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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분기점»
1차/old 2019. 10. 23. 00:59

지평선을 루가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아나렉샤는 위성 나흐트를 내려다보며 5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관찰한다. 자잘한 잎사귀를 가진 루는 마치 수십만 개의 레고가 엎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냥 흩뿌려져 있는 건 아니다. 3m 가량의 두께로 한 줄씩,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열을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를 사람들이 누빈다. 마찬가지로 3m씩 떨어진 열과 열 사이로. 어떠한 보조기구나 보호장비 없이. 그저 반복해서 잎을 채취하는 단순 노동. 

좀 더 자세히 보면 농장에 배치된 인력 사이에서 제국민과 장교를 손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주로 검은색 옷을 입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곳의 장교들은 종종 인간 구분 놀이라고 불렀다. 나머지 인력은 곧잘 비인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아나렉샤는 이곳에 와서 배웠다.

“생도.”

“…….”

“생도.”

미르 대위가 힘주어 말했다.

“생도들,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안카를라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나렉샤는 그보다 한 박자 늦었다.

미르 대위는 화가 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고 있었는데 꾸짖기 직전에 나오는 버릇이었다. 

지안카를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통이 있어서요.”

미르 대위가 눈을 가늘게 뜨자 아나렉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합니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봅시다.”

미르 대위가 딱딱하게 질문했다. 

“루를 피웠습니까?”

아나렉샤가 지안카를라를 곁눈질 했다.

지안카를라는 자세를 정돈하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당일 농장 관리 담당이던 크샤트 대위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아나렉샤가 재빨리 덧붙였다.

“시범근무 중인 생도의 입장으로, 상관의 권유를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강압적인 분위기였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르 대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함선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AI의 눈을 피할 수 없지만 농장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장교들은 종종 그곳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횡령과 폭력, 착취와 학대가 감시탑 아래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지상에서 근무하는 날이면 약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장교들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직접 나니아민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는데 너무 멀어서 확실히 본 건 아니었다. 아마 그것도 크샤트 대위였을 것이다. 어제는 그가 지상근무 중이던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를 불러 루를 어떻게 피우는지 알려주었다. 반투명한 종이 위에 두어 번 접힌 루를 얹는다. (붉을수록 잘 익은 것이다). 함께 돌돌 만다. 불을 붙이면 오렌지색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설명하는 그의 왼쪽 눈꺼풀이 미약하게 경련을 일으키던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함선에서 루를 피우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농장에서는요?”

지안카를라의 물음에 아나렉샤가 다소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안카를라는 태연했지만 아나렉샤는 일이 더 커질까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르 대위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중독성이 강한 약물이 함선에 유통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불미스러운 일이겠죠. 매년 어린 생도들이 시범근무 배치를 받고 이곳에 오르지만, 여태껏 루와 관련되어 처벌을 받은 이력은 없습니다. 생도 여러분이 처음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거짓말이다.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가 처음일 리 없었다.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린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지안카를라는 웃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같이 웃어야하는지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쳤다.

미르 대위의 엄격한 꾸짖음이 이어지는 동안 지안카를라가 다시 농장을 내려다보며 검은 옷을 세기 시작했다. 몇 번 손가락을 까딱거리더니 아나렉샤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네 명.

아나렉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는 뜻인지 다시 한 번 세어보라는 건지 그 뜻이 모호했다. 지안카를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 간 함선 B덱 바닥은 전부 생도들의 몫입니다.”

AI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손수 걸레질을 하고 먼지를 긁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에,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또한, 생도 여러분은 이틀 간 관개용수 관리 야간반에 배치될 것입니다. 성실히 임해야 할 겁니다.”

이 일은 밤을 새야한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지안카를라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아나렉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지난 번에는 음주 사실이 적발되어 지적받았다. 그때에도 미르 대위는 갑판 청소 따위의 처분을 내리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는 슬슬 함선의 분위기와 미르 대위의 유한 태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을 담당하는 이 직속 장교는 암묵적 금기를 실행하는 어린 두 생도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는데 아마 윗선에 그들의 행동을 보고하면 일이 정말 커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음주나 마약 복용은 시범 근무 성적 감점으로 끝나지 않고 최악의 경우에는 본국에 소환되어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운이 나쁘다면 말이다. 이미 지안카를라는 미르 대위가 너무 쉽다고 언급한 적 있었다. 감점이나 심문을 견디는 대신 고작해야 함선 바닥을 닦거나 드나들기 번거로운 관개용수를 감시하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군기가 다 죽을 게 빤하다는 것이다.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가 본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안카를라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성으로 인사하고 나가는 폼이 전혀 반성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나렉샤가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미르 대위가 아나렉샤를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아나렉샤 생도.”

