켜보는 게 다였다.

 얼굴은 오로지 나그네가 눈을 깜빡일 때만 가까워졌다. 움직이는 시늉조차 없었는데 그 얼굴만큼은 나그네의 졸음에 맞추어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죽기 전에 나그네는 자신의 발치까지 다가온 그 허공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적적으로 돌아온 나그네들이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더는 이야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산에는 매년 눈을 가린 채 꽝꽝 얼어버린 시체 몇 구가 나온다.

 

 바르바라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다 말고 테이블의 접시 대부분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나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손님이 꾸준히 먹어치운 것이다. 바르바라는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손님이 식기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받아쳤다.

 “흥미로웠어.”

 “그랬니?”

 “그럼. 네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지 바르바라.”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손님이 바르바라처럼 몸을 앞으로 숙였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시선이 서로를 샅샅이 훑었다. 둥그런 이마와 눈썹, 눈동자와 콧대, 입술과 턱바르바라는 검은 거울을 떠올렸다. 어둠속에 가려져 더는 아무것도 비추거나 흉내 낼 수가 없는 거울을. 손님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슬슬 가야겠어. 네 음식을 다 먹는데 사흘이나 걸렸거든.”

 “많이 만들었으니까.”

 “그래, 하지만 제때 다 먹었지. 네 속셈쯤은 알고 있어.”

 “그러니.”

 “이제 정답을 말할 시간이야.”

 손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로 촛대 위의 촛불이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작은 화염이 두 사람의 눈동자를 번갈아 비추었다. 둥글고 반들반들한 눈동자 위에 맺힌 상이 원통으로 일그러졌다. 바르바라는 손을 뻗어 촛대를 쥐었다. 손님이 그 위로 손을 포갰다.

 “내가 누구지?”

 손님이 속삭였다. 바르바라는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 위로 포개어진 손님의 손등을 응시하며 침묵하다가, 마침내 천천히 대답했다.

 “이반.”

 바르바라는 손님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그럴듯하게 흉내를 내줘.”

 바르바라는 덧붙였다.

 “바르바라라고 부르지 마.”

 손님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하도록 할게, 바랴.”

 그런 후 손님이 후, 촛불을 불었다. 오두막집은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졌다. 잠시 후 달빛이 들면서 조금의 빛이 들어와 서로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손님이 바르바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오두막집 밖으로 나갔다. 젖은 풀을 맨발로 밟자 흙냄새가 퍼졌다. 바르바라는 손님을 따라 호수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손님은 호수 앞에서 손을 놓더니 먼저 성큼성큼 검은 물을 해치고 나아갔다. 그의 허벅지까지 차오른 수면 위로 부드러운 결이 잔잔하게 퍼졌다. 바르바라는 멈추어 섰다. 발끝으로 출렁거리는 호수물의 축축한 냉기가 느껴졌다.

 “안 올 거야?”

 손님이 뒤돌아 물었다. 바르바라는 손님을 쳐다보았다.

 “난 네가 거울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너는 오답을 말했잖아.”

 “맞아. 일부러 그랬어.”

 바르바라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이미 오답을 말했으니까. 그래서 호수 밑바닥이 아니라 오두막집에 앉아있었지.”

 그런 후 바르바라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차가운 호수의 물살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무릎을 타고 기어올랐다. 오한이 돋았다. 꿈이 이상할 정도로 생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짠 내가 밀려오더니 강한 파도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는 번쩍 눈을 떴다.

 큰 달이 보였다. 써드빌 해변의 밤바다 냄새가 짭조름하게 밀려왔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바다로 걸어 들어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이 파도치며 그녀를 떠밀었다가 다시 끌고 들어갔다. 바르바라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다말고 천천히 해변으로 되돌아왔다. 잠옷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치마폭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발목을 두드리며 발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바르바라는 신경질적으로 치마를 들추고 옷을 짜다가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나머지 한손으로 그것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런 후에 자신이 바깥으로 걸어 나오며 찍어놓았던 발자국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바다 따위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바랴. 잃어버린 사람이 있어?

