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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이야기의 숲을 (完)»
1차/old 2019. 10. 22. 15:59

 1. 

 소문대로 그 잡화점에는 간판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껏해야 여섯 평 남짓의 공간이 펼쳐졌다. 좌측에 매대가 있었지만 잡동사니만 듬성듬성 비치되어 있었고, 천장 곳곳에 뒤집힌 채 매달린 꽃다발들은 서서히 말라가며 풀 냄새를 풍겼다. 가게의 풍경은 잡화점이라기엔 지나치게 간소했으며, 가게라기보다 개인적인 공간에 더 가까워보였다. 

 가판대는 가게의 3분의 1정도 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도 가게의 주인은 안쪽에 앉아 뜸을 들였다. 루시우스가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한 번 더 알린 후에야 그녀는 가판대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금발. 루시우스는 눈앞의 여인이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안녕. 바르바라는 느긋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아 편한 자세로 앉았다. 찾는 게 있니? 시선이 마주치자 루시우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부탁하면 못 해도 일주일 안에 무엇이든 구할 수가 있다고 하던데. 바르바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지. 더 늦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더 빠를 수도 있지. 바르바라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판대를 두드렸다. 그래서, 뭘 찾고 있니? 

 처음에 루시우스는 조금 쭈뼛거렸는데, 바르바라와 눈이 마주친 후에는 오히려 바싹 긴장한 것 같았다. 바르바라를 쉽게 대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의미심장하고 수상쩍으며 위험하고 냉랭해보였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이 작은 마을에까지 찾아와 그녀에게 도움을 구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마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검은 모자를 쓰지도 않았고 산발머리도 아니었으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게에는 도마뱀 대신 꽃이 매달려 있었고 루시우스 자신이 부탁할 내용도 심각하게 위법적이거나 유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시우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르바라는 그를 위해 기꺼이 몸을 기울여주었다. 잠시 후, 루시우스가 바르바라로부터 떨어졌다. 바르바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좋아, 그건 해줄 수 있어. 

 가능한 빨리 구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렵지 않아. 

 바르바라는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걸릴까? 루시우스가 조급함을 숨기며 은근하게 독촉하자, 바르바라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딴 생각에 잠겨 있는 말투로 말끝을 흐리던 바르바라가 명령하듯 대답했다. 일주일 뒤에 거기서 봐. 

 

 2. 

 떠난 지 반년 만에 길리언에게서 편지가 왔다. 써드빌의 생활을 청산하고 북쪽으로 올라온 바르바라는 아든 상단에 손을 벌려 조금의 돈을 빌렸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는 액수였지만 한동안 체사레의 방식을 내려놓을 참이었으므로 다른 길도 나쁘지 않았다. 신변정리를 끝낸 바르바라는 오는 길에 써드빌에서 훔쳐온 그녀의 흔적을 대부분 처분하고 외진 마을까지 침착하게 흘러갔다. 호숫가가 보이고, 빽빽한 숲이 드리웠고, 공기가 한적하며 전쟁의 여파가 크지 않은 곳으로. 시간이 남아돌아 무엇이든 저질러볼 수 있는 곳으로. 마리사 체사레가 써드빌을 선택한 것처럼 바르바라도 그곳을 선택했다.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새 터전은 현관 앞에 서면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호수를 껴안고 있는 짙은 숲, 젖은 흙의 냄새, 볕이 잘 드는 창가. 그 집에 불을 밝히며, 바르바라는 앞으로의 일들이 이전의 일들과 얼마나 연관되어갈지를 생각했다. 과거의 선택을 끊어내듯 써드빌의 난나를 지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바르바라가 살아있는 한 과거는 얼마든지 그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거가 현재를 추월해 미래의 방향을 정할 때가 오면… 선택의 순간. 순간들. 또 순간들. 

