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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화창한 밤공기 아래에서, 케니스는 삼각형을 그린다. 나뭇가지를 들고 흙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이다. 그녀는 스물세 살이었고, 곁에는 마약중독자 애인 J가 있었다. 그들은 지난 2시간 동안 들판에 앉아 지겨운 토론을 이어가던 참이었다. 근처에는 농가가 있었고, 농가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작은 교회가 나왔다.
 “사후에 지옥이란 없어.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징벌의 공간이야. 케니, 봐. 사는 건 지옥이야. 그러니 우리에게 남는 건 천국뿐이지. 교회는 미신이야. 예수는 엿이나 먹으라고 해.”
 J는 무신론자가 되기보다 보편적 신앙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기로 결심한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사이비라고 부른다. 그는 농장 창고를 보수해서 주말마다 짧은 강연을 했다.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았다. 대체로 두어 명의 구경꾼들이 참석했다. 케니스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지루한 표정으로 지옥과 천국을 일갈하는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심판은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음은 천국의 입구일 뿐이다.” J는 엄숙했다. “우리의 삶이 이미 지옥이다.”
 “그럼 살인마와 강도들도 천국에 가겠네?”
 케니스가 제기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J는 분필로 벽을 문질렀다.
 “인간의 원죄는 세 가지가 있어. 하나는 탐욕이고, 하나는 무지고, 하나는 방조야. 한 가지만 추구하거나 회개해서는 안 돼. 그럼 천국에 못 가. 균형이 무너지거든.”
그는 석회가루로 삼각형을 그린 후 각 모서리에 a, b, c를 붙였다. 탐욕(Avarice), 무지(Blindness), 방조(Connivance). 마지막으로는 가운데에 H점을 찍었다. 그건 천국이었다. Heaven.
 “우리 삶은 완벽한 삼각형이야. 한 모서리라도 떨어져나가면 변이 무너지고, 그럼 천국으로 가는 문도 닫혀. 만약 지금이 고통스러운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네가 아직 저지르지 않은 죄로 징벌 받고 있는 거야. 네가 앞으로 저지를 죄도 결국 네 삶의 일부가 될 테니까. 네 미래의 죄를 징벌함으로써 인생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은 미리 네게 벌을 주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고통스럽다면, 얼른 그 균형을 맞춰야 해. 네가 무엇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고 그 원죄를 잘 찾아서 저질러야 해. 우리는 균형 있는 원죄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 거야. 살인마든 강도든 상관없어. 균형을 맞추면 천국에 갈 수 있어. 이해했어?”
 J가 손바닥으로 삼각형을 더듬자, 손바닥 끝에 붙은 흰 석회가루가 마약가루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쨌거나 J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꽤 반반했으므로, 케니스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주말의 강연이 끝나면 둘은 들판에 앉아 토론을 했다. 주로 J쪽이 일방적으로 떠들고, 케니스는 듣는 쪽이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따금 J가, “케니, 듣고 있지?”라고 물어오면, 그녀는 “그럼.”이라고 대답하곤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삼각형을 그렸다. 그럼 J는 고개를 끄덕이며, “완벽한 삼각형이야.”라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케니스는 두 달 뒤 그를 차버리고 N과 연애를 시작했다.

 2.
 눈보라가 그치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스프링필드의 어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케이트 역시 자신의 빌라로 돌아왔다. 걸어서 가기엔 꽤 먼 거리였으므로 당연하지만 마차를 탔다. 케이트의 빌라는 런던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슬럼가 바로 옆이다. 당연하지만 치안은 좋지 않았다. 빌라촌은 빽빽하게 늘어져, 마치 싸구려 목재로 조재된 인형의 집처럼 보였다. 낡았고, 칠이 벗겨져있었으며, 공기도 탁했다. 빌라들은 대체로 4층 높이였다. 발코니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다. 듬성듬성 화분을 내놓은 가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식물들도 모두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졌거나 시들어있었다. 빌라촌 사람들은 겨울이었음에도 화분을 실내에 들여놓지 않는 둥 자신에게 소유된 존재들을 특별히 보살필 의지가 없어보였다. 사실상 그곳의 모든 것들이 그런 무기력함과 권태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케이트는 자신의 빌라 우체통에 편지가 한 뭉텅이 꽂혀있는 것을 보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배달된 우편물들이었다. 녹슨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그 우편봉투들을 성의 없이 훑어보았다. 모두 한 사람 분의 필체로 쓰인 편지였다. 아서 롤랜드. (케이트의 애인?) 편지는 총 다섯 통이었고, 그 중 하나는 박이 들어가 있어 굉장히 화려했다. 케이트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머지 네 통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린 후 침대에 걸터앉아 금박의 봉투를 뜯어보았다. 청첩장이 나왔다. 케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청첩장 주인공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미세스 롤랜드라고 호칭되고 있었다. 케이트 벨은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녀는 이제 유부녀였다.

 *
 그들은 이미 삼주일 전에 법적으로 부부가 된 참이었다. 케이트가 스프링필드의 편지를 받기 일주일 전의 일이다.
 원래 아서는 결혼을 그렇게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느긋하고 깐깐한 남자였다.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은 침대에 누워 젊은 사용인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시킨 후,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집어던지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예순을 넘은 남자가 지킬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예순이란 젊음, 외적인 매력으로 얻을 수 있는 사람들 간의 호감, 건강, 그리고 흐르는 시간이 모두 보드라운 모래알갱이마냥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갈 나이였다. 그러나 아서 롤랜드에게는 돈과 지위가 있었다. 그는 권력을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 했기 때문에 위상과 권위는 없고 야비함과 경멸만을 획득하고 있는, 다 늙어가는, 그럼에도 부유한 백작이었다. 런던 바닥에 흔하게 널린 인간상이지만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건 몇 되지 않았다.
 케이트 벨은 그를 상류층 파티장에서 처음 보았다. 아서 롤랜드는 그녀가 파티장에 들어설 때부터 그녀를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어리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몸이 어떤 식으로 거래되거나 욕망되어 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육신은 남자들에게 매혹적이었다. 아서는 그 육신을 원했다. 그는 차가운 물에 담갔다가 막 건져 올린 수국의 줄기처럼, 싱싱하고 서늘한 냉기를 뿜고 있는 케이트 벨을 소유하길 원했다. 그녀가 오갈 데가 없는 고아인 것, 마땅한 보호자가 없다는 것 역시 그를 흡족하게 했다. 그녀는 고급 진 사용인이었고, 벗기기 좋은 인형이었고, 실제로 벗기기 좋은 인형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케이트 벨은 모델의 이름으로 그 파티에 참석했던 것이다.
 얼마 뒤, 아서 롤랜드는 케이트 벨의 단독 스폰서가 되었다. 파티가 끝난 후에 두 사람이 호텔을 들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아무도 그 사실을 구태여 알아보거나 되묻지 않았다. 너무나 진부한 소문이었던 것이다.
 스폰서를 얻은 뒤 케이트는 나날이 화려해졌다. 아서는 그녀가 요구하는 장신구는 모조리 사주었다. 값비싼 가방과 드레스를 두르게 하고, 품위유지비용이라는 명목 하에 따로 수표를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케이트의 거처를 옮기도록 허락하지 않고, 스폰서를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고-원래부터 높은 임금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그녀 이름의 계좌를 만들 수 없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꾸밈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지불했지 그녀의 근본적인 빈곤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해했다. 그녀가 자립해선 안 됐기 때문이다. 인형은 인형으로 남아야하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진 불 꺼진 빌라에 얌전히 방치되어 있어야 했다.
 케이트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걸고 최신 유행하는 드레스를 껴입은 채, 좁고 지저분하고 이따금 쥐가 나오는 빌라에 앉아 창문을 비스듬히 열어두고 담배를 피웠다. 이따금 종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 소리는 경관들이 내는 것으로, 근처 슬럼가에서 누군가 찔려죽었거나, 강도를 당했거나, 불이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람이 나날이 탁해지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오물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어쨌거나 가난은 늘 그녀 곁에 있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특별히 비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모든 게 지겨울 뿐이었다.
 아서 롤랜드가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건 그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케이트는 그가 자신의 애인은 되어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과 결혼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고아였고-물론 그 이전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와 섹스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금전적 지원이 케이트를 굴욕적으로 만들기 위해 교묘히 애쓰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서는 조로한 남자였다. 쪼글쪼글한 육신을 가졌고, 늙었으며,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그 깨달음이 노인의 뒤통수를 강력하게 내리쳤다. 그는 저택 복도에서 느닷없이 기절했다가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종종 케이트에게 결혼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케이트는 웃는 낯으로 사근사근 그의 이마를 짚어주며 이렇게 대답했다. “네, 네, 알지요, 나의 사랑. 저도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길 바라고 있답니다.” 개소리였다.

