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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 «조류»
2차/old 2019. 10. 23. 01:51

 모든 것은 언젠가 되돌아오는 법

 

 1.

 덩케르크 해안에는 조류가 있다. 어느 바다에나 있는 것이므로 명물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특별할 것 없이, 세상의 바다는 가득 찼다가 가득 빠져나가는 것이다. 마치 철새처럼.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그들의 조국’이 있는 건 새도 바다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필립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간조(干潮)였고 모래사장은 군데군데 움푹 패어있었다. 백사장 너머의 바다는 눈부시게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줄지어 선 망령 같은 영국군들이 없었다면 덩케르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관광지로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등 뒤에서 총성이 마구 울려 퍼졌다. 필립은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 나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는 막 방어선 내부로 들어온 참이었다. 가벼운 이명이 찾아왔다가 맥없이 사라졌다. 심장소리만 남았다.

 그의 부대는 둘로 나뉘어졌다. 다섯 명이 방어선에 남았고, 나머지가 퇴각 명령을 받았다. 후퇴한 빈자리에 영국군들이 엎드려 총탄을 장전했다. 개중 한 명이 영어로 무어라 소리를 쳤지만 필립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알아듣지 못 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총격전이 시작되었으므로 모두가 몸을 낮췄다. 영국군들이 손사래를 쳤다. 쌓아올린 포대 사이로 총탄이 박히면서 모래가 조금씩 튀었다. 소음 속에서 out, get, shit 따위가 들렸다. 누군가 어깨를 잡아끌었다. “기예, 뒤로 빠지자. 바다로 가자. 퇴각하라잖아.”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해변으로 달렸다. 마을의 끝까지. 그들이 지켜낸 방어선의 가장 안쪽까지. 누군가 쓰러졌지만 알지 못 한다. 허겁지겁 달리다 말고 멈추어 섰을 때, 푸른 수평선이 펼쳐졌다. 남겨진 전우도 달려 나온 전우도 각각 다섯이었는데 필립을 포함한 세 명만이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곤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잔교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영국군이 시간마다 선박을 보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미 해안선에는 몇 척의 함선이 떠있었다. 저 함선에 타면 군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땅에 무사히 이송된다. 퇴각명령을 받은 것은 프랑스군이나 영국군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겨지고 그들은 떠난다. 독일 군에는 진격할 수 있는 탱크와 폭격할 수 있는 비행기가 있다. 최전방에서 싸워온 우리는 덩케르크 해안선으로 시시각각 좁혀드는 방어선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남겨진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남겨졌다. 우리는 죽는다. 자명하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마르첼로가 필립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저 배를 타야해.” 테오가 묵묵히 동의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해안선을 가로질러 잔교로 향했다. 걷는 동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뭇거뭇한 점들과, 어렴풋이 보이는 영국령과, 희끄무레한 순양함들이 떠있었다. 하지만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찢어질 듯 한 굉음과 함께 슈투카 폭격기가 날아갔다.

 잔교 입구는 이미 퇴각한 프랑스군의 군집으로 꽉 차있었다. 마르첼로가 익숙하게 몸싸움을 벌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테오와 필립은 그가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집 앞에 선 영국군은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only!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필립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소리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영국군은 인파에 밀려날 때마다 빈번이 온몸을 던져서, 앞당겨진 군집을 도로 밀어놓았다.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외치고 있었다. 이번엔 또렷하게 들렸다. English Only!

 “그들은 우리를 보내주지 않을 거야.”

 “엿이나 먹으라지.”

 테오는 빈정거리면서도 초조하게 마을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 뒤지게 생겼다고, 알아? 기예, 이제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영국군만 된다잖아, 빌어먹을! 멀쩡한 건 이 잔교뿐이야. 여길 막는다고? 알아서 뒤지라고 등 떠미는 거랑 뭐가 달라?”

 “기다릴 거야?”

 “그럼 기다려야지. 별 다른 도리가 있겠냐? 마을로 돌아갈 순 없잖아. 미친 나치새끼들… 마르첼로 좀 봐.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데?”

