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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기억은 시냇물처럼»
1차/old 2019. 10. 23. 00:55

1.

허겁지겁 정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떠났을까?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그 뒤에는 어떡하지?


2.

그 날 아나렉샤는 오전 일곱 시 반에 번쩍 눈을 떴다. 보통은 여덟 시까지 괴로워하며 꿈지럭거리는데,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패드를 확인했더니 AI 마리사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과연, 뭔가 있기 때문에 일찍 눈이 떠진 것이로구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기며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하루 대련 보조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아나렉샤는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튀어 올랐다. 귓불에서부터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벼락처럼 그 이름이 떠올랐다. 코스챠!

‘수락하면, 오늘 하루 정신없겠지….’ 

오후에는 콘스탄틴과 정원을 걷기로 되어있었다. 만약 호출을 받으면 언제가 되었든 그녀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대련실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사에게 대련 보조직 제안을 받은 사실 역시 영광스러운 일이다.

‘약속을 미룰까?’

귓불이 여전히 찌르르 아팠다. 창밖으로부터 새벽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방의 조도로 하루의 운을 점쳐보았다. 오늘만큼 화창한 날이 없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콘스탄틴이 보고 싶다던 꽃이 내일은 질지도 몰랐다.

아나렉샤는 AI 마리사의 메시지에 답장한 후 패드를 껐다.


3.

‘멍청한 아나렉샤.’

숨이 가쁘기 시작할 무렵, 정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4.

생물학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잠깐 방을 들릴 시간이 있었다. 아나렉샤는 서랍을 열고 그동안 모아둔 보급용 실삔을 꺼내 거울 앞에 섰다. 심각하게 고민을 거듭해 왼쪽 머리카락을 고정시켜 귀가 보이도록 해보았다. 그러자 새빨간 귓불이 드러났다. 어제보다는 붓기가 많이 빠졌는데 괜찮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드러낸 적이 없는 귀를 내놓고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아나렉샤는 오른쪽도 마저 올리려다 말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고백하자면 하루 종일 귀가 만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다. 여전히 귀걸이가 제대로 달려있는지, 혹시 꼭지가 빠지지는 않았는지, 씻을 때 보석 알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물학 시간에도 한 손으로는 필기를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자꾸만 귀 뒤를 문질렀다. 콘스탄틴이 보았더라면 뭐랄까, 가자미 같은 눈으로 ‘만지지 말라고 했지’라고 말했을 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귓불로 올라가는 손을 연거푸 내려 책상 위에 얹어두었다.


5.

정원은 열려 있었다. 아나렉샤는 잠깐 문고리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줄곧 달려와서 숨을 쉬기가 무척 힘들었다. 무려 복도 끝에서부터 끝까지, 3층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오른 것이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손을 더듬어보니 삔이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뛰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아나렉샤는 눈을 감고 후, 심호흡을 했다.

‘바보 같아….’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면 서운하다.

설령 실행되더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변함없이 속상하다.


6.

정원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과연 날씨가 좋았고 콘스탄틴이 찾던 꽃도 거기 있던 모양이었다. 좁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목을 지날 때, 콘스탄틴이 파란 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건가?”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그늘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왜냐하면 빛이 있는 쪽이 좋으니까.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귀를 뚫기 직전에 두 사람이 지었던 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했다. 콘스탄틴은 비장하고 어딘지 전문적이었고, 아나렉샤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귀를 관통할 때는 으드득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둘 다 조금 놀랐다. 귓바퀴를 잡고 있던 콘스탄틴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겁이 났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뒤에는 사실 자긴 그렇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고 말하려고 했다. 가든에서도 이런 일을 함께 한 쪽은 콘스탄틴이니까 말이다. 패드에서 호출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물어보았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막 가든에서의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인공 시냇가를 앞에 두고 있었다. 패드의 호출 신호를 듣자마자 아나렉샤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추어 섰다.

“왜?” 콘스탄틴은 묻자마자 무슨 일인지 이해한 얼굴을 했다.

잠깐 시냇가를 쳐다보던 콘스탄틴이 물었다.

“가야하지?”

아마 그때 아나렉샤는 울상을 지었을 것이다.


7.

정원에 들어서자 조금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아까보다 어두워진 정원에는 빛이 많지 않았다. 아나렉샤는 한 손에 쥔 물건을 다른 한손으로 옮기고는 손을 붕붕 휘저어 땀을 말렸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줄기가 조금 뭉개져 있었다. 방에서 가지고 올 때는 좀 더 싱싱했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주변이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시냇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나무가 드리워 그림자가 졌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캄캄한 한밤의 동굴을 지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나렉샤는 걸어가는 동안 자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키가 조금씩 작아져 생도복이 헐렁거리고 신발이 끌렸다. 그런 채로 열두 살까지 돌아갔다.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탄내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나렉샤는 우뚝 멈추어 서서 빛을 반사하며 튕겨져 오르는 물방울을 보았다. 시냇가 앞에서 뒤통수가 고개를 돌렸다. 타이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나렉샤는 심호흡을 했다.

“30분이나 걸려서 미안해.”

쥐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잎이 줄줄 떨어졌다.


8.

하지만 말해야 하는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을 종종 구분하지 못한다. 어쩌면 아까, 패드에서 알람이 울리지 않았더라도 아나렉샤는 콘스탄틴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뒤에 하고픈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 법이니까. 포기하는 일들이 늘어나는 것 말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감각이란 이런 걸지도. 그렇지만 언젠가 흙을 뒤집어 쓴 콘스탄틴을 구덩이에서 건져올렸을 때에는 제대로 물어보았다. 무섭지 않았어? 그래서 그 뒤의 말도 할 수 있었다. 돌아가자.

포기한 말과 행동은 어디로 흘러가고 마는 걸까. 만약 인간도 AI처럼 DB가 있다면… 그런 것들은 어디로 흘러가 퇴적되는 것일까.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진다면 서운하다. 설령 실행되지 않더라도 스스로는 기억하고 있는 편이 좋다. 파란 꽃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애의 옆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햇빛, 얼굴에 드리우던 조도를 보면서 아나렉샤는 생각했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

하지만 정신없이 정원으로 달려오는 도중에 아나렉샤는 결국 그 순간의 말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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