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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1부 2화 비밀글
2차/old 2019. 10. 2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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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1부 1화
2차/old 2019. 10. 24. 19:13

페스트, 오오, 페스트!

 - 일기 중에서

 

회고하자면 그 집안사람들은 전부 조금씩 미쳐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다 죽어도 다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광기였다. 인중에 붙은 죽음은 그들이 숨을 몰아쉴 때마다 조금씩 달랑거리며 매일 꾸준하게 그 숨구멍으로 기어 올라갔다. 도련님, 아가씨, 주인마님, 주인님, 하녀, 하인, 집사 너나할 것 없이 그 광기와 죽음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나 또한 그 때는 조금씩 미쳐있었다.

그 성은 탐욕스럽게 제 안에 발을 디딘 모든 것들을 먹어치웠다. 제네바 시민들, 실력 좋던 사냥개, 도처에 있던 슈테판 저택, 종국에는 찬란한 젊음을 가진 젊은이들까지도. 내가 죽지 않은 까닭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한다한들 그 성에 결코 완벽하게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한 번도 그 성에 매료되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미 나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저택. 그 길고 넓던 복도, 깨끗하고 섬세한 조각상들과 품위 있고 단단한 가구, 화려한 거울과 향수 냄새들! 나의 저택은 프랑스 남동쪽에 있다. 제네바에서 마차를 타고 종일 달려 삼일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프랑켄슈타인 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햇볕이 들었다. 하녀들은 아침마다 문을 열어 신선하고 깨끗한 바람을 들였고, 내 옷장에는 드레스가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나는 포도주를 흔들면서 빛깔에 대한 심미적인 감상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후가 되면 책을 읽었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정원에 나가 산책을 했다. 아가씨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소위 그렇게 하듯이. 나에게는 안온하고 조금은 따분한 일상이 늘 도처에 준비되어 있었다. 죽음은 없었으며, 행복했다.

나의 고모는 주말마다 저택 문을 열고 사람들을 들여 소규모의 파티를 열었다. 친분이 있던 부인들이 매주 가슴에 꼭 끼는 드레스를 바꿔 입고 남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이 빙글빙글 돌 때마다 드레스 겹겹이 외국제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집안은 사치스러운 편이 아니었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고, 그 위에는 부유한 지방 자제들이 응당 거쳐야 할 것들―이를테면 무용한 낭독 회나 지루한 파티들을 어떻게든 저질러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가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잘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나를 괜찮은 아가씨로 만들었을 테니까. 맞는 짝을 찾으면 그 성질머리도 조금씩 죽을 거라고 아버지는 늘 나에게 호언장담을 하곤 했다. 그러니 얼른 사랑에 빠져오라며 호통을 쳤지. 아버지는 정략결혼이나 집안 간 교류를 위한 형식 절차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는 꽤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다. 죽을 때조차 그는 가장 아름다운 비석에 대해 고민하느라 절절맸다.

고모는 아버지를 내 다섯 살 동생과 함께 큰 나무 아래에 묻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공동묘지에 가는 건 영 꺼림칙하다면서 저택 바깥으론 발도 들이지 않았다. 고모는 전염병이 시체로부터 옮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장례는 고모와 나, 그리고 우리 저택을 아버지 젊은 시절부터 지키던 집사와 함께 치렀다. 그 무렵 우리는 집안을 돌아다니던 하녀와 하인 대부분을 해고하고 텅 빈 저택을 정리하고 있었다. 관을 옮기는 일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하인 둘이 끝까지 남았다. 그들은 퇴직금과 함께 수당을 더 받아 챙기곤 장례가 끝나자마자 마차를 잡아 부리나케 우리 마을을 떠나버렸다. 전염병은 어떻게든 이 고장 사람들을 자꾸 줄여나가고 있었다. 죽여 버리거나, 쫓아내거나. 아버지는 죽여 버렸을 뿐이고, 그 하인 둘은 쫓아냈을 뿐이고. 병에 대해 크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 나는 다만 살아남은 사람이었고, 병의 원인을 알아내기도 전에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나는 앞으로 살아남는 데에 더 진중한 고민을 해야 했다. 텅 빈 마을, 밤마다 지붕들 아래서 뒤섞이는 탄식과 울음이 주는 음울함. 전염병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고 왔고 집안의 사업은 완전히 주저앉았다. 고모와 나는 마주 앉아 텅 빈 저택에서 얼마 남지 않은 차를 우려 마셨다. 우리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택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도. 그 무렵의 우리는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전염병은 학살을 멈췄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터전을 단 한 곳도 남기지 않았다. 고모는 내가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저택을 팔고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 나리’를 만난 것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독감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는 우리 저택에 머물며 어머니를 극진하게 보살폈다. 꽤 괜찮은 의사였다. 용모가 수려해 하녀들은 그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저들끼리 헤죽헤죽 웃어댔다. 아버지와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했던가. 나는 문 뒤에 숨어 그가 어머니의 맥을 짚는 것을 때때로 구경하곤 했다. 그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내저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는 치료 도중 환자와 환자 가족이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모는 그에게 추천장을 썼다. 추천장이 아니라 편지에 가까웠지만, 여하튼 내용을 보자면 추천장이었다. 집안 사정은 간략했고, 나를 고용했으면 한다는 내용이 길고 수더분하게 편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아버지와의 옛 인연에 호소하는 문장들은 웃기게도 귀족적이었다. 고모는 그런 편지들밖엔 써본 적이 없던 것이다. 후에 집사가 고모의 편지 중 일부를 고쳐주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고모는 셋만 남은 하녀를 데리고 와 나를 가르쳤다. 그 이주일 간, 나는 허리를 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을 배웠다. 드레스보다 얇고 잘 구겨지는 천을 수선하는 법, 재질 따라 빨래하기에 적절한 물의 온도, 시트를 개는 법, 바닥의 얼룩을 지우는 법, 물청소를 할 때 주의할 점, 집안사람들에게 쓰는 높임말과 하녀들 사이의 은어들. 나는 내 앞에 놓인 삶의 궤적을 그려보았고, 썩 유쾌하지 않음에 가끔 서글퍼했다. 하녀들은 나에게 정성껏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자 몹시 어려워했다. 그들은 몸에 밴 대로만 움직이지 일정을 짜놓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남은 일주일 동안은 내가 그녀들이 움직이는 걸 따라다니며 구경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직접 말로 배우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이주일 간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자면 내 기억 속 하녀들에겐 얼굴이 없었다. 한참을 궁리한 후에야 나는 그들이 내 앞에서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집안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하녀의 덕목’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켄슈타인 성으로부터 답장이 왔을 무렵, 나는 대부분의 일은 눈대중으로 어찌어찌 해볼 수 있는 하녀가 되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가씨에서 하녀로 신분 추락이라니, 젠장.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신경질적으로 침대 위에 짐 가방을 얹어놓고 나는 그렇게 푸념했다.