 3.
 앞에서 말했듯, 아서 롤랜드는 기절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근처에 마련된 응급실 개념의 작은 건물이었고, 위생 상태가 나빴다. 홈리스들이 자주 드나들어 종종 환자실에선 악취가 났다. 가난을 멸시하는 아서 롤랜드는 깨어나자마자 곧 하운슬로우 병원 특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식을 받은 케이트 벨이 일을 마치고 병원 로비를 방문했다. 간호사 하나가 다가와 차트를 넘겨주었다. “방명록에 성함과 거주지를 쓰세요.” 케이트 벨은 법적인 이름-케니스 리드-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예명을 써야하는지 아주 잠시간 고민했으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병원을 방문했는지 곱씹은 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썼다. 케이트 벨, 런던 72번가 B빌라.
 그녀의 애인은 5층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502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링거를 갈아주고 있는 간호사를 보았다. 그녀는 긴 녹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링거 봉을 붙잡아 봉투를 갈고 있었다. 간호사는 모든 일을 재빠르게 해치우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굴었다. 봉을 고정시키고, 새 링거를 걸고, 바늘이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한 후 아서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 뒤 신속하게 병실을 빠져나왔다. 문간에서, 그녀들은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케이트는 간호사의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보았고, 간호사 역시 케이트의 회색 눈동자를 마주보았으나, 그녀의 시선은 곧 빗겨가 케이트의 무거운 귀걸이에 머물렀다. 케이트는 일순 기억의 아주 깊은 곳에서, 과거라는 고랑에서부터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기억의 개울은 천천히 흐르다 말고 가파른 낭떠러지를 따라 폭포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단단하게 응축된 수백만 개의 물방울이 그녀의 암전된 머릿속을 때리며 동력을 이끌어냈다. 머릿속이 환하게 밝혀지더니 거짓말처럼 눈앞으로 한 장면이 던져졌다. 그건 동적인 장면이 아니라 오래된 사진처럼 정적인, 다소 이미지가 왜곡된 기록에 가까웠다. 케이트 벨은 눈앞의 간호사가 놀랍게도 그 사진 속에 들어있는 인물과 똑 닮았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흐릿했던 소녀의 모습 위로 간호사의 현재 모습이 겹쳐지고, 사진은 곧 현대적이고 깨끗한 촬영물로 변했다. 사진 속의 인물 이름이 떠올랐다. 클라라 헤이우드. 케이트 벨은 내면의 세계 속으로 불어오는 극적인 봄바람을 느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주 깨끗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스프링필드의 정원으로 불어오던 바람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케이트 벨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제기랄, 이 짓은 그만하고 싶어! 라고 외치고 있었다. 케이트는 케니스 리드가 발을 구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쿵 떨어지고 있었다. 케이트 벨의 껍질이 턱 선을 따라 후드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간호사가 된 클라라 굿맨이 짧은 목례를 했다. 시선이 차단되었다. 마법이 진행되던 눈동자 간의 접촉이 단절되고, 긴밀해지던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뚝 끊겼다. 케이트 벨은 쏜살같이 고랑 속의 폭포로부터 추방되었다. 마법이 끝나고 그녀는 다시 502호 앞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얼굴 가죽도 무사했다.
 클라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케이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눈동자 속을 살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깊은 고랑과 깨끗한 봄바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클라라는 케니스를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이다. “방문객이시죠? 들어가셔도 괜찮아요.” 클라라가 말했다.
 케이트 벨은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아서 롤랜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서는 자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짓뭉개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아서는 단단한, 깨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뭉그러진 가루를 석회와 섞어 굳힌 덩어리처럼 보였다. 패봤자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아서 롤랜드는, 그 자신이 너무나 형편없는 존재인 나머지 케이트에게, 폭력을 행사해 누군가를 압도하는 데에서 오는 가학적인 쾌감과 인간적인 죄책감조차 제공해줄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그는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이었다. 그는 늙어가고 있었다. 추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병실 밖으로 나온 케이트는 한산한 복도에 기대어 담배를 태웠다. 냄새를 맡은 의료인이 달려올 때까지. 그러나 달려온 것은 클라라가 아니었다.

 4.
 아서 롤랜드는 하운슬로우에 이주일 가량을 머물렀다. 병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입원환자의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케이트가 주기적으로 그를 만나러 온다는 사실에 흡족한 듯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권력이 그녀에게 행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서는 입원한 이주일 동안은 그녀에게 기꺼이 평소보다 많은 금액을 수표로 써주었다. 케이트는 그것을 “용돈”이라고 부르곤, 아서의 뺨에 입을 맞춰준 후 가방에 수표를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곧장 빌라로 떠나지는 않았다. 때때로 복도에서 담배를 태우기도 했고, 또 때때로는 클라라와 마주치기도 했다. 하루는 클라라가 병실에 들어오다 말고 케이트가 아서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조금 빈정거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연예계 뒷소문 말로만 듣던 걸 눈으로 보게 되다니 신기하네요.” 케이트 벨은 히죽 웃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애인이 아파서 속상해죽겠는데 무슨 소리에요~” 클라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예예, 병실 문은 꼬박꼬박 닫고 다녀주세요~” 그리곤 502호로 들어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문을 쿵 닫았다.
 케이트는 이주일 동안 직장과 병원, 빌라를 번갈아 다녔다. 일이 없는 날에는 런던 인근의 술집에 들어가 수표를 내고 술을 들이부었다. 마시고 또 마셔도 어쩐지 취하지 않았다. 몸을 관통하는 큰 구멍이 생겨, 그곳으로 들어간 알코올이 제 효능을 다하지 못 하고 장기와 함께 발효되는 것 같았다. 그럴 때 그녀는, 남자를 찾았다. 아주 손쉬운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케니스를 거쳐 간 남자들은 그녀의 몸을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동안 그녀가 익힌 “타인을 위한 어루만짐”이라곤 고작해야 그 사실을 전복시키는 것, 남자들의 몸을 그녀 자신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술집에서 어리고 젊은 남자들을 호텔로 데리고 가서 섹스했고, 아침이면 슬그머니 빠져나와 머리를 정돈하고 화장을 한 후 직장으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아서를 엿 먹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일련의 난교는 재미있었다. 근래 가장 즐거웠던 일을 꼽자면 케이트는 이 이주일에 대해 늘어놓을 것이다. 어쩌면 그 중 가장 괜찮았던 남자 둘에 대해서 떠들어 댈지도 몰랐다. 그럼 알피어스 고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의 알피.
 그 날은 아서 롤랜드가 처음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병상에서 할 이야기 주제치곤 지극히 무거웠다. 처음에 그녀는 모든 말을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였다. “네?”라고 되묻자, 아서가 가래 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수국, 지금 나는 청혼하고 있는 거야.” 지랄이다, 진짜. 케이트는 웃는 낯으로 그의 뺨에 입맞춰주곤 밖으로 나와 담배를 두 대나 태웠다. 그리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술집으로 돌아가 술을 마셨다. 모처럼 취기가 올랐다. 기분은 금방 괜찮아졌다. 그녀는 단순한 인간이었다.
 알피어스 고든은 바에 앉아 브랜디를 걸치고 있었다. 깃이 긴 트렌치코트 차림에 단단한 신발을 신고, 다소 우울한 얼굴이었다. 술에 취한 케이트가 요란한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알피어스 옆에 앉았다. 알피어스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곁을 차지한 여인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케이트가 턱을 괸 채 히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서 왔어요?”
 알피어스는 술잔을 매만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떨렸다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아… 여기 살아요.”
 “정말요? 와, 잘생겼네.” 맥락도 없이 케이트는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
 케이트는 그를 빌라까지 끌고 갔다. 술에 취한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주고 싶었던 알피어스가 순순히 따라나섰다. 케이트는 현관에서 그를 붙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알피어스는 밀어내지 않았다. 그들은 좁아터진 빌라에서 한바탕 뒹굴었다. 케이트는 화가 난 것처럼 굴었고, 실제 그랬다. 그를 조르거나 할퀴거나 잡아먹을 것처럼 굴면서 어떤 것들 떠올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알피어스가 단단한 몸과 잘생긴 얼굴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케이트는 울고 말았을 것이다. 손에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노인처럼. 그래, 그녀의 영혼이 노인이 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붙잡을 수 없는 예순 살이 되어버린 것처럼. 어딘가에 멈추어 서서 죽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재미는 있다. 사는 것은 재미있었다. 남자의 돈을 갈취해 원하는 옷을 사거나 목걸이를 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쇼핑은 재미있었다. 늙다리 애인 몰래 어린 남자들을 굴리는 것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떠올려야만 한단 말인가? 케이트는 그 날 알피어스를 지극히 성적으로 즐겁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아프게 하면서도, 종종 술에 취한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될 대로 되라지. 모든 게 귀찮고 짜증나….” 그렇지만 어쨌든 둘은 잘 했고, 잘 맞았고, 그래서 섹스에 매진한 후 밤이 끝나도 전에 아무렇게나 얽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것은 알피어스였다.
 알피어스는 머리통 위로 떨어진 쥐 한 마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식겁한 그가 벌떡 일어나자, 이불을 타고 떨어진 쥐가 쏜살같이 바닥을 달려 화장실로 사라졌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진저머리의 여자를 발견했다. 빌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가물가물하고, 대화도 드문드문 끊어져있었지만, 그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목덜미에 남은 손자국과 등을 할퀴어 놓은 손톱자국 때문에 간밤의 일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알피어스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엉망이 된 빌라를 치웠다. 케이트의 빌라는 개판이었다. 화장대 앞에 널브러진 비싼 화장품들과 장신구들은 우중충한 빌라의 공간과 이질적으로 동떨어져 있었다. 케이트가 간밤에 벗어놓은 옷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러운 천의 드레스와 섬세한 자수의 장갑을 가진 여자가 사는 것치곤 무척 허름한 거주공간이었다.
 술기운을 몰아내며 알피어스가 집안을 치우고 있을 무렵, 케이트도 눈을 떴다. 그녀는 반라의 상태로 이불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가, 알피어스와 눈이 마주쳤다. 긴 침묵이 있었다. 시선이 부딪힌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조여들었다. 케이트는 이전에 이 비슷한 상황을 병원에서 겪어보았기에, 어렵지도 않게 그를 알아보았다. 귓가에 흐르는 물소리, 기억의 폭포가 때리는 그녀의 고랑. 그녀는 그 속에서 이름을 하나 건져 올렸다. 그녀는 알피어스의 눈동자 속에서 비슷한 것을 감지했다. 알피어스의 고랑을 보았다. 그가 과거의 흐릿한 사진을 꺼내들고, 눈앞의 여인과 그것을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알피어스가 신음하며 물러났다.
 “맙소사.” 알피어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끙끙거렸다.
 “케니…?”
 “맞아.” 케니스가 히죽거렸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그녀가 덧붙였다. “알피.”