 그래, 라고 바르바라가 중얼거린다. 그래, 있어. 아주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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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검을 주웠니? 내가 남긴 것들은 무사히 전달되었니?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살아있다면 어디쯤 왔는지를 묻고 싶었다. 섬에 남기고 온 그들에게. 하지만 동시에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오즈에게 짧은 인사와 보고를 마친 후에 바르바라는 일주일동안 해변을 걸었다. 다 걷지도 않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창밖을 쏘아보며 내내 생각에 잠겨있었다. 기사단의 숙소는 평소보다 두 배로 조용했다. 아무도 감히 복도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거나 소란스럽게 뛰쳐나와 곤경에 처한 자신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침묵과 고요함 속에 미세하게 스며든 불안과 분노와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미세한 입자에는 다름 아닌 바르바라의 냄새도 배어있었다. 

 바르바라는 배에 올라타 섬으로 떠나던 그 순간부터 배에 올라타 섬을 떠나던 순간을 차분하게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주일 째에는 더 이상 해변으로 나가지도 않고 숙소에 머물렀다. 오즈가 돌아오지 못 한 자들의 숙소를 치우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따금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낮은 목소리들이 속삭이듯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바르바라는 비교적 침착한 얼굴을 했다. 실제로 침착하려고 애썼다. 

 한 달 뒤부터 바르바라는 무엇이든 이야기하고픈 욕망에 시달렸다. 살아있니.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니. 시체를 찾을 수 있겠니. 살아있다면 내가 남긴 것을 발견했니. 오즈가 보낸 배는 어떻게 되었니. 의미가 없는 질문이 많았다. 바르바라는 죽음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실종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완전히 끝났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끝났을 거라고 애써서 믿는 데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는 인간이 아니다. 

 얼마 뒤, 바르바라는 헤일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짧은 담소로 시작했다가 때때로 방에 앉아서 조용한 목소리로 의견을 교환했다. 대화는 저녁부터 밤까지 계속되기도 했다. 감성적인 시간대를 보낼 때에도 바르바라와 헤일리는 흥분하거나 흐느끼는 법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고저 없는 톤으로 침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바르바라는 종종 방안을 밝혀둔 촛불을 흘끔거렸다. 빛. 타오르는 성질을 연거푸 흘끔거리면서 입으로는 “돌아오지 못 하겠지”라고 말했다. 

 “오답을 말한 쪽이라 안심한 적 있어?” 

 바르바라가 물었다. 두 사람은 그 날 오전 오즈가 써드빌을 직접 돌아다니며 돌아오지 못 한 기사들의 가족들에게 직접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헤일리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바르바라를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안심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겠지만, 거짓말도 별 의미는 없겠죠.” 

 “그래.” 바르바라는 중얼거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런 후 약속이나 한 듯이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헤일리가 아니었더라면 바르바라는 고통스럽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헤일리에게 그런 것들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헤일리가 아닌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헤일리가 아닌 누군가에게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안도한 적이 있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바르바라는 선루스 기사단에서 나쁜 의미로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정말로 헤일리나 오즈뿐이다. 

 “다들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바르바라가 묻자, 창밖을 응시하던 헤일리가 바르바라를 곁눈질하고는, 곧이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든 말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제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헤일리는 날카롭게 덧붙였다. 

 “살면서 한 번도 제 생각대로 되어본 적이 없는데.” 

 “하하… 그래?” 

 바르바라는 힘없이 웃었다. 

 “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후 두 사람은 똑바로 마주보았다. 바르바라는 헤일리의 얼굴을 시선으로 훑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부터 진한 한 쌍의 녹안, 눈 아래에 난 두 개의 점을 훑어댔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제자들이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헤일리와 길리언은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헤일리는 혼자를 원하지만 길리언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헤일리는 영특했지만 길리언은 둔했다. 헤일리는 종종 거짓을 짚어 말했지만 길리언은 종종 진실을 짚어서 말했다. 그러나 헤일리를 바라보는 그 순간, 바르바라는 자신의 두 제자가 어김없이 똑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르바라는 눈앞에 앉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진한 녹안의 소년을 볼 수 있었다. 길리언은 입가에 난 두 개의 점을 문지르다 말고 배시시 웃었다. 

 “스승님.” 

 헤일리가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바르바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길리언이 눈꺼풀 뒤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눈을 뜨자 헤일리가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헤일리.” 

 바르바라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밤이 늦었네요.” 

 “불을 꺼야겠구나.”

 “방이 어두워지면 저는 돌아갈게요.” 

 “그러렴.” 

