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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는 2층 다세대 주택으로 꾸며져 있었다. 1층은 세 개의 방으로, 2층은 옥상으로 사용되었다. 1층과 무대바닥 사이에는 반 지하로 보이는 좁은 틈이 존재했다. 그곳에 무수한 빈 의자가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의자들은 옥상에도 있었다. <옥상밭 고추는 왜>의 무대에는 널브러진 의자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 극의 메인플롯은 304호의 광자 아줌마가 가꾸던 옥상 밭의 고추를, 201호의 현지 아줌마가 무차별적으로 수확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지 아줌마의 땅을 빌려 농사한 고추였으므로 광자 아줌마는 현지 아줌마는 물론이고 주택 이웃들에게도 이 고추를 나누어주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현지 아줌마가 한 마디의 양해도 없이 이 고추들을 한 바구니 가득 따기 시작하면서부터 고추는 이웃 간의 정과 호의가 아닌, “나의 것을 빌려 만든 것이므로 언제든 내가 탈환할 수 있는 것”, 요컨대 오로지 소유자가 소유권을 행사하는데 쓰는 소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전략하고 만다. 광자 아줌마의 삶의 행복이 되어주었던 옥상 밭의 고추들은 그렇게 그녀가 하루하루 구축한 의미망을 상실한 채 세속화된다. 극의 주제는 이때부터 명확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그러나 <옥상밭 고추는 왜>의 주제는 한 가지로 정의될 수가 없다. 각종 사회문제와 현 우리 세태, 하루하루 급변하는 시대의 모습들은 다세대 주택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광자 아주머니가 돌보던 “옥상밭의 고추들”로 축소되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관객들은 청년과 기성세대 간의 갈등, 빌라촌의 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 좌우파의 정치적 모순, 사이버 신상 털이와 주택 간의 소음공해, 주차 공간 부족으로 인한 이웃 간 갈등과 같은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들과 마주할 수 있다.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옥상밭 고추는 왜>가 이 모든 문제 상황을 제시할 뿐 그 어떤 정답과 문제해결의 실마리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중 현태와 현지 아줌마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에겐 각자의 욕망과 현재 그들을 만든 개인적인 사정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 누구도 절대적인 악인이나 선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혈압으로 쓰러진 광자 아줌마를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현태는 평소 현지 아줌마와 소소한 갈등을 빚었던 인물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변변한 직업이 없어 촬영장을 비정기적으로 드나들어야만 하는 개인적 고난이 존재한다. 그는 광자 아줌마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겠다며 정의를 외치지만 그것이 정말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현지 아줌마에 대한 복수심과 자신이 처한 지리멸렬한 상황으로부터 기인한 자기혐오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관객들은 알 도리가 없다. 현지 아줌마 역시 절대적 악인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야간 학교를 나온 여성 노동자로 대한민국의 IMF 극복에 자신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밥벌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현재 부동산 투기와 중계로 돈을 벌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전부 자신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관객들은 그녀의 삶이 필연적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될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급박한 경제상황이 배출한, 우리 주변의 “누군가들”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현지 아줌마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필연적 무지와 생존의 태도로부터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절대적 악을 지닌 자가 아니며, 사회가 낳은 무수한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작중 현지 아줌마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현태의 싸움은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광자 아줌마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인물 간의 새로운 갈등구조 속에서 잊혀 진다. 마침내 광자 아줌마는 별세하고, 상황은 엉거주춤 버려진 채 일부만 수습될 뿐이다. 현태는 현지 아줌마가 아끼는 반려견 하니를 도둑질하여 현지 아줌마를 광자 아줌마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과를 받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현지 아줌마는 자신이 광자 아줌마의 고추가 가지는 의미망을 어떻게 탈환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다. 현태는 결국 그녀로부터 하니를 탈환함으로써 사과를 받는데 성공하지만, 그도 물론이고 관객들 역시 씁쓸함에서 벗어나지는 못 한다. 현태는 광자 아줌마의 가족이었던 개를 “강요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략시켰던 것이다. 현태는 광자 아줌마가 가진 의미망을 파괴시킨 현지 아줌마의 반성을 위해 현지 아줌마의 의미망을 파괴했다. 결국 그 의미망을 잃은 하니는 풀밭에 놓여 자유의 몸이 되고, 옥상 밭의 고추들은 현지 아줌마의 엉성한 사과로 인하여 그 무엇의 의미도 가지지 못 하고 진딧물로 인해 죽게 된다.

 이렇게 보면, 무대 곳곳에 널려있던 의자들은 최초의 의미망을 잃고 세상 속에서 죽거나 버려지거나 잊혀진 것들을 대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문제는 이렇듯 개개인의 상황과 사연 속에서, 그들이 가진 애정의 의미망들을 파괴하거나 탈환한다. 우리의 주변이 삭막해지는 건 바로 이 의미망을 상실한 자들의 빈자리가 늘어나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것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작중 현태가 울분을 토하며 내뱉은 대사, “엄마, 진짜 모르겠어? 세상이 왜 망가지는지. 그런 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세상이 점점 더 이렇게 되는 거야.”에 주목하게 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현태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전달된다. 사소하고 작은 이유는 사실 우리 주변을 파괴하는 어떤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별반 다를 게 없으며, 개인의 존재(의미)는 이 두 가지 상황 전부에 의해 말살당할 수 있다는 것. 무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관객들이 찝찝하고 갑갑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이 극이 “그 잃어버린 존재들을 상기시킬 뿐 수복할 기회는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단지 주인 없이 넘어진 무수한 의자들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이 살면서 지나쳐오거나 혹은 스스로 압사시킨 누군가들의 의미망을 곱씹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하지만, 이 극이 마땅한 문제해결 방법을 내놓지 않은 것은, 이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던 작가적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해결되었을 때 잊혀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실된 의미망들을, 잊혀진 개개인의 존재를 거듭하여 보여주기 위하여 이 모든 문제를 그저 문제의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무대 곳곳에 버려진 의자들은 그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 의자들이, 마땅한 용도가 없어 의미 없이 무대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 그 자체 역시 상징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옥상밭 고추는 왜>가 가지는 불편함이 곧 극이 아닌 우리의 세계에 내제된 문제로부터 기인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한 번 씩은 반드시 곱씹어봐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언젠가 지나치거나 삭제했던 누군가의 빈 의자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의자일지도 모를 그 의자들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언젠가 잊어버릴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 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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