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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1-4»
1차/old 2019. 10. 30. 01:19

1.

기억하기로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날씨가 좋았을 것이다. 찬락은 창가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점심시간엔 아무래도 그 자리가 제일 볕이 잘 드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잘 불고 커튼이 들썩여서 찬락의 몸은 성공적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던 건 그 탓인지도 모른다. 축구에도 불려가지 않았고 식후땡 모임에도 소환되지 않았다. 완전 혼자였다.

햇빛이 기울어질 무렵에 누군가 공을 던지기 시작했고 소리가 계속됐다. 찬락은 뒤척였다. 들썩이다가 한 번 움찔거렸다. 그러다 깼다. 고개를 돌리니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누군가 개나리를 잘라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나리는 아무데서나 심어도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찬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테니스부가 줄지어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체육복을 갖춰 입고 테니스 체를 흔들면서 일렬로 선 무리를 보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키 큰 애, 마른 애, 작고 통통한 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애, 체육복이 큰 애…… 눈으로 훑다가 아는 얼굴을 보았다. 같은 반 애였다. 반장? 부반장? 아니다, 서기? 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애였을 지도. 어쨌든 예뻤다. 그래서 계속 봤다.

찬락 안의 테니스는 펄쩍 뛰어오른 후 공을 내려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김찬락은 서브밖에 모르는 애송이였던 셈이다. 여자애는 뛰어 올랐고, 한순간 머물렀고, 내리쳤다. 하지만 찬락이 상상 속에서 기대한 파워의 서브는 아니었다. 공은 벤치를 맞고 부원들의 발치로 굴러왔다. 여자애가 공쪽으로 허리를 굽혔을 때, 찬락은 개나리를 쥐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개나리를 마구 흔들었다. 꽃잎이 우수수 3층 높이에서 추락하고 있었고 그것은 찬락의 상상 속에서 제법 드라마틱하고 멋진 이미지로 치환됐다. 여자애는 반응이 없었다. 조금 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자리로 돌아갔다. 싱거운 엔딩이었다.

“차였네.”

대수롭지 않은 실패였으므로 찬락 역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책상으로 돌아와 엎드렸다. 눈을 감았다. 공이 튀겨 솟구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손쉽게 잠이 몰려왔다. 개나리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딱 점심시간까지만 살아있었다. 꽃은 자는 동안 죽었다.

 

2.

김찬락의 집은 매 달 집안모임이 있다. 장소로는 주로 레스토랑이나 호텔을 잡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강제적으로 참석해 집안어른들의 덕담을 듣는다. 이야기는 뻔했다.

“성적 좀 신경 써라.”

“쟤 요즘 공부 안 해.”

“네 사촌 좀 본받아.”

“한심하게 살지 마라.”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해 쌓아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은 아직 고리타분해서 고학력과 스펙, 영어 점수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어르신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그랬다. 실제로 그렇게 자라온 어른들이 레스토랑과 호텔에 거리낌 없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카드를 긁고 있으니 그 말은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부모들은 말했다. 비싼 곳에서 질 좋은 음식에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행복이야. 그런 것 같아요. 부드러운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엔 찬락 역시 순순히 납득했다. 자본, 을 발음하는 일은 달콤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느낌을 줬다. 언젠가는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찬락은 생각했다. 자유? 오토바이? 무엇이 됐든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좀 더 놀아도 괜찮았다.

 

3.

64가 등 뒤에 매달려 있다. 김찬락은 오토바이를 몰고 쏜살같이 내달린다. 더 빨리 가야해, 더 빨리, 아니야, 그만해 나 무서워. 뒷자리에 앉힌 64가 중얼거릴 때까지 풍경은 자꾸만 뭉개지고 있었다. 찬락은 오토바이를 멈추고 길가에 세웠다.

“야, 미쳤어! 나 죽는 줄 알았어.”

64는 오토바이에서 내리자마자 찬락의 등을 마구 쳤다. 가까이 다가온 64에게선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어디 꺼야?”

찬락이 64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고 인중까지 들어올렸다. 64는 몸을 움츠렸다.

“걍 로드샵에서 샀는데.”

“얼만데?”

“왜, 사주게?”

“미쳤냐, 내가 왜?”

찬락이 낄낄거렸다.

“걍 물어본 거야.”

“난 또 사주려는 줄 알았지.”

64는 입을 삐죽였다.

“너 완전 돈 많아 보여.”

“왜?”

“오토바이 가지고 있잖아.”

“내 거 아니고 빌린 거야.”

“그렇구나.”

“그렇지.”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둘은 오토바이에 오르기 전 소주 한 병을 반씩 나눠 마셨다. 새벽 두 시엔 도로가 비어서 아무렇게나 달려도 괜찮았다. 찬락은 눈을 깜빡였다. 가드레일 너머로 줄지어 선 가로등이 겹쳐졌다가 흐릿해지며 마구 뭉개졌다. 주황빛들은 모든 감각이 마구 뒤섞이고 있다는 경고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찬락은 향수냄새 속에서 64의 얼굴을 찾아냈다. 찾아내서, 붙잡았다. 끌어당겨서 입을 맞췄다. 64가 웃으며 더듬더듬 찬락의 팔 안쪽을 뒤졌다. 줄기가 똑, 하고 꺾였다. 향수 때문에 베고니아에서 아무 냄새도 맡지 못 했다.

“집까지 데려다 줘.”

“그럼 다시 타.”