 바르바라는 손을 뻗어 촛불을 쥐었다. 희미한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 들어찼다. 바르바라와 헤일리는 불꽃을 내려다보았다. 빛. 타오르는 성질. 밝고 따뜻하고 왕성한 것. 생명. 바르바라가 후, 촛불을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방이 어둠으로 들어찼다. 눈을 감아도 떠도 모두 어둠이었다. 단검을 주웠니? 바르바라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니오, 스승님. 그 목소리가 길리언인지 헤일리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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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AU이벤트로그 (2)»
1차/old 2019. 10. 22. 15:39

 1. 

 “이리로 와, 난나.” 

 아드리안이 춤을 추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아드리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이렇게 된 이후로 애쓰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것들이 생겼는데, 이를테면 여유로운 아드리안의 표정 뒤로 숨겨진 공포나 그의 뽀얀 피부 아래로 흐르는 핏줄이 일순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모습 따위다. 지금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손, 정확히는 손등 아래로 흐르는 피의 고랑과, 그 아래로 늘어진 손목을 감싸고 있는 핏줄, 그 핏줄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 소리를 모조리 느낄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런 난나는 별로니?’ 

 ‘아뇨….’ 

 아드리안이 부탁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뇨, 이렇게 해주세요.’ 

 바르바라는 그래서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에게 손을 내민 아드리안에게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아드리안이 불만스럽게 신음했다. 

 “더 천천히, 가볍게 올려놔야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정말이다. 

 

 2. 

 아드리안이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빙글빙글 돌면서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언제부터 춤을 추려고 마음먹었을까? 아드리안은 왜 이런 쓸모없는 일에 열을 올리고 공을 들이는 것일까?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손을 자꾸만 끌어당겼다. 춤을 주도하면서 내킬 때마다 그의 목을 물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먼저 손을 내민 주제에 바르바라의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뒷걸음질 치며 그녀의 범위 바깥으로 벗어났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이 여유로운 척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아드리안이 ‘정말로 완전히’ 미치지는 못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드리안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드리안이 정말로 자신을 길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난나, 이제 나를 먹어도 좋아.” 

 오, 아드리안. 나의 오만한 먹잇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정말이란다. 

 바르바라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아무리 춤을 추고 도망을 치거나 그녀의 포식을 미루려고 애써도 결국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원하는 것을 취할 것이다. 배가 부르면 아드리안을 아무 곳에나 버려두고 좋을 대로 떠나버릴 것이다. 그러고는 돌아오겠지. 목이 마를 때마다 아드리안이 생각난다. 아드리안을 격렬하게 원한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모든 것을 끔찍하게 갈망한다. 아예 살을 잘근잘근 씹어볼 수만 있다면. 아드리안의 육체가 머금고 있는 모든 습윤한 물질을 나의 입속으로 털어 넣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바르바라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드리안이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바라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이다. 

 

 3. 

 아드리안은 흡혈을 할 때 말이 많다. 바르바라는 그 점을 무척 짜증나했다. 그는 입을 열 때마다 뜬구름 같은 소리를 하곤 했다. 장미, 가시, 길들이는 일과 오래 전에 읽은 동화 같은 것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다. 난나, 나를 원해요? 바르바라는 포식을 할 때 말이 많지 않았다. 따뜻한 피를 가득 퍼올리면서 오로지 지금 그 순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목에 이를 박으면 처음에는 비릿한 향이 마치 작은 낱알에서 하얀 알갱이가 튀어 나오듯 터져 나왔지만 곧이어 그것은 어떤 달콤하고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바르바라의 내면을 날뛰게 만들었다. 그럼 바르바라는 이성을 치워버리고 허겁지겁 그 피를 빨아올렸다. 아드리안의 육신은 마치 우물 같아서 그 안에 고인 피를 퍼올리고 또 퍼올려 마셔도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신선한 피를 제공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입술과 혓바닥이 짜증스러웠지만 그것을 베어 물면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것은 좋았다. 바르바라에게 있어 비극이란 아드리안이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 상황을 합리화하다 마침내는 매혹당하고 미쳐버렸을 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아드리안을 전부 탐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을 끔찍하게 원했지만 아드리안 전부를 빼앗아 취하면 아드리안의 육체성은 소실되고 말 것이었다. 그럼 그녀는 정기적으로 그녀의 욕망을 공급해주는 장소를 영영 잃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 바르바라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신에게 간청하고 자비를 구할 것이다. 아드리안을 돌려달라고 통곡하고 애처롭게 흐느낄 것이다. 입에는 아드리안의 피를 잔뜩 묻힌 채로. 