미르 대위는 어딘지 수치심을 억누른 얼굴이었다.

“…저는 우리 함선의 분위기가 시범근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나렉샤는 대답 대신 무심한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어 경례했다. 미르 대위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손을 이마에 붙였다. 그것으로 대화가 닫혔다.

밖으로 나오자 지안카를라가 벽에 기대어 있다 말고 아나렉샤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대위가 뭐래?” 

“몰라.” 아나렉샤는 일부러 귀찮다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지안카를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기댔다.

“차 타러 가자.”

운전은 네가 해. 그렇게 말하는 지안카를라가 아나렉샤는 밉지 않았다.

에오르에서 일루어스Illuearth까지 대략적으로 이주일이 걸렸다. 지루한 나날이었다. 지안카를라는 이틀 만에 셔틀 생활에 질렸다. 아나렉샤는 대체로 잠을 잤다.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일루어스 주변을 부유하는 위성 나흐트Nacht였다. 크기가 일루어스와 비슷해 위성이라기보다 독립된 행성에 가까워보였다. 셔틀 AI가 일루어스의 중력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전송했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두 행성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돌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벽히 지배하지 못 해 두 행성이 서로를 공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함선에 가까워지자 얼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아나렉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지안카를라가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아직도 무슨 소리였는지 모른다. 도킹할 때 셔틀이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던 것, 정거장 앞에 엄숙하게 서있던 미르 대위의 모습 따위가 파편적으로 남아있다. 함선생활에 적응하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르 대위를 제외한 모든 장교가 각자의 사리사욕을 쫓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지안카를라는 보조석에 앉자마자 다리를 쭉 뻗으며 의자를 젖혔다. 아나렉샤는 목적지를 입력한 뒤 차를 자동 운전모드로 전환했다. 지안카를라처럼 의자를 젖힐까 하다 그만두었다. 누워있으면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차가 천천히 방향을 틀어 추진을 준비하자 사방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술이라도 챙겨올 걸.”

출발하기 직전 지안카를라가 중얼거렸다.

관개시설까지 한 시간을 꼬박 달렸다. 흙먼지와 끝없이 이어지는 루 농장의 풍경 외에는 볼 게 거의 없었다. 아나렉샤와 지안카를라는 서로 농담따먹기를 하며 지루함을 견뎠다. 중간에 아나렉샤가 회심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해 심각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지안카를라가 박장대소를 했다. 발로 창문을 걷어차며 웃다가 의자가 끝까지 젖혀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아나렉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를 세우고 시설 꼭대기에 앉아 핏빛으로 물든 루 농장을 내려다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몇 번째 보는 풍경이었기에 아나렉샤는 조금 심드렁했다. 지안카를라가 다시 술 이야기를 했다. 

“조금이라도 챙겨올 걸.”

나흐트는 볼 게 정말 없었다. 미르 대위도 그것을 알기에 두 사람을 종종 농장으로 보냈다. 물론 크샤트 대위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농장에서 루를 빨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아나렉샤는 약을 자주 빨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망가지는 감각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중독되면 본국으로 돌아갈 때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지안카를라도 그 정도는 구분했다. 그래서 약 대신 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테였다.

“그냥 째고 셔틀 빌려서 드라이브나 할래?”

아나렉샤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지안카를라가 무시해주기를 바라며 모호한 어투로 던진 것이었지만 동시에 지안카를라가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다는 투이기도 했다.

지안카를라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나렉샤의 버릇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진짜 간다?”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의 허리에 손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정류장까지 차를 몰라 셔틀을 빌린 다음 위성 나흐트에서 행성 일루어스로 건너갔다. 일루어스 정류장에서 가장 예쁜 색의 차를 골라탔다. 이번에는 지안카를라가 운전대를 잡았다.

광활한 사막 끄트머리에 빛의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다. 캄캄한 모래 지대를 지날 때 지안카를라가 차 뚜껑을 열어젖히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싸샤, 음악 좀 틀어 봐. 발끝으로 라디오를 차서 음악을 틀려다 실패한 아나렉샤가 머쓱한 표정으로 AI에게 라디오를 요청했다. 곧이어 알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진 경쾌한 후크송이 흘러나왔다. 반복되는 비트가 두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클래식이네.”