 잔교 위에서 작은 몸싸움이 벌어졌다. 다리 위에 서있던 영국군 두 명이 달려와 주먹질을 하는 마르첼로를 떼어놓고 내동댕이쳤다. 프랑스군들은 쓰러진 마르첼로를 잡아 벽 쪽에 앉혔다. 소란이 진정되자마자 영국군들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다리로 돌아갔다. 프랑스군들은 잠시 침묵하다말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이 재개되었다.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프랑스군들은 덩케르크 해안으로 쏟아지는 파도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주저앉은 마르첼로는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대열을 정돈하기 어려워졌음에도 그를 막기 위하여 영국군은 필사적이었다. 소리를 치며 쏟아지는 인파를 막으려 애썼다.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ENGLISH, ONLY!

 “난 갈래.”

 “어딜?”

 “여기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필립은 잔교를 내려왔다. 백사장을 지날 때, 바다에 줄지어 선 영국군들이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죽은 눈들이 필립의 뒤통수로 따라붙었다가 곧 떨어져나갔다. 테오는 따라오지 않았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부대 안에서도 싸도 도는 사이였으므로 납득할 수 있었다. 필립이 혼자 남겨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같은 부대원이라도 그와 그들은 동지보단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그의 동지들은 진작 최전방에서 죽었다.

 필립은 마을입구와 가까운 것도, 그렇다고 해안선과 가까운 것도 아닌 곳에 주저앉았다. 탱크의 포탄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강했고,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질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필립은 그곳에 앉은 채 파도가 높아지고, 영국군들이 잔교 위 혹은 해변 가 안쪽으로 후퇴하고, 노을이 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수평선을 따라 떠있던 거뭇거뭇한 점들이 파도와 함께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 시체들, 무수한 시체들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바닷가에는 여전히 새가 없었다. 어쩌면 돌아가지 못 하고 전부 죽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끝까지 붙들고 있던 가냘픈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치까지 떠내려 온 시체 한 구가 허벅지를 치고 지나갔다. 필립은 고개를 숙였다. 배를 탄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것보단 살 확률이 높아지겠지.

 English, Only! 마음속으로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필립의 영혼에 구멍을 냈다. 시체의 군번줄이 노을빛을 받아 눈앞에서 붉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Gibson. 그것은 꼭 경고등처럼 보였다.

 

 2.

 그는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아침이 되었을 땐 Enligh가 되어 있었다. 이제 배를 탈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게 된 셈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군번줄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군복 깊숙한 주머니에 묶은 후 안으로 감추어놓았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 새 군번줄을 달았다. Gibson. 그것이 이제부터 그의 이름이었다.

 깁슨이 깁슨이 되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깁슨이었던 누군가의 시체 위로 흙을 덮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행동만은 아니었고,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이상한 의식에 가까웠다. 전쟁은 폭격과 살육의 현장이었고 그는 생사를 넘나들며 최전선까지 밀려나온 생존자였다. 학살은 너무나 당연한 듯 자행되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정신은 내내 제대로 붙박여있지 못 하고 종종 반쯤 허공을, 무의식의 경계를 부유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깁슨이란 존재에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당시에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 했다. 하지만 필립이 깁슨이 된 순간, 그가 디디고 섰던 땅은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의 조국이 아닌 죄악의 심판지대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방황하던 그의 영혼이 무사히 몸으로 되돌아올 즘엔 필연적으로 그 죄책감과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시체를 파묻으며, 깁슨은 눈물 대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죄의식의 영역은 오래 전에 두고 온 나머지 너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고개 숙이는 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그의 영혼이 지상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 했을 것이다.

 반쯤 파묻은 시체를 두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 바지를 내리던 어린 영국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소년은 헐거운 바지를 추슬러 올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가와 마주보고 쪼그렸다. 소년은 그가 묻어주다 만 시체의 발 위로 모래 더미를 얹어주기 시작했다. 깁슨은 손을 멈추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영어가 유창했더라면 무엇이든 물어봤을 지도 몰랐다. 소년에게 발견되었으므로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된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 필립(Philippe)이었던 프랑스군은 깁슨(Gibson)이란 영국군으로서 영국군 소년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이제 이전의 정체성으로는 설령 원한다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소년이 나타난 순간부터 톱니바퀴는 반대방향으로 맞물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유하던 영혼이 육신을 향해 끌려오고 있었다. 죄악의 지대로, 단죄의 시간으로, 죄책감으로, 손쓸 도리도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수통을 원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전우에게 무언가를 원한다. 깁슨은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깁슨도 그렇게 한다.

 그는 수통을 내밀었다.