그러나 뭐 그런 일도 있는 것이다.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은 진작부터 포기하는 것이 맞다. 포기하라고 있는 일이니까. 나는 포기하는 일이 없는 삶을 살아왔었지만, 이제부터의 삶은 아주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고모는 추천장을 다시 썼고(이번엔 제대로 써냈다) 제네바까지 가는 마차를 구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짐을 쌌다. 단정하고 움직이기 편한 단색의 드레스, 앞치마와 얇은 잠옷 두 벌. 앞으로 내가 가져야 할 신분을 상징하는 옷들이 거기 있었다. 고모는 내게 아름다운 드레스 한 벌 쯤은 남기라 충고했다. 과거의 너를 기리는 일쯤은 괜찮지 않겠니. 그녀는 팔지 않고 남겨둔 목걸이와 향수를 내밀었다. 가지고 가렴. 나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받아들였고, 그건 내 가방 가장 안쪽에 둘둘 말려 들어갔다. 

떠나는 날도 화창했다. 나는 아버지와 동생의 무덤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마차는 저택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고모는 나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편지하렴. 정착하게 되면 프랑켄슈타인 성으로 편지를 보낼 테니, 그 주소로 답장을 주면 될 거야.”

“고모님은 어디로 가시나요?”

“집사 일을 배우고 있어. 프랑스를 떠나진 않을 거야.”

“건강하세요.”

“죽지 마라, 일라인.”

나는 추천장을 들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짐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볕 아래에서 말들은 푸르륵 숨을 토해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나의 저택은, 햇빛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이 한 움큼도 남지 않은 그 거대한 집. 그 앞에 선 고모는 점점 멀어지고, 또 멀어지고, 또 멀어지고, 그리고 마침내는 사라졌다. 고모가 손을 흔들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차는 덜컥거리며 프랑스 국경 지대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다가를 반복했다. 눈을 뜰 때마다 주변의 풍경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밤이냐 낮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후가 중요했다. 날씨가 자꾸만 흐려지고 있었다.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나는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리나요?”

마부는 대답했다.

“이틀.”

나는 가까워지는 마을과 버려진 집들을 세며 눈을 감았다. 프랑켄슈타인 성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한 번도 성을 본 적 없는 나는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대신 아버지의 무덤이 떠올랐다. 내 어린 남동생의 무덤도. 그러자 갑자기 조금 눈물이 났다. 창가에 이마를 댄 채로, 나는 조금 울었다. 내 나이 열 살에 나는 그렇게 나의 저택을 잃은 것이다. 영영,

아주 영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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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이후의 일들은 모두 혼란스럽기만 했다. 토미는 총 세 개의 수업을 더 들었지만 강의 내용은 머릿속에 절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하마터면 레포트에 쓸 필수 내용 중 절반을 받아 적지도 못 할 뻔 했다. 방과 후가 가까워졌을 때, 토미는 알렉스 스타일스가 그토록 자신을 비난한 이유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토미 화이트헤드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가벼이 플러팅 했음에 대해선 비난할 수 있었으나 그가 알렉스에게 요구한 것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토미가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알렉스 스타일스를 공격하고 싶어 안달 나있던 지난주 금요일을 떠올리곤 생각하기를 관뒀다. 때마침 종이 쳤으므로 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 프린트물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오늘의 유일한 위안은, 토미가 바라던 대로 알렉스의 새로운 가십-린다 패거리의 짓거리-덕에 토미 화이트헤드의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토미와 제시 사이에 벌어진 점심시간의 작은 소동은 알렉스 스타일스가 홀에서 맞은 밀가루 폭탄으로 인해 이미 깔끔하게 잊혀진 상태였다. 그러나 토미 화이트헤드는 전혀 이 모든 상황이 달갑지 않았고,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오스본을 찾아가야 해…….’

그러나 토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린다 오스본과 그녀의 패거리들은 알렉스 스타일스가 린다에게 몹쓸 짓을 해서 이 사태를 벌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알렉스 스타일스가 곤경에 처하기를 바랐고, 마땅한 이유를 찾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토미 화이트헤드는 그 기회를 마련해준 꼴이 되었다. 미워하기 위하여 이유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토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알렉스에게 그렇게 했던 것이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토미는 퍼뜩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는 복도로 나온 린다의 패거리를 보았다. 린다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의자를 끌고 와 복도 정중앙에 양동이를 매달고 있었다. 한구석엔 포대를 잘라 작게 묶은 밀가루 폭탄들이 치워져있었고, 그들을 둘러싼 학생들은 대체로 그들을 격려하거나 환호하는 부류였다. 소란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다른 학생들은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토미는 이 모든 작태가 구역질났다. 그들이 의자를 치우고 허겁지겁 돌아가 복도 부근에 숨었을 때, 토미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서부터 알렉스 스타일스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시 버크는 없었다.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토미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교사에게 말하는 것이 훨씬 좋을지도 몰라. 그가 직접 이 일을 해결할 필요는 없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문제가 발생하면 토미는 뒤로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맞서 싸우지 않아도 해결에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계속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토미는 주먹을 짧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락카 뒤로 치워진 의자를 끌고 와 밟고 올라섰다. 

“워, 워, 워, 지금 뭐하는 거야?”

몸을 숨기고 숨어있던 린다의 패거리들이 내려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토미는 흘끔, 그들을 내려다보곤 공중에 걸린 양동이로 손을 뻗었다. 린다의 패거리 중 하나가 달려들어 의자를 붙잡았다.

“야, 방해하지 마. 죽고 싶어?”

“야, 저 새끼 알렉스랑 굴렀다던 그 호모 아니야?”

“진짜냐?”

“토미 화이트헤드잖아.”

락카 뒤에 몸을 구긴 채 눈짓을 보낸 남학생이 토미를 노려보았다.

“알렉스 뒤치다꺼리 하려고 온 거야, 이 샌님아?”

“이런 짓은 그만둬.”

토미는 목소리를 짜냈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는 이런 상황을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이 없었다. 현관 복도로 다가오던 알렉스가 머뭇거리며 멈추어 섰다. 그는 의자 위에 올라서 천장으로 손을 뻗은 토미를 발견하곤 고개를 젖혀 천장에 매달린 양동이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놈이 작게 소리를 질렀다.

“야, 야, 잭, 들켰어. 완전 망했다고.”

“그럼 억지로 여기까지 끌고 오면 되지.”

의자를 붙잡은 잭이 으르렁거리며 등받이를 뒤로 훅 빼냈다. 중심을 잃은 토미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붙잡다 놓친 양동이가 위에서 마구 시계추마냥 흔들렸다. 머리 위로 금속음에 섞인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잭은 토미의 멱살을 틀어쥐고 가볍게 들어올렸다.

