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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흔들리고 진동이 점차 구멍에서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매캐하고 텁텁한 연기가 바닥에 내려앉고, 진동이 서서히 멎을 무렵, 'D역'은 눈을 감았다. 몸을 밟고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 무쇠로 된 뱀의 열차와 곳곳에 깔린 노란 안전 보도블럭. 이곳은 역이다. 하루 수십 명이 지나는 이곳은 작은 세상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진풍경이었으리라. 개미처럼 제 위를 걷는 사람들의 파도를 'D'역은 언제나 관조하고 있었다. 실로 흥미로운 관찰이 아닐 수 없었다. 제 안에는 바닥을 보고 걷는 사람이 있고, 바쁘게 뛰는 사람이 있고, 길을 잃은 미아가 있고,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소매치기와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들이 있었다. 걸인이 있고, 흥에 취해 기타를 퉁기는 거리의 연주가들이 있고, 잡상인이 열차 곳곳을 돌아다니며 목청을 높였다. 제 위를 흐르는 열차들은 대게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말을 걸 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사람들을 싣고 빠르게 그를 스쳐가곤 했다. 'D역' 은 제 안을 흐르는 모든 소음을 작은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작은 세상이었기 때문에 'D역‘ 은 그리움과 쓸쓸함을 알지 못했다.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에 알맞게 알림을 울리거나, 승객의 돈을 냉큼 삼켜버린 심술궂은 자판기를 달래주거나, 잔뜩 골이 난 채 터널을 달리는 지하철들에게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것을 빼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D역‘ 은 이내 많은 부분을 그저 버려두는 것이 습관이 된다. 그것마저 성에 차지 않았을 때, ’D역‘ 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부터 쏟아져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전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구나, 라던가, 혹은, 저 조그만 사람들은 얼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양복을 입고 하이힐을 신는 어른이 되는 걸까? 라던가, 그런 질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저 피곤한 표정을 달고 그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버리는 것일까. 생각이 자랄수록 배수관의 쥐들은 늘어나고 조금씩 커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표정을 뒤집어쓰고 열차에 올라 사라졌다가 돌아왔다가 쏟아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D역’ 은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사람들의 세계에 녹아들었다. 언어를 터득하고 짐작했다. 저것은 저것이고, 이것은 이것이고, 그래, 오늘도 당신들은 출근을 하는구나. 피곤함을 달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으레 선심을 쓰며 온몸을 판판하게 펼치곤 했지만, 사람들이란 둔하기 짝이 없어서 ‘D역’의 말과 행동을 알아듣지 못했고, 대게는 그 위를 구둣발로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위안이었다. 그래도 ‘D역’ 은 정해진 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그 피곤한 얼굴들을 좋아했다. 재미있던 것은 요일마다 달라지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D역’ 은 목요일의 그들을 안쓰러워했다. 부쩍 지쳐 보이는 사람들은, 그러나 내일은 주말을 앞둔 평일의 마지막 요일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이 반짝이는 눈으로 열차에 올랐다. 동시에 수요일을 거쳐 피로에 찌든 몸뚱이가 옮기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제 위로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D역’ 은 일주일을 셌다. 가장 무거우면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D역’ 의 머리 위로 무게가 꾹 꾹 짓누르면, 아, 목요일이구나, 했다.

‘D역’ 이 유심히 살피던 청년이 있었다. 잔뜩 움츠리고 긴장한 표정의 그는, 그러나 어딘지 희망차보였고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둥그스름한 안경 아래로 반짝이는 눈이 있었다. 단정히 손질한 머리에 어정쩡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청년은 초조한 듯 시계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그 익어가는 청춘의 냄새를 ‘D역’ 은 맡을 수 있었다. 첫 출근이구나! 행운을 빌어, 라고. 제 위를 밟고 안전선을 겅중겅중 뛰어 열차에 오르는 청년의 아래에서 그는 힘껏 몸을 펼쳐 배웅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그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궁금해서 기다렸고,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어서 자꾸만 기다려야 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지하철이 수상한 냄새를 달고 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네게서 피 냄새가 나.”

‘D역’ 은 불쾌한 듯이 움츠렸다.

“내가 사람을 먹었거든.”

지하철이 킬킬거렸다.

“한 남자가 내 발 밑에 떨어진 애를 구하고 깔려죽었어. 그래서 내가 그를 먹어버렸지.”

지하철의 발밑에서는 채 다 익지 못하고 터져 죽은 청춘의 냄새가 났다. ‘D역’ 은 그 냄새의 주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분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를 미워할 거야."

나는 진작부터 너를 미워하고 있었어. 그 말을 끝으로 지하철은 입을 다물고 만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지하철은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내달렸다. 피 냄새가 흐릿해지고 진동이 다시 멀고 먼 어둠 속으로 사라질 무렵, 분노한 역은 더 이상 알림을 울리지 않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의 목소리를 삼킨 지하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미움을 배운 ‘D역’ 은 끝이 없는 꿈을 꾸었다. 지하철이 하염없이 그의 안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여전히 쏟아져 내렸지만, 'D역‘ 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안에는 매일 밤 운행이 중지된 제 안의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청년이 있었다. 너는 죽어버린 거니? 지하철 역 ’D‘ 는 되물었지만 그것은 또한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매일 꿈을 꾸고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D역’ 이 폐쇄된 것은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판기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 역을 만들었다더군. 새로운 ‘D역’ 으로 사람들이 쏟아질 거야.

그럼 나는 버려진 건가. ‘D역’ 이었던 그는 대답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지. 나는 아주 오래된 역이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까.”

조금 서글펐다. 다시는 제 위를 지나는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고, 사람들의 거무죽죽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 많던 하이힐과, 운동화와, 음악소리와 자판 소리가 들리지 않을 작은 세계의 종말을 ‘D역’ 이었던 무언가는 슬픔으로 천천히 받아들인다. 자판기는 희극적으로 키득거렸다. 그거 참 서글픈 일이군.

“앞으로 무엇을 할 거지?”

'D역‘ 이었던 그는 생각한다. 눈을 감자 제 안으로 떨어지는 죽은 청년이 있었다. 둥그스름한 뿔테 안경, 어쩐지 움츠린 어깨와 초조한 낯빛, 그럼에도 희망이 있던 눈과 두툼한 서류철. 익어가는 청춘의 냄새를 품고 돌아오던 지하철. ’D역‘ 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을 꿀테지.”

‘D역’ 은 피곤한 목소리였다.

“내내 꿈을 꿀거야.”

그 날은 목요일이었다.

 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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