 알피어스의 투덜거림으로 완성된 아침을 먹은 후, 케이트는 그를 끌고 런던 중심부로 나왔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 쇼핑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알피어스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군말 없이 따라 걸었다. 쇼윈도우 앞을 지날 때마다 케이트의 짐 가방은 하나씩 늘어났다. 케이트는 그것을 몽땅 알피어스에게 맡겼다. 그녀는 드레스를 샀고, 장갑과 목걸이를 샀고, 귀걸이를 샀고, 향수를 샀다. 그들이 한 골목을 전부 돌았을 때, 케이트에겐 빌라의 가난 대신 상류층 집안 여인의 면모만이 남았다. 과시적인 소비였다.
 “뭐하고 지내니?”
 “경찰 일을 해요.”
 “아, 의외네.”
 “그러는 케니는요?”
 “모델.”
 “알만 하네요….”
 “케이트 벨이야.”
 “예명이죠?”
 “애칭은 캣.”
 “애칭도 있나요.”
 “예뻐졌지?”
 “예에….”
 “저것도 살까?”
 “그건 캣이 결정하는 거죠….”
 “어젠 왜 술집에 혼자 앉아있었니?”
 “음. 우울해서요.”
 “왜 우울했는데?”
 “자꾸 질문만 하시네요.”
 “왜 우울했는데?”
 “…범인을 쐈거든요.”
 “아, 그렇군.”
 “캣은요?”
 “청혼 받아서.”
 “네?”
 알피어스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저랑….”
 잤다고요?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케이트가 그 꼴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알피어스는 양손가득 쇼핑백을 쥔 채 난처한 표정으로 케이트를 내려다보다가, 곧 기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한참 후에 간신히 대답했다.
 “케니답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케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하다면 신기하네.”
 “얼굴도 그대로인 걸요.” 알피어스가 말했다.
 “주근깨 때문에 금방 알아봤어요.”
 “화장하면 지워져.” 케이트가 대답했다.
 “그럼 더 예뻐진단다.”
 헤어지기 전, 케이트는 알피어스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던졌다. 남색의 고급 진, 손바닥에 착 감기는 크기의 상자였다. 알피어스가 어렵지 않게 상자를 받았다. 그는 케이트와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계야.” 케이트가 낄낄거렸다.
 “비싼 거야.”
 “그래 보여요.” 알피어스가 말끝을 흐렸다.
 “왜 주시는 거죠?”
 “우린 늘 그렇게 했잖아.” 케이트가 대답했다.
 “일이 끝나면 넌 때때로 나한테 쿠키를 받아가고.”
 케이트는 상자를 가리켰다.
 “그건 어른의 쿠키인 셈이지.”
 그것은 단어 찾기 모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
 단어 찾기 모임은 스프링필드에 대한 이야기다. 케니스 리드가 그곳에서 만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정직했다. 멤버들은 책을 뒤져 어려운 문장, 단어, 관용구를 찾아 공책에 정리하고, 모임에서 그 공책을 서로 교환하여 각자의 내용을 옮겨 적으면 됐다. 그러나 이 모임은 학습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케니스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외설 말이다. 그 소설에 쓸 단어와 관용구가 필요했다. 케니스는 모임에 들어온 다른 아이들을 시켜, 소설에 쓰일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을 도모했던 것이다. 예나지금이나 그녀는 노력하는 일이 꽤나 귀찮았던 모양이다.
알피어스 케이건은 바로 그 모임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한 눈망울에 온화한 성품을 가진, 케니스보다 키가 작고 어린 소년은 결국 그녀의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케니스의 강요로 인해 억지스럽게 모임에 가입하게 된 알피는 그녀를 위해 매주 책을 뒤져 단어와 문장을 필사하여 가지고 갔다. 케니스는 자신보다 어린 소년의 노동력을 태연하게 착취하며, 이따금 수고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부드러운 말투로 칭찬하거나, 또 때때로는 쿠키를 주었다. 알피는 어느 순간이든 떨떠름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케니스가 매주 과제를 내주며 저 자신은 놀고먹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이, 알피의 공책은 나날이 빼곡해졌다. 우리는 알피의 노고 덕에 케니스의 소설이 한층 더 풍부한 어휘를 갖출 수 있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케니스가 모임을 운영하는데 금방 지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4개월 쯤 되던 날, 케니스는 알피에게, 다음 주부터는 정원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 그 다음 주는요?” “나올 필요 없어.” “앞으로 쭉이요?” “그래. 이제 귀찮아.” “모임은 없어진 건가요?” “아니. 그냥 내가 필요할 때 부를게. 그럼 넌 그 다음 주까지 공책을 채워오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녀가 알피어스를 부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모임은 흐지부지 되었고, 알피어스는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되면 케니스는 나무 그늘에 앉아 알피의 공책을 뒤적거리는 대신, 나무 위로 올라가 책을 읽는 시늉을 하거나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 때는 여름이어서 나뭇가지가 무성했다. 알피가 그 후에도 아주 가끔, 나무 그늘로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케니스는 그의 머리 위에 있었고, 나뭇잎에 가려져있었고, 모임을 주최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피어스는 돌아갔다.
 케니스 리드는 언젠가 모든 것은 사라진다고 믿는 여자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다소 노인 같은 점이 있었다. 유한성에 대한 믿음은 견고했다. 너무 어릴 적에 가족을 잃고, 집이라 불릴 만한 마땅한 장소 없이 떠돌았으며, 스프링필드는 매일 같이 만남과 이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중적인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사라지거나 되돌아왔지만, 또 영영 떠나버리기도 했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찾거나, 혹은 영영 상실하듯. 모임도 그 유한성의 믿음 하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귀찮아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흐지부지될 모임이었다. 알피어스에겐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끌어들였으므로, 금방 풀려난 것은 행운이 아닌가. 그녀는 딱 그 정도로만 이 모든 일을 평가했다.
 그런데 알피어스 케이건은 “내가 필요할 때 부를게.”를 잊지 않았다. 케니스는 알피어스가 얼마나 성실한 관성을 가진 아이인지 다소 과소평가한 부분이 있었다. 알피어스는 모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계속 썼다. 케니스는 알피의 침대 아래에 보관된 공책이, 여름이 끝나가는 동안에도 매일같이 성실하게 채워지고 있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아원이 불타버리고 그 공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 알피어스는 그 모임을 계속 해나갔고, 아주 이따금씩 케니스에게 물었다. “케니, 우리 모임 계속 하고 있는 거죠?” 그럼 케니스는 귀찮다는 듯,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걸?” 그래서 알피어스는 계속 써나갔던 것이다.
 단어 찾기 모임은 사실상, 알피어스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주는 모임이었다.

