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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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었는데...”
“...양파 썰다가!...”
“왜 울었냐고?”
“양파때문이라고 대답했어.”
“...내가 양파냐...”
-개기면죽는다 中- 

 

 1. 

 섬에서 귀환한 이후 한동안 바르바라는 아주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허비했다. 일주일 정도는 해변을 걸으면서 수평선을 응시하고, 나중에는 숙소에 처박혀서 잠을 자고, 좀 더 나중에는 기사단 본부를 돌면서 다른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고통과 분노와 슬픔과 자책이 담긴 신음소리들이 바르바라를 꿰뚫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복도를 걷다 말고 멈추어 서서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오즈월드가 부랴부랴 다시 써네스 섬으로 배를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종종 바다를 보면서 해변을 걸어본 것도 그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수평선에서부터 나타날 배 한 척의 소식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써네스섬 탐사 임무가 끝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에는 써드빌에 보슬비가 내렸다. 바르바라는 어두컴컴해진 수평선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죽음을 이해시키고 현재의 상황과 타협하고는 바다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악몽이 시작되었다. 바르바라는 몽유병 때문에 종종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축축하게 젖은 채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이 상황을 실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바르바라가 남은 사람들과 번갈아가며 대화를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 그건 바르바라 뿐만이 아니라 살아 돌아온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숙소와 본부를 번갈아 드나들며 바르바라는 살아남은 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대화가 항상 죄책감과 상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주제는 항상 바뀌었고 때때로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대체로 듣는 쪽이었지만 누군가가 질문할 때에는 피하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자신 역시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르바라는 상대로부터 고통을 이끌어내어 입으로 그것을 실토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건 해독解毒의 과정과 비슷했는데, 그들이 삼키고 있는 괴로운 물질을 토하게 만들어 그 물질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만이 바르바라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절반의 죽음에 압도당하기보다 절반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죽은 자를 기리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서 움직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2. 

 주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르바라의 행동반경이 전보다 넓어졌다. 원래 그녀는 숙소의 개인 방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복도를 걷거나 휴게실 소파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의미 없이 쓰고는 했다. 그 무렵에 바르바라는 테사와 종종 마주쳤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모여앉아 십자말풀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르바라가 문제를 냈지만 곧 문제를 내는 쪽은 테사로 고정되었다. 

 바르바라는 써네스섬 탐사 이전까지 테사와 특별히 엮여본 적이 없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인사를 나누고 이따금씩 안부를 묻고 함께 보초 근무를 서고는 했지만 특별히 어딘가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나누어 마신 적은 없었다. 테사는 동료였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바르바라의 관록을 생각하자면 테사는 아직 그녀에게 있어 신참에 가까웠다. 영특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능력이 발휘되는 걸 눈앞에서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바르바라는 테사가 멈추지 않고 종이 위에 그어놓은 검은 선과 알파벳을 들여다보았다. 테사는 문제를 만들고 단어를 배열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펜을 잡는 순간부터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르바라는 펜을 들고 테사가 비워놓은 단어를 하나씩 맞추어 나갔다. 

 주로 곡선이고, 흔적이기도 해. / 궤도(orbit). / 반복되는 거야. / 그리고? / 그런 구조를 말하기도 하고. / 프랙탈(fractal). 

 테사의 단어가 바르바라의 무언가를 건드려왔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테사를 응시했다. 추상적인 단어들이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와 곡선. 흔적과 반복. 바르바라는 테사의 목구멍에 걸린 게 자신과 동일한 그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게임을 계속했다. 테사는 막힘없이 단어를 생각하고 그 자리를 비워서 바르바라에게 돌려주었다. 바르바라는 빈 사각형의 박스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를 닮았구나.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결국 단어에 얽힌 기억을 나눈다는 것과 비슷했다. 다음 날에도 바르바라와 테사는 휴게실에 앉아 게임을 계속했다. 테사가 쓰는 단어는 갈수록 단순하고 뜻이 모호해졌다. loss, syndrome, empty…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두 명료한 단어였다. 결국 하나의 이야기에 도달하기 위한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기억을 복기하고 있었다. 잃어버렸고, 비관적인 징조만을 포착했으며, 결국 빈자리를 마주하고 있는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졌다. 바르바라는 제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리온과 메이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길리언과 트윙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세이런과의 있었던 이야기를 조용히 되짚어보거나 이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이선의 습관을 이야기하거나  제인이 낚은 물고기들,  알렉스가 업무로 절절매던 광경 혹은 칼리오페가 걸어가던 길가에 남은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우리가 두고 왔으며 여전히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불가항력적인 그 힘들. 그 힘들은 점점이 분해되어 바르바라와 테사의 목구멍에 흩뿌려져 있었다. 미세한 독처럼 두 사람의 힘을 조금씩 앗아갔다. 바르바라는 진작부터 그 독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그 증거였다. 테사는 어떠할까. 테사는 어떤 방식으로 그 독에 노출되어 있는가. 