 잡화점을 연지 한 달 반 만에 그녀는 아든 상단에 진 빚을 청산했다. 필요한 물건을 반드시 구해오면 신용이 붙었고, 암암리에 돌던 소문에 가속이 붙을수록 벌이가 점점 좋아졌다. 도둑질이 아니어도 바르바라는 수완이 좋았다. 장사에도 재능이 있었나봐. 바르바라는 호숫가에 쪽배를 띄우고 느긋하게 낚시를 하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했다. 못 하는 게 없어서 큰일이네, 바뀐 이름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 반은 농담이었다. 새 터전의 풍경은 온통 선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낮이면 새가 울고 밤이면 풀벌레가 울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쏴아아 파도처럼 몰아치고, 물 냄새는 비리지 않고 맑았으며, 햇살은 매일같이 청명했다. 건져 올릴 때마다 미끼가 사라진 낚싯바늘과 텅 빈 양동이를 두고도 근심어릴 일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런 식으로 팔자 좋은 몇 달을 살았다. 

 길리언의 편지를 받은 날, 바르바라는 평소보다 일찍 잡화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오전시간에 루시우스의 의뢰를 받아놓았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었다. 떠난 지 반년 만에 마주한 과거의 흔적은 생각했던 딱 그만큼 기꺼웠다. 길리언 아든의 필체와 문장은 변함이 없어 무척이나 그 애다웠다. 원한다면 길리언은 좀 더 빨리 그녀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든 상단을 통한다면 길리언은 한때 바르바라였고 지금은 바르바라가 아닌 그녀가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를 손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든의 성을 빌어 돈을 마련해준 길리언에게 최소한의 염치를 차리기로 마음먹은 바르바라는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겨 필요할 때 그 애가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일찍부터 자신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리 맹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 다행히 길리언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반년이면 충분하다. 편지 문장마다 묻어있는 그리움이나 조금의 서운함을 시선으로 문지르며, 바르바라는 발끝을 까딱였다. 길리언의 편지는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늦게 도착한 편에 속했다. 꾹 참은 모양이지, 기특한 것. 바르바라는 답신을 짧고 간결하게 썼다. 

 며칠 뒤에 길리언이 마을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길리언은 입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바르바라를 가볍게 포옹한 후 놓아주었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자라있었다. 아이구나, 그 생장을 실감하며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자라고 있는 아이구나. 

 바르바라, 잘 지냈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아니야, 적당한 때에 도착했어. 

 받자마자 출발했으면 이틀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땐 내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단다. 

 여행 다녀오신 거예요? 

 아니, 일 때문에. 

 오늘도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 아닌가요? 

 맞아. 

 바르바라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도트라에 가야겠구나. 말을 빌려주렴. 

 루소에서 도트라까지 반나절이 걸렸다. 길리언이 마차를 부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바르바라는 말을 달리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말 두 필에 나란히 올라 거리를 좁히거나 벌리며 고삐를 잡거나 놓아주었다. 쉬지 않고 달려 늦은 밤에 도트라 인근에 도달했다. 숙소에 방을 잡으면서 길리언이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왜 수도에 가는 거죠? 연극을 보러. 그렇게 대답한 바르바라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도 응시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았다. …연극 내용을 얼핏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호기심이 생기더구나.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음 날 점심 두 사람은 수복 중인 도트라의 공연장을 찾았다. 거리의 많은 것이 부서지거나 헤져있었는데 꼭 그만큼의 사람들이 벌떼처럼 붙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고 타일을 깔고 있었다. 바르바라와 길리언은 기사단 복장이 아니었으므로 그 누구도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 했다. 사실 두 사람이 리퍼코트를 입고 있었더라도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하얀 드레스 위에 짙은 색 망토를 두른 채 야외에 세워진 원형극장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길리언이 바르바라의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길어서 거치적거리더구나. 그런가요?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어울리니?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게 어색해서 보고 있었어요. 

 연극 시작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텐데도 객석의 절반이 벌써 차있었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을 옆에 세워놓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시우스였다. 

 구했나? 

 그럼. 

