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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시미어 코트를 샀다.

 값이 꽤 있었고, 유진의 돈으로 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유진이 못 살 만큼 비싸지도 않았다. 유진은 이제 돈이 많다.

 그러나 유진이라면 처음부터 비싼 코트를 살 생각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규혁과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음악이 떠오른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의 사운드트렉을, 귀에 익어서 기억하고 있다. 유진은 규혁의 빈 오피스텔에서 종종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곤 했다. 주말의 어느 날에는 규혁이 오피스텔을 지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규혁은 유진의 곁에 앉았고, 둘은 서로의 비스듬한 무게와 온도를 느끼며 가상의 연애를 관조했다. 규혁이 유진의 손을 만지작거릴 때가 있었는데, 그건 그가 드라마에 집중하거나 공감하지 못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유진은 손가락 끝으로 그를 건드렸다. 때때로 TV속의 연애는 그들의 연애보다 훨씬 연애같이 보였다. 그럼 유진은 그게 조금 웃겼고, 아이러니하기도 했고, 그래도 정말 연애를 하는 것은 우리다. 라고 생각했다. 주말마다 그들은 아주 오래도록 섹스했다. 사실 주말이 아니어도 종종 그렇게 했었다. TV꺼놓는 걸 잊어서 이따금 거실에서 음악소리가 났다. 그들은 침대 위를 뒹굴면서 등장인물이 울거나 매달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규혁과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그 생각을 했다. 오늘은 오피스텔 대신 백화점에 있는데, 이 매장 역시 어떤 은밀한 유희가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 그런 사고에 도달하자 어쩔 수 없이 규혁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규혁은 지난가을보다 머리가 길어서 앞머리가 눈썹을 반쯤 덮고 있었다. 차분하게 쳐진 눈꼬리 안으로 눈동자가 반들거리다가, 옆으로 이동했다. 유진은 시선이 부딪혔지만 피하지 않았고, 규혁 역시 그렇게 있었다. 잠시 후 규혁이 손을 뻗어 유진의 손끝을 부드럽게 쥐었다 놓았다. 뒤에 사람이 없어서 그 장면은 은밀한 드라마가 되었다. 둘은 4층에서 내렸다.

 어울리네요, 라고 규혁이 말했다. 처음 유진이 코트를 입고 뒤를 돌았을 때다. 유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내리꽂는 규혁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점원을 흘끔거렸다. 점원은 둘의 드라마가 로맨스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 규혁이 결제를 할 때 “동생분이신가 봐요.”라고 웃었다. 아무리 애써도 둘은 형제는커녕 먼 친척으로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정말 바보 같은 말이었다. 유진과 규혁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고, 규혁이 부드럽게 입 꼬리를 올리며 “아는 후배에요.”라고 대답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매장을 나오면서 유진은 코트 포장지를 뜯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깨에 옷을 걸치고 팔을 조금 벌린 후에 규혁 앞으로 몸을 돌렸다. 아주 소극적인 짠. 이었지만 규혁은 유진이 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고, 눈썹을 작게 씰룩거렸다. 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작게 웃었고, 규혁은 웃지 않았지만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게 좋았다.

 야외주차장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추웠고 일교차가 심해졌으며 가을이 갑자기 사라지고 입김이 터져 나왔다. 유진의 코트는 조금 품이 남았는데도 가벼웠고 부드러웠다. 사람들이 백화점 정문을 끊임없이 드나들면서 둘을 스쳐지나갔다. 유진은 코트 깃을 손가락으로 비벼보았다. “마음에 들어요?”하고 규혁이 물었다. “마음에 안 들면 안 입었어요.” 유진이 대답했고, 농담이었다. 유진은 규혁이 돌핀팬츠를 사줬어도 기껍게 입었을 것이다. 물론 반나절만. (유진도 체면이 있다)

 규혁이 앞좌석 문을 열었다. 유진은 차에 타면서 어떤 것, 요컨대 아까의 음악소리를 떠올렸고, 그 음악소리가 예고한 어떤 은밀한 유희를 떠올렸고, 그 유희가 진행될 수 없던 세계를 곱씹었다. “동생분이신가 봐요”가 방영시키지 않은 누군가의 드라마가 있었다.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라고 유진이 생각했다. 규혁이 차에 타면서 시트가 무게를 따라 왼쪽으로 기울어졌고, 유진은 그 무게가 보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유진은 그를 붙잡아 입을 맞췄다. 바라던 바, 곧 차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규혁의 엄지가 유진의 턱을 익숙하게 쓸어내렸다. 둘은 오래 키스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전희를 나눴고, 유진은 비로소 캐시미어의 진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몸이 몹시 뜨끈뜨끈해졌는데 온도가 빠져나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볼에 슬쩍 열이 오를 정도였다.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져나갔을 때, 유진은 규혁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붙이며 “더워요.”라고 중얼거렸고, 규혁은 운전대를 잡았다. “그래요, 이제 갈까요?” 유진의 연인은 알아들었다.

 주말이었고 드라마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들은 그래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멈추지 않았고, 이번에는 음악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게 좋았다. 유진은 규혁과 계속되는 게 정말 좋았다. 계속 되기를 바랐고, 그럴 테였다. 드라마는 종영을 앞두고 있으나 둘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은 정말 드라마가 될 수는 없었고, 그러니까 그들은 TV를 꺼놓고도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규혁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러니까 정말 연애를 하는 것은 우리다. 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우리를, 아주 오래 생각했다.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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