 어느 날 테사는 마침내 감정에 대한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공백의 사각 칸에 차분하게 그것들을 써내려갔다. 슬픔, 우울, 고통, 죄책감, 후회, 번민… 궤도와 프랙탈은 사실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짚어내기 위해 만든 단어다. 하지만 감정에 대한 단어는 결이 다르다. 그것들은 오로지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바르바라는 조용히 테사를 불렀다. 

 “루시엔.” 

 “응.” 

 “넌 영리하구나.” 

 테사가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난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보다 받아들인 이후가 더 쓸쓸해…,” 

 바르바라는 다시 십자말풀이 칸으로 시선을 내렸다. 

 “영리한 사람들은 미신을 믿지 못 하지. 우리는 그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믿는 게 아니라…,” 

 “되짚는 것뿐이야.” 

 “맞아.” 

 바르바라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고통스럽게 웃었다. 

 “맞아, 루시엔. 우리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들을 잃었다. 고통으로 몸이 절절 끓었다. 마음이 녹아내리더니 그 위로 알 수 없는 독성물질이 점점이 흩어져 끈적끈적한 액체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핏줄을 타고, 뼈를 감싸고, 피부 바로 아래에서 꾸준하게 흘러 다닌다. 바르바라를 악몽에 들게 하고 테사가 자꾸만 써드빌 바깥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게 한다. 그 때, 테사의 단어가 그 끈끈한 액체 속으로 빠지는 것이다. 모호하고 덩어리져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점점이 흩어진 독성의 물질들이 그곳으로 몰려든다. 테사의 단어는 자석처럼 새까만 점들을 이끌어 당긴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던 고통의 감정들이 흐물흐물한 테사의 단어와 함께 융합된다. 의미가 명확하고 단단해진다. 바르바라가 십자말풀이에 그것을 쓴다. 슬픔, 우울, 고통, 죄책감, 후회, 번민… 고통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 바르바라와 테사는 상처를 짚어서 복기하고 수복의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그런 게임을 십자말풀이라고 불렀다. 

 

 3. 

 왕명을 받은 후에 바르바라는 방으로 돌아와 숙소를 정리했다. 책상에 쌓인 잡동사니를 버리고 옷장을 비웠다. 침대보를 치우고 의자를 집어넣고 가방을 챙겼다. 

 숙소를 나왔을 때, 바르바라는 잠시 기사단 본부를 천천히 걸었다. 발자국의 모양을 따라 닳아 헤진 층계와 계단, 테라스 난간과 2층 창문, 식당과 휴게실, 빈 복도와 숙소의 샤워실을 천천히 거닐었다. 지난 십일 년 간 그녀가 꾸준히 지켜온 장소를 눈으로 쓸고 매만졌다. 그 장소에 머물렀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정말 모든 이들을. 그런 후에는 해변으로 나왔다. 

 파도가 치자 하얀 거품이 튀어 올랐다. 갈매기는 없었고, 모래사장은 황량했다. 바르바라는 해변을 따라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추어 서서 길고 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남풍이 불어와 바르바라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파도가 밀려들었다 빠져나가면서 그녀의 구두코를 적셨다. 

 바르바라는 주머니에서 수정조각을 꺼냈다. 수정조각은 바르바라의 손아귀에 들어오자마자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써네스섬에서 가져온 마법의 조각이었지만 큰 조각들은 모조리 왕에게 전달되었고 남은 건 한 손에 들어오는 조각 두어 개뿐이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바르바라는 그것을 제대로 꺼내보지도 않았다. 해변 가에 어슬렁거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써드빌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 할 지도 모른다. 수정 따위 알 게 뭔가. 마법이 살아있다면 어째서 나의 동료들은 죽었는가.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정말로 의미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더 이상 그런 생각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바르바라는 수정 한 조각을 분리해서 두 손에 쥐고는 작게 이름을 외웠다. 

 록웰. 

 레밍턴. 

 르윈. 

 리온. 

 드와이트. 

 길리언. 

 트윙클. 

 이반. 

 세이런. 

 이선. 

 그런 후 그녀는 수정을 그대로 바다에 던졌다. 수정은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파도치는 물결 사이로 사라졌다. 바르바라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반대로 불어서 이번에는 바다를 향하여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머리카락 때문에 자꾸만 눈앞이 가려졌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빈 기사단 본부가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그곳에 차례로 메이지와 리온, 알렉스와 칼리오페, 제인과 길리언, 트윙클과 이반, 세이런과 이선을 세워놓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하게 서있다 말고 바르바라를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든다. 바르바라는 인사하지 않는다. 잘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순간, 파도치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이닥치고 바르바라는 눈을 뜬다. 동료들의 환영은 사라지고 광활한 수평선만이 남는다. 

 바르바라는 비틀거리며 뒤돌았다.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면서 기억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표정이 더욱 단단하고 비장해졌다. 죽으러 가야겠다. 혹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 바르바라는 자신이 완전히 타인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소실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로 죽어야 할 때가 온다면 죽을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르바라는 해변의 반대방향을 향하여, 북쪽을 향하여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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