지안카를라가 낄낄대며 볼륨을 높였다.

바람이 귀를 자꾸만 때렸다.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시트를 젖힐 때였으므로 아나렉샤는 드러누워 얼굴을 찡그린 채 별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뭘 하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보면 카지노나 호텔 방에 들어갈 수 있겠지. 지안카를라는 도박 운이 좋았다. 아마 다음에는 잭팟을 터뜨릴 것이다. 반면 아나렉샤는 운이 나쁜 쪽에 속했다. 지안카를라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나렉샤에게 대체로 어려웠다. 대범하게 저질러도 성정이 따라주지 않으면 행운 역시 주춤거리는 모양이었다.

지안카를라가 뒤늦게 아나렉샤의 표정을 확인했다.

“어디 아파?”

“아니~….”

힘없이 대답한 아나렉샤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시의 화려한 간판이 번쩍이며 머리 위를 끊임없이 스쳐지났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아나렉샤가 지안카를라를 돌아보았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자꾸만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나렉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멈추기만 해봐. 더 세게 밟아야 돼, 알겠어?”

지안카를라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

ACOTS에 입학한 당시에는 지안카를라와 대화할 일이 거의 없었다. 첫 훈련에서 지정구역을 이탈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일라이와 카르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고 시민 주택 단지에 내린 후에도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 파트너 축제에서 술을 나누어 마실 때에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지안카를라는 금기를 쉽게 넘었다. 아나렉샤가 눈치를 보며 카르니와 술을 반씩 나누어 마실 때, 지안카를라는 끊임없이 잔을 채우며 붉어진 얼굴로 히히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찾아갔고, 음주의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고 새빨간 얼굴로 털어놓았다. 지안카를라는 짓궂은 표정으로 허리를 감싸며 다가왔다. 얼마 뒤 두 사람은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그 통은 아직도 지안카를라의 방에 보관되어 있었다. 규칙을 지킬 때보다 금기를 넘을 때 우정은 훨씬 단단해졌다. 지안카를라는 그런 인간이었고 아나렉샤도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 익숙해졌다.

아나렉샤는 자신이 생각만큼 자제력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았다. 지안카를라와 가까워진 것을 계기로 아나렉샤는 차차 삶의 궤도를 수정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하거나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지안카를라가 부추길 때도 있었고 스스로 행할 때도 있었다. 가든이나 신입생 시절을 얌전하게 보낼 수 있던 건 그녀를 부추길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분위기에 잘 융화되고 감정적으로 굴며 타인의 성정에 휩쓸리는 인간이었다. 지안카를라와 가까워질 수록 이런 면모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쨌든 아나렉샤 역시 전환기를 맞은 셈이었다. 누구나에게나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발견하는 시기가 온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나렉샤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남의 성정에 기대어 술이나 담배 따위의 금기를 넘나드는 일로 자신을 적당히 파괴시키고 돌아오는 일 외에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열을 확인하는 일 외에는 말이다.

그래도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가 좋았다. 금기를 넘는 일을 대수롭지 않은 모험처럼 취급하는 말투가, 여유로운 발걸음이, 문제를 징검다리처럼 느긋하게 뛰어넘는 태도가 좋았다. 지안카를라와 옆구리를 찌르며 나란히 걸을 때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나렉샤는 일련의 문제를 무성의하게 건너뛰는 지안카를라의 대담함에 빌어 ACOTS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무시하는데 익숙해졌다. 불안감은 점점 무뎌졌고 행동은 보다 대담해졌다. 일탈은 곧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고 아나렉샤는 변한 자신을 경계심 없이 받아들였다. 사춘기가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외롭거나 괴롭지 않은 방식으로, 다만 담담하고 기묘하게.

사실 아나렉샤 자신이 그렇다고 믿었다.


