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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그랬지만 변재구는 참 열심히 하는 교사인 듯싶었다.

 힘썬은 투박한 선과 최선을 다해 쓴 흔적이 남아있는 글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리스트의 내용을 읽었다. 이름하야 ‘친해지길 바라! 리스트!’…. 느낌표는 강조하고자 하는 대상 뒤에 놓이는 문장부호인데, 그것을 두 개나 찍었으니 변재구는 분명 강조하고 싶은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힘썬은 외교반의 첫 시작을 위해 화합을 도모하는 변재구 선생님의 태도가 무척이나 훌륭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리스트를 수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아이패드가 뭐였더라?)

 가장 무서워 보이는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서는 교실 한 바퀴를 돌아야했다. 힘썬은 왁자한 교실에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큰 다리로 주변을 활보하기 시작했는데, 바닥 대신 얼굴들을 보느라 하마터면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고개를 번쩍 든 후에야 힘썬은 그것이 누군가의 긴 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힘썬은 시선으로 다리의 길이를 어림잡은 후 머릿속으로 신장을 계산해보았고, 고개를 완전히 들어 다리의 주인과 마주했을 때는 그의 대략적인 기장을 모조리 파악한 상태가 되었다. 힘썬은 머릿속으로 <4. 나보다 키 큰 사람>을 하나 지웠다.

 힘썬이 남자 아이에게 말했다.

 “안녕?”

 그 애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듣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무언가를 듣고 있었더라면 힘썬은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반드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그 애가 대답했다.

 “안녕.”

 힘썬은 그 애의 목소리가 가지는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펼쳐 그 애의 눈앞에 가져다댔다.

 “너는 키가 183cm정도 될 거야, 그렇지?”

 그 애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뒤에 그 애가 말했다.

 “맞아. 정확해.”

 (아주 정확히 맞췄다! 힘썬은 이로써 그 애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썬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조금 뒤늦게 통성명을 시도했지만 그 애는 조곤조곤 대답해주었다.

 “이동아.”

 “동아야, 나는 키가 175cm야!”

 이번에 동아는 대답하지 않고 힘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썬은 동아가 대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잠시 후 동아가 여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판에 사인을 해달라는 거지?”

 힘썬은 너무 성급하게 사인 판을 내밀어서 대답을 한 박자 느리게 하고 말았다.

 “오, 맞아. 너 정말 눈치가 빠르구나?”

 동아는 이번에도 어떤 긍정이나 부정을 하지 않았다. 힘썬은 그 애가 꼭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고, 혹은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꼭 닮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힘썬은 자신의 빛과 온도, 행동거지와 목소리를 꼼꼼히 떠올려보았고, 그것이 동아처럼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있는지 고민해보았다. 그러자 동아가 그러하듯, 자신을 이루는 개성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아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동아가 펜을 꺼내자 힘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판 네 번째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그런 후 덧붙였다.

 “너는 친절하구나. 그리고 조용한 편이고. 너를 이루는 모든 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싶어. 지금 말해버렸구나! 원한다면 우리 사인을 교환하자. 왜냐하면 나는 너보다 키가 작으니까 다섯 번째 동그라미에 사인을 할 수 있어.”

 힘썬은 동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동아의 펜부터 들었다. 벌써부터 사인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곧 힘썬은 어떤 행위를 할 때 대체로 허락받아야만 하는 교실의 특성을 뒤늦게 떠올렸고, 그래서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동아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네게 돌려줄 항목이 있다는 게 기뻐.”

 힘썬이 말했다.

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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