 소년은 물을 마셨다.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뚝뚝 흘려가며 마셨다. 그리고 되돌려 주었다. 그들은 눈을 마주보며 웃지도 않는 낯으로 희미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은 그 순간 전우가 되었다.

 그 날, 그 순간, 하늘로부터 시시각각 슈투카 폭격기가 가까워지던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는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으므로’ 시체 묻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소년을 만났고, 잃어선 안 될 이름과 조국을 잃었고, 동시에 잃어선 안 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토미와 함께 찾아온 그것을 양심(Gibson)이라고 불렀다.

 

 3.

 필립은 세 개의 부대에 배치되었다. 첫 번째 부대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곳엔 필립의 오랜 전우들이 있었고, 전쟁 이전의 시대를 함께 보낸 이들이었다. 당시엔 독일군의 침략 선전이 허황되고 우스운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들이 폭격을 맞이했을 때, 대다수는 부대 기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필립과 불침번을 섰던 두 명의 전우를 제외한 모든 이가 사망했다. 프랑스는 5일 만에 손을 들었고 손쓸 도리 없이 조국 곳곳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살아남은 필립과 남은 전우들은 새 부대에 재편성되었다. 마르첼로와 테오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부대에서였다. 나치가 최신형 전차를 끌고 시시각각 언덕을 넘고 있었다. 연합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덩케르크로 밀릴 때까지, 필립은 그들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대다수의 부대가 저지대에 전력 배치되어 몰살당하거나, 힘겹게 후퇴했다. 필립이 새롭게 배치된 부대의 사기는 이미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말수가 없고 신경질적인 부류였다. 과거의 부대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도 않고, 말이 나오면 분노했다.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서로의 안식인 것처럼 굴었고, 저들끼리 과거의 이야기를 하거나 죽어버린 이전의 전우들 이야기를 나눴다. 필립은 그들과 만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최전선에서 고전하다 말고 덩케르크 해안까지 밀려났다. 총격전에서 필립의 전우들이 모두 사망했다. 뒤돌아서 뛰쳐나온 건 필립뿐이었다. 살아남은 것도 필립뿐이었다. 함께 남겨진 건 마르첼로와 테오 뿐이었으나, 그들은 전우라고 하기엔 너무 멀고 남처럼 느껴졌다. 어색하기만 해서 소용이 없었다. 그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찢겨나갔을 지도 몰랐다.

 필립이 마지막으로 옮겨간 부대는, 정확하게 몇 사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의적으로 옮겼고, 소속도 바뀌었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확실하게 자신의 소속을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English. 그는 이제 깁슨이었다.

 잠시 후에, 병원선이 정박했다. 토미는 시체를 묻다 말고 수통을 들고 마셨으며, 목을 축인 후 해안선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깁슨은 일어나 그의 뒤를 밟았다. 다시 간조기를 맞은 해변으로 영국군들이 일렬을 유지하며 해변에 서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장관이었다. 동시에 끔찍한 풍경처럼 보였다. 백사장을 모조리 채운 군인들의 투구 때문에 해변은 새까맣게 뒤덮여있었다. 토미는 눈치를 보며 줄에 끼어들었다가, 소속이 아님이 발각되자 빠져나왔다. 계속해서 걸었고, 이따금 뒤를 돌아 깁슨와 눈을 마주쳤다.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그들 사이에 희미한 끈이 생긴 것 같았다. 유대감이라 부르기엔 너무 얄팍한 시간으로 붙잡힌, 전쟁이 만든 기묘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토미는 앞서 나가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미 뿐만이 아니었다. 해변의 모든 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누군가 총을 장전했다. 창공을 찢으며 폭격기가 등장했다. 슈투카 폭격기들은, 온몸에 폭탄을 두른 괴물들이다. 그들은 비명소리 같은 소음과 함께 등장해 모래사장으로 내리꽂을 것처럼 하강하다가, 몸무게를 줄이고 직각으로 솟구친다. 총을 장전한 병사 하나가 대공사격을 개시했으나 이내 쓰러졌다. 모두가 모래밭이 납작 엎드린 채 때를 기다렸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바로 근처에 떨어졌음에도 그 무엇도 하지 못 한 채 숨을 죽여야 하는 순간, 인간의 무력함은 가중된다. 깁슨은 숨을 멈추고 차례차례 터지는 폭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주변이 조용해졌다. 깁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토미 쪽을 바라보았다. 토미는 죽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마저 걸어나갔다. 계속해서 걷다가 다시 멈추어 섰다. 버려진 들 것 위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토미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상병 하나가 꿈틀거리며 목을 움직였다. 잔교에 정박한 병원선에서 길게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토미는 뒤를 돌아 깁슨을 바라보았다.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순간, 그들 사이를 아우르던 투명하고 느슨한 그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유대감! 토미가 코트를 벗는 동안 깁슨은 들 것의 손잡이를 쥐었다. 토미가 가세했다. 그들은 장정을 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토미가 생존을 위하여 선택한 일은 죄를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행위의 기저에는 동일한 당위가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군번줄을 훔침으로서 영영 시체의 소속을 지워버린 것과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양심과 함께 찾아온 소년이었기 때문인가? 혹은 양심 그 자체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토미(Tommy)는 그의 구원인가?