*

지안카를라와 도시를 두 바퀴째 돌았다. 중간에 도박장에 들렀지만 한 푼도 따지 못 했다. 지안카를라는 걸었던 금액에서 두 배의 성과를 올렸다. 가는 길에는 술을 샀다. 진탕 퍼마셔서 마침내는 지안카를라도 아나렉샤도 제법 취했다. 비틀거리며 어깨에 손을 감는 지안카를라의 무게가 자꾸만 아나렉샤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나렉샤는 머리가 아파서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술이나 담배가 그녀를 즐겁게 하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았다. 다만 저지르고 나면 남는 미약한 죄책감이 자신을 제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으므로 계속할 수 있었다. 제국이 암묵적으로 금기하는 것들을 저질러 마침내 개인으로 남고나면 무엇이 찾아올지가 궁금했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런 것들을 궁금해 했지만, 그러므로 결국 저질렀지만, 남는 건 숙취과 기침뿐이었다. 슬슬 이 짓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밤거리를 걷는 내내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불안정한 세계에서 나를 찾아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지. 눈을 감았다 뜨면 거리가 두 개가 되었다. 어디로 걸어가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끌고 자꾸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코너를 돌던 두 젊은 생도를 발견한 건 슬럼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나니아민이었다. 늙은 걸인 역시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그가 벽을 짚으며 천천히 허리를 펼치고 일어났다.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좌측으로 밀어 중심을 잡아주다 말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안카를라가 낄낄거리며 아나렉샤를 안아주었으나 아나렉샤는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혀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마찬가지로 걸인 역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있었다. 눈앞에 서있는 이들이 어디 출신인지 가늠해보는 얼굴이었다. 술에 쩔어있는 눈이 가늘게 뜨여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이 났다. 마침내 그가 술병을 들었을 때,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끌고 급하게 뒤로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뎠다. 

쨍강.

술병이 빗나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뺨이 잠깐 따끔했다. 지안카를라가 번쩍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적의는 상대를 확인하자 금방 수그러들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신세라는 걸 인지한 얼굴에 비웃음과 여유로움이 스며들었다. 아나렉샤는 물러났지만 지안카를라는 다가갔고, 걸인의 멱살을 붙잡아 벽으로 내팽겨쳤다. 대단히 세게 밀친 것도 아니었다. 지안카를라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고 술에 꼴아있는 나니아민쯤이야 어느 정도 봐줄 요량이 있었다. 

“눈치없게 나타나서는!”

지안카를라가 높게 웃음을 터뜨리며 허공으로 발길질을 했다. 걸인은 다시 일어나지 않고 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작게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아나렉샤가 걸인에게 다가가다 말고 지안카를라에게 팔을 붙잡혔다. 그녀가 다정하게 아나렉샤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우리 너무 깊게 왔나 봐. 돌아가자.”

“…응.”

지안카를라가 아나렉샤의 손을 잡고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나렉샤는 따라서 걷다 말고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걸인이 쓰러진 골목 뒤쪽에 아이 하나가 숨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어둠 속으로 달아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싸샤!”

그제야 아나렉샤는 고개를 돌렸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종종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어둠뿐이었다. 무엇도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그녀를 되돌아가게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아나렉샤는 그 캄캄한 길을 외면하고 지안카를라와 함께 돌아갔다. 빛에 감싸인 아름다운 차체에 몸을 싣고 출처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음 날 아나렉샤는 일루어스 슬럼가 순찰을 맡아 미르 대위와 함께 셔틀을 타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지안카를라는 나흐트에 남아 함께 올 수가 없었다. 의도적인 분리였다. 

화창한 날씨였다. 빛이 드는 골목을 걸으며, 미르 대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나렉샤는 그 침묵이 불편해 자꾸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문제의 그 코너를 돌 때, 느닷없이 미르 대위가 입을 열었다.

“어제 이곳에서 나니아민이 한 명 사망했습니다.”

아나렉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신중한 침묵이 있었다. 미르 대위가 아나렉샤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아나렉샤가 대답했다.

“저희가 그런 게 아니에요.”

지안카를라를 변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음주 사실을 밝혀야 했으므로 입만 달싹였다. 미르 대위는 얼굴을 찡그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알콜 중독사였어요.”

그런 후 먼저 앞서 걸어갔다. 아나렉샤가 보폭을 빨리하자 미르 대위가 충고했다. 

“제 등을 보며 걷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시야를 넓힌 순간 아나렉샤는 그 말을 이해했다. 빛이 드는 골목 곳곳에 널린 걸인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나렉샤는 미르 대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방금의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깨달았지만 그건 입밖으로 냈을 때 지나치게 위험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괜찮을 지도 몰랐다. 나니아가 제국의 일부라면 나니아민 역시 결국은 제국민이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대위님은 슬럼가 거주민들을 하나하나 파악하세요?”