“씨발, 야. 끼어들지 마. 이건 우리들과 저 새끼의 일이라고.”

토미가 헐떡거리며 잭의 손목을 쥐었지만 린다 때와는 달리 떼어내기 쉽지 않았다. 그의 악력은 지나치게 세고 단단했다. 어쩌면 토미가 너무 약골이었는지도 모른다. 

“교수님께 말씀드리겠어.”

토미가 이를 악물었다.

“너희가 오늘 내내 한 짓은 징계감이야.”

“오호, 그래? 같은 호모라고 감싸주는 거야? 존나 눈물겹네.”

잭이 바싹 토미를 끌어당기고 흔들었다.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새끼야. 슨생님한테 이를 고에요(이 때 잭은 일부러 입을 쭉 내밀고 조롱하듯 중얼거렸다) 어디 해 봐. 어떤 일이 벌어지나 보자고.”

머리 위로 양동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토미는 반사적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치며 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발로 차고 붙잡고 꼬집고 할퀴었다. 잭은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비웃으며 낄낄거리다가, 토미의 멱살을 갑자기 놔주었다. 토미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바로 그 순간, 줄이 툭 끊어지면서 잭의 머리 위로 계란물이 양동이 째 통째로 떨어졌다. 꽝, 소리와 함께 계란물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토미는 뺨에 튀긴 끈끈한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락카 쪽으로 기어 물러났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양동이를 뒤집어 쓴 채 굳은 잭을 올려다보았다. 락카 뒤편에 숨었던 린다의 패거리들이 경악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잭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토미는 후들거리는 팔로 지탱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잭이 양동이를 집어던졌다. 끈끈한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양동이가 현관 쪽으로 굴러갔다. 토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락카 쪽에 간신히 기대어 있었다. 잭은… 잭은 흡사 막 양수에서 깨어난 괴물처럼 보였다. 끈끈한 물을 뒤집어 쓴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를 때, 토미는 곧장 뒤를 돌았다. 그러나 곧 덜미가 잡혔다. 교복 카라를 붙잡은 잭이 토미를 자신의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호모 새끼, 죽여 버리겠어!”

토미는 순간 자신의 눈앞이 새하얗게 반짝이는 경험을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락카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고, 코에서 끈끈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픔은 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전혀 소식이 없다가, 토미가 고개를 드는 한순간에 몰려왔다. 끔찍한 얼얼함이 왼쪽 뺨으로 맹렬히 퍼지기 시작했다. 잭은 한 방으론 만족하지 못 했는지 한 번 더 휘두를 기세였다. 토미는 어깨를 움츠린 채 눈을 꾹 감았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복도로 내달리는 발소리들을 들었다. 잭의 주먹은 소식이 없었다. 에버릿 교수-그녀는 수학 교사였다-의 고함과 잭과 패거리들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내달리는 발소리들이 조용해지자, 토미는 창백하게 질린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거기 있었다.

토미는 아까보다 훨씬 더 겁에 질렸다. 공포에 대한 감각은 아니었고, 난처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토미는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알렉스에게 곤욕스러움을 느끼는지 확신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가 욕을 하거나 혹은 이제 와서 뭘 어쩔 것이냐고 말한다면 도무지 대답할 말이 없었는 지도 몰랐다. 해명할 할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스스로도 수습하기엔 일이 너무 크게 벌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이유를 통틀어, 토미는 그러니까 알렉스의 반응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스 스타일스의 표정은 아주…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것은 토미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얼굴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토미에게 다가와 곧장 팔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후, 가볍게 들어 그대로 안아 올렸다. 맙소사… 라고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토미는 후들거리는 몸으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려고 애썼다. 몸이 기울어지자 코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토미의 정수리를 감싸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곧장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토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토미가 신음하며 몸을 바르작거리자, 알렉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토미. 쉬, 쉬. 괜찮을 거야. 교수님을 불러왔으니까. 고마워. 미안해, 토미.”

공포와 긴장으로 굳어져있던 토미의 몸이 그제야 천천히 풀어졌다. 얼얼한 뺨으로 아득한 아픔이 느껴지는 가운데, 반쯤 정신을 놓은 토미가 힘없이 알렉스의 품에 늘어진 채 조용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보건실로 향하는 동안, 알렉스는 토미의 정수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연거푸 쉬, 쉬, 하고 달래주었다. 모두가 바라보았지만 토미는 눈을 꾹 감았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그런 문제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토미가 받지 않는다. 

휴대폰을 붙들고 학교 현관을 바라보던 짐은 결국 전화를 끄고 라디오를 틀었다. 시시한 음악과 뉴스가 나오는 채널을 번갈아 뒤적거리던 그는 학교 정문으로 후다닥 뛰쳐나오는 몇 명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중 한 명은 온통 엉망으로 어질러진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귀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패거리들은 우왕좌왕 주차장으로 흩어졌다. 교사가 소리를 치며 현관에서 뛰쳐나왔다. 짐은 자신의 차 뒤편으로 우다다 달려오는 남학생의 상태를 백미러로 확인하곤 경악했다.

“맙소사, 꼴이 왜 그러니?”

“알 바 없잖아요.”

잭이 씹어뱉었다.

“그거 풀이니?”

짐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뇨.”

잭이 으르렁거렸다.

“그냥 신경 끄라고요! 선생이 묻거든 저 못 봤다고 하세요. 씨발, 호모새끼 때문에…….”

“그런 말은 쓰는 게 아니다.”

짐이 엄숙하게 지적하자 잭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욕지거리를 하며 다른 차로 뛰쳐나갔다. 짐은 라디오를 끄곤 잠시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요즘 애들이란!”

그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긴 신호음이 이어졌다. 아주 긴 신호음이었다.

 

알렉스는 찬장에서 연고와 거즈 따위를 찾아 책상에 늘어놓곤, 침대에 걸터앉은 토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토미는 입을 다문 채 눈으로 알렉스가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토미의 인중에 거즈를 가져다대자, 그는 그 손을 붙잡은 후 거즈를 빼앗아 쥐었다.

“내가 할게.”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연고를 건넨 뒤 책상 의자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토미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토미는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가 왜 토미에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할 수 있고, 지금처럼 상냥하게 대하는 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알렉스가 물어봐주기를 바랐다. 왜 자신이 뛰어들었는지… 그럼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사과를 하고, 해명을 하고, 그리고……. 그리고 뭐?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토미는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토미는 자신이 더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어떤 명분이나 타이밍을 줄 때까지 기다려선 안 되는 처지임을 깨달았다. 그건 너무 뻔뻔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일이. 토미는 천천히 거즈를 떼어냈다.

“미안해.”

토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되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토미는 용기를 잃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할 수 있었다.

“오늘… 점심시간 이후에 알았는데 말이야.”