 짙은 색 망토가 조금 들썩이더니 로브 사이로 조용히 손 하나가 빠져나왔다. 바르바라는 티켓 토큰을 루시우스에게 쥐어주고는 빈 손바닥을 펼쳤다. 대체 무슨 수로 이걸 구했는지 모르겠군. 티켓 토큰을 훑으며 중얼거리던 루시우스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값을 지불했다. 

 떠나기 전 루시우스가 눈짓으로 길리언을 가리키며 은근하게 웃었다. 애인? 너무 어려보이는 걸.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날카롭게 웃었다. 조카야. 바르바라는 곧 정정했다. 음, 아닌가… 사촌? 바르바라는 맹하게 서서 딴 곳을 보고 있는 길리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결론지었다. 사촌쯤으로 하자. 

 당신에 대한 소문이 꽤 많아. 

 마녀라는 것?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를테면? 

 어린 애를 잡아먹는다던데. 

 바르바라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부진한 상상력들이구나. 

 재주 좋은 사람이 외딴 곳에 숨어살면 다들 궁금해 하기 마련이지.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비슷한 거야. 

 바르바라는 극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것뿐이지.

 연극이 시작됨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루시우스는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바르바라와 길리언은 문지기에게 토큰을 보이고 객석에 앉았다. 막이 오르자 켈커스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남자가 나타났다. 욘디. 무대를 올려다보던 바르바라의 입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각색되었다. 바르바라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몇 가지가 빠지거나 더해졌고, 욘디가 사랑한 소녀는 결국 욘디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비극서사의 구조를 착실하게 쌓아올리며 절정으로 치달아갔다. 비극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쓴 극이었다. 극 기저에 깔린 감정을 감지한 바르바라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의자에 기댔다. 노이어에서 시작된 공연이 있는데, 이번에 도트라에도 온다더군, 그 티켓을 구해줘. 루시우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노이어.

 누가 썼는지 궁금한 걸. 

 그런가요? 

 농담이란다. 사실 궁금하지 않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옆자리에 앉았더라면 자신을 보며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다. 이건 무엇에 대한 이야기 같아? 상상 속의 이반이 바르바라에게 묻는다. 글쎄, 바르바라는 대답한다.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구나. 

 연극이 끝나고 박수가 이어졌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인사를 나누고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르바라와 길리언은 객석 바깥으로 걸으며 그들이 알고 있는 욘디의 이야기를 극의 서사와 비교해보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도 방금 보고 온 것도 비극임은 마찬가지였지만 같은 성질은 아니었다. 사랑을 얻지 못 하고 괴물이 되어버린 남자와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상실한 남자의 이야기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비극이란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진부한 대화주제를 꺼내려던 바르바라는 무대 뒤편으로 빠져나오는 붉은 뒤통수를 보고 잠깐 말을 멈췄다. 길리언이 주변 관객들의 대화내용을 주워듣고는 바르바라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평이 좋아요, 다들 비극을 좋아하나 봐요. 아마 저 사람들은 원래 이야기가 어떤지 모르겠죠. 

  바르바라는 곧 무대 뒤편에서 시선을 떼어내고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모르는 편이 나아, 그건 우리 이야기니까. 

 

 3. 

 이반과 재회한 건 그 뒤로부터 세 달이 좀 더 흐른 뒤였다. 잡화점을 열어놓고 정작 하릴없이 느긋하게 마을을 걷던 바르바라는 말을 탄 이방인이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질 않았는데 바르바라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이더라.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가 말에서 뛰어내려 두 팔을 벌렸다. 그 품에 안긴 후에야 바르바라는 술래잡기 혹은 숨바꼭질 비슷한 것으로 남았던 지난 몇 달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반. 로브를 벗자마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바르바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내가 안아줄 틈을 주지 않는구나. 사실, 그녀의 친구들이 대체로 그랬다. 

 다시 만났구나.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모양이지. 

 이반이 웃는 걸 올려다보던 바르바라가 가볍게 이반의 손등을 쥐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잡화점으로 돌아갔다. 이반은 바르바라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이반은 그녀가 가게 문을 닫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거리로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네. 나는 네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맞아.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좀 더 분명하게 용건이 있는 것 같구나. 이반이 대답했다. 그것도 사실, 맞아. 