 다리를 건너는 와중에도 몇 번의 공습이 이어졌다. 그들은 인원 수 제한으로 승선거부 당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교각에 매달린 채 다음 기회를 노렸다.

 새하얀 병원선은 집중 포격되었다. 쉰여 명의 부상병들이 물에 수장되었고 깁슨은 교각을 붙들고 토미와 함께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군들, 다른 배를 타게.” 머리 위로 제독이 권고했다. 깁슨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지만, another ship이란 단어에서 생존의 냄새를 맡았다. 토미와 그는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교각을 붙잡고 물에 들어갔다가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들이 건져 올린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들은 교각 사다리를 타고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잔교 위로 올라왔다. 모두가 물에 젖어있었으므로 그들은 한 군집처럼 보였다. 꽁무니에 허겁지겁 붙었는데도 누구 하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이방인임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은, 토미가 건져 올린 토미 또래의 소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은근슬쩍 부대원들 사이에 낀 그들을 보고도 적개심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후 뻔뻔한 표정으로 나아갔다. 토미와 깁슨은 다시 한 번 시선을 교환했다. 모터보트에 탑승했을 때, 소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산뜻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Hey, 제법인데.”

 바로 그 순간, 알렉스 역시 그들의 전우가 되었다. 말하자면 한 배를 탄 셈이다. 

 다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4.

 그 날 밤, 깁슨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지 못 하고 난간에 섰다. 그는 조국을 보았다. 멀어져가는 바다 너머의 땅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다. 그곳은

 불타고 있었고, 

 싸우고 있었고, 

 나날이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조국이 사라진다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영국군의 이름을 얻은 그가 안식을 취한다면 어디에 묻힐 것인가? 오월인데도 바닷바람은 몹시 찼다. 깁슨은 추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과 맞서 싸우며 덜덜 떨었다. 바다 곳곳에 보트가 떠있었다. 무수한 영국군들이 올라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Don't, leave, us! 불기둥은 끊임없이 어두컴컴한 마을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어뢰다!

 그것은 상어처럼 물살을 가르며 왔다.

 

 5.

 많은 것을 서술할 수는 없다. 밤바다는 존재만으로도 몹시 공포스러운 장소다. 새까맣고, 끝을 알 수도 없으며, 발 디딜 곳조차 제공해주지 않는다. 상어나 어뢰 같은 것을 상상하면 도무지 맨 정신으로 떠있을 수가 없다. 깁슨은 그곳에서 구출되었다. 영국군들은 그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지 않은 영국군이어서 기꺼이 건져내주었다. 배 끄트머리에 탑승한 채, 그는 물을 떨어뜨리며 침몰하는 함선을 바라보았다. 토미와 알렉스가 배 근처로 헤엄쳐오는 것이 보였다. 함선 뱃전을 삼킨 불길이 천천히, 육중하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보라가 일면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 한 병사들이 수장되었고, 모두가 끔찍할 만큼 숨을 죽였다. 토미가 헐떡이며 뱃전을 잡았다. 깁슨은 바라보았다. 그가 문을 열어 기꺼이 구출한 그의 양심을. 그의 전우를. 알렉스는 그 옆에 꼭 붙어있었다.

 “우릴 버리지 마.” 그의 전우들이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밧줄을 내려서, 둘이 그것을 꼭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들은 밤바다를 가르며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 다음 날 탈출에 실패한 한 남자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6.

