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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발레리안 레이»
1차/old 2019. 10. 22. 15:15

 1. 

 발레리안의 소문을 들은 건 그가 입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대략적인 사정을 들었을 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말이야. 소문을 전해준 기사는 호들갑을 떨면서 이야기를 좀 더 부풀렸다. 바르바라가 원하는 만큼 격하게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사교계에는 훨씬 추잡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소문이 정말 사실일지 맞춰 보자고도 했다. 바르바라는 거기서 이야기를 끊었다. 알겠어, 고마워. 그런 후 그를 내버려두고 혼자 걸어갔다. 

 정부가 되는 기분은 어떨까. 남의 남자나 여자를 빼앗은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바르바라는 그런 것들이 때때로 궁금했다. 그녀가 비슷한 짓을 저질러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르바라는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기보다는 자신이 이미 경험한 쪽을 타인의 시선으로 다시금 느끼는 일을 상상하는 게 훨씬 잦았다.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너는 어떻게 느꼈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말을 정말로 내뱉어본 적은 없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실수나 기억을 구태여 먼저 언급하는 편이 아니었다. 

 

 2. 

 써네스 섬에서 돌아온 이후로 바르바라는 아주 가끔 꿈 비슷한 것을 꾸었다. 그녀는 호수가 보이는 오두막집에 앉아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호수밑바닥에서부터 살아 돌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손님은 바르바라가 섬에서 두고 온 누군가들을 닮아있었고, 식사가 끝나면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정말로 그 누군가들인지를 물었다. 바르바라는 항상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답했다. 눈앞의 손님이 정말로 바르바라가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바르바라는 손님과 함께 호수로 내려가고, 그리고… 거기서 꿈은 끝난다. 바르바라는 이따금 그런 식으로 한밤중에 걸어 나와 바다로 들어가려고 했다. 바르바라는 그런 꿈들이 얼른 끝나기를 바랐다. 언제까지나 한밤중에 잠옷을 푹 적신 채로 숙소를 드나들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바르바라를 보았다면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의 바르바라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흐느끼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고 호출을 받으면 마을로 내려가 일을 도왔다. 바르바라가 자신의 균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밤과 새벽 그 어딘가에 있었다. 혼자 있으면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이 지리멸렬한 슬픔과 고통이 끝나고 마침내 동료들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주의자였고 희망보다는 눈앞에 닥친 위험을 상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꿈을 꾸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가라앉고 머리를 식힌 후 냉정하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오밤중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 익사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 날 밤에 바르바라는 거의 바다에 빠질 뻔 했다. 정신을 차리니 가슴팍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고, 파도가 거칠게 바르바라를 밀었다가 다시 잡아끌기를 반복했다. 바르바라는 진저리치며 해변 가로 헤엄쳐 돌아왔다. 코를 통해 들어간 짠물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녀는 두 번씩 기침하면서 축축한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헛구역질을 하며 목구멍에 달라붙은 짠 내를 완전히 게워낸 후에, 바르바라는 비틀거리며 해변을 따라 마을로 돌아갔다. 그녀가 예배당을 본 건 순전 우연이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우연찮게 시야에 그곳이 있었을 뿐이다. 바르바라는 어떤 예감을 받았다. 그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안은 거기 있었다. 예배당 전면 창은 전부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신의 형상을 본뜬 흰색 유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바로 그 신의 형상을 투과한 달빛이 발레리안의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달빛은 바르바라가 바닷가에서 보고 온 것보다 훨씬 밝고 새하얬다. 유리의 색깔 때문일 것이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이 경전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3.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을 찾고 싶은데 단서가 없을 때에는 예배당으로 향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단식 이후 그녀가 발레리안을 처음 마주친 곳도 다름 아닌 예배당이었다. 그는 독실하고 성실한 신자였다. 