 *
 알피어스는 그 뒤에도 가끔 케이트의 빌라에 방문했다. 섹스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이제 둘 다 한 번으로 족했다. 알피어스는 케이트의 어지러운 빌라를 치우고, 사방에 널린 구두를 한쪽으로 정돈하고, 별 것 없는 식료품으로 요리를 만들어줬다. 때때로 구시렁거리거나 잔소리를 하면서. 이주일 동안 둘은 그런 식으로 지냈고, 케이트의 빌라는 조금 깨끗해졌고, 그래도 여전히 쥐는 나왔다. 알피어스도 그 부분에 관해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오로지 아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케이트의 집을 옮기는 것.
 “애인이 돈 많다면서요?”
 “많지.”
 “집이 이런데 왜 캣을 여기 살게 두나요?”
 케이트 침대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알피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성질이 드러워서.”
 “애인이요?”
 “아니, 내가.”
 알피어스는 잠시 침묵했다.
 “이건 일종의… 징벌인가요?”
 징벌이라! 케이트는 어디선가 그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길들이려고 하는 거야.”
 케이트는 몸을 뒤집어 시체처럼 손을 포개어놓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알피어스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시트 한쪽이 푹 꺼졌다.
 “캣….” 머리 위로 알피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재미있어요?”
 귀찮지 않냐고 묻는 것이다. 알피어스는 케이트에게 삶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케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은 재미있단다.”

 5.
 이주일 뒤에, 아서 롤랜드는 퇴원했다. 그리고 법적으로 케이트와 결혼했다. 죽기 전까지 옆에 둘 인형 하나를 가지고 싶은 모양이지. 케이트는 고아계집이었지만 아름다웠으므로 옆에 두기엔 괜찮은 인형이 될 수 있었다. 식은 한 달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준비될 것이었다. 레아의 별장으로 떠나던 날, 케이트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던 자신이 런던으로 돌아오면 식을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끔찍한 일인가?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산다. 아니… 아니다, 모두가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모두가 이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는 없다. 자신은 아름다워서 남자에게 욕망 받았다. 돈 많은 남자에게 욕망 받는 일. 지루한가? 그럴 리가요. “지금은 재미있답니다.” 개소리였다.
 런던으로 돌아와 네 통의 편지를 쓰레기통으로 처박고 청첩장을 열어본 바로 다음 날, 케이트는 아서의 자동차를 타고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별장으로 내려갔다. 아서가 가진 여름별장이다. 겨울이라 사용인들이 많지 않았다.
 케이트는 이미 일전에 딱 한 번, 그의 별장에 들린 적이 있었다. 아서의 과시는 종종 이런 식으로 드러났다. 별장, 자동차, 값비싼 양복. 그의 재화는 케이트를 짓누르기 위해 존재했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마호가니 가구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케이트는 결혼을 앞두고 자신을 다시 한 번 찍어 누르고자 하는 아서의 욕망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둘은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시시한 대화를 건조하게 나눈 뒤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아서의 방에는 발코니가 있었다. 케이트의 빌라에도 발코니가 있긴 했지만 그건 마땅히 발코니의 기능을 다한다고 볼 수 없는 초라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별장의 발코니는 그야말로 신전처럼 보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서 바닥부터 난간까지 아름다운 상아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티 테이블을 놓아도 자리가 충분할 만큼 넓었다. 난간 대리석은 각종 신화적 인물과 동물들로 섬세하게 조각되어, 어떤 예술품처럼 보였다. 천국에 발코니를 놓는다면 저런 모양새여야만 했다. 케이트가 시선을 떼지 못 하고 창가로 다가가자, 아서가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를 저지시켰다.
 “잠깐.”
 그녀가 멈추어 서자, 아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문은 열지 말지. 추운 바람을 쐬고 싶지가 않은데.” 아서가 말했다.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저지되었다. 케이트는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발코니의 창문을 한 번 흘끔, 바라보곤 아서에게로 되돌아왔다. 아서가 그녀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식사를 하러가죠.” 케이트가 그의 품에서 말했다. “나의 사랑, 지금 저는 배가 고파요.” 사랑을 말하는 케이트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잠시 자유시간이 있었다. 케이트는 아서와 내내 붙어있어야 했다. 별장에는 둘 외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없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별장에 붙어 지내야 하는 망령 같은 존재들을 제외하면 두 사람은-두 부부는 오로지 서로밖에 없었다. 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을 것인데, 그건 오로지 케이트를 위해서이다. 어쨌든 케이트는 그 날도 아서와 섹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다. 슬프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새벽, 케이트는 아서의 침대에서 반라의 상태로 깨어났다. 쪼글쪼글하고 더러운 육신의 남자가 그녀의 곁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달빛이 떨어지는 창가를 보았다. 유리창 너머의 아름다운 발코니를 보았다. 달빛이 비추고 있는 섬세하게 세공된 난간들, 난간 속에 새겨진 신화 속 여자들을 보았다. 남자의 전리품이 되거나 남자를 전리품으로 가졌던 그녀들의 역사를. 케이트는 바람을 맞고 싶었다. 봄바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스프링필드는 이미 타버렸다. 13년 전에 사라졌다. 영원한, 그 깨끗한 감각은 이제 없다. 아름다운 시절은 불꽃처럼 사라졌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찾지 않아도 괜찮았다. 케이트는 자신이 지금 불행한 것인지 행복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래 전에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미는? 재미는 있나? 영감탱이는 곁에 누워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저녁에 그는 침실에서 헐떡거리며 이렇게 외쳤다. ‘오 나의 수국,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아!’ 죽을 만큼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케이트는 생각한다. 재미가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정말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어차피 난 여자잖아?
 신화에 남을 수가 없는 시대의 구성원. 케이트가 어떤 방식으로 죽던 난간에 자신이 남겨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여자들이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재난이 보편적인 불행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지루하고 귀찮아.’
 케이트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펼쳐 얼굴을 묻었다. 울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케이트는 생각했다.
 ‘지겨워.’
 벌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젠장. 재미없어.’
 케이트는 징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어디서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던지. 잘 되지 않았다. 기억 역시 유한성의 일부였고 시간에 따라 하나씩 소거되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J의 강연 같은 게 제대로 떠오를 리가 없다. 하지만 케이트는 자신의 고랑 속에서 어떤 균형, 균형 잡힌 도형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삼각형이었다. 꼭지 점에 이름을 붙여주고 선을 연결하면 완성되는 균형 잡힌 정삼각형이었다. a, b, c의 꼭짓점을 달고 있었다. 원죄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케이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삼각형을 완성해야 한다.’ 그녀에겐 저질러야만 하는 죄가 있다.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 했지만, 신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그것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케이트는 굳게 닫힌 아서의 방 발코니를, 달빛이 비추어 온통 별세계처럼 환하게 빛나는 그곳을, 천국의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죽여야겠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아서 롤랜드를 죽여야겠다.
 그래서 케이트는 마음속으로 삼각형을 그리고, 그 삼각형에 이름을 붙였다. Life. 이제 케이트는 도형L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이것으로 그녀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6. 꼭짓점 B(Blindness)
 결혼식이 일주일 남짓 남았을 때, 케이트는 하운슬로우 병원을 재방문했다. 클라라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클라라는 케이트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되물었다. “왜, 애인이 또 아프냐?” 케이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결혼식 전까지 별장에서 지낼 거래.”
 “그래서?”
 “발작이 오면 간병인이 주사를 놔주거든.”
 “주사 놓을 줄은 알고?”
 “간병인은 알겠지.”
 케이트는 간병인으로부터 받은 이전의 처방전을 클라라에게 보여주었다. 하운슬로우 병원 소속 의사가 써준 것이었다. 클라라는 담당 의사가 지금 자리를 비웠다고 말했다. 약을 그대로 받아가는 거라면 자신이 임의로 써줄 수는 있지만, 만약 아니라면 환자와 다시 방문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케이트는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냥 심부름 온 거니까 아무거나 줘.”
 “네 남편 될 사람은 부인을 이런 곳까지 심부름시키기도 해?”
 클라라와 케이트는 병원 복도를 걸었다. 의료인들은 모두 정갈한 동선으로 병원 곳곳을 시스템의 일부처럼 흘러 다녔다.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케이트는 곁눈질로 무성의하게 그들을 훑으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응, 웃기지?” 케이트가 말했다.
 “아내 될 사람을 무슨 사용인처럼 부린다니까.”
 “호로잡놈일세, 그거.”
 클라라가 중얼거리며 의료보관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클라라는 열쇠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다시 복도를 걸어 다른 방에 도착했다. 이번에 케이트는 기다리지 않고 클라라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클라라가 서랍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알약과 주사약이 서로 부딪혀 구르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주머니에서 빈 주사약을 꺼냈다.
 “이거랑 똑같은 거 줘.”
 “약 이름이 뭔데?”
 “몰라, 그냥 애인 집에 있던 건데.”
 “그런 거 들고 다니다간 의심받는다?”
 케이트가 웃음기 도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의심?”
 클라라는 케이트가 준 처방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곤 서랍을 뒤지면서 대답했다.
 “남편 죽이는 아내라던가?”
 “와.”
 케이트의 목소리가 어딘지 기대에 차있었으므로, 클라라는 서랍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케이트가 히죽 웃었다. 클라라는 질린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전처럼 케이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뭐, 어쩔 건데.” 클라라가 물었다.
 “지금 떠보는 거지?”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뭘?”
 “아니면 됐어.”
 클라라가 다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빈 주사약을 손안에서 굴려보았다.
 잠시 후, 케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 죽이는 약도 있을까?”
 클라라는 이번에 뒤돌아보지 않고 대수롭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만약 내가 달라고 하면 너는 줄 거야?”
 “당연하지~”
 “농담 아닌데.” 케이트가 그녀를 불렀다.
 “클라라.”
 클라라는 서랍 뒤지기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다시 케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케이트는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클라라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케이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케이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별장은 지겨워.”
 케이트가 말했다.
 “거기서 늙다리랑 자는 것도 지겨워.”
 “지겹다는 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재미없다는 뜻이야.”
 “그런데서 어떻게 재미를 찾니.”
 “그래, 선택할 수 없는 일에선 재미를 찾을 수가 없더라.”
 클라라는 침묵했다.
 “어쨌든 남편을 죽일 건데.”
 “돈은 네가 다 가지고?”
 “당연하지.”
 “의심받을 텐데?”
 “몰라, 성공하면 고민해보지 뭐.”
 이번에는 케이트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클라라는 짧은 한숨을 쉬곤 고개를 흔들었다.
 “약 받아가.”
 클라라는 서랍에서 약 몇 개를 꺼내 케이트에게 주었다. 케이트는 받은 주사약마다 일일이 손안에서 굴려보았다. 액체들은 하나같이 투명했다. 불투명한 액은 하나도 없었다. 꼬리부분에 태그가 붙어 있었다. 작은 글씨로-아마 볼펜으로 쓰인 것 같았다-약 이름처럼 보이는 게 적혀 있었지만, 케이트는 읽을 수가 없었다. 읽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약들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케이트가 히죽였다.
 “어떤 착오가 있다면, 그건 의료과실이지?”
 클라라는 열쇠 꾸러미로 서랍을 잠그며 대답했다.
 “의료과실이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고.”
 클라라는 콧방귀를 뀌며 손을 털었다.
 “뒤는 알아서 잘해라? 나도 모르는 일이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 되지?”
 “이런 일에?”
 클라라가 되묻고는 저도 웃겼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난 처방해달라는 약을 준 것뿐이거든.”
 클라라가 대답했다.

