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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리사 체사레와 그녀의 딸 바르바라 체사레는 체사레 식구들 중에서도 유독 손이 재빠르고 영악한 편에 속했다. 집안을 꾸려온 마미사 할머니는 두 사람을 특별히 예뻐했고 그 사실을 다른 식구들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딸 마리사를 무척이나 기특하게 여겼다. 마리사라면 어딜 가도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바르바라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라면 어디서든 실력을 발휘하여 놀랄 만한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써드빌로 내려온 이후, 마리사는 얼마 안 가 손을 털었다. 그 결정을 바르바라에게 통보 식으로 이야기했을 때만해도 바르바라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써드빌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곳은 너무 한적했고 유동인구도 적었다. 체사레 여관이 무수한 도둑질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룬넨마을을 방문하는 유동인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 그들이 다시는 마을로 돌아올 일이 없는 외부인들의 주머니를 털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써드빌은 어떠한가. 써드빌에는 외부인들이 많지 않았다. 종종 외부인들이 유입되는 때가 있기는 했다. 선루스 기사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목적지로 삼은 이들은 대체로 기사가 되어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숙소에 머물렀기 때문에 여관까지 도달할 일도 없었다. 마리사가 손을 털겠다고 내린 결정은 모로 보나 타당해보였다. 써드빌은 모험을 하기에는 시시하고 문제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었다. 바르바라는 어머니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리사가 바르바라의 출생 건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바르바라는 잠자코 마리사의 이야기를 듣다가 밖으로 나와 침을 뱉었다. 출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리사는 켈커스에 방문한 별 볼일 없는 귀족 남자와 눈이 맞아 하룻밤 몸을 섞고는 바르바라를 낳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르바라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애초에 체사레 집안에는 남자가 없었다. 이때까지 바르바라는 그 문제를 크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발생한”적이 있기는 했으나 곧 이 집안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라고 막연하게 상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의 생부가 체사레 여관에 존재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녀들에게 추방당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떠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임신한 여자를 버려두고는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개새끼. 마리사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 남자의 마음을 훔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고는 바르바라를 낳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존재가 곧 마리사 인생의 어떤 지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여태까지 어머니를 높게 평가하던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여관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삶을 유지하며 어머니와 닮고 싶지 않았다. 사춘기는 그런 식으로 왔고, 결과적으로 바르바라는 기사단으로 떠났다. 어머니의 거울이 되고 싶지 않은 딸의 마음은 어느 세대에서든 그런 식으로 계승되어 그녀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선택지로 떠밀고 마는 것이다. 

 내 말은, 리온… 우리 엄마는 이미 한 번 실패했다는 거야. 도둑으로서. 

 난 그런 일 겪고 싶지 않아. 

 바르바라는 그 말을 지키며 살았고, 스물한 살이 되었다. 바르바라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가 멈추고 살과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바로 그 때 느꼈다. 

 

 2. 

 타지아 계나디 페트로프가 써드빌로 내려온 건 바르바라의 스물한 살이 한창 무르익은 늦은 여름의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그 때 기사단 업무 접수처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귀족처럼 보이는 여자가 써드빌 관문 앞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르바라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 장소에 없었으면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관문까지 걸어가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바르바라는 관문 앞에서 문지기와 입씨름을 벌이던 명랑한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타지아는 비명을 질렀다. 

 “난나!”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난나, 나야!” 

 타지아가 손에 들고 있는 짐을 내팽겨 치고 바르바라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바르바라를 껴안고 붙잡고 매달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밀쳐내야 하는지 아니면 얌전히 안겨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인지를 정확하게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공중에 붕 떠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그런 것들이 불확실하게 맴돌았다. 타지아가 바르바라를 힘껏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그 힘에 들려서 바르바라의 발끝이 땅과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바르바라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 발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여기에 왜 타지아가 있는 거지?’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무척 현실적이었다. ‘그럼 타지아는 집으로 돌아가 매를 맞게 되는 건가?’ 

 “네가 왜 여기 있어?” 

 한참 후에야 바르바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타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오년만의 만남이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편지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3. 