 발레리안이 처음 입단했을 때, 기사단을 술렁거리게 만든 소문이 있었다. 바르바라도 그와 얽힌 소문들을 알고 있었다. 더러운 소문도 있었다. 발레리안은 단 한 번도 직접 그런 것들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사정이 있었을 뿐이라고 드문드문 짚어서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곧 그를 시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주기적으로 예배당을 찾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종종 그 시간에 그곳을 찾기도 했다. 발레리안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르바라는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들을 떠올렸고, 그것은 발레리안이 기도하지 않으면 평소에는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는 일들이었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을 보면서 자신의 친구의 약혼자를 빼앗아 취했던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신의 부름을 믿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가 예배당에 자주 드나들지 못 한 것은 자신이 기도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을 부르기에는 다소 염치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발레리안은 어떠할까. 그 소문들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예배당을 드나들고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기도를 전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아니다, 사실 그의 소문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과 같은 도덕적 흠결을 가진 자가 교회를 드나드는 걸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 발레리안이 그 문턱을 넘는다면 자신도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 문턱을 넘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아니다… 그런 생각도 아니었던 것 같다. 바르바라는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그저 생각할 공간이 필요했고, 발레리안 덕분에 예배당을 그 공간으로 지정할 수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발레리안은 성실한 신자였다. 그가 예배당 문턱을 넘을 때마다 그를 향한 소문들이 조금씩 줄어들거나 목소리를 낮추었다. 발레리안이 신과 가까워보이자 사람들은 그의 무결을 믿었다. 더러운 소문이라던가 사교계의 추잡한 성질 따위는 애초부터 부지불식이었으므로 상쇄되었다. 바르바라는 모름지기 신앙이란 결국 신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가까워 보이는 인간이 신을 믿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했다. 그러자 발레리안과 대화할 마음이 생겼다. 

 어느 날 오전, 바르바라는 여느 때처럼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는 발레리안에게 물었다. 

 “누군가를 인생의 선택지로 알았다가 잘못됐을 때가 있다면,” 

 바르바라가 끊어서 대답했다. 

 “후회한 적도 있나요?” 

 발레리안은 조용히 바르바라를 들여다보다가 잔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뇨, 후회하지 않습니다.” 

 발레리안은 그것을 현재형으로 말했다. 

 “그런가.” 

 바르바라가 미지근하게 웃다가 말을 돌렸다. 

 “에아를 사랑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바르바라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두 손을 모으고 웃었다. 

 “저는 신에게 미움 받을 짓을 골라하거든요… 제 기도는 닿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 발레리안은 뜸을 들였다. 한동안 바르바라를 내려다보다 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에아는 모든 이들을 사랑할 겁니다. 인간은 원래 부족함으로 가득 차 신의 보살핌이 필요하니까요.” 

 발레리안은 다시 한 번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경이 원한다면 기도하겠습니다.” 

 그런 후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던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창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침묵한 채 진중하게 마음을 다했다. 바르바라의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올렸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뒤에 서서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댄 채로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발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르바라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와 함께 예배당을 나섰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함께 돌아왔다. 그 뒤로도 종종 그런 일들이 반복됐다. 발레리안은 바르바라가 오지 않아도 그녀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매번 같은 시간에 올려주었다. 바르바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그곳을 찾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레리안을 찾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도하고 싶지만 기도하지 않을 자신을 느낄 때에는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4. 