토미는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왜 린다랑 헤어졌는지…….”

변명할 생각은 없었는데도 내뱉고 보니 그렇게 들렸다. 그것이 토미는 몹시 창피했다.

“나는 너와 린다가… 임신 때문에 헤어진 줄 알았어.”

“알아.”

알렉스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아까 제시가 말해주더라.”

“음, 미안해. 걔네가 그런 이유로 너를 괴롭혀왔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Hey, Tommy.”

알렉스가 다가와 토미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거즈로 인중을 눌렀다.

“너 코피나.”

그 말에, 토미가 고개를 들어 알렉스 스타일스를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면서 알렉스의 갈색 머리카락과 섬세한 속눈썹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제야 토미는 복도에서 마주친 후 내내 알렉스가 짓고 있던,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토미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알렉스가 시선을 내리깔고 희미하게 웃자 토미는 그가 자신의 사과는 진작 받아들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방금 그 말이 지난주 월요일 주차장에서 토미가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처음으로 건넨 것-미움과 열등감 속에서도 기어코 튀어나왔던 호의(토미는 그것을 이제 ‘걱정’이라고 마음껏 부르기로 했다)-과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토미가 따라 희미하게 입 꼬리를 올리자, 알렉스는 손을 거두곤 퉁퉁 부어오른 토미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가 떼어냈다.

“미안해.”

알렉스가 말했다.

“뭐가?”

토미가 물었다.

“따지고 보면 원인은 전부 나니까.”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음.”

토미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생각해?”

“아니야?”

“아니야.”

토미가 대답했다.

“정말 아니야.”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토미의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울리더라. 안 받아?”

알렉스가 물었다. 토미는 액정을 확인한 후 휴대폰을 시트에 뒤집어놓았다. 

“응.”

진동소리는 연거푸 이어지다가 곧 끊겼다.

“새 아빠야.”

토미가 말했다. 알렉스는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그렇구나.”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번에 알렉스는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되묻지도 않았다. 토미는 잠시 다리를 작게 흔들거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래도 이제 가봐야겠어.”

“오, 그래.”

알렉스가 물러나 침대 아래에 세워둔 토미의 백팩을 건넸다.

“고마워.”

토미는 가방을 멨다. 전화가 다시 울렸지만 이번에도 토미는 받지 않았는데, 알렉스 역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인사했다.

“내일 보자, 토미.”

“응.”

토미가 희미하게 미소 짓자, 알렉스 역시 씩 웃었다.

“레포트 잊지 마.”

알렉스가 말했다.

 

gib22 : Hey, Tommy.   13:01

 

토미는 노트북을 펼치고 답장을 보냈다.

 

Tommy0612 : Hi, Gibson.   17:10

Tommy0612 : 오랜만이야.   17:10

Tommy0612 : 먼저 연락 줘서 고마워.   17:10

Tommy0612 : 미안해.   17:10

 

짐이 불러 아래층에 내려갔다오니, 답장이 와있었다.

 

gib22 : 괜찮아 :>   17:22

gib22 : 그냥 걱정되어서 연락한 거야.   17:22

gib22 : 학교 일은 마무리 됐어?   17:23

 

토미가 타자를 쳤다.

 

Tommy0612 : 응.   17:23

Tommy0612 : 그럭저럭.   17:23

Tommy0612 : 오해가 있었는데 풀렸어.   17:23

gib22 : 걔랑?   17:23

Tommy0612 : 응, 걔랑.   17:23

gib22 : 다행이네.   17:24

Tommy0612 : 말없이 사라진 거 정말 미안해.   17:24

gib22 : 괜찮아, 크게 신경 안 썼어.   17:24

gib22 : 그럼 넌 걔랑 어떻게 되는 거야?   17:24

Tommy0612 : 뭐가?   17:24

gib22 : 데이트 할 거야?   17:24

 

토미는 답장을 치지 못 하고 멈췄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메시지 하나가 더 올라왔다.

 

gib22 :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17:24

 

토미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Tommy0612 : 잘… 모르겠어…….   17:25

 

왜냐하면 알렉스는 데이트가 아닌 레포트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미는 이미 그를 한 번 찼다.

 

Tommy0612 : 잘 모르겠어, 정말로.   17:26

 

곧 이어 화면으로 gib22의 한숨 가득한 이모지가 올라왔다. 

장담컨대, 그건 우리 모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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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로부터 수증기가 솟고 있었다. 닫힌 블라인드 틈으로 햇빛이 느슨하게 쏟아져 탁자 위에 줄무늬를 만들었다. 병원은 조용했다. 이따금 복도로 간호조무사가 차트를 들고 여유롭게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메리엇 클락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진료기록을 살피는 중이었다. Appendicitis, 라는 것은 충수염이고, 더 간단하고 보편적인 단어로 치환하자면 맹장염을 뜻한다. 한 마디로 몸내부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고름이 터질 테고, 그럼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이다. 고름이 터지면 뱃속을 통째로 청소해야하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메리엇은 맹장이 터지기 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녀의 차는 아직 링컨스쿨의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고, 오후 8시쯤엔 그녀의 동생이 서랍 안쪽에 정리해둔 여분의 키를 가지고 그것을 몰아 메리엇을 데리러 올 것이다.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의 여동생은 말했다. “큰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네!” 메리엇도 동감했다. “그래, 훨씬 복잡해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차트에 사인했고 병원비를 지불한 후 금식에 대한 안내를 듣고 수술 일정을 조율했다. 그러고 나서, 학교에 연락을 넣었다.

“당신 괜찮나요?”

버튼 교감의 목소리는 꽤 사무적이었다.

“네, 괜찮아요. 의사 말론 충수염이라고 하더군요.”

“충수염이요?”

“맹장염 말입니다.”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니군요.”

“네, 아니죠.”

메리엇이 말했다.

“수술은 내일이고, 퇴원은 다음 주 수요일 이전엔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부 교과 교수는 누구로 신청하셨죠?”

“존 심슨이요.”

“그가 계약직 교수라 일정 조율이 자유롭지 않다는 건 알고 계시죠?”

“이미 그와 통화했어요. 일주일 단위로 조정할 수 있겠다던 걸요.”

“다행이군요. 그럼 다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입니까?”

“그렇습니다.”

“클락, 일은 유감입니다.”

버튼 교감이 덧붙였다.

“그래도 큰 수술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고맙군요.”

“복도에서 구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 그건 제가 아니에요.”

