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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가 신경 쓰인다. 이것은 불길한 예감이다.
아나렉샤는 악시온 알레프와 생활한 지난 이주일 간의 데이터를 정리해보았다.

첫째로, 알레프는 레고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미니블럭 함대다)

아나렉샤는 손재주가 나쁜 건 아니지만,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라서 그런 분야에는 영 관심이 없다. 가든에서도 조립이나 수리와 관련된 과목이 등장하면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AO2에서 현식스케 5세를 만났을 때에도 심드렁한 감상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다. 룸메이트 알레프에게는 바닥이나 침대에서 미니블럭 함선을 조립하는 취미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함선에는 꼭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네이밍센스는 형편없었다. 현식스케라니.

언젠가 알레프가 자리를 비운 틈에 현식스케들을 감상한 적이 있기는 했다. 울퉁불퉁한 면 없이 매끄럽게 칠해진 등, 부드럽게 잘 빠진 선으로부터 알레프가 느끼는 애정을 느껴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둘째로, 알레프는 못됐다.

종종 알레프가 방바닥에 레고 조각을 흩뿌려 놓을 때가 있다. 아나렉샤가 밟았으면 해서 거기 놓는 것이다. 며칠이 가도록 치우지도 않는다. 이런 술수에는 통달했다고 자신했지만, 화장실 매트에 발을 올리다 말고 레고를 밟은 뒤로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게 됐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레고를 밟는 순간은 정말 아프다. 아나렉샤의 경우 머리카락이 위로 삐죽 솟구쳐오를 정도다. 눈물이 고일 때도 있다. 

아나렉샤를 제일 짜증나게 만드는 건 레고를 밟자마자 고개를 돌렸을 때, 반드시 눈이 마주치고 마는 알레프의 등장이다. 알레프는 언제나 뺀질거리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동그란 눈을 접은 후에 난처하게 웃는다. 그런 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처럼 군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세 번째, 알레프는 잠버릇이 있는 것 같다.

새벽에 종종 침대에서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낸다. 첫날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아나렉샤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나 바닥을 확인했다. 떨어진 알레프는 매번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면서 도도하게 일어나지만, 최근부터 아나렉샤는 그 말을 믿지 않게 됐다.

네 번째, 알레프는 얼굴점 클럽 초창기 멤버다.

룸메이트 이상으로 엮기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그 외에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를 더 쓸 수 있다. 이주일은 꽤 긴 시간이었다.

지난 주에 아나렉샤는 알레프의 레고를 정통으로 밟는 비극적 경험을 했다. ACOTS가 들썩일 만큼 비명을 지르면서, 아나렉샤는 다짐했다. 피의 복수를 내리리라. 응징하리라. 처벌해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도록 만드리라. 알레프는 복도에서 태평하게 감말랭이를 먹다 말고 덜미를 잡혔다. 알레프는 별로 당황하거나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대신 감말랭이를 먹을 거냐고 물었다. 

아나렉샤는 AO2로 돌아가면 현식스케들을 치워버릴 거라고 다짐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점 클럽의 창시자이자 아나렉샤에게 종종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네는 콘스탄틴은 알레프가 그렇게 나쁜 친구는 아닐 거라고 넌지시 언급했다. 아나렉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슬쩍 말을 얹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콘스탄틴의 말에 따르면, 알레프는 마음에 드는 상대의 발 밑에 지뢰를 설치해 그 폭발 장면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콘스탄틴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알레프는 바닥을 치우고 레고를 제자리에 보관하기 시작했고, 자신과 새벽에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거나 아직 끝내지 않은 과제를 해치우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건네기 위해 복도를 질주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알레프는 생각보다 아나렉샤를 싫어하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방법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노력하는 쪽일 수도 있다. 아나렉샤는 귀여운 것과 노력하는 것들에게 너그럽다. 그러니까 어쩌면 알레프는, 바닥에 흩뿌려진 난잡하고, 기분 나쁘고, 자나깨나 아나렉샤를 찌르려 드는 레고조각이 아니라 잘 조립되어 특별한 이름이 붙은 함선 같은 아이일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럴 지도.


아나렉샤는 AO2 문앞에서 품에 든 블럭 함대 세트 박스를 한 번 점검해보았다. 이틀 전 마리사를 통해 요청한 것으로, 모델명은 같은 악시온 출신의 동기들에게 자문한 것이다. 사달수드가 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알레프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방으로 들어선 아나렉샤는 잠깐의 고민 후 함대 세트 박스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나왔다.

40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들러 책상 위를 확인했다. 박스는 그대로 얹어져 있었다. 알레프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나렉샤는 다른 수업을 듣기 위해 방을 나왔다.

50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룸메이트가 귀가했는지 AI 마리사에게 정보를 요청했다. 갑자기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 아나렉샤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AO2의 책상에서 박스를 제거했다.

2시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들러 책상 위에 박스를 다시 얹어놓았다. 

2시간 30분 후, 허겁지겁 AO2로 뛰어온 아나렉샤가 박스를 침대 밑으로 치워버렸다.

3시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들러 책상 위에 박스를 다시 얹어놓았다. 

이런 짓을 2시간 동안 더 반복했다.

5시간 10분 후, 아나렉샤는 마침내 마음을 결정했다. 선물을 치우고 없던 일로 하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잡고 나니 제법 비장한 마음도 들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부리나케 달려온 아나렉샤는 텅 빈 AO2에 들이닥쳤다. 박스는 여전히 알레프의 책상 위에 얌전히 얹어져있었다. 하도 만져서 구겨진 표지가 보였다. 아나렉샤는 박스를 들어올리다 말고 마지막으로 고민에 빠졌다. 괜찮을까? 

괜찮을 지도…, 

아니 역시 괜찮지 않을 지도…….

엉거주춤 책상 앞에 선 아나렉샤는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박스를 도로 책상 위에 얹어두었다. 그 다음에, 그 일이 있었다. 아나렉샤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문앞에 서있는 알레프를 보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레고를 밟지 않은 상태로 마주친 알레프의 얼굴,
에 붙은 삼각형 모양 점,
과 꽤 고약한 잠버릇과 그것을 수습하는 태도의 귀여움,
같은 것을 막 깨달은 참이다.
그 순간에,

언젠가 알레프가 자리를 비운 틈에 보았던 현식스케들이 떠올랐다.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조립된 단면들을 보며, 아나렉샤는 생각했었다. 그렇게 사방팔방 요란하게 흩뿌려놓고는 이런 것을 만들다니. 알레프의 행동거지는 꼭 레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의 단계일 뿐이다. 알레프는 결국 그 모든 조각으로 함선을 만들고 이름도 붙여주지 않는가. 그러므로 뭔가 수정해야 한다면, 아나렉샤는 두번째 항목을 수정하겠다. 그런 건… 싫지 않아, 라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뭐가 됐던 간에,
알레프에게 딱 걸리고 만 것이다.


5초 뒤 아나렉샤의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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