 7.
 다음 날, 케이트는 짐을 꾸려서 아서의 별장으로 떠났다. 여전히 날씨는 우중충하고 풀릴 줄 몰랐다. 창밖으로 펼쳐진 숲속은 음침하고 음울했다. 하늘은 잿빛으로 뿌옇게 떠있었고, 언덕 길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차 유리창에 얇은 성에가 꼈다. 케이트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닦아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작은 짐 가방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아서의 간병인에게 전달되어야 할 의약품들이 들어있었다. 물론 클라라가 처방해준 약도 있었다. 간병인은 아마도 그 약을 주사할 테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케이트가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어쨌든 간병인이나 케이트나 그 약의 효능에 있어서는 무지했다. 단지 그들은 처방받은 약을 처방받은 대로 행할 뿐이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의료과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 클라라에게 책임을 묻게 되지 않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뒤를 걱정하지 말자.

 아서는 방에 있었다. 천국의 발코니는 여전히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찬바람이 세게 불어, 창문이 이따금 흔들리는 것을 제외하곤 방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서는 소리 내지 않고 숨을 쉬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지 않았으면 이미 죽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케이트는 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서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가증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 왔어요.”
 아서는 대답 대신 귀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케이트가 다가가자, 그는 힘껏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곤 히죽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케이트는 웃었고, 그건 그를 여전히 흡족하게 만들었다. 아서는 못 본 이틀 사이에 부쩍 더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가진 추잡한 욕망조차도 그 몸에 담기엔 걸맞지 않아보였다.
 “몸은 좀 어떠세요?”
 “빌어먹겠다.”
 아서가 으르렁거렸다.
 “오늘도 배가 고프냐?”
 케이트는 아서가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뇨, 내 사랑.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케이트가 대답했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게요.”
 그녀는 아서의 뺨에 입을 맞춰주곤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케이트는 자신이 그 어떤 살의도 느끼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귀찮은-강력한 욕망이다. 누군가를 증오해야 가능한 일인데, 케이트는 그를 증오할 만큼 그를 중요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를 죽여야 했다. 이건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러자 케이트의 마음속이 몹시도 침착해졌다.

 그 날 저녁, 케이트는 혼자 식사를 하고-아서는 침대에 계속 누워있었다. 내려올 만큼 기운이 없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밤에 그 짓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란 이 얼마나 지겨운 생물이란 말인가!-차를 마신 뒤 다시 아서의 방으로 올라갔다. 간병인이 아서에게 주사를 놔주고 있었다. 클라라가 처방해준 약은 아니었다. 케이트는 곁눈질로 간병인이 주사기를 다루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서는 찌글찌글한 얼굴로 기침을 하며, 얌전히 한쪽 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오래 살고 싶은 걸까?
 간병인이 나가자, 아서는 케이트에게 문을 닫으라고 말했다. 케이트가 이미 닫혀있다고 대답하자,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문을 잠그라는 이야기였다고 호통을 쳤다.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잠갔고, 되돌아 와서는 아서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서가 케이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 뒤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다. 늘 있던 이야기였고, 이 시대의 어떤 여자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으며, 이 이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케이트는 어쨌든 견뎌냈다. 토하고 싶을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클라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사람을 죽이는 약도 있을까? 당연하지.
 별장이 지겹고 남자가 지겹다. 늙다리가 지겹고 모든 게 지겹다. 하지만 그걸 지겹다고만 말할 수 있는 일일까? 케이트가 속으로 짜증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클라라, 끔찍하구나!’ 지겹거나,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화가 나거나, 혹은 그 모든 것들이 권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른 이 상황이. 이런 일 앞에서도 살의를 느끼지 못 하는 이 일련의 상황들이. 아서가 케이트의 위로 올라탔을 때, 케이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을 느끼고 그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아서가 깩 소리를 냈다. 몸뚱이가 둔탁하게 나가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케이트가 벌떡 일어나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방속에서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서가 바닥을 구르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그의 명치를 걷어찬 것이다. 아서는 컥컥거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케이트를 노려보았다. 살의가 가득 찬 눈이었다. 그녀를 찢어발길 것처럼 보였다. 숨을 고르지 못 하는 노인의 손목이 파들파들 떨렸다. 케이트는 콧방귀를 뀌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아서를 걷어찼다.
 “케이트!” 그가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오, 케이트!”
 달빛이 사선으로 떨어져 케이트의 맨살을 새하얗게 비추었다. 발코니의 문은 굳게 잠겨있으나 달빛만큼은 선명하게 그 어떤 방해 없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케이트는 그 속에서 권태로운 사냥꾼이었고, 영원한 신이었다. 그녀는 아서의 징벌자였다. 동시에 그녀 자신을 징벌하기로 작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케이트가 짐 가방에서 약을 꺼내고 주사기를 쥐었을 때, 아서의 나무토막 같은 손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케이트는 다리를 거칠게 흔들어 아서를 떼어내려 애썼다. 아서의 손은 접착제를 붙여놓은 것처럼 잘 떨어지지 않았다. 생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을 노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케이트는 시큰거리며 다시 한 번 아서를 걷어찼다. “씨발.” 케이트가 작게 읊조렸다. “아, 씨발!” 주사기를 든 손이 벌벌 떨렸다. 두려운 게 아니었는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발아래에서 아서가 작게 우우 울부짖었다. 케이트는 약을 채워 넣었다. 액이 몇 번 흐르긴 했지만 괜찮았다. 주사기는 가득 찼다. 그녀는 죽일 수 있었다. 케이트가 아서를 향해 다가가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리고 아서의 목을 조를 것처럼 손아귀를 펼쳤다. 그 때, 거센 바람이 불었다. 창이 통째로 떨어져나갈 것처럼 흔들렸다. 방이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서는 헐떡이며 케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달빛 아래에서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어떤 말을 쥐어짜냈는데, 형편없었다. “살, 살려다오….” 그가 말했다. 케이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케이트가 중얼거렸다. “영감탱이, 3일 전에도 내 밑에서 울었잖아요.” 케이트는 머리카락을 정돈하여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 땐 죽어도 좋다면서요?” 그녀는 아서의 팔뚝을 짓밟고 올라타 그녀가 하고자 했던 일을 실행했다. 아서는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팔딱거리며 케이트의 팔을 마구 때렸다. 몹시 아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이를 악물었고, 고개를 숙였고, 집중했고, 주사기를 밀어 넣었다. 클라라가 넘겨준 약이 그의 몸속으로 침투해 피와 함께 흐르도록 했다. 그동안 아서는 죽여 버릴 거라고 속삭이고, 사람을 부르기 위해 꺽꺽거리고, 애원하고, 눈물을 흘리고, 침을 흘리고, 다시 한 번 케이트를 후려쳤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케이트는 해냈다.
 아서는 죽었다.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사기를 던지고 숨을 골랐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반쯤 걸치고 있던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전라의 몸으로 우뚝 섰다. 달빛이 떨어지며 그녀를 축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피부로 호흡하듯, 눈을 감고 그 달빛을 모조리 흡수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캄캄한 방을 밝히며 환하게 타올랐다. 뱀파이어처럼. 하지만 영원한 삶 같은 건 없다! 케이트는 발코니를 막아놓은 창문을 통째로 열어젖혔다.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그녀의 몸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건 남자들의 손톱도, 손가락도, 시선도, 혓바닥도, 성기도 아니었다. 바람은 매서울 수 있어도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다. 위협이 될 수도 없다. 아니,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케이트의 얼굴을 후려치자, 섬세하게 조각된 케이트의 껍질이 산산조각 났다. 케이트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조각들이 떨어지게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가슴이 자꾸만 뛰고 있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지막 조각이 그녀의 콧대를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조각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케니스 리드는 고개를 쳐들고 두 손을 가슴에 포갰다. 텅 빈 가슴으로 자꾸만 바람이 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술을 마셔야만 해갈되는 공백은 아니었다. 이건 기분 좋은 공백이었다. 기쁨의 공백이었다. 즐거움의 공백이었다. 삶에 대한 공백이었다. 케니스가 속으로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재미있어 죽겠어!
 사는 거, 진짜, 재미있어 죽을 것 같아!
 케니스는 두 손을 들어 뺨을 더듬거려 보았다. 그러나 눈물은 없었다.
 남편을 죽이는 일은 진짜 재미있었다.