메리엇의 머릿속으로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린 채 바닥을 흘끔거리던 장면이 나열되고 있었다. 그녀는 수업 자료를 정리해 뒤늦게 교실을 빠져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복도가 소란스러워 코너를 돌았고, 중앙 복도에 빽빽하게 들어선 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누군가들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인파에 가려져 누군가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메리엇은 소리를 쳤다. ‘거기!’ 아이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워, 하는 소리와 함께 중심 부근에 서있던 몇몇의 학생들이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 허리를 숙이고 락카에 기대어 휘청거리고 있었다. 메리엇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날카롭게 외쳤다.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엇은 알렉스 스타일스를 보았다. 그는 락카에 기대선 학생을 마치 아이처럼 안아 올린 후, 등을 쓸어주면서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는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그녀는 알렉스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학생의 얼굴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는 토미 화이트헤드였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나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군요.”

메리엇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다음주에 해당 학생들을 불러 물어봐야겠어요.”

“큰일은 아닐 겁니다. 이미 몇몇 학생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냥 작은 말다툼이었다고 하더군요.”

“말다툼이요?”

메리엇은 토미 화이트헤드의 평소 태도에 대해 떠올렸고, 그것에 굉장한 이질감을 가졌다. 미스 메리엇이 기억하는 한 그는 어떤 불만사항이나 반발심이 있어도 결코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는 소시민적 태도를 고수하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문제에 있어 그는 극단적일 정도로 개입되고 싶지 않아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메리엇은 교사생활을 하면서 그보다 더한 엘리트들도 얼마든지 만나보았다. 그들은 대체로 재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 성실하고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놓는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분명 훌륭한 장학생 혹은 수석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될 것이다. 메리엇은 그 미래에 관해선 자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화이트헤드에 대해 뭐라 말하던가요?”

“그 부분에 관해선 저도 잘 모르겠군요. 전달받은 게 없어서요. 화이트헤드와 연관된 일인가요?”

“아뇨.”

메리엇은 우선적으로 뱉었다가 이내 덧붙였다.

“아마 아닐 겁니다.”

“그렇군요.”

버튼 교감이 말했다.

“그럼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클락.”

“네, 그러죠.”

메리엇이 대답했다.

전화가 끊어진 후 알림을 확인하니 그녀의 여동생으로부터 문자가 와있었다. 병원을 나서며, 메리엇은 잠시 알렉스 스타일스와 토미 화이트헤드의 연관성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둘은 정말이지 아무 연관도 없었으므로 곧 그만두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클랙슨을 울렸다. 그녀는 핸드백에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천천히 주차장으로 나아갔다.

 

지난 주말동안 토미 화이트헤드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gib22와 채팅하지도 않았고, Site에 접속하지도 않았고, 짐의 요리를 거부하기 위해 층계 위에서 무언의 시위를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전환을 위해 산책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방구석에 박혀 과제를 끝내고, 레포트를 작성하고, 교수에게 메일을 날리고, 시간이 되면 층계를 내려와 짐의 요리를 몇 번 끼적이곤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일상을 무탈하게 영위하는 것에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을 때, 토미는 침착한 얼굴로 가방을 들고 내려와 비장하게 짐의 차를 바라보며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Nevermind.’

링컨 스쿨로 향하는 동안 짐이 몇 가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지만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고, 그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를테면 최악의 시나리오들에 대한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의 사건으로 온 학교가 떠들썩할 것임은 분명하다. 중요한 건 알렉스 스타일스의 반응이다. 첫 번째, 그가 토미에게 화를 낸다. 이건 방어할 수 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말로 상대를 누르거나 납득시키는데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문제는 객관적으로 알렉스 스타일스의 잘못이 아닌가……(이 과정에서 토미는 상처받은 알렉스의 얼굴을 떠올렸으나 애써 접어두었다). 두 번째, 그가 토미를 완벽히 무시하고 새 애인을 찾아 학교를 쏘다닌다. 훨씬 좋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원래 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소문으로 요란스럽던 학교도 일주일이 지나면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 곧 싱거워질 테지. 알렉스의 새로운 가십이 시작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토미 화이트헤드의 이름은 그들의 관심사 밖으로 멀리 밀쳐진 채 발굴될 일 없이 영영 역사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PERFECT.

다행스럽게도 월요일 스케줄은 알렉스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겹치는 수업이 하나도 없었고, 토미는 점심시간에 알렉스가 있는 홀에 나가지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아침 수업, 그러니까 미스 메리엇의 물리학 수업이 미스터 심슨의 캘리포니아 지역 역사 수업으로 교체되기 이전까지 그는 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실로 들어오는 미스터 심슨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토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야만 했다. 

“이미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심슨은 파일철을 교사 책상에 얹어놓으며 말했다.

“클락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수술 일정으로 그녀의 이번 주 수업은 전부 캘리포니아 지역 역사 수업으로 교체되었어요. 아시겠지만 저의 수업은 총 두 반이 합석하여 진행되고 있으므로, 당분간 D반과 C반은 합동 수업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토미는 몸을 돌려 황급히 교실을 살펴보았다. 과연 낯선 얼굴들이 드문드문 껴있고-D반 학생들이었다-심지어 창가 근처에 앉은 제시 버크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토미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펜을 쥐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보이지 않았다. 땡땡이인가? 그럴 지도. 혹은 조퇴-아니, 첫 교시인데 그럴 리는 없다. 혹은 병결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마주칠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만세, 토미 화이트헤드!

그러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수업종과 함께 알렉스 스타일스가 앞문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섰다. 시선이 마주쳤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다소 급한 기색으로 책과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심슨은 그런 그를 상냥하게 맞아주었다.

“오늘은 지각을 체크하지 않겠어요. 남는 자리에 앉도록.”

수업 교체 안내를 뒤늦게 전해들은 D반 학생들이 교실의 앞문과 뒷문으로 허겁지겁 쏟아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심슨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후 토미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흘끔거리거나 노려보지도 않았고, 스쳐가면서 중얼거리거나 욕설을 뱉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알렉스 스타일스는 토미 화이트헤드의 ‘알렉스 가설 2’에 기반해 움직일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뻐해야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알렉스 스타일스가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그를 스쳐지나갈 때, 토미는 마음이 따끔거림을 느꼈다. 다소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잘도 자신을 이런 궁지로 몰아넣고 이제와 모른 척 한다는 게 짜증이 났던 걸지도 모른다. 교실의 시선이 일순 둘에게 집중되었다가, 알렉스가 토미를 스쳐 지나자 수그러들었다.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심슨이 교탁으로 나서자 다시 잠잠해졌다. 토미는 기분 나쁜 뒤통수를 한 채 애꿎은 노트만 노려보았다. 난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Nevermind. 

미스터 심슨이 토미의 바로 앞으로 교탁을 끌고 왔다.

“자리가 어수선한 것은 압니다. 제가 관여하지 않은 건 오늘 수업 이전에 새로운 자리 배치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죠.”

토미는 펜 끝을 씹으며 손가락으로 연거푸 공책을 두들겼다. 손톱이 바짝 깎여있었으므로 소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심슨은 산만한 그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일주일간은 둘 혹은 셋으로 짝지어 합동 레포트 수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제비뽑기로 진행할 계획이고, 자리는 조에 따라 새롭게 배치됩니다. 질문 있는 사람?”