 

 4. 

 한밤중이었다. 바르바라는 잠시 졸았다가 깨어났다. 어깨에 무게가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아드리안이 기대어 자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고 있는 청년의 얼굴, 정확히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창백한 콧날, 뜨거운 피가 돌고 있을 입술을 뜯어보았다. 시선은 주체하지 못 하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창백한 목덜미, 그 목덜미에 군데군데 난 몇 쌍의 점 같은 상처를 보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것을 오래오래 시선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시세로.” 

 바르바라가 속삭였다. 

 “너 자고 있니?”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친 후 천천히 바닥에 눕혀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걷는 동안 등 뒤로 아드리안의 냄새가 희미하게 번졌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바르바라는 반사적으로 목을 매만졌다. 아직 목이 마르진 않았으니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고성을 산책했다. 바닥은 싸늘하고 고요했고, 바깥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달빛에 비친 거대한 창틀 그림자와 그 안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성의 모두는 어디에 있는 걸까?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그들도 그들의 짝과 밤을 나고 있을까? 누군가는 잡아먹히고 누군가는 그 상황을 합리화하거나 도망치는 것일까?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러니까, 이런 상황들 말이다. 영원할까? 권태가 찾아올까? 아드리안에게 질리는 날이 올까? 아드리안을 다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일들을 원하는가? 하지만 정말이지 단 한 가지의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복도를 쏜살같이 지나쳐 층계를 내려왔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갔을 때, 바르바라는 1층 난간에 기대어 있는 이반을 보았다. 이반은 눈을 감고 있었고 어딘지 지쳐보였지만 바르바라가 계단을 한 칸 더 내려오자 눈을 뜨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자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안녕.” 

 바르바라가 말했다. 

 “안녕.” 

 이반이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잠시 침묵한 채 이반을 뜯어보았다. 코를 넓혀 조용히 냄새를 맡았다. 바깥으로 눈이 흩날려서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변했구나.”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계단 한 칸을 더 내려왔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잖아. 그렇지?” 

 이반은 바르바라가 말하는 변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들을 대답해줄 이유는 없었다. 바르바라도 사실 대답을 바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너는 분명 늑대였는데….” 

 바르바라는 말끝을 흐렸다. 

 “다시 욘디로 돌아왔구나.” 

 “정확히는,” 

 이반은 말을 정정했다. 

 “욘디는 인간도 늑대도 아니었지.” 

 “맞아, 그건 나일지도 모르겠어.” 

 바르바라는 중얼거리듯 대답하다가 뒤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뒤로는 그녀가 밟고 내려온 어두운 층계와 고요한 복도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바르바라는 무엇을 찾는 것처럼 뒤를 연거푸 흘끔거렸다. 

 바르바라는 다시 이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조금 커져있었다. 

 “이반.” 

 바르바라가 작게 헐떡였다. 

 “이리와.” 

 “목이 마르면 네 파트너에게 돌아가.” 

 이반은 바르바라의 상태를 눈치 챘다. 

 “너무 멀리 왔어.” 

 바르바라가 신음했다. 

 “젠장,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끌고 오는 게…,” 

 바르바라는 말끝을 흐리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아니, 역시 나는 혼자가 좋아.” 

 “바랴, 그만 돌아가.” 

 이반이 어둠 속에서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마치 전언 같았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갈증으로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고 입은 부자연스럽게 벌어져 있었다. 바르바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가 느닷없이 이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목덜미에 이를 박지는 않았다. 그냥 그 상태로 손을 뻗었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래, 돌아가야겠어.” 

 바르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이반이 덧붙였다. 

 “나는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니까.” 

 “바보.” 

 바르바라가 말했다. 

 “그 상태로 그냥 있지 그랬니?” 

 “저주하는 거지?” 

 “욘디가 어때서?” 

 바르바라는 목덜미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어두운 고성이 한눈에 펼쳐졌다. 바르바라의 시선은 두 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기나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쏟아지는 눈 그림자와 거대한 창틀을 지나 액자가 걸린 복도를 지나면 아드리안이 바닥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바르바라의 시선이 아드리안의 온몸을 게걸스럽게 훑어대다가 종국에는 목덜미에 머물렀다. 바르바라는 목덜미에 돋아난 핏줄과 두근거리는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언제든 느낄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눈을 떴다. 이반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바르바라는 더 이상 농담하거나 우스갯소리를 하지 못 했다. 