 달빛에 물들었던 발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일어나자 예배당 복도에 늘어진 그림자가 더 길어졌다. 바르바라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발레리안이 자신을 응시할 때까지 기다렸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바닷물에 축축하게 젖은 탓이었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옷을 몇 번 매만지다 말았다. 젖은 옷이 팔뚝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생경해서 불쾌했다. 발레리안은 익숙하게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돌아왔다. 예배당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밤바람이 몰아쳐서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겉옷을 벗어주었다. 바르바라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발레리안이 벗어주지 않았더라면 벗어달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인사없이 헤어졌다. 발레리안이 짧게 고갯짓을 하기는 했지만, 평소의 그라면 좀 더 길게 인사를 했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멀어지는 발레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이 더는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켜 예배당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교가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침의 발레리안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흐느끼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진중한 걸음으로 걸었고 호출을 받으면 마을로 내려가 일을 도왔다. 그러나 더 이상 태양이 내리쬐는 오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배당이 아름다운 유리창의 빛깔로 물드는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무릎 꿇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균열이 자신과 동일한 시간에 찾아오곤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밤과 새벽 그 사이에는 어떤 것들이 자꾸만 바르바라를 혹은 발레리안을 끌어당겼다. 인력처럼 바다로, 혹은 신이 깃든 장소로 이끌었다. 악몽에 휘둘리다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바르바라는 정신이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추락처럼 느껴졌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현실로 복기하기 위한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발레리안은 어느 쪽일까. 발레리안은 고통이 지나가기 전까지 무엇을 하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도하는가… 그 날 남은 새벽동안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5. 

 “오늘은 당신도 기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체사레 경.” 

 “당신의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나요?” 

 “부르는 이름이 많아 그만큼의 정성이 더 필요할 듯싶네요.”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발레리안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발레리안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이어나갔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달빛의 창백함을 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들은 태양을 통과했을 때보다 미미하고 어쩐지 허옇게 질려있었다. 그 빛들은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다. 발레리안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으나 바르바라는 결과적으로는 발레리안 역시 자신과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있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일들을, 이곳으로 돌아온 우리가 겪게 될지도 모를 혼란과 고통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랐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기를 바랐다. 발레리안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누군가의 아들을 위해 매번 아침마다 무릎을 꿇었던 사람이 살아남은 자들의 이름만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바르바라의 몫인가. 

 바르바라는 천천히 두 손을 올려 깍지를 꼈다가 곧 떨어뜨렸다. 그녀는 기도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반달을 보았다. 밤바다의 파도가 몰아치면서 수백만 개의 물방울로 쪼개지고 그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혀 격렬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발레리안은 바르바라를 곁눈질했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이 몇 주 전 건네주었던 그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 외투를 돌려주지 않았고 이따금은 그것을 입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런 차림새로 새벽이나 밤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 발레리안이 기도를 마칠 때까지 서 있다가 그와 함께 되돌아왔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은 궁극적으로 이전과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과가 낮이 아니라 밤 혹은 새벽에 일어난다는 점만이 달랐을 뿐이었다. 발레리안은 바르바라에게 외투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대체로 바르바라에게 질문하지 않는 편에 속했다. 보통 그는 그녀에게 있어 답하는 자였다. 

 바르바라는 양손을 엇갈려 발레리안 외투의 양쪽 깃을 붙잡은 채 걸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해변의 모래 위로 나란하게 찍혔다. 발레리안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파도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 

 발레리안은 바르바라를 응시했다. 

 “돌아오는 것과 남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후회한 적 있어요? 다시 한 번 파도가 쳐서 그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발레리안이 대답하지 않았다. 숙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바르바라는 때때로 부드러운 모래를 잘못 디뎌서 미약하게 휘청거렸다. 바람이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바다가 아니라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피와 철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도 선택을 하게 될까. 바르바라는 언제나 선택을 미루어두고는 했다.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에둘러 질문하는 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감추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물며 생존 역시 선택의 기로 안에 있었다. 바르바라는 생명을 택하는데 성공했지만 밤마다 죽음의 장소로 걸어 들어간다. 후회하게 될까. 

 “레이, 추워.” 

 바르바라가 작게 중얼거린다. 넌 안 그러니? 그녀가 말을 놓는 순간에도 발레리안은 그 이유를 물어보는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다시 낮의 영역으로 돌아오기를. 햇빛 아래에서 침묵할 수 있기를. 

 저희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힘을 주시옵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굽어 살피소서. 

 하지만 발레리안을 굽어 살피는 건 에아가 아니라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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