“그렇습니다.”

“왜요?”

미르 대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렉샤가 다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은 깨끗하게 치워져있었고 어젯밤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를 향해 술병을 휘두르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시체가 있었는 줄도 모를 만큼 풍경은 완벽히 은폐되어 있었다. 골목은 그대로였다. 단지 불행한 나니아민들을 수용하는데 기능하고 있을 뿐. 아나렉샤는 이 모든 일을 왜 미르 대위가 굳이 상기시키는지 궁금했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고도 어떤 것과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그것과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정말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렉샤는 결국 골목 뒤쪽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어딘가에 있을 시선을 확신했다. 멍한 표정으로 아나렉샤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죽은 나니아민에게… 파트너가 있었나요?”

대위가 멈추어 섰다.

“질문의 의도를 묻고 싶습니다.”

“자녀는요?”

미르 대위는 몸을 돌려 골목에 시선을 빼앗긴 아나렉샤를 확인했다.

잠시 후 아나렉샤 역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으나, 아나렉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미르 대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묻겠습니다.”

“…….”

아나렉샤는 땅을 쏘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생도.”

“…….”

“아나렉샤 생도.”

“나니아민들은 미개해요.”

아나렉샤는 여전히 땅을 쏘아보는 채 힘주어 말했다.

“저희가 꼭 이렇게 신경써야 하나요?”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으므로 미르 대위는 대답 대신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생도.”

 아나렉샤는 고개를 들고 미르 대위를 쏘아보았다.

“제 대답에 책임지실 건가요? 제 입으로 굳이 이 기분을 꺼내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위님이 제게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 건지 알고 계신가요?”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아나렉샤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대위에게 대들어서인지, 아니면 이제 막 고백할 내용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길은 여전히 두 갈래였고 아나렉샤는 그 앞에 멈추어 있었다.

마침내 아나렉샤가 신음하듯 고백했다.

“마음이… 불편해요.”

“…….”

주먹을 쥐고 바닥을 쏘아보았다. 빛과 어둠이 나뉘어 그림자는 보다 선명하게 발등으로 떨어졌다. 

미르 대위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림자가 아나렉샤의 발등을 통째로 덮었다. 아나렉샤는 고개를 들었지만 표정을 숨기지는 못 했다. 혼란스러웠고 어린 애처럼 보였다. 스스로 짓고 있음에도 낯선 표정이었다. 미르 대위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생도, 저 역시 아까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지안카를라가 보고 싶었다. 이이상 대화해서는 안 됐다. 아나렉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르 대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도, 사관학교 졸업생의 3할은 시범근무지역을 선택합니다.”

“…….”

“갈리모프로 돌아오면 어떻겠습니까? 생도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아나렉샤는 고개를 들었다. 역광 때문에 미르 대위의 표정을 구체적으로 읽기가 어려웠다.

“저는….”

아나렉샤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웅얼거리듯 대답한 아나렉샤가 곧이어 대답을 정정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지안카를라를 봐야할 때였다. 아나렉샤는 이 골목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어둠 속을 걸어 빛의 세계로 귀환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곁에 있어야 했다. 미르 대위를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나렉샤는 그 끝에 어딘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갈래의 길이 있다면 친근한 자가 골라준 길을 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갈팡질팡할 거라면 보다 안전하게 잘 휩쓸릴 수 있는 곳으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어두캄캄한 골목을 돌아보는 일이었고 아나렉샤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추는 일에 능숙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출 수가 없다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다못해 약을 빨면 됐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대체 뭘까.

“그렇군요.”

미르 대위는 그것으로 대화를 닫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나렉샤는 셔틀에서 루 농장을 내려다보았다. 500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농장이 관개 파이프를 두고 끝없이 펼쳐졌다. 흰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장교와 제국민 틈에 섞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그들을 구분해냈다. 손가락으로 수를 셀 수도 있었다. 열 손가락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수백 명이 그곳에서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 한 채 단순노동을 했다. 아나렉샤는 손가락을 조용히 까딱이다 말고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으로 까만 옷을 세기 시작했다. 


지안카를라.
아나렉샤는 손바닥으로 4를 만들다 말고 눈을 감았다.
네가 필요해.


술을 아주 많이 마셔야 할 때였다.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름이 필요했다.
그 이름을 불러줄 친근한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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