 “이반, 생각해본 적이 있어. 지금의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말이야…,” 

 바르바라는 중얼거렸다. 

 “나는 늑대를 낳게 될까, 인간아이를 낳게 될까?” 

 바르바라는 뒤를 돌았다. 

 “어쨌든 다시는 새끼를 배고 싶지 않아.” 

 그런 후 바르바라는 갈증을 참지 못 하고 매서운 속도로 뛰었다. 이반의 냄새는 순식간에 멀어지고 오로지 한 가지 냄새만이 남았다. 바르바라는 복도를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맨발로 고성의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소리없이 내달렸다. 바르바라는 멀리서부터 강렬하게 퍼져오는 먹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바르바라를 찾고 있었다. 

 

 5.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을 복도에서 맞닥뜨렸다. 아드리안은 조급하고 안달 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 말고 바르바라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어디 갔었어요?”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아드리안에게 다가가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아드리안이 바닥에 넘어진 채 고개를 들다 말고 신음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멱살을 쥐어 잡고 올렸다. 아드리안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도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바르바라의 행방을 물음으로써 그녀가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려 하는 것 같았지만 바르바라는 생각한다. 하지만 너는 나를 무서워하잖아. 

 바르바라가 아드리안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을 때, 아드리안이 그녀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두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습윤했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아드리안이 호소하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러면, 영영 사라져버릴 거라고 했어.” 

 “알아.”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뒤통수를 상냥하게 쓸어주다 말고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아드리안의 벌어진 입으로 작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바르바라는 그의 머리를 목으로부터 분리시켜버릴 것처럼 강하게 틀어쥔 채 원하는 만큼 뒤로 젖혔다. 곧 조개껍질을 열 듯 허옇고 보들보들하고 상처가 가득해 군데군데가 붉게 물든 목덜미가 눈앞에 드러났다. 아드리안이 그녀를 미약하게 밀어냈다. 바르바라는 그의 모든 의사를 무시했다. 바르바라는 이를 드러내고 강제로 아드리안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드리안의 다리가 작게 버둥거리며 바르바라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드리안이 힘겹게 헐떡였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위로 올라탔다. 아드리안의 숨소리가 뜨겁고 거칠어졌다. 

 “바르바라…,” 

 아드리안은 떠나버릴 거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차라리 춤을 추자고 말했다. 약속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바르바라가 다 망쳐버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난나라고 부르면서 동화 이야기를 했다. 바르바라는 신경질이 나서 아드리안의 턱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입 안 다물면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그럴 수 있어요?” 

 아드리안이 일그러진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날 죽일 수 있어?” 

 물론 그럴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흡혈을 할 때마다 샘솟는 힘을 느꼈고 손에 힘을 준다면 간단히 아드라인의 모가지를 나뭇가지처럼 부러뜨릴 수 있었다. 피를 모조리 빨아먹어 껍데기만 남길 수도 있고 몸을 갈가리 찢어서 질겅질겅 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의 내면은 아우성치고 있었다. 아드리안을 죽이면 안 된다고 비명을 질러대면서 필사적으로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죽으면 바르바라도 죽는 것이다. 목이 말라서?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아무 것도 갈망할 수 없게 되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드리안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드리안을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바르바라는 포식자가 아닌가. 

 “너 정말 귀찮게 구는 구나.” 

 바르바라는 손으로 아드리안의 허리를 더듬거리며 내려갔다. 그러고는 단추를 풀고 아드리안의 옷가지를 헤집었다. 뜨거워진 그의 성기를 속옷 위로 주무르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아드리안의 턱을 부서질 듯이 쥐어잡았다. 아드리안이 허리를 퉁겨 올리며 헐떡였다. 그가 바르바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애칭을 불렀다. 그러다 다시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이 사정할 때까지 그를 손안에 넣고 주물렀다. 아드리안이 몸부림치면서 울먹였지만 바르바라는 고개를 젖히고 냉랭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어쩌면 좋을까? 그는 정말로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까? 아드리안이 마침내 부르르 떨다가 힘이 빠져 늘어졌을 때, 바르바라는 다시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얌전해진 먹잇감을 두 손으로 손쉽게 들어 올려서 정성스레 살갗을 핥아 올리고 냄새를 맡았다. 입을 쩍 벌리면서 속삭였다. 너를 먹어도 좋다고 해줘. 하지만 사실 대답을 바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정말이다. 

2018/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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