 타지아 계나디 페트로프가 가출을 감행한 건 그녀가 집안이 맺어준 귀족 자제와 결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타지아는 페트로프 가문이 준수하는 몇 가지 벌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 무렵의 타지아는 그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타지아는 결혼을 감행하면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비틀리고 말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녀는 오밤중에 짐을 싸들고는 체사레 여관 문을 두드렸고-정말 무례하구나, 라고 바르바라는 그 대목을 들으며 생각했다-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낸 뒤의 마미사의 도움을 받아 체사레 모녀의 최종 행선지를 알아낸 것이었다. 타지아는 짐과 몇 가지 금품을 챙겨서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써드빌까지 단숨에 내려왔다. 

 “내 말은, 난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오잖아. 안 그래?” 

 바르바라는 그 감각을 이미 열일곱 살 전후로 겪어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타지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이제 어른이었고 격동의 사춘기는 훨씬 이전의 이야기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사춘기가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그녀를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작 타지아 본인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특유의 태평스럽고 낙천적인 성격은 오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였다. 타지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체사레 여관 소파에 제집마냥 다리를 뻗고 눕더니 바르바라를 보며 해죽해죽 웃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렇지?”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혔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니?” 

 “돌아갈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줄 알아?” 

 타지아는 입을 삐죽였다. 

 바르바라는 확인 차 반복해서 되물었다. 

 “여기서 살 거란 소리야?” 

 “너희 여관집은 넓으니까 방 하나쯤은 날 줘도 괜찮지 않을까? 정 뭐하면 돈을 줄게.” 

 바르바라가 화를 내기 위해 입을 벌리던 순간, 타지아가 덥다고 중얼거리며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다. 하얗고 얇은 드레스 속에는 얼룩덜룩한 다리가 숨겨져 있었다. 바르바라는 숨을 멈추고 타지아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귀족의 다리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순간… 바르바라는 할 말을 삼키고는 참담하게 시선을 돌렸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심정을 모른 체했다. 바르바라가 자신의 상처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지아는 체사레 여관의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마리사는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귀족을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타지아가 선금으로 내민 금품이 제법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도 있었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컸다.) 첫날,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짐을 푸는 것을 도와주다 말고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돌아가다니? 여기가 네 집 아니야?” 

 타지아가 휘둥그레 눈을 뜨자 바르바라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난 이제 따로 살아. 기사가 되었거든.” 

 “기사?” 

 “그래, 선루스 기사단 말이야.” 

 타지아는 현관까지 바르바라를 졸졸 따라왔다가, 바르바라가 입구에 걸어둔 검은색 리퍼코트를 입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복받친 것처럼 두 팔을 벌려 바르바라를 와락 껴안았다. 

 “세상에, 너무 기쁘다. 오, 맙소사. 난나, 너 정말 대단하다!” 

 바르바라는 끙, 소리를 내다가 시선을 내리깔고는 중얼거렸다. 

 “그러니.” 

 “그렇고말고.” 