 8. 꼭짓점 C(Connivance)
 알피어스 고든은 새벽부터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유쾌한 기상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잠시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다시 한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알피어스는 눈을 몇 번 깜빡여, 초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문 바깥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을 땐 끙끙거리며 일어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알피.” 하고 그녀가 문 너머에서 그를 불렀다.
 케니스는 부스스한 알피어스의 정수리를 보며 낄낄거렸다. 알피어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케니스를 내려다보았다. 새벽녘이 밝아와 사위는 온통 암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건물들은 아직 어둠 속에 가려져 외곽만 드문드문 드러났다.
 “캣… 무슨 일이에요?”
 알피어스가 덧붙였다.
 “제정신인거죠?”
 왜냐하면 눈앞의 케니스는 평소처럼 화려한 드레스에 무거운 귀걸이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그녀는 심지어 바지를 입었다-유부녀였던 데다가 직접 알피어스의 집으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케니스가 말했다.
 “제정신이지.”
 “아, 그래요.” 알피어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요?”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줘.”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알피어스는 케니스가 벌써부터 사고를 쳤다는 가정 하에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혹은 그녀에게 할 일이 있거나. 둘 다였다. 알피어스는 그런 일들이 너무 익숙했다. 적어도 케니스에겐 그랬다.
 케니스가 말했다.
 “나 사람을 죽였는데.”
 “네?”
 알피어스는 되묻자마자 평정을 되찾았다.
 “남편이요?”
 알피어스는 케니스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번 더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몰라.”
 케니스는 피곤한 듯 미간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라….”
 “당연히 처음이겠죠.”
 “그래서 일단 버려두고 나왔는데….”
 “어디다요?”
 “별장….”
 “사람들이 알아차릴 텐데요.”
 “발코니 타고 내려와서 괜찮아.”
 “문을 열 수도 있잖아요.”
 “그럼 돈으로 매수하지 뭐.”
 “돈으로?”
 “나 이제 돈 많아.”
 케니스가 한숨을 쉬곤 징징거리는 투로 알피어스에게 매달렸다.
 “어쩌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어.”
 “우발적으로 죽인 게 아니었어요?”
 “아니, 우발적이지.”
 “그런데 아무 것도 생각을 안 해놨다고요?”
 “응.”
 알피어스는 기막히다는 눈으로 케니스를 내려다보았다.
 “캣….”
 알피어스가 참담하단 얼굴을 했다.
 “생각 안 하고 사나요?”
 케니스가 히죽히죽 웃었다.
 “안 하고 산지 꽤 됐어.”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거죠?”
 “당연하지.”
 “잡혀가긴 싫고요?”
 “당연한 소릴.”
 “춥지 않아요?”
 알피어스가 그녀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케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건 왜 물어?”
 알피어스가 대답했다.
 “두꺼운 외투를 입어야 할지 고민 중이거든요.”

 마차를 타고 산 입구 앞까지 도착한 뒤에는 둘 다 계속 걸었다. 별장은 언덕 위쪽에 위치했고 주변은 울창한 숲이었다. 시체를 암매장하기엔 충분한 면적의 숲 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하지만 알피어스는 시체를 암매장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갑자기 사라질 수가 없는 남자잖아요.”
 “그런가.” 케니스는 공감하지 못 했다.
 “사람들은 분명 금방 잊을 텐데.”
 “잊기 전에 케니가 체포되겠죠.” 알피어스가 대꾸했다.
 그들은 동이 막 터오를 즈음에 별장에 도착하여, 아직 사용인들이 모두 자고 있는 조용한 복도를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알피어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반이었다. 대체 케니스가 어떻게 저 숲을 지나 런던 외곽까지 올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알피어스가 케니스에게 이 사실에 대해 묻자, 케니스는 돈을 먹여 마차를 탔다고 말해주었다.
 “숲 입구까진 걸어 내려가서, 마부를 깨웠지.”
 “두들겨 팬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케니스가 후후 웃었다.
 “나는 힘없고 가련한 여인이란다.”
 3층 아서의 방은 마치 케이트의 빌라 같았다. 어쩌면 케이트의 빌라가 그토록 지저분했던 건, 가난 때문이 아니라 그냥 케이트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케이트가 머물며 휩쓸고 지나간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발코니 창이 활짝 열려 커튼이 마구 방안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방은 복도보다 더 싸늘했다. 아서의 시신이 침대 곁에 우그러져 있었다. 알피어스는 시신 옆에 쭈그리고 앉아 시신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그는 아서의 팔뚝을 따라 난 미세한 주사자국들을 발견했다. 그 중 가장 깊은 구멍이 있었다. 알피어스는 손가락 끝으로 그 지점을 눌러보았다가 떼어냈다. ‘깊게도 찔렀군….’ 알피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하면 될까?”
 케니스가 물었다.
 알피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강도가 들었다고 하죠.”
 그는 문 열린 발코니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산에 지어진 별장에선 그런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하거든요.”
 동이 완벽히 터 오르자, 케니스는 아서의 가방에서 수표를 꺼낸 후 층계를 내려갔다. 그리고 몇 안 되는 별장의 사용인들을 돌려보내고 관리인에게 수표를 써주었다. 거짓 진술을 하게 할 셈이었다. 수표는 아서 롤랜드의 이름이었고, 아서는 죽었으므로, 만약 그의 부인인 케니스가 연행된다면 그 수표는 백지수표가 될 것이다. 관리인은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모든 걸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산을 내려가기 전에 심지어 의욕적으로 이렇게 묻기도 했다. “제가 더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아침. 케니스와 알피어스는 손목을 걷어 올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알피어스는 시험 삼아 아서를 칼로 찔러보았는데, 혈액이 이미 굳어가고 있어 충분한 양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케니스와 알피어스는 그의 시체를 붙잡아 거꾸로 매달아야 했다. 마치 도살장의 가축처럼 말이다. 케니스는 정말 불유쾌한 경험이라고 투덜거렸다. 아서에게서 구린내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노인의 삭은 몸으로부터 오는 발효의 냄새인지, 아니면 시체의 부패과정에서 오는 냄새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피어스가 아서의 시신 근처에 일어나지도 않은 범행의 흔적을 꾸미는 동안, 케니스는 팔짝 팔짝 뛰어다니며 어린아이처럼 벽과 벽을 짚고 방을 분주하게 내달렸다. 그리고 그녀의 동선을 막아서는 가구가 있으면 모조리 걷어차거나 집어던졌다. 화분이 와장창 깨지고, 탁자가 통째로 엎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전화기가 박살나고 시계가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케니스가 한 것은, 침대 위에 걸린 아서의 초상화를 뜯어내 침대 헤드에 박아버린 것이다. 영예로운 아서 롤랜드의 얼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케니… 적당히 부수는 게 좋아요. 아서가 저항하면 얼마나 저항했겠어요?”
 알피어스가 아서의 상처를 날 방향대로 미세하게 도려내며 말했다.
  “누가 그 늙다리가 저항했다고 진술해?”
 케니스가 낄낄거렸다.
 “내가 강도에게 저항한 거겠지!”
 “그래서 아서의 방 가구들이 모조리 박살 났구요?”
 알피어스는 한숨을 쉬곤 피 묻은 칼을 침대 아래쪽에 배치했다.
 “몇 가지는 치우는 게 좋겠어요. 협조 좀 해줘요, 케니….”
 알피어스는 새벽부터 이 모든 작업을 진행하느라 몹시 피로해보였다.
 