 이제 깁슨은 모래톱에 좌초된 선박에 앉아 만조를 기다리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지루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죽음의 공포를 감내하는 일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웅크리고 있던 모든 소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들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다 말고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예민하게 경청하며 바싹 곤두섰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배는 방어선 바깥에 있었다. 독일군이 모래톱 너머로 득실거렸다.

 몇 시간동안 긴장과 공포에 길들여진 깁슨은, 그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의 틈 속에서, 문득, 아주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그는 깁슨 아닌 필립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을 소년들이 알 리는 만무하였으나, 때때로 관념은 예리하고 섬세한 영혼의 감수성에 의하여 포착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깁슨은 알렉스에게 유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이따금, 아니 자주, 인간들은 살기 위하여 영혼을 내던진다. 그것은 온전히 가지고 있기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깁슨의 품에는 두 개의 군번줄이 낙인처럼 매달려 있었으며, 그의 영혼은 이미 한 번 내던져 졌다가 토미에 의해 간신히 붙들려 있었다.

 배 안에서 유일한 프랑스군이 된 깁슨은 이제 토미와 함께 들 것을 지고 뛰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들 것에 버려진 부상병을 이고 잔교 입구를 지날 때, 프랑스군들의 군집과 다시 마주할 일이 있었다. 깁슨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단 한 명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발견되지도 않았다. 잔교 입구엔 마르첼로도 테오도 없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방도를 찾아 떠난 것일 지도 모른다. 새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배 안의 소년들은 결코 알지 못 했지만, 만조가 다가올 무렵 창공으로 갈매기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무거운 공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날개를 움직이다가, 다시 바람을 타고 위로 솟구쳐 오른 후 해안선 너머로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갔다. 그 새들은, 잔병들을 태운 순양함과 병원선을 지나… 국기를 단 채 함선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수십 척의 요트들을 거쳐… 용기를 위해 영혼을 걸고 투쟁한 고귀한 두 소년을 태운 단 한 척의 특별한 배(MOONSTONE)를 거슬러…… 도싯의 하얀 절벽 너머로, 누군가의 조국으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7.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다. 돌아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인간들이 있었다. 영혼을 버린 사람도 영혼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들이 벌어져야만 했나.

 새들은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8.

 말해, 어서 말해, 아니라고 말해!

 

 9.

 Français… Je suis Français…….

 

 10.

 그는 온전한 영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전우를 잃었다.

 

 11.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알렉스는 깁슨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전혀 닿지 못 하고 수장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가 고백함에 따라 전위로 올라온 그의 죄 때문이었다. 그가 버렸다고 시인한 정체성을 돌려받는 순간, 알렉스와 그 사이를 묶던 투명한 끈은 끊어지고 유대는 사라졌으며 부족한 영어로도 소통할 수 있었던 마법 같은 순간들은 삭제되었다. 물을 차고 빠져나오려던 깁슨의 군복 안쪽에서부터 필립(Philippe)의 군번줄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부유하다말고 물살에 친친 엉켜 뱃 기둥에 단단히 감겼다. 수면을 갈망하며 뻗었던 손이 저지되었다. 바닷물이 목구멍을 차고 끊임없이 빨려 들어왔다. 필립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했다. 군번줄은 단단히 그의 몸을 붙잡고 함선과 함께 침몰했다. 부유하던 육신은 영혼을 향해 끌려 내려갔다. 죄악의 지대로, 단죄의 시간으로, 죄책감으로, 손쓸 도리도 없이… 수몰되었다…… 바로 그 순간, 필립의 숨통이 끊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군번줄이 순간 붕 뜨면서 엉겨 붙은 매듭에 헐거운 틈이 생겼다. 필립의 시신은 물살과 함께 아래로 소용돌이치듯 잡아당겨졌다가, 뱃전에 쿵 부딪히며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선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수면 위로 조금 치솟았다가, 이내 물살에 따라 흔들리며 천천히 운반되었다. 그의 시체는 파도를 타고 무수한 다른 시체들과 함께 덩케르크의 해변으로, 새가 한 마리도 날지 못 했던 그 흰 모래톱 위로, 프랑스의 바다로, 조국으로…… 돌아갔다.

 세상의 파도는 바다가 삼킨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12.

 마르첼로와 테오는 해안에서 퇴각하는 영국군 무리 끄트머리에 서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조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서둘렀다. 요트와 선박을 끌고 온 민간인들이 차례로 영국군을 실어 나르고 있었고, 여유의 자리에 프랑스군들을 태웠다. 조국에 남겠다고 승선을 거부한 일부는 해안의 반대편을 향하여 마르첼로와 테오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시체들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새가 하나도 없군.”