 타지아가 바르바라의 뺨에 입을 맞추자, 바르바라는 윽, 소리를 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타지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타지아가 여관방에 자리를 잡은 이후 마리사와 바르바라는 조금 바빠졌다. 우선 그들은 타지아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점심이 되기 전에는 타지아의 방을 청소해야만 했다. 타지아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지아는 두 모녀의 이런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페트로프 성에 있을 적에도 타지아의 주변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일꾼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타지아는 이미 차려진 식사, 늘 깨끗한 시트, 식지 않은 찻잔과 반들반들하게 닦긴 식기에 어떤 노력이 투자되었는지를 알지 못 했고, 사실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이 늘 도처에 준비되어 있는 삶을 살아왔다. 평민의 귀감이 되어야한다고 뺨을 얻어맞고 살면서도 동시에 그녀에게는 그런 모순된 이면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항상 타지아의 그런 점을 못 견디게 짜증스러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타지아는 사랑스러웠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르바라가 퇴근하여 집으로 되돌아올 때면 타지아는 현관 바깥에 서서 바르바라가 보일 때까지 발끝을 세우고 풍경을 기웃거리다 곧장 뛰쳐나가 두 팔로 바르바라를 끌어안았다. 그런 환대를 받은 적이 얼마만이더라. 바르바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타지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코 그녀의 아침식사를 포기하거나 접시를 닦지 않거나 시트를 치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 모든 골치 아프고 귀찮은 일을 기꺼이 해냈다. 타지아가 귀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귀족이 타지아였기 때문이다. 타지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지아라는 인물과 귀족이라는 상황을 그런 식으로 역전시켜 사고할 필요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런 일들을 능숙하게 해내는 축에 속했다. 이제는 소녀보다 어른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두어 달 동안 타지아의 시중을 들어주고 늦은 오전에 출근해 기사단에서 근무를 하고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생활을 유지했다. 때때로 피곤한 날에 타지아의 저녁밥을 준비해줘야 할 때도 있었다. 씻지도 못 하고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타지아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며 바르바라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럴 때마다 바르바라는 음식을 손질하느라 축축한 손을 내려 타지아의 손등을 붙잡았다가 다시 천천히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따금은 타지아를 위해 닭을 잡았고, 큰 생선을 낚았고, 그들의 목을 비틀거나 대가리를 잘라내고 뼈를 분리하고 살을 손질했다. 칼을 이용해 고기를 큼지막하게 잘라낼 때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빨래를 할 때, 시트를 갤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지아가 자리에 없을 때마다 바르바라는 혼란스러워했다. 타지아를 쫓아내고 싶었다. 자신의 상처와 지난날의 우정을 빌미로 이곳을 은신처로 삼고는 뻔뻔스럽게 구는 타지아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타지아의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타지아에게 제대로 화낼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사랑하는 것들 앞에서 바르바라는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 급급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치욕에 가까웠다. 마리사 체사레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 했다. 그래서 바르바라를 낳은 것이다. 바르바라는 체사레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기꾼 여자의 오점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였고 그 자신은 어머니의 실수를 답습할 마음이 추어도 없었다. 타지아를 내쫓기 위해 타지아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을 거란 것을 바르바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동일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삶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타인의 나락을 보았다면 비슷한 것을 겪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게 그녀가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신중한 판단이었다. 

 

 5. 

 타지아가 써드빌에 몰고 온 작은 재앙은 바르바라가 스물두 살이 되기 불과 몇 주 전에 일어났다. 초겨울이었고 날씨는 아직 따뜻했다. 파발이 말을 타고 써드빌 관문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가의 장손이 긴장한 기색으로 마을에 들어섰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때 바르바라는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그 소식을 한참 뒤에야 접했다. 퇴근하고 숙소로 돌아가던 바르바라는 낯선 품종 말이 자신의 여관 근처에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 타지아의 방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마리사는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이층을 가리켰다. 

 “누구야?” 

 “약혼자.” 

 “오늘 아침에 온 귀족?” 

 “후작가란다.” 

 “어디서 왔대?” 

 마리사는 은근하게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도에서.” 

 “하루 종일 둘이 대화했던 거야?” 

 “말도 마렴.” 

 바르바라는 층계참을 올려다보았다. 복도에 희미하게 밝혀진 불이 보였다. 귀를 기울이자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타지아는 결혼이 싫어서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저 후작 가는 이곳을 어떻게 찾았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페트로프 자제를 숨겨주었기 때문에 응징을 받는가? 바르바라는 다시금 심란해졌다. 그리고 심란해진 지금의 상태에 짜증이 났다. 

 얼마 뒤 완전히 밤이 찾아왔고, 타지아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던 후작가의 자제가 마침내 층계참에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아는 그보다 두 박자 정도 늦게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서는 현관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바르바라가 타지아의 뒤로 다가가 삐딱하게 섰다. 후작가의 시선이 타지아에서 바르바라로 이동했다. 

 “저분은…,” 

 후작가가 타지아에게 은근한 눈치를 주자, 타지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돌아보고는 바르바라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언제 와있었니?” 

 타지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후작가 자제를 향해 웃어주었다. 

 “제… 현재 시중이에요.” 

 타지아가 우물거리며 얼버무렸다. 

 “시중이라고?” 

 바르바라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타지아가 다급하게 실토했다. 