 바람이 불자 선선한 손길이 바르바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르바라는 여기까지 온 이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선한 것들, 아직은 선한 것들. 혹은 지속적으로 선할 것들. 좀 걸을까. 바르바라가 중얼거리자 이반이 물었다. 어디로? 어디겠니. 

 마을을 천천히 벗어나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는데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반과 떨어지거나 재회하는 일들이 너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 거니. 그 때 이반이 했던 대답을 바르바라는 기억해냈다. 

 기다리고 있었어. 

 알고 있어. 

 이반은 대답하면서 웃었다. 이번에는 바르바라가 까닭 없이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엇갈렸다가 다시 나란해졌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지난 아홉 달의 이야기가 짧고 간결하게 이어졌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아홉 달에 대해 말을 아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늘어놓을 사건들이 많지 않았다. 이반이 빛깔만 다른 바다를 내내 보고 있을 때, 바르바라는 잔잔한 호숫가에 찌를 던졌다가 빈 양동이를 들고 돌아오는 하루를 살았다. 이야기는 결국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여행하기 전에는 뭘 했는데? 바르바라의 질문에 이반이 코끝을 긁적였다. 책을 썼어. 드물게 이반은 머쓱해했다. 너도 나와. 누군가 책을 쓴다면 그것은 비극이거나 희극일 것인데, 바르바라가 그곳에 있다면 이반은 그것을 비극으로도 희극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나오는지 알겠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노이어에서부터 시작된 그 순회공연을 보고 돌아온 이후 바르바라는 이따금 꿈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이질적인 감각들과 마주하곤 했다. 한밤중에 나타난 그림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거나 반투명한 무언가가 의자에 앉아 호숫가를 내려다보는 일들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이반을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꿈과 환상의 경계에서 시작된 상념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했다. 바르바라는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턱을 괸 채 여유를 부리며 중얼거렸다. 넌 욘디구나. 아, 넌 우이드린 호수에서 왔니. 그럼 너는 버나디의 얼굴을 본 모양이지. 어느 날에는 호숫가에서부터 아주 깊고 슬픈 포효가 들려와 한밤중에 침대에서 일어난 적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호수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검고 축축한 짐승을 보았다. 고래는 숨구멍으로 물을 뿜어내며 달이 뜬 호수의 수면 위를 천천히 헤엄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육지를 향해 거대한 턱을 벌렸다. 그 안에서부터 남자가 걸어 나왔다. 죽은 자였다. 다음 순간 눈앞의 호수는 우이드린이 되었다. 세상은 무엇도 비출 수 없고 무엇도 비치지 않는 검은 유리 속에 갇힌 것처럼, 그래서 어두컴컴하고 영원한 밤이 계속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바르바라를 경계에 데려다놓았다. 마무리 짓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 의도적으로 매듭을 느슨하게 매어놓고 세상 밖으로 끊임없이 괴담을 방출하면서,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지금의 자신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다면, 내일이 오기 전인 오늘에 있다면, 그렇다면 아직 끝이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 아직 오늘인 것을 알고 있는 한.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더라고.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던 이반이 덧붙였다. 그래서 이건 그냥 책으로 남겨둘 거야. 이반이 꺼낸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르바라가 작게 말했다. 거기에 내가 나오는구나. 이반은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 책의 한 부분을 펼쳤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쓰고 그린 것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진심으로 즐거워진 바르바라가 책장을 넘기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을 짚고 호명했다. 마리안, 페니, 사라… 이선, 테사와 리온, 메이지, 브륀힐드. …헤일리. 길리언. 아드리안, 트윙클, 오즈월드… 알렉스. 그것은 역사서도 아니었고 수기도 아니었다. 그것 역시 분류하자면 어떤 불분명한 경계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명확했다. 바르바라는 지난 아홉 달 동안 잊고 있던 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호명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누그러지더니 종국에 부드러워졌다. 세이런, 칼리오페, 제인, 에밀, 세실… 그래, 전부 다. 