토미는 고개를 들어 심슨을 바라보았지만 손은 들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했다. 교실의 누구도 질문하지 않자 심슨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교탁 위에 박스를 얹어놓았다.

“그럼, 앞자리부터 순서대로 나와 번호를 뽑도록 하세요. 총 마흔 명이니까… 스물한 번째 사람부터는 번호를 불러 자신과 같은 번호를 뽑은 친구의 옆 좌석에 앉도록 합시다.”

토미는 12번을 뽑았다. 제비뽑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내내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설마 그런 빤한 일이 일어나겠어. 그래도, 만약에 신이 지루한 나머지 알렉스를 자신과 가까운 자리에 데려다놓는다면……. 그런 일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었다. 신의 장난이 없어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였다. 

스물한 번째 학생이 번호를 뽑았다. 그는 큰소리로 자신이 뽑은 번호를 부른 후, 손을 든 학생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토미의 바로 뒷좌석이었다. 토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몇 번 더 두들기다말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대각선에 앉은 게이브를 조용히 불렀다.

“Hey.”

게이브는 고개를 들었다. 

‘뭔데?’

‘번호표 좀 바꾸자.’

토미가 시선으로 찡긋거리자 게이브는 얼굴을 구겼다.

‘내가 왜?’

‘지금 당장은 말고.’

‘레포트라도 대신 써주게?’

‘그건 불가능하지만 참고자료를 줄 순 있어.’

‘언제 바꿔주면 되는데?’

‘어, 그건 내가 신호할게.’

그러나 이 비밀스러운 거래가 성사되기도 전에, 제시 버크가 앞으로 나와 번호를 불렀다-“15번이요.” 미스터 심슨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15번 뽑은 사람이 누구지?”

게이브가 손을 들었다.

“오, 저요.”

토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게이브를 돌아보았으나 게이브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Sorry.’

제시 버크는 게이브의 책상으로 이동하면서 토미를 지나쳤고, 여전히 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며 돌아보았다. 그리곤 자리에 앉았다. 게이브가 활짝 웃으며 제시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토미를 노려보느라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게이브가 다시 고개를 돌려 토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미는 아까 게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Sorry.’

“12번을 뽑은 사람이 누구지?”

“어, 음. 저요.”

토미가 엉거주춤 손을 들다 말고 딱딱하게 굳었다. 알렉스는 종이를 쥔 채 토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뻔한 전개였으면서도, 심지어는 토미 자신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토미 화이트헤드는 그 순간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What the……?!’ 

교실의 모든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천천히 책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토미에게 흡사 1시간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속삭였다. 

“진짜 끝내주게 재밌겠다!”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기대에 찬 침묵 속에서 토미는 앞을 노려보았다. 앞만 보았다. 그러나 시야 바깥, 눈동자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흐릿한 영역으로 알렉스의 인영이 훤히 들어왔고, 토미는 도무지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불안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지난주 금요일로 돌아가 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와 함께 보건실에 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그 때 뭐라고 말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주말 내내 그 장면을 곱씹었으나 막상 현실의 알렉스를 마주하는 순간, 정말이지 아무 것도 뚜렷하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토미 자신이 지나치게 그 장면을 곱씹었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지난주 금요일 그들이 격정적으로 주고받았던 대화는 모두 물을 먹은 소리처럼 먹먹한 세계 저편의 것으로 느껴졌다. 토미는 심호흡을 했다. 진정해야만 한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토미 화이트헤드를 무시할 테고……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토미는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왜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 찜찜하지?

“Hey, 토미.”

알렉스가 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 한 채, 토미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음, 미안. 뭐라고?”

“너 레포트 초안 작성해야 한다고.”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토미의 책상을 두들겼다. 토미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미스터 심슨이 레포트 초안 양식을 배부한 모양이었다. 알렉스가 챙겨둔 것인지 얌전히 토미의 손바닥 아래에 깔려 있었다. 토미는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으로부터 그 어떤 저의나 의도도 읽어내지 못 했으므로 당황스러워졌다. 알렉스는 단지 해야 할 일을 막 마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토미가 펜을 쥐자, 알렉스 역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양식 란에 이름과 날짜를 적어 넣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토미는 자신의 뒤통수로 내리꽂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으나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잘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알렉스가 다시 토미를 불렀다.

“토미.”

“왜?”

토미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겨놓곤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에 당황해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뭐가 어떻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 레포트로 뭘 쓸지 주제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아?”

“어, 음.”

토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렇지.”

“너 설명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토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아마도.”

“오. 그래.”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 우린 지역 하나를 정해야해. 존나 당연하지만 켈리포니아주 안에 있는 곳으로. 관광명소보단 그 지역에 오래 전부터 있던 자연물로 정하는 게 좋다더라. 그리고 조사를 하는 거지. 발표는 공동으로 해도 되고, 한 사람이 해도 되고. 하지만 레포트는 같이 써야해. 같이 안 쓰면 감점이야.”

“음. 그래.”

토미는 스스로가 멍청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고마워.”

“그래서, 어떤 지역으로 할지 생각한 거 있어?”

“음.”

토미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봐야겠는데…….”

“그래, 내일까지니까 좀 여유를 가지고 고민해보자고.”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토미는 다시금 얼굴을 찡그린 채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얘가 왜 이러지? 그러니까, 토미는 그가 화가 나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지막에-토미 딴으론-격렬하게 싸웠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 했고, 분노했고, 진심을 주고받고 실망한 채로 헤어졌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지금 알렉스 스타일스는 마치 토미 화이트헤드와 정말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굴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데이트나 린다 같은 문제가 없었던 때로. 알렉스가 토미에게 플러팅 하기 이전으로, 토미가 알렉스의 설문지에 뭔가를 작성하고, 그것을 알렉스가 발견하기 한참 전으로.

알렉스 스타일스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토미는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없긴 했어도 어쨌든 그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음은 알고 있었다. 만약 토미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토미였다면… 아니, 생각할 필요는 없다. 토미라면 이렇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굴지는 않는다. 상처를 받거나, 분노한 이후라면.

토미는 고개를 기울인 채 미스터 심슨을 올려다보는 알렉스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다시 레포트에 시선을 처박았다. 그는 마치 린다 오스본에게 뺨을 맞은 지난주 월요일과 같은 얼굴이었다. 어떤 격렬한 일이 일어났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단 채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토미는 그게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알렉스가 입을 다물자 고민하기 시작하는 자신이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토미는 지금 필요 이상으로 이상하리만큼 알렉스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을 생각하자면, 알렉스 역시 마땅히 그래야했다. 그게 더는 긍정적인 의도가 아닐 지라도 그 역시 토미를 의식하거나 혹은 그 의식을 필사적으로 무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토미의 생각이 가로막혔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건드렸으니까. 