 “사실은, 제 친구인데, 제발 저희 집안에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후작가는 바르바라를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바르바라는 그 시선이 짜증스러웠지만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불빛 앞으로 직접 나서는 친절을 보였다. 비꼬는 행동이었지만 후작가 자제는 눈치 채지 못 한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 올리고는 일부러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그러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후작가가 눈을 크게 뜨더니 급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그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았다. 

 “저분, 저분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후작가가 일부러 타지아를 바라보며 억지로 웃었다. 타지아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말해주기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후작가가 다시 바르바라를 응시했다. 바르바라는 후작가의 양 귓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후작가가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뭔데요?” 

 바르바라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무례를 저질렀네요. 제 이름은 요한입니다.” 

 후작가가 절절매자, 바르바라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쏘아붙였다. 

 “난나예요.” 

 요한이 돌아간 후에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끌고 이층 방으로 올라가 그와 결혼할 생각이냐고 캐물었다. 타지아는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대답했지만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 직접 써드빌까지 내려온 요한의 태도에 조금 취해있는 것 같았다. 집안이 엮어준 사람이라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좀 더 만나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바르바라에게 요한과 했던 대화를 되짚으면서 그가 자신에게 빠져있는 것인지를 봐달라고 했다. 바르바라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얌전히 타지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훔치기를 원하지 않았던 남자의 마음이 지금 내 손안에 있네. 

 

 6. 

 요한은 한동안 써드빌에 머물며 종종 체사레 여관을 찾았다. 타지아는 그를 기다리느라 하루 종일 방 안에 처박혀 옷을 골라 입고 화장을 했다. 물론 뒷정리는 바르바라의 몫이었다. 요한이 여관 앞에서 타지아를 부르면 언제나 타지아 대신 바르바라가 먼저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아가 준비를 제 때 마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소리 높여 타지아의 이름을 부르는 건 타지아에게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기보다는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르바라를 보고자 하는 의도에 더 가까웠다. 그는 바르바라를 마주할 때마다 수줍게 시선을 돌렸다가 곧 자신의 권력을 의식하면서 바르바라에게 손을 내밀고는 했다. 바르바라는 그에게 손을 주었고 그럼 요한은 그녀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위층에서 타지아가 요한을 만나기 위해 법석을 떨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매일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기만하는 이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즐거웠다. 자신에게 한눈에 반한 남자를 대해본 게 그 때가 처음이기 때문도 있었다. 

 타지아가 밖으로 나오면,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떨어져 걸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와 요한 사이에 서서 해변을 산책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세 사람 사이의 대화는 대부분 타지아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타지아는 정말이지 쉴 틈 없이 떠들어댔다. 써드빌의 풍광과 아름다운 해변, 바르바라 여관의 안락함과 이곳 주민들의 식생활 따위를 능숙한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조금 으스대기도 했다. 타지아는 자신이 이다지도 써드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던 것은 평민들의 생을 존중해왔던 이전의 삶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저희 집안은 항상 평민의 삶에 귀감이 되어야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해왔답니다. 아버지는 절 엄격하게 교육하셨어요. 이전에는 그런 일들이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답니다. 써드빌로 도망쳐온 건 다소 성급하고 부끄러운 선택이었지만 저는 이곳에서 결국 페트로프 가문의 모든 걸 이해하게 되었어요.” 

 바르바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타지아가 꾸며내는 뻔뻔스러운 말들. 그녀가 겪어온 학대와 부조리가 하나의 교육관으로 포장되어 혓바닥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결혼할 지도 모를 남자의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괴로운 과거를 좋은 것으로, 미래를 위해 투자해온 일종의 대가로 치부하는 것을 가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타지아는 천천히 산책을 하며 눈앞의 요한을 두고 그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복잡한 심경으로 해변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눈을 감았다. 

 요한과의 산책이 끝난 그 날 저녁 타지아는 유독 짜증을 많이 부렸다. 신경이 날카로워져서는 바르바라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고 자신은 나 몰라라 소파에 주저앉았다. 바르바라는 침착한 얼굴로 타지아가 집어던져 산산조각이 난 접시를 치우다 말고 손을 베였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니?”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내려다보다 말고 타지아에게 물었다. 

 “난나.” 

 타지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라는 앞치마에 핏방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타지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뭘?” 

 바르바라는 시치미를 뗐다. 

