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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haircsis «가정의 이야기»
1차/old 2019. 10. 22. 16:26

1.

눈이 검은 상인을 본 적이 있어, 라고 말해서 난롯불이 화드득 타올랐다. 꼭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잼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야.”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난롯불 때문에 벽난로 근처까지 희미한 주황빛이 둥글게 퍼져 있었지만, 창가부터 응접실 끄트머리까지 이어지는 넓은 공간이 모두 푸르스름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불꽃으로부터 동떨어진 모든 공간이 거대한 암실 같았다.

알랑은 막 복도를 지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잼이, “눈이 검은 상인을 본 적이 있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알랑은 멈추어 섰고, 잼은 덧붙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잼과 알랑은 대화할 수 있었다.

사실 둘은 비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2.

요컨대 이것은 가정(假定)의 이야기다. 잼은 열다섯 살에 동쪽항만으로 몰려온 낯선 상인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보지 못 한 옷을 입고 들어보지 못 한 언어를 썼는데, 때때로 잼보다 나이든 남자들이 그녀보다 키가 작기도 했다. 돌이켜보자면 대체로 그들 모두가 키가 큰 편이 아니었다. 잼이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한 가지는, 그들 모두가 눈이 새까맣고 깊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에흐놀 너머의 동방국가에서 온 부르주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국가에서 권력자였다.

 

3.

“바다 너머에는 에흐놀이 있고, 에흐놀의 너머에는 그런 국가도 있는 거야. 그걸 잊은 적이 없어. …열다섯 살에 말이야. 나는 세상을 나가고 싶었는데. 내게는 당나귀와 작대가 있었지만 돈도 배도 없었지.”

잼은 어둠속에 들어앉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열다섯 살에 말이야, 나는 카르스텐의 이름 바깥에 있는 세계를 슬쩍 엿보게 되었던 거야.”

알랑이 잼의 옆 소파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잼은 알랑이 여느 때처럼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상상하는 건 쉬웠다. 알랑은 호수의 수면을 보여주는 사람이므로, 수면 아래를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과 함께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밤이군요.” 알랑이 잘 개어진 옷처럼 대답했다.

“…그건 격려입니까?”

“맞아.” 잼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요점을 짚어줘서 고마워.”

그래서 잼은 이야기를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4.

이름 모를 동방 국가에서 온 그 부르주아들이 많은 것을 구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책을 몇 번 뒤져보고, 과일을 기웃거리고, 몇 가지를 가리켜 먹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서책 방에서 몇 가지 저서를 구입했고, 머뭇거림도 없이 배에 오를 채비를 했다. 잼은 반나절동안 그들을 졸졸 쫓아다닐 마음을 먹은 참이었는데,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나 몹시 실망했다. 그들은 통상적인 상인처럼 재물을 취하지도 않았고, 마을 한가운데에 세워진 교회를 구경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시시하다.” 잼은 중얼거리다 말고 허리를 숙였다. 발치에 무언가 채였던 까닭이었다.

잼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주워들었다. 부르주아의 돈주머니에는 황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낯선 모양으로 둥글게 깎은 동전들이었다.

잼은 배를 오르던 그들 중 하나에게 뛰어가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흠?”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잼을 올려다보았다.

잼은 그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5.

잼이 이야기 하다 말고 농담조로 덧붙였다.

“그냥 내가 다 가질 걸 그랬다.”

어둠 속에서 알랑의 웃음소리가 작은 알 구슬처럼 쏟아졌다.

“그것도 좋겠지요.” 알랑이 대답했다.

“하지만 잼 공은 돌려주셨군요.”

“맞아.” 잼이 말했다.

“왜냐하면 알고 싶었기 때문이야.”

 

6.

남자는 몹시 유쾌하게 웃어댔다. 어찌나 크게 웃어댔던지, 배에 오르던 동료들 모두가 몸을 돌려 그와 눈앞의 잼을 바라볼 정도였다. 잼은 그들 전원이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서야 본 것이다.

“고마워.” 남자의 발음은 몹시 서툴렀다.

“나. 아가씨. 고마워. 감사하다.”

“말 할 줄 알아?”

“조금.” 남자가 엄지로 검지의 마디를 쥐꼬리만큼 잡았다.

“그러나 알아듣는다. 듣기 한다. 말. 조금.”

“그럼 나 질문 있어.”

남자가 완전히 잼쪽으로 몸을 틀었기에, 잼은 그의 소맷부리를 놓아주었다.

“너 왜 책만 사?”