그래, 알렉스는 토미를 건드렸고, 토미 역시 알렉스의 무언가를 건드렸으니까. 토미는 그것을 느꼈고, 지난 주말 내내 고민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각오를 하고 온 참이었다. 그러나 알렉스 스타일스는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그들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토미 스스로가 알렉스는 자신을 알지 못 한다고 자부하고 있던 시절로 혼자 회귀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어떻게?

대체 왜?

심지어 알렉스 스타일스는… 친절했다. 정말로, 그랬다.

토미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똑똑, 알렉스가 책상을 두들겼다. 토미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알렉스는 한 번 더 두들겼다. 똑똑.

“……왜?”

“아까부터 하나도 안 쓰고 있어서.”

“어.”

토미는 자신의 텅 빈 레포트 양식을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가 이내 멍청한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치워냈다. 알렉스는 토미를 곁눈질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 당장 낼 거 아니니까 쓸 거 없으면 그냥 내려놔. 내가 몇 가지를 추려볼게. 나 켈리포니아의 몇 군데는 캠핑으로 다녀와 봤거든. 그 중에 택해도 되고, 뭐, 안 그럼 다른 걸 또 찾던가.”

“음, 그래.”

토미는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

“괜찮아.”

그런 후, 알렉스 스타일스는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토미는 시선으로 알렉스의 레포트 초안 양식을 훑었는데, 토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는 이미 초안의 절반 정도를 채워 넣은 상태였다. 토미는 진심으로 다소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한들 어쨌든 그들은 한 조였고 작성해야할 레포트가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 스타일스는 상황이 어떻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중이었다. 엉망인 건 토미 화이트헤드였다. 이런 건 전혀 그답지 않았다. 애초에 알렉스가 제대로… 레포트를 작성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던가? 그렇다면 이런 건 전혀 알렉스 답지도 않았다. 

복잡한 기분에 휩싸인 채, 토미는-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으면서도-자신의 레포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심슨이 머리위에서 자신의 보이스카우트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교실의 대다수는 졸기 시작했다. 알렉스와 토미 사이에 별 다른 대화가 오고 가지 않자 끝까지 그들에게 집중하던 몇몇도 곧 흥미를 잃었다. 결국 남은 건 토미와 알렉스였다. 그들은 레포트에 시선을 박은 채 끝까지,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칸을 채워나갔다. 캘리포니아주의 지명들이 종이 위로 빼곡하게 나열되는 동안 마지막까지 그들 사이를 관찰하던 뒷자리 학생마저 시선을 거뒀고, 이제 교실의 모두는 미스터 심슨의 보이스카웃 시절 따위 알 바가 아니게 되었다. 사실, 그런 건 언제나 알 바가 아니었다.

수업 종이 쳤을 때, 제시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알렉스는 벌떡 일어나 책과 프린트를 챙긴 후 나가버렸는데, 제시는 문을 나서기 전 토미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겁자!”

토미는 자리에 우뚝 멈춰서 자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죄의식을 느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거북했을 뿐이다.

‘내가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렇다, 그저 그뿐이었다.

 

제시 버크는 누구보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락커 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책 몇 권을 던져 넣은 뒤 레포트 하나를 꺼내고 문을 닫았다.

“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지만 제시는 고개를 저었다.

“걘 완전 의도적으로 너를 엿 먹인 거라구!”

“내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던 것도 있지.”

“일주일 내내 쫓아다닌 것도 아니고, 고작 반나절이거든! 싫으면 그냥 욕을 퍼붓고 물러날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런… 너의 지금 상황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냐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아니겠어?”

알렉스가 입 꼬리를 올리자 제시가 질색했다.

“맙소사!”

그들은 복도를 지나 D반으로 돌아갔다. 제시 버크는 복도를 걷는 내내 얼굴을 찡그린 채였다.

“걔가 호모포비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건 그래.”

알렉스가 수긍했다.

“본인은 호모포비아라고 불리기를 엄청 싫어하더라.”

“그게 나쁜 말인 줄은 아는 모양이지! 하지만 제대로 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린다 오스본을 가엾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제시는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난 이제 걔가 싫어! 알렉스, 너도 걔한테 앞으로 상냥하게 굴어주지 마. 본인이 잘못한 게 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고. 난 그런 순진한 얼굴을 한 호모포비아들이 제일 싫어. 걔넨 언제나 내가 왜? 같은 표정을 짓지.”

“음.”

알렉스가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미스터 심슨의 수업 내내 어딘지 불안해보였던 토미 화이트헤드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알렉스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알렉스, 농담이지?”

제시 버크가 그를 노려보았다.

“잘 봐, 알렉스. 걘 네가 너무 싫은 나머지 최선을 다해 널 엿먹인 거라구. 걘 진심으로 네가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길 바랐던 거야. 널 단념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너를 인간쓰레기로 매도한 거지. 만약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라고 말한 게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건 더 문제야! 걘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네가 잘못이 없단 걸 알면서도 네가 싫어서 널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상처주고 싶어 한 거라고!”

알렉스는 제시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어쩐지 토미의 의도가 둘 다인 것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둘 다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뭐, 나는 이제 호모포비아 같은 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알렉스가 대답했다. 

D반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제시가 먼저 멈추어 섰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쭉 뺐다. 제시는 인파 속에서 A반 아이들, 린다의 친구들을 발견했다.

“알렉스, 무슨 일인지 보여?”

제시가 물었다.

“모르겠는데.”

알렉스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며 대답했다.

“이 봐, 니네 여기서 뭐해?”

바로 그 순간, 알렉스의 머리 위로 무엇인가 쏟아졌다. 끈적끈적한 계란물이 눈앞을 덮는 동안, 알렉스는 제시 버크가 분노와 경악으로 뒤엉킨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곧이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딘가로 부터 밀가루 뭉치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홀에 들어섰다. 한손에 짐의 샌드위치를 낀 채였다. 그는 재빨리 홀의 전체를 훑어 알렉스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했다. 알렉스가 있었더라면 토미는 당장에 홀을 빠져나와 교실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거기 없었다. 