 “요한에게 말이야.” 

 타지아가 신경질을 냈다. 

 “말하지 말라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 전부.” 

 “너 그 사람이랑 결혼할 마음이 없다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난나. 넌 모르겠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야!” 

 타지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겠니? 내일부터는 산책도 같이 나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우리 둘이 이야기하게 내버려둬.”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무언가를 감지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그렇지만 타지아, 난 네 시종이나 마찬가지 아니니. 시종도 없이 돌아다니다 다치면 안 되잖니?” 

 “그렇게 말한 건 널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타지아가 항변했지만 바르바라는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타지아가 부엌을 향해 돌진하더니 바르바라의 발치에 놓인 접시 파편을 발로 걷어찼다. 바르바라는 하마터면 다시 한 번 접시에 크게 베일 뻔했다. 바르바라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타지아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바르바라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이딴 식으로 굴면 나도 더는 안 봐줘.” 

 “봐줘? 네가? 나를?” 

 타지아가 딱딱거렸다. 

 “주제를 알아, 난나! 너와 나는 친구이기 이전에 귀족과 평민이야!” 

 타지아가 비명을 질렀다. 

 “귀족과 귀족의 일에 끼어들지 마, 절대로!” 

 그런 후 타지아는 엉엉 울면서 층계참을 쏜살같이 달려 올라가버렸다. 

 바르바라는 홀로 남겨져 부엌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접시를 마저 치우기 시작했다. 주제를 알아, 라는 말을 몇 번 정도 중얼거리다 그만두었다. 귀족과 평민. 타지아와 바르바라. 그 두 가지는 바르바라가 지금껏 의도적으로 역전시켜온 구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타지아의 입을 통해 그것이 다시 한 번 반전된 순간, 그리하여 바르바라의 앞에 평민이, 귀족의 앞에 타지아가 대치된 순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균열이 되었다. 타지아는 그런 식으로 들먹여서는 안 되었다. 바르바라를 죄의식 없이 하대하고 잡일을 도맡게 한 그녀의 밑바탕에 깔린 사고를 그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실수했음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접시를 치우는 손이 작게 덜덜 떨렸다. 

 그 날 밤, 요한이 체사레 여관에 찾아왔다. 말을 타지 않은 채였고, 소리 높여 타지아를 부르지도 않았다. 바르바라는 불을 끄기 위해 현관으로 나섰다가 요한을 마주치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요한은 바르바라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틀 뒤에 수도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미약하게 떨렸다. 

 “그전에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난나라는 이름도 타지아라는 이름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갈등했다. 입을 벌려 타지아를 부르면, 요한은 타지아와 함께 한밤의 해변을 걷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요한이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요한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해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바르바라는 층계참을 한 번 흘끔거리고는 현관의 기둥을 힘주어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던지 손이 하얗게 질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좋아요, 같이 걷죠.” 

 바르바라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7. 

 두 사람은 그 날 한밤의 해변을 걷다 말고 모래사장에 두꺼운 요를 깔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누워 몸을 겹쳤다. 요한이 허겁지겁 바르바라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그러고는 바르바라에게 입을 맞추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요한은 바르바라에게 자신과 함께 수도로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자신은 바르바라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고백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신이 바르바라를 원해왔음을 알아달라고 애걸했다. 타지아를 원하지 않는다고 자꾸만 중얼거렸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무성의하게 혀를 섞던 바르바라가 그 이름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몸을 떼어내고는 눈앞의 벌거벗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타지아의 이름은 마치 힘주어 내려친 주먹처럼 바르바라의 복부를 내리쳤다. 그 힘에 휩쓸린 바르바라의 영혼이 순간적으로 허공에 튕겨져 올라온 것만 같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약혼자와 몸을 겹치고 있는 자신의 헐벗은 등과 어깨, 미끄러져 내려오는 금발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 짓눌린 요한의 진한 금발을 볼 수도 있었다. 해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자신과 요한의 발자국을 볼 수도 있었고, 그 발자국을 거슬러 오르면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체사레 여관을 볼 수도 있었다. 이층에서 타지아가 상심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 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바르바라는 신의 눈동자를 빌어 해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았고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에 대해서도 충분히 파악했다. 그녀에게는 아직 모든 걸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 잠시 후, 의식이 다시 육신으로 빨려 들어왔다. 바르바라는 자신을 껴안은 요한의 뜨거운 팔을 느끼며 눈을 떴다. 요한이 바르바라의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바르바라는 냉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물었다. 