 마르첼로가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테오도 덩달아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마리도 없군. 원래 그런가?”

 “모르지.”

 “폭격기가 올 지도 몰라.”

 “배에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뻣뻣한 시체 하나가 마르첼로의 허벅지를 둔탁하게 치고 지나갔다. 마르첼로는 고통으로 펄쩍 뛰었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테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르첼로, 왜 그래?”

 “기예야.”

 마르첼로가 고개를 들어 테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살에 더는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시체를 붙들고 있었다. 테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체의 눈을 마주보았다.

 “…눈을 감겨.”

 그가 속삭였다. 마르첼로는 그렇게 했다.

 “……이 자식, 군번줄이 없어.”

 “달아야 할 자리에 없어?”

 “없어. 이음부가 떨어져 나갔어.”

 테오는 물살에 흔들리는 희끄무레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것은 시체의 허리 부근에 친친 감기다 만 모양새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테오는 몸을 숙여 물속에서 그것을 건져냈다. 햇살에 반짝이며 눈부신 흰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Philippe.

 “찾았어.”

 테오가 말했다.

 “입에 넣어줘.”

 마르첼로가 읊조렸다. 그래서 테오는 그렇게 했다.

 그는 눈을 감긴 시체의 입 안으로 그의 이름을 밀어 넣고, 단단히 턱을 다물렸다. 이제 시체의 혓바닥 아래에는 그가 어디에 묻힐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줄 소속의 징표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우리 모두는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떠내려 보내.”

 마르첼로가 말했다. 그는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작게 신음한 후, 앞으로 움직인 대열을 향하여 한 발짝 나아갔다. 테오는 조심스럽게 시체를 다른 시체와 부딪히지 않도록 파도에 띄워 모래톱으로 보냈다. 그들은 필립의 시체가 점점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 하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은 필립의 전우가 되었다.

 

 13.

 덩케르크 해안의 만조가 모래톱을 무너뜨리며 코앞까지 차올랐다가, 간조기가 다가옴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파도는 후퇴하는 도중에도 곳곳을 헤집었다. 땅에 반쯤 묻혀 있던 소속 없는 시체 한 구가 물살을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다시 모래톱으로 되돌아왔다. 물거품과 함께 중간이 똑 끊어진 군번줄 하나가 마구 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물결을 타고 천천히 시체 근처로 떠내려 왔다. 마침내 파도가 더는 모래톱에 영역을 끼치지 못 하고 바다로 되돌아 갈 때, 시체에 막혀 돌아가지 못 한 군번줄이 젖은 흙에 남았다. 그것이 반들거렸다. Gibson. 그러니까, 모든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돌려받은 것이다. 조류였다. 누군가는 언젠가 그것을 양심이라고 읽었다.

 간조가 닥치고 덩케르크의 모두는 후퇴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덩케르크의 해안 위로 하얗고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창공에 나타났다. 그것은 유유히 날갯짓하며 희고 고운 모래톱과 새파란 물위를 떠돌다가, 마을을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그리고 포화를 뚫고, 언덕을 넘어서… 총알과 대공사격을 피해서… 누군가의 평화로운 조국(home)으로, 집(home)으로, 평화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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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깁슨은 WW2 당시 지리적으로 영국 몸빵을 하느라 개털린 프랑스를 상징하는 인물. 깁슨을 연기한 배우 아나이린의 피셜에 따르면 깁슨의 진명은 필립 위고 기예 (Philippe Hugo Guillet). 내 안의 이미지랑 매칭되는 어감은 아니다. 위고? 기예는 좀 어울린다고 생각함. 작중 이름조차 없던 배역이 작품 바깥에서 유일하게 풀네임을 얻은 이 아이러니라니.

2. 처음 덩케르크를 보았을 땐 알렉스가 죽은 것인줄 알았다. 권선징악 엔딩인줄 알았음. 2차 찍은 후에야 알았다. 죽은 거 깁슨이었음을... 그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백인 배우들 얼굴 어떻게 구분하는 거냐. 

3. 깁슨의 설정을 마구 날조해가며 썼는데 무슨 생각을 하며 썼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잘 안 난다. 깁슨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함.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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