토미는 짐의 샌드위치를 잔반통에 버린 후 매점에서 작은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더럽게 맛없는 땅콩 샌드위치보다 조금 더 비싼 햄 치즈 샌드위치로. 지난주 금요일 사건으로 인해 토미는 매점 땅콩 샌드위치만 보면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지불한 후 구석자리에 앉아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서 무언가를 먹는 일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곁에 앉는 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토미는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로는 거의 혼자였다. 마땅한 친구도 없었고, 점심시간을 같이 보낼 좋은 선후배 사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토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학기 초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토미 화이트헤드는 그 모든 것이 거북했다. 사교가 시작되면 언젠가는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지점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토미가 매일 타고 오는 차의 주인을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토미는… 사람들에게 별로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상태로 학교생활을 보낸 후 대학교에 들어가 새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고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이곳을 떠나리라. 그 때가 되면 연애를 해보거나, 혹은 커밍아웃 비슷한 걸 해볼 수도 있겠지. 토미는 오래 전부터 그 일을 꿈꿔왔다. 그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이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트집을 잡힐 일이 하나도 없어야만 누군가는 간신히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것. 그의 어머니도 그 때쯤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자립한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전화로 욕을 퍼붓는 정도가 아닐까. 

샌드위치를 쥔 손이 조금 떨려서, 토미는 그냥 포장지 째로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그냥 버리고 돌아가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다. 일전에 토미는 짐의 요리를 먹고 싶지 않아 점심을 굶은 적이 있었는데,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꼬르륵 소리를 내어 당혹스러워졌던 기억이 있은 후로는 꼬박꼬박 무엇이든 챙겨 먹었다. 짐은 토미가 배고픈 상태라는 걸 눈치 챘을 때 몹시 슬픈 눈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긴 했지만 말이다. 그 눈을 누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까? 덕분에 토미는 배부르다는 핑계로 저녁을 먹지 않을 수도 없었고, 먹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용기도 잃어버렸다. 짐에게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토미 스스로 곤욕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알렉스 스타일스처럼. 그렇다, 알렉스 역시 짐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거부하거나 싫어할 구실을 찾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지난 학기 내내 알렉스 스타일스의 방탕하고, 제멋대로고, 수시로 애인을 갈아치우는 작태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자신이 그에게 일종의 열등감-커밍아웃에 대한 것 말이다-을 느끼고 있으며 그 부수적인 사항들은 토미가 못마땅해 하거나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결론만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고백하자면 토미는 린다 오스본의 사건이 터졌을 때, 은밀하게 다소 흡족해하기까지 했다. 그는 알렉스 스타일스를 싫어할 객관적이고도 타당한 이유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마음껏 퍼부어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남은 건 찝찝함뿐이고, 오히려 토미는 자신이 비난받는 처지가 된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가 주말 내내 싸워온 것은 바로 그 예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바로 그것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의 딜레마.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혹은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둘 다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선택지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최악인 것은, 토미는 전혀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입맛이 완전히 떨어진 토미는 결국 애써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 문 뒤 포장지에 싸서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홀이 시끄러워지지만 않았어도 당장에 일어나 출구로 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더니 곧 와글와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토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건 당연하지만-알렉스 스타일스일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토미는 홀로 들어오는 알렉스의 몰골을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

그는 밀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토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입구 문 위에 양동이가 거꾸로 뒤집어져 있고, 아래로 뚝 뚝 점액질의 무엇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경악 혹은 흥분으로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이 들러붙은 덩어리들을 닦아냈다. 토미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문을 박차고 제시 버크가 허겁지겁 들어오다가, 알렉스의 꼴을 보곤 그대로 멈춰 섰다. 토미는 제시가 알렉스의 이름을 비명처럼 내지르는 것을 들었다. 인파에 섞여 있던 남학생 서너 명이 박장대소를 하며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린다의 친구들이었다.

린다가 밀가루덩어리가 된 끈적끈적한 알렉스의 어깨를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렉스, 너 괜찮니? 맙소사… 쟤네 전부 신고해버릴 거야!”

아이들 대다수는 이 상황을 곤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동정의 눈빛이 알렉스 스타일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알렉스는 태연하게 웃으며 얼굴을 장난스럽게 찡그렸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던 까닭에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그는 천천히 홀을 지나치며 제시를 향해 힘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꼴론 점심은 못 먹겠네. 나가서 좀 씻고 올게.”

알렉스가 토미 화이트헤드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칠 때, 토미는 순간 긴장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이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토미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느릿느릿 그를 지나쳐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질척거리는 밀가루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제시가 훌쩍거리며 뒤를 따르다말고 토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토미를 향해 주먹을 쥐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너, 너!”

제시가 으르렁거렸다.

“이제 만족하니? 어때, 아무 잘못도 없는 애를 곤란하게 만든 기분은?”

토미는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다고 해명하려고 했지만,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왜 저러는 거야?”

제시는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손을 휘젓다가 토미의 멱살을 쥐었다.

“넌 이 와중에도 알렉스의 행실 타령이니? 걘 그냥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거야, 이 얼간아! 너 알렉스가 너한테 평소처럼 군다고 해서 네가 잘못이 없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알렉스가 린다를 찾아가서 들쑤신 것도 다 너 때문이라며? 걔랑 데이트하기 싫었으면 차라리 욕을 퍼붓지,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일을 만들 건 없잖아!”

“내가 뭘?”

토미가 얼굴을 찡그린 채 린다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쨌든, 내가 아니었어도 걘 오스본에게 사과해야 했었어. 그래도 이런 일을 바란 건 아니야.”

“걔가 왜 린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데?”

제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사과를 해야 하냐고?”

토미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야말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화이트헤드?”

제시가 으르렁거렸다.

“알렉스가 전 애인이 남자였다는 걸 왜 린다에게 사과해야 하는지 설명해 봐!”

“난 그걸 말한 게 아니었어.”

토미가 신경질적으로 제시의 멱살을 붙잡아 떨어뜨렸다.

“그럼 뭔데?”

제시가 소리를 쳤다.

“넌 왜 자꾸 린다를 가엾게 여기는 건데?”

“린다는 임신했잖아!”

참다 못 한 토미가 버럭 질렀다. 

긴 침묵이 있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분노로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이 충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정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얼빠진 얼굴로 변하는지를 코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시 버크는 천천히 물러났지만 턱을 다물지는 못 했다. 

“Fuck.”

한참 뒤, 제시가 중얼거렸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제시가 말했다.

“린다 오스본이 임신했다고?”

“그래.”

토미가 대꾸했다.

“정말 환장하겠군.”

제시는 이마를 짚고 끙끙거리다가 토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럼 넌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문 때문에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간 거야?”

“오스본이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도 들었어.”

토미가 불안하게 덧붙였다.

“오스본 입으로.”

“오, 그러시겠지. 퍽이나! 난 이제 갈래.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난 네게 해명하거나 너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추어도 없어.”

제시가 질린 듯이 대꾸했다.

“린다 오스본 씨가 생명을 잉태했는지 알고 싶어서 병원에 손수 다녀오신 건 맞아. 에이즈 세포도 생명이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런 후, 제시는 테이블을 박차고 떠났다. 토미 화이트헤드가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토미가 벌떡 일어났을 때, 제시 버크는 밀가루 발자국을 따라 출구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이번에는 결코 nevermind, 라고 중얼거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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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2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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