 “왜 그 애 이름을 꺼낸 거죠?” 

 “타지아요?” 

 요한은 중얼거리듯 되물었다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요한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녀에게는 닿지 않지만요.” 

 바르바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쪽이 왜 그 애에게 상처를 준담?” 

 “난 오늘 저녁내도록 당신의 여관 앞에 서있었으니까.” 

 요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타지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난나.” 

 주제를 알아. 

 바르바라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래요? 본인은 다르다 이건가?” 

 “귀족들이 모두 같지는 않아요.” 

 “증명할 수 있는지?” 

 “원하신다면.” 

 그런 후 요한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바르바라는 내버려두었다. 에아가 마련해준 기회를 왼손에 쥐었다가 오른손으로 옮긴 뒤 파도에 흘려보냈다. 잘못된 순간을 고칠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고는 이성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모든 게 편해졌다. 바르바라는 요한의 위에 올라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그의 여유를 빼앗아주었다. 요한이 자신의 안에 들어오게 허락한 다음에 곧장 그에게서 규칙적인 호흡을 훔쳤다. 온몸으로 요한을 붙잡고 취하면서 그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그 순간의 것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두 사람은 한밤의 모래사장을 뒹굴면서 몇 번이고 그 짓을 했다. 요한이 사정하는 순간, 바르바라는 두 눈을 감았다. 오오, 에아이시여! 바르바라가 속으로 에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정녕 세상의 딸들은 어머니의 거울이 되는 수밖에는 없나이까! 이토록 현명하게 살아왔는데, 결국 선택하게 되는 것들은 어째서 오답이여야만 하는지. 

 그 날 바르바라는 먼저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몸을 누이자마자 지쳐 잠이 들었다. 

 

 8. 

 다음 날 바르바라는 늦은 오후에 겨우 눈을 떴다. 다리 사이가 뻐근했고 온몸이 뜯어질 것처럼 아프고 나른했다. 바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껴입고는 양동이에 받아둔 물로 세수를 했다. 그러다 여관 앞에서 익숙한 말의 그림자를 보았다. 바르바라는 바깥으로 나갔다. 

 요한은 타지아와 함께 서있었다. 체사레 여관의 그림자 속에 숨은 두 사람은 은밀하고 다정해보였다. 요한이 문지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르바라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타지아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바르바라는 현관에 기대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요한이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타지아와 바르바라를 번갈아 바라보는 꼴을 보았다. 이제는 요한이 선택할 차례였고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요한은 잠시간 바르바라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것처럼 팔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눈을 감고는 팔을 그대로 타지아에게 감았다. 바르바라는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 말고 집안으로 돌아갔다. 그런 후 곧장 리퍼코트를 입고 다시 바깥으로 나와 두 사람을 지나쳐 기사단으로 출근했다.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욕지거리를 하지도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바르바라의 표정은 차츰 냉랭해졌다가 침착해졌고 곧 아무 일도 없던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 날 밤, 타지아는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오늘 요한과 섹스를 했다고 통보 식으로 털어놓았다. 

 “내일 돌아갈 거라고 하기에 내가 졸랐어. 시트 좀 갈아줄래?” 

 타지아는 무척 피로해보였고 어딘지 후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그 감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바르바라는 간밤에 벌였던 자신과 타지아 사이의 냉전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남자를 나란히 번갈아 사용한 후에야 기진맥진한 채로 이 모든 일을 과거에 묻어놓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얼마큼을 눈치 채고 알고 있을까를 재보다가 결국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요한의 어떤 감정이 명백히 바르바라를 향하고 있음을 타지아가 눈치 채기는 했지만, 지난 밤 바르바라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지아는 이제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상 요한이 수도로 올라간 건 타지아와의 일을 가문에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요한 자신이 저지르고 만 실수로부터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요한이 뒹굴었을 시트를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다시 긴 잠에 빠져들었다. 바르바라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20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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