 고개를 들자 이반이 손바닥으로 귀를 꽉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민망해하는 모습이 드물었으므로 바르바라는 진심으로 그 모습을 귀여워해주었다. 그림이 있는 건 이것뿐이거든. 이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게 원본이고, 노이어에 있는 건 전부 사본이야. 

 사본이 아니라 아예 다른 책인 것처럼 들리는데. 

 원본 수식어를 다 바꾸느라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였지. 폐하가 어찌나 재수가 없던지 원본이 그만. 

 바르바라는 이반의 얼굴에 떨어지는 나무그림자를 응시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이반의 어깨 너머로 숲의 빽빽한 어둠이 드리워있었다. 그들은 함께 어두컴컴한 숲을 지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반이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괴담,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걸친 그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바르바라는 이반의 어깨 너머로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들 틈바구니에서 버나디를 보았다. 이야기에 열중하던 이반이 고개를 들었다. 저 끝에는 뭐가 있지? 그 때 등 뒤로 바람이 불어오며 술렁이는 목소리를 실어 날랐다. 바르바라는 호수 밑바닥에 잠긴 누군가의 연인들의 목소리들을 들었다. 호수가 있단다. 바르바라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이반은 말을 멈췄다. 

 숲에서부터 괴물들이 기어오고 있었다. 버나디와 한쪽 뿔이 잘린 사슴, 눈 먼 예지자와 유령들, 욘디와 소녀가 이반의 등 뒤에 있었다. 바르바라는 걸음을 멈추고 이반을 돌아보았다. 괴수들이 반투명하고 흐릿한 그림자처럼 일렁이며 두 사람이 걸어온 길 위에 서있었다. 그 속의 이반은 그 무엇보다 명징하고 선명해보였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흔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한다면 호수 밑에 가두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바람이 스친 숲처럼, 지난 나날이 흔들릴 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면. 바르바라는 들고 있던 책을 옆에 끼고 몸을 돌려 이반을 정면으로 보았다.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책등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괴물들이 뒷걸음질 쳤다. 이반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흘러가버릴 거라면 그냥 호수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하지만 너는 책을 썼잖니. 

 역서사도 수기도 아니지만 거짓이 없기에 명징한 활자.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면,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 서있더라도 아직 오늘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걸로 충분할까. 

 아마도. 

 괴물들이 뒷걸음질 쳐 숲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좋은 나날이라고 생각해? 

 그럼. 

 그림자들이 사라진 숲의 대지 위로 빛이 드리웠다. 

 그럼 이제 춤을 춰도 되겠구나. 

 그래. 

 한 걸음을 남겨두고 바르바라가 손을 내밀었다. 이반.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했다. 어둠은 그곳에 있었지만 그들은 무사했다.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또한 어떤 이야기도 필요 없었다. 음악의 부재는 기억으로 충분했다. 손만 잡는다면 모자람이 없었다. 이반이 깊이 숨을 들이쉬고 앞으로 내딛었다. 다음 순간- 

 너 화가 났구나 

                네가 떠날 거란 사실을 잊은 적은 없어 

너는 가고 싶은 곳이 없어? 

                네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페트로프 아가씨가 드레스를 입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었대 

                그냥 네가 추지 그래? 

                                내가 훔친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게 될 것 같아 


내가 화가 난 것 같아? 

                                아니 


뭔가 좋은 말을 덧붙여봐 

                        그냥 거기 있어줘 


그래서 이 이야기는 뭘 말하고 싶은 건데? 

                                …… 모든 것을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잡아당겼고, 두 사람은 그 손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자 이제 모든 어둠 속에서 탄생한 괴담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때가 되었으니. 술렁임이 끝나고 바람과 물소리, 젖은 흙과 향기로운 풀 냄새가 남는다. 선한 것들, 아직은 선한 것들, 혹은 지속적으로 선할 것들을 위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의 숲을 빠져나온다.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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