둘은 동네를 빙 둘러 아파트 단지 사거리까지 오토바이를 몰았다. 64가 찬락 등을 자꾸 밀었다. 찬락아, 아무도 태우면 안 돼. 왜? 이제부터 여기 내 자리야, 알겠지? 찬락은 대답을 내뱉는 대신 삼켰다. 그게 될까? 얼마 후 64는 57로 바뀌었다. 헤어질 때 64는 베고니아를 도로에 버렸다.

 

4.

최유현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유현은 잠깐 표정을 굳히고 있었는데, 곧 이어 반달처럼 눈을 접었다.

“또 같은 반이라니 신기하고 질린다.”

“농담인 거 알지?”

찬락은 최유현의 표정이 상냥함으로 빽빽해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질릴 리가 있냐. 잘생긴 나한테.”

그렇게 대꾸한 후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앞에는 훈화가 붙어 있었다. 어디가 끝일까, 너희들의 잠재력. 제법 비장한 감탄사였다. 하지만 잠재력에도 끝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력이 아니지 않은가.

“방학엔 뭐했어?”

“나야 뭐 똑같지. 술 까고 학원 재끼고.”

“김찬락 그러다 진짜 훅 간다.”

“야, 설마 죽기야 하겠어.”

둘은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에 대해서다.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 찬락은 오토바이를 몰았고 유현은 선행학습을 했다. 그것을 찬락은 능청스럽게, 유현은 사무적으로 늘어놓았다. 매번 똑같았다. 김찬락은 놀고, 최유현은 공부한다. 김찬락은 튀기 위해 노력하고 최유현은 돋보인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다.

“너 어제 또 오토바이 탔지?”

“어떻게 알았냐.”

“어제 봤어.”

“하긴 내가 좀 까리하게 동네를 쏘다니긴 했어, 그렇지?”

“착각도 병이래, 찬락아.”

유현은 조금 웃었다. 백만불짜리 미소고 빽빽하게 상냥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누구나 상냥한 것을 좋아한다. 지난 몇 년간 찬락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남자애들이 종종 최유현에게 고백하거나 치근덕대는 걸 보았다. 한 때는 찬락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고 아마 수요일이었고 날씨가 좋았을 즈음의 일이다. 테니스를 치던 최유현은 예뻤다. 정말로, 예뻤다.

“너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는 거냐.”

“응, 그렇겠지…….”

“진짜 내 주변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애 최유현 밖에 없다.”

“나도 내 주변에서 막 나가는 애 너밖에 없어.”

“그래?”

이번엔 찬락이 웃었다.

“그거 존나 까리하네.”

언젠가 찬락은 도로를 달리다 말고 신호 앞에서 유현과 마주친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뜬 유현을 보고 뒷자리에 앉은 70이 물었다. 누구야? 찬락은 시동을 걸었다. 부러 크게 오토바이의 배기음 소리를 높이자 김찬락은 도로에서 제일 시끄러운 존재가 됐다. 내 친구야. 찬락은 소리를 질렀다. 야, 쟤 완전 모범생이야. 존나 까리하지? 내 친구다! 그 날은 아주 빠르게 너무 많이 달렸고 집에 돌아와 볼기짝을 얻어맞았다. 네 친구 좀 닮아라! 험상궂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김찬락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유현하고 저는 진짜 완전 종족부터가 다르다니까요. 걘 진짜 모범생의 표본이고요, 저는

그러니까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뒷좌석에 앉힐 여자애는 매번 바뀌었다. 67일 때도 있고 71일 때도 있고 혹은 65거나 64거나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마다 여자애가 허리를 감아주는 게 좋았다. 술을 마시고 된소리 심한 욕을 내뱉으며 폼을 잡으면 베고니아가 피었다.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애들은 그런 것들 앞에서 꽃을 피워줬다. 많은 꽃을 꺾어보고 피워보고 버려보았다. 종종 김찬락의 꽃도 피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꺾거나 피우거나 버리거나 했을 것이며 64가 버린 베고니아는 도로에 짓눌려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김찬락은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베고니아인지. 여자애들 이름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사랑은 왜 그딴 줄기식물처럼 탄생하고 죽어버리는지. 최유현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무렵 테니스를 그만뒀다. 그리곤 다시는 서브를 치지 않았다. 부상 때문이라고 하며 유현은 준비된 웃음을 지었다. 비가 오면 아직도 거기가 막 쑤신다니까. 유현의 미소는 각오한 사람의 결과물처럼 보였고 상냥함으로 빽빽해 파고들 기미가 없었다. 찬락은 그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내 뒷자리에 태워줄게.”

최유현은 눈가를 찡그렸다.

“거긴 네 여친들만 태우는 걸로 해.”

하지만 최유현이 정말 김찬락의 뒷자리에 탄다한들 그 애가 68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유현은 최유현으로 남는다. 비가 올 때마다 쑤신다는 유현의 왼팔로는 찬락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을 수 없다. 그러니까 찬락은 유현을 태운다한들 최고 속력으로 세상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찬락은 한 번 차였다. 한 번? 두 번? 셀 수 없다. 꽃은 시들었다. 딱 점심시간까지만 살아있었다. 꽃봉오리들은 자는 동안 죽었다. 베고니아도 아니었다.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는데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었는데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자신이 있었는데도.

“김찬락, 일어나. 수업 시작한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마.”

“수업 좀 듣지.”

“시끄러워.”

최유현, 이라고 발음하는 건 자본, 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에 소속된 존재들은 다 그런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최유현은 그 세계로 완전하게 떠날 것이고 김찬락은 몇 가지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자유. 이를테면 오토바이. 이를테면 무수한 64들과 71들과…… 그것이 아쉽다면 좋을 텐데. 아쉽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수업종이 친다. 김찬락은 눈을 감는다. 잠에 빠진다. 좀 더 막 살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 좀 더 이렇게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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