 이후에도 둘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종국에는 조금의 대화도 주고받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서는 이제 침대 바로 아래쪽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가 누운 바닥 일대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칼이 침대 아래쪽으로 굴러가 있었고, 방은 “적당히” 난장판이었으며, 시트는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모든 일을 끝낸 알피어스는 한 번 기지개를 편 후 쉬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케니스는 어깨를 으쓱이곤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케니스는 쟁반에 우유와 차를 들고 있었다. “스콘 남은 것도 꺼내올까 봐.” 케니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발코니에 테이블을 두고 앉아 차를 마셨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깨끗했다. 알피어스도 케니스도 기진맥진했다. 둘의 셔츠와 바지는 피로 얼룩덜룩 했고, 몸에선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케니스는 우유를 먼저 따른 후 차를 섞어 알피어스를 흡족하게 했는데, 케니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알피어스를 흡족히 여겼다. 남편을 죽인 후 젊은 남자와 마주 앉아 마시는 티타임은 만족스러웠다. 알피어스와 케니스는 발코니 뒤로 펼쳐진 아서의 시체와 그의 방-그 난장판을 돌아보는 대신 눈앞으로 펼쳐진 산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지는 새카만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빛이 투과되지 않은 숲은 거대한 덩어리, 바람에 따라 꿈틀거리는 검은 유기체처럼 보였다. 그 위로 하늘이 어두운 암청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보랏빛과 남색의 경계선이 구름에 감싸여 아름답게 일렁였다. 알피어스가 조곤조곤 말했다.
 “동이 트네요….”
 케니스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홀짝이며 대답했다.
 “아니야, 알피어스. 저건 노을이 지는 거야.”
 케니스의 말이 맞았다. 여명이 아니라 땅거미였다.
 둘은 옷을 갈아입고 걸어서 별장을 내려왔다. 그리고 케니스가 알피어스의 집까지 갔던 방법 그대로 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알피어스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케니스를 그녀의 빌라까지 데려다 주었다. 밤이 될 무렵이었으므로 슬럼가 쪽은 벌써부터 으스스해보였다. 알피어스는 이제 케니스가 이사를 할 수 있겠다고, 그건 아주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서의 죽음 같은 건 벌써 머릿속으로 밀어낸 지 오래였다.
 현관 앞에서 케니스가 알피어스를 붙잡았다. 섹스의 징조는 아니었다. 둘 다 흥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소 지겹고 지쳐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둘은 처음부터 그런 일들을…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술김에 벌어진 일이고, 그들은 다시 되돌아 왔다. 가족으로. 어떤 것을 나누고 떠난 사이로. 공모자로. 케니스는 그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알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빌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알피어스는 간단한 요리를 했다. 케니스는 군말 없이 그것을 먹어치웠다. 알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을 끝난 자들에게 빵과 소스는 성대한 만찬처럼 느껴졌다. 촛대도 분위기도 없었고, 화장실에선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찮았다. 맛있었다. 둘은 이미 한 남자의 시체를 등지고도 아름다운 티타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배가 찬 후에는 졸음이 몰려왔으므로, 둘은 침대 위에 올라가서 지쳐 나가떨어진 자들 특유의 괴로운 숨소리를 내며 끙끙거렸다. 케니스는 알피어스의 손바닥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웅크렸다. 알피어스는 케니스의 손목을 타고 번진 멍과 손톱자국들을 보았다. 아서가 남긴 폭력의 자국들. 그를 죽일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알피어스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끝난 일이었고, 그녀는 연행되지 않을 것이었다. 연행된다고 해도 증거는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없는 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케니스와 알피어스는 잠이 들었다.

 *
 그 날 밤, 케니스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가지가 무성하고 잎사귀들이 싱그러웠다. 나뭇가지는 무성했다. 듬성듬성 쏟아지는 햇살은 녹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했다. 그녀는 스프링필드의 정원에 솟아오른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었다. 여름의 바람. 생명이 충만하고 그림자들이 빽빽한 계절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며 노래를 불렀다.
 케니스는 스프링필드 고아원의 뒷문을 통해 나오는 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알피어스 케이건이었다.
 알피어스는 한 손에 공책과 책을 들고 정원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케니스는 가지에 몸을 늘어뜨리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미 이런 장면을 과거에 본 적이 있었다. 단어 찾기 모임이 흐지부지 되었던 여름날에 이따금씩 벌어졌던 사건이었다. 케니스는 나무 위에 올라가있고, 알피어스는 나무 그늘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알피어스는 케니스를 찾지 못 하고 돌아간다. 나뭇가지가 너무 무성하고, 케니스가 더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피어스가 나무 그늘로 들어왔다. 케니스는 숨을 죽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알피어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케니스를 찾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찾지 못 한다.
 그러나 꿈속의 알피어스는 떠나는 대신 풀밭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리고는 공책을 펼치고 책의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무언가를 베껴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케니스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곤 웃음을 터뜨렸다. 알피어스는 여전히 그놈의 단어 찾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바보 같은 알피.’ 케니스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가지 위에 늘어졌다. ‘어차피 공책은 다 불타버릴 것인데.’ 왜냐하면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스프링필드도 결국은 마찬가지의 이야기였다. 불타버렸다. 사랑하는 그곳은 불타고,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은 13년 만에 모여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고 사랑하다가 다시 헤어졌다. 스프링필드가 케니스 리드에게 가르쳐준 것은, 안온한 공간도 결국은 소실된다는 사실이었다. 가정을 잃은 그녀에게 한 번 더 알려주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사람도 영원하지 않고, 사랑도 영원하지 않고, 돈도 영원하지 않다. 하물며 그녀 자신의 젊음도.
 눈물에 나오기엔, 꿈속의 그녀도 결국 어른이다. 그런데도, 왜일까. 이제 와서 겨우 눈물에 대해 생각하고 마는 것은.
 그 때, 알피어스가 고개를 든다. 케니스와 시선이 마주친다. 꿈속의 알피어스는 마치 처음부터 케니스가 그곳에 있던 것을 알고 있던 사람 같다. 어쩌면 무언가를 쭉 기다리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케니.” 알피어스가 그녀를 부른다.
 “알피.” 케니가 대답한다.
 “울고 있군요.” 알피어스가 말한다.
 케니스는 뺨을 더듬어본다. 건조하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다.
 “그렇지 않아.”
 “지루해 보이는 걸요.”
 “지루하다고 울지는 않아.”
 “그렇다면 당신은 괴로운 모양이죠.”
 케니는 대답하지 않는다.
 케니. 알피어스가 그녀를 올려다본다.
 “우리 모임 계속하고 있는 거죠?”
 케니스는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알피어스의 얼굴이 보였다. 알피어스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 케니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니스는 눈을 깜빡여, 정신이 현실로 복귀하기까지 잠시간 기다렸다. 시야가 뚜렷해지고 감각이 맑아지자, 알피어스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피어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케니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슬 가야겠어요.” 케니스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몇 시지?” “새벽이요.” 케니스는 자신의 속눈썹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울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은 없었다.
 그녀는 빌라의 현관 앞까지 알피어스를 배웅했다. 알피어스는 구두를 고쳐 신곤 고개를 들었다. 케니스는 알피어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보았다.
 “고마워.” 케니스가 말했다.
 “그런가요.” 알피어스는 잘 모르겠다는 투였다.
 케니스는 고민했다.
 “이번엔 뭘 줘야하지?”
 알피어스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닫곤 볼멘소리를 했다.
 “필요 없어요.”
 “그러니.”
 케니스가 어린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이 모든 일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알피어스는 케이트가 케니스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지 않고, 바지를 입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쩐지 그녀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프링필드는 불에 탔잖아?
 “단어 찾기 모임 말이야.”
 케니스가 쿡쿡 웃었다.
 “해산이야.”
 “정말….”
 알피어스는 할 말을 찾느라 뜸을 들였다.
 “웃기네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알피어스는 웃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케니스는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너와 작별해도 되겠니.”
 알피어스는 가만히 서있었다. 그래서 케니스는 손을 뻗어, 알피어스의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알피어스 케이건을 알피어스 고든으로 만든 흔적을 만져주었다. 손가락으로 미끄러지듯 더듬어, 마치 “잘했구나, 알피”라고 말하는 것처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케니스의, 어른이 된 케니스의 “타인을 위한 어루만짐”이 가지는 첫 상냥함이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것이었다. 모임이 해산되었으므로 알피어스는 그녀의 그늘로 들어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케니스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던 모임은 그렇게 완전히 사라졌다. 알피어스는 돌아갔고, 케니스는 그녀의 나무에 남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닫혔다.
 며칠 뒤, 케니스는 이사를 했다. 템스 강이 잘 보이는, 그러나 악취가 닿을 만큼 가깝지는 않은 넓은 빌라였다. 그녀는 모델 일을 그만두었다.

