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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경보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밤 9시 무렵의 일이었다.

아나렉샤는 베개 속으로 뜨끈뜨끈한 패드를 밀어 넣고 복도로 나왔다. 취침시간이었으므로 전원 소등되어 있었고, 어둠이 깔린 가든의 복도는 낮에 느끼는 것보다 훨씬 차갑고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경보가 점점 더 뚜렷해졌다. 아나렉샤는 탄내를 맡았다. 정원 쪽이었다. 통유리로 된 창문 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아나렉샤가 멈추어 서자, 키 큰 실루엣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확인했다.

오르카가 말했다. “정원에 불이 났어.”

아나렉샤는 천천히 걸어 오르카 곁에 섰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우거진 열대우림 한 편에서부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가든에서부터 다소 떨어진 섹터였다. 주황색 불꽃이 일렁이며 솟구쳐오를 때마다 바싹 탄 나뭇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을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화재 장소가 결코 가깝지 않았음에도 유리창에 손을 대면 그 열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 더 올 지도 몰라. 경보가 너무 커.’ 아나렉샤는 생각했고, 그 일은 얼마 안 가 정말로 벌어졌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부터 콘스탄틴이 등장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오던 그는 눈앞의 풍경을 보고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코스챠.” 이번에는 아나렉샤가 말했다.

“정원에 불이 났어.”

그러니까, 밤 9시 무렵이었다. 오르카와 콘스탄틴이 무엇을 하다 경보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경보를 들은 게 아니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세 사람은 어둠속에서부터 생명력을 품고 타오르는 그 끔찍한 불기둥을 보았다. 연기가 솟구쳐 오르고, 나무가 서서히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것을, 재와 함께 흩날리는 나뭇잎 조각들을 세 아이들은 똑똑히 보았다. 정말이지 속수무책의 광경이었다. 끝없이 확장하는 불기둥이 정작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서는 열대우림의 생명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아나렉샤에게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완전히 넋을 빼놓고 창가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삑삑 소리와 함께 인공강우가 시작되었다. 묵직한 빗방울이 정원 한복판으로 쏟아지더니, 탄내가 축축해지고 불길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세 사람은 침묵한 채 창가에 서서 그 압도적인 소리를 들었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었는지 땅에서부터 피어오른 안개 때문에 앞이 자욱해질 지경이었다. 화재가 수습되고 난 뒤 AI가 짧게 보고했다. B섹터가 전소되었다고 했다.


짐을 챙겨 기차에 오를 때, 아나렉샤는 열두 살에 보았던 그 운명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콘스탄틴은 이미 좌석에 앉아있었고, 오르카는 일련번호를 확인하며 좌석을 찾는 중이었다. 아나렉샤는 두 사람이 ACOTS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이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당연한 듯 나눌 만큼 친근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ACOTS행 열차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존재는 한편으로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세 사람이 다시 모인 건 열두 살에 정원 화재를 목격한 이후 그 열차에서가 유일했다. 거의, 유일했다.

아나렉샤는 오르카의 옆좌석에 앉았다. 콘스탄틴은 그녀의 맞은편에 대각선으로 앉아있었다. 고개를 들면 콘스탄틴을, 고개를 돌리면 오르카를 볼 수 있었다. 아나렉샤는 나란히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해, 마침내는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마주친 채 서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하며 오르카와 팔뚝이 부딪쳤다 떨어졌다. AI가 느세파 가든에서부터 ACOTS까지 소요될 이동시간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아직도 가끔씩 어렴풋한 그 경보소리를 듣는다. 느세파 가든 출신 중에 그 화재를 모르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밤에, 9시 무렵에 말이다. 그 유리창 앞에 당도하지 않고서야 불꽃이 무엇인지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을 테다. 그것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끔찍하게 타오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세 사람을 묶어놓지 못 한 다소 시큰둥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세 사람은 ACOTS으로 떠날 것이고, 다시는 한밤중에 불타오르는 숲을 목격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세 사람은 여전히 첫번째 이름으로써 그 화재를 간직한다. 불기둥은 기억 속에서 아칸을 닮은 그 원초적인 힘과 함께 영원토록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불을 기억하는 느세파의 우리는 모두 불의 아이들이 아닌가. 

아나렉샤는 아직도 그 불이 너무 일찍 전소되었다고 믿는다. 때로 우리를 묶는 끈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더욱 단단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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