그 때, 남자의 등 뒤에서 그의 동료들이 이국어로 무어라 말을 걸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몇 가지 대답을 했고, 어깨를 으쓱이곤 낄낄거리며 다시 잼을 바라보았다. 잼은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가 궁금했다. 눈앞의 남자들은 어떤 질서처럼 보였다. 이베르타에 도착했으나 그 무엇도 이베르타에 방문한 행색 같지가 않았다.

남자가 대답했다.

“아가씨. 이곳의 물건. 우리에게도 다 있다.”

남자는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며 덧붙였다.

“오로지 책. 모두 다르다. 어디를 가도.”

“너 배고프지 않아?”

잼이 얼굴을 찡그렸다.

“고기나 빵을 사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자 남자가 히죽 웃으며 동료들을 바라보았고, 동료들에게 몇 가지 말을 전달했다. 잠시 후, 그곳에 선 동방의 부르주아들이 너나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 아가씨.” 남자가 말했다.

“배에 탄다. 배고플 때 있다. 그러나 지루하다. 그것이 더 크다.”

“너희는 귀족이야?”

“아니.”

남자는 잼이 건네준 돈주머니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힘이 있다.”

그들은 이국의 노래를 부르며 배에 올랐다. 잼은 항구 돌바닥에 주저앉아 낯선 돛을 달고 바람을 맞는 동방의 함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배가 까마득한 점으로 멀어지는 것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잼은 허전했고, 갑자기 허무해졌는데, 곧 괜찮아졌다. 그러자 어떤 질서가 막 이베르타에 도달했는데, 닿기도 전에 떠나보냈다는 것을 막 깨달았다. 그러나 열다섯 살의 잼이 무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잼은 단지 그 질서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할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7.

- 저는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세드릭 상인 조합의 사업이요. 비르가 가주가 된다면 상업의 활성화와 인식 개선을 해나갈 테니 제게는 더욱 호기가 될 것입니다.

 

알랑은 “호기”를 말할 때조차 단정했다.

그러나 그 담담한 어조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런 걸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알랑의 수면 아래를 상상하는 일이다.

 

8.

“어떻게 되던 시대가 변할 거야.” 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난롯불이 거의 다 꺼져서, 방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아까보다 짙고 빽빽하고 건조한 어둠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꼭 한밤처럼 보였다. 새벽이 올 기미는 없었다.

“그럴 겁니다.” 알랑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일까요?”

“허무하고 좀 어이없지만, 그래.”

잼은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를 뒤척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들 모두가 눈이 새까맣게 깊었다는 것뿐이야.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권력자라는 사실이었지. 그런데 그들이 흑안이었기에 권력자였던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지. 나는 그걸 잊은 적이 없어.”

잼은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들을 생각했어.”

“그만큼 큰 돈주머니를 들고 다니진 않지만.” 알랑은 농담조로 덧붙였다.

“그렇군요.”

“그래.” 잼은 대답했다.

“그런 세상도 있더라고.”

“그런 세상을 기대하십니까?”

“아니.”

잼은 알랑이 있을 어둠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단지 너의 호기를 기대할 뿐이야.”

탁, 하고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난롯불이 꺼진 것이다. 이제 서로의 눈동자를 희미하게나마 비춰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깜깜한 눈동자가 되었다. 어둠속에서 둘은 차츰 공평해졌다.

이번에도 잼은 알랑이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을 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 좋을 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게 끝났기 때문이다. 시대가 작살났기 때문이다. 항구에는 언젠가 또 다른 신세계의 배가 도달하고, 어두컴컴한 방에도 새벽이 온다. 잼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헤어짐의 노래를 불러볼까.”

잼이 씩 웃었다.

“이건 그들이 떠나기 전에 나에게 불러줬던 노래인데 말이야. 뜻은 모르지만 음만 따서 내가 멋대로 개사했어.”

그리고 잼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에 말이다. 열다섯 살에 잼은 그 항구에서, 새벽이 올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허전하고 쓸쓸했던 것이다. 그것이 언제 올 줄도 모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잼은 어둠속에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으니 노래를 부를 수가 있다.

 

잘 있게나, 어제의 전우여.

우린 어쩐지 오래 전부터 벗이었던 것만 같아….

 

눈을 감자 항구가 펼쳐졌다. 잼은 굴러온 돈주머니를 주웠다. 남자의 소맷부리를 붙들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잼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도 웃어주었고, 잼도 그렇게 했다. 알랑과 잼은 잠시 그런 식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네 호기가 올 거야. 잼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새 시대가 온다면.

요컨대 이것은 가정(假定)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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