 9. 꼭짓점A(Avarice)
 그 뒤에 경찰이 몇 번 오기는 했다. 사망자의 아내였으니까. 그러나 금방 돌아갔다. 알피어스를 만날 수는 없었다. 오지 못 한 게 아니라, 오지 않은 것일 테다.
 케니스는 여러 의미로 런던 바닥에서 유명해졌다. 그녀는 모델로 일할 때보다 사망자의 아내로서 더 빠르고 손쉽게 아름을 날렸다. 유명해지고 싶다면, 여인들이여,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남편을 죽여라! 케니스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거물이 된 셈이다.
 케니스의 새로운 빌라를 설명하고 싶다. 5층짜리 빌라로, 건물 전면에 상아색 발코니가 둥글게 솟아올라 있다. 발코니 손잡이는 화려한 신화 속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발코니는 넓고 기능적이기 때문에 테이블을 놓거나 탁자를 놓아두어도 손색이 없다. 안개가 끼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면 템스 강이 보인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았으므로 거주자들은 그 위로 떠내려가는 쓰레기들을 보지 않고도 강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공업지대와도 동떨어져 있고, 슬럼가도 한 구석에 밀려나 있다. 물론 쥐도 나오지 않는다. 가구들은 모두 안락하며 품위가 있다. 그곳에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어놓지 않으면 어쩐지 허전할 정도다. 모두 아서의 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서의 돈은 전부 케니스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아서의 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케니스의 소유라는 개념만이 세상에 남았다. 케니스는 소굴에서 벗어나 막 깨끗한 장소에 도착했다.
 케니스 리드가 발코니에 서서 런던 시내를 바라본다. 노을이 지기 직전의 도시는 아름답다. 그 속에는 구정물로 구성된 강과 몇 명의 강도와 몇 명의 무뢰배와 또 몇 명의 살인마들, 몇 명의 아름다운 인형들과 몇 명의 고통스러워하는 인형들과 남자를 죽이기 위해 기꺼이 공모해주는 몇 명의 여자들, 그리고 몇 십 명의 강간범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불규칙적으로 흘러 다니고 있다. 케니스는 그것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멀리서 바라본 도시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싼 드레스를 입었고, 배고프지 않을 미래가 준비되어 있으며, 아름답고 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그 모든 것을 잘 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영혼은 삶에게 매혹적이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리더니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연이어 총소리가 들린다. 근처에 강도가 든 모양이었다. 혹은 살인사건이나. 케니스는 난간에 팔을 늘어뜨리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빌라 건너편 골목에서 두 남자가 뛰쳐나오다 말고 멈추어 선다. 그들은 포위된 것이다. 경찰들이 빌라 골목에서 튀어나와 총을 겨눈다. 발코니에 가려져 케니스의 시야 안에는 경찰들의 팔과 그 화기밖엔 보이지가 않는다. 고함소리가 들린다. 경찰 중 한 명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케니스는 머리카락을 넘긴다. 포위된 두 남자가 어쩔 줄 모르다 말고 묵직한 가방을 앞으로 던진다. “Freeze!”라고 누군가 다시 한 번 외친다. 그러나 두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빠져나왔던 골목으로 다시 도망친다. 총성이 울린다. 뒤따라 뛰쳐나가던 남자가 등에 총을 맞고 고꾸라진다. 나머지 한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간다. 경찰들이 흩어진다. 몇 사람은 쓰러진 남자에게, 몇 사람은 나머지 남자를 쫓아 골목으로 뛰어 들어간다.
 총상을 입은 남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맥을 재는 경찰이 있다. 죽은 지 확인하는 것일까? 하지만 총을 쏜 건 본인이 아닌가. 케니스는 곧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찰을 내려다 보다말고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고작 이게 끝?
 그 때, 하늘을 꿰뚫고 굉음이 솟구친다. 쾅, 소리를 내며 온 세상을 흔든다. 총성이 아니다. 총성은 이렇게 크지 않다. 깜짝 놀란 케니스가 템스 강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시 한 번 굉음이 솟구친다. 곧이어 세상이 불꽃으로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템스 강에서 한 번 더 펑 소리가 난다. 불꽃들이 불규칙적으로 터지며 런던 상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황금색, 붉은색, 파란색, 자주색, 주황색… 응집된 중심부를 따라 꽃잎처럼 차례로 퍼져나가는 불꽃, 용처럼 길게 이어지며 솟아오르는 불꽃, 마차처럼 흔들리며 나아가는 로켓 불꽃…… 오, 그 불꽃들! 빛 속에 감싸인 채, 케니스는 놀랍지도 않은 사실을 하나 알아차린다. 오늘은 자신의 결혼식 날이었다. “캄벨!” 케니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 씨씨!” 노을이 저물어 가는 하늘 위로 거대한 불꽃들이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데리고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런던 시내 곳곳을 밝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낱낱이 비추었다. 강간범들이 달아나고, 인형들이 뛰쳐나오고, 무뢰배들이 욕지거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런던이 일순 파라다이스가 된 것처럼. 그곳이 지상낙원인 것처럼. 어둠은 티끌만큼도 없고, 지루한 인간들이 모조리 죽어버린 누군가의 천국처럼. 런던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곳을 바라보며, 케니스는 생각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처음으로 욕망했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진정으로 바랐다.
 그래서 케니스는 허공으로 양손을 뻗어, 검지와 엄지를 맞대고 정삼각형을 만들어 보았다. 무지를 가장하여 죄를 저지르고, 방조를 요구하여 죄를 덮어놓고, 욕망하여 그 모든 일을 저질렀으니 완벽해진 그녀의 인생을. 그러자 텅 빈 손가락의 삼각형 프레임 한가운데로, 클락 캄벨이 쏘아올린 불꽃이 담긴다. 아름다운 런던이 담긴다. 케니스의 삼각형이 완성된다. 멋지다. 이제 이것으로 그녀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에필로그
 알피어스 고든은 종소리를 듣고 런던 12번가의 골목으로 뛰쳐나왔다. 벌써부터 날이 저물고 있어 주변은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그는 근처에서 동료들과 합류해 골목을 따라 이동했고, 14번가에서 용의자 2명과 맞닥뜨렸다. 그들은 절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거운 짐 가방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알피어스를 포함한 경찰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며 거리를 좁혔다. 용의자를 빙 둘러싼 경찰 무리가 느린 보폭으로 두 남자를 조여들었다. “Freeze!”라고 알피어스의 곁에 서있던 경찰 하나가 외쳤다. 그러나 용의자들은 곧장 뒤돌아 그들이 빠져나왔던 골목으로 재빨리 몸을 틀었다. 알피어스가 얼결에 발포했다. 총은 빗나갔다. 그러나 누군가 연이어 발포했다. 남자 하나가 쓰러지고, 나머지 한 명은 어두운 골목을 따라 쏜살같이 달아났다. 알피어스는 총을 내려놓았다. 경찰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지시를 내리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알피어스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용의자는 죽어있었다. 그러나 알피어스가 죽인 것은 아니었다. 알피어스는 무릎을 접고 앉아 그의 목덜미의 맥을 짚어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울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괴롭지도 않았다. 착잡함은 있었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그가 발포한 총에 죽은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알피어스 역시 그에게 총을 겨눴다. 그가 무슨 죄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종소리가 울렸고 그들은 달아나고 있었기에.
 선과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 때, 알피어스의 시선 안으로, 그러니까 정면이 아닌 옆 시야로 흐릿한 인영이 들어왔다. 여인이었다. 위쪽에 있었다. 발코니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피어스는 고개를 돌리려 했는데, 연이어 터진 거대한 굉음 소리에 깜짝 놀라 반사적인 몸짓으로 템스 강 쪽을 바라보았다. 불꽃이었다. 불꽃이 마구 쏘아 올려져, 상공을 밝히고 있었다. 알피어스는 대체 왜 이 시간에 불꽃놀이를 저 구정물 앞에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아름다웠으므로 그 자리에 서서 불꽃을 감상했다. 그 영문 모를 불꽃놀이는 10분가량 계속되었다. 황금색, 붉은색, 파란색, 자주색, 주황색… 응집된 중심부를 따라 꽃잎처럼 차례로 퍼져나가는 불꽃, 용처럼 길게 이어지며 솟아오르는 불꽃, 마차처럼 흔들리며 나아가는 로켓 불꽃…… 오, 그 불꽃들! 빛 속에 감싸인 채, 알피어스는 어떤 예감을 받는다. 방금 자신을 내려다 본 여인이 그가 아는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발코니는 텅 비어있었다. 상아색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난간 너머에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알피어스는 커튼을 치는 새하얀 손을 보았으나 그녀의 얼굴을 보지는 못 했다. 발코니엔 아무도 없었고, 주변은 금세 어두워졌다. 불꽃놀이가 끝난 것이다. 빛이 사라진 런던 도시는 일전보다 더 어두컴컴해진 것 같았다. 
 알피어스는 모자를 고쳐 쓰곤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총을 집어넣었다.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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