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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면의 밤과 맞서 싸웠다네>

 

1.

철마가 달린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강에서 땅으로. 2호선은 언제나 붐볐다. 원한다면 언제든 떠밀리거나 섞여들 수 있었다. 신촌 로터리를 지나 대학가를 몇 정거장 더 지나치면 열차는 충정로에 유진을 내려주었다. 역으로 사람들이 쏟아질 때면 그의 정수리는 성공적으로 평범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규혁의 오피스텔을 위해서는 좀 더 걸어야 했다. 번화가 근처에 올린 높은 건물. 유진은 한 번도 그것을 올려다 본 적이 없었다.

규혁은 대체로 그곳에 있었고 언젠가부터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유진에게 자신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유진은 항상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한참 그 앞에 서서 문을 쏘아본 적도 있다. 하지만 종국엔 문을 두들겨 규혁을 자신의 앞으로 데리고 왔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얼굴은 항상 담담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을 맞출 땐 그가 억누르고 있는 일종의 소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걸지도 몰랐다. 당신은 날 몰라요. 그래요, 난 청저에 대해 잘 몰라요. 그래서 죽고 싶은 거예요, 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거기에 대답해야 해요? 유진은 종종 그의 입술을 물었다. 규혁이 뭔가 말해주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시비를 걸고 화내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가 평생 아무 것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지난한 나날이었다. 섹스가 이어졌고 피로가 찾아왔으며 잠이 들었다가 깼다. 이따금 새벽에 눈을 뜰 때도 있었다. 규혁은 대체로 자리에 없었고 거실 어딘가로부터 은은한 빛이 쏟아지거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그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유진 때문일 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유진은 어둠 속에서 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움츠려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대충 여섯 개를 접었던 것 같다. 그의 오피스텔에선 빠르게 잠들고 느리게 깨어날 수 있었다. 그가 잠들 수 없는 밤에 유진은 비로소 잠들 수 있는 아주 이상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것은 극과 극에 대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규혁의 오피스텔은 모든 게 넓었다. 무엇이든 쌓아둘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먼지나 소음, 적막과 피로함 같은 것들. 하지만 그들이 간밤에 얼마나 엉망으로 뒹굴었던 소파와 매트리스는 언제든 깨끗해졌다. 모든 것은 오직 유진이 그 자리에 머물 때 뒤집어지고 헤집어지고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규혁이 언제까지 문을 열어줄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차유진은 과연 언제까지 규혁을 이 문 앞으로 데려올 수 있는가? 오피스텔 거실엔 음악 CD 몇 개와 고상한 기기가 있었다. 차유진은 종종 문을 두드리는 자신의 존재를 힘껏 무시한 채 음악을 듣는 규혁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아니, 이 오피스텔엔 너무 많은 가구가 이상할 정도로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릴 수 있었다.

차유진은 그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2.

어느 달엔 비가 많이 왔다. 장마처럼 긴 비였지만 장마가 올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장마라 부르지 않던 비였다. 유진은 도망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국경을 넘어 강물을 따라 타지에 도달하는 사람들. 비가 오는 날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악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뿐 아니라 살아있지 못한 것으로부터도 냄새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흙탕물과 구정물의 냄새, 땀과 살 냄새, 지린내, 음식물 쓰레기의 악취, 침침한 피비린내가 빗물과 함께 번성했다. 도망자들은 숨을 죽이고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것이다. 탈북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고 비가 올 땐 몸을 숨기고 구겨 넣어도 냄새가 표적처럼 피어오르니 말이다. 총부리에 맞지 않으려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 유진은 규혁이 가진 철문을 떠올렸다. 오피스텔 문이 닫히는 소리는 시시때때로 그의 총성처럼 들렸다. 유진은 도망자였지만 총성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규혁의 영역 안에서 그것은 안전과 생존의 신호였다.

하지만 비가 오잖아. 아주 이상한 예감을 받았다. 어쩌면 오늘은 규혁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진 않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고 결심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 달, 비가 그칠 때까지 순환하는 열차가 유진을 태우지 않은 채 충정로를 지나쳐 땅속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자취방에 틀어박힌 채 새벽마다 발작적으로 깨어났다. 하나, 둘, 셋, 넷… 열 개를 접고 다시 스무 개 째를 접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종종 꿈속에선 어딘가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쾅…… 그 소리는 총성처럼 들렸으나 안전과 생존의 신호는 아니었다. 유진은 규혁을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자신이 찾아오지 않는, 더 이상 헝클어뜨릴 수 없는 오피스텔에 안전하게 정착한 그를. 무엇이든 누리고 있는 규혁의 얼굴은 늘 그렇듯 아주 무덤덤하고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유진은 그가 여전히 잠을 잘 수 없기를 바랐지만, 유진이 잠들 수 없었으므로 그는 손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비가 그쳤다. 세상의 악취가 사라지고 도망자들이 국경을 넘을 때였다. 비는 세상 모든 음습함을 고양시킨 후 그것을 모조리 가지고 타지로 떠났다. 유진도 바깥으로 나왔다. 2호선은 여전히 붐볐다. 쾌청한 공기에선 유리감이 느껴졌다. 투명하고 깨끗해서 죄의식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진은 충정로역까지 도달하지 못 하고 중간지점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역사에 걸린 현수막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햇살 아래서 지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부당해고 반대! 9호선 청소부 임금을 지불하라! 그것을 읽는 동안 유진의 가슴 속으로 한 번 더 총성이 울렸다. 심장에 퍽, 하고 박혀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규혁의 오피스텔에 찾아가지 않았고 불면증이 계속됐다. 노조는 계속 되고 있을까? 유진은 도망자인가? 어디로부터 도망쳐 어디로까지 나아가는가? 재난처럼 폭주인간들이 쏟아졌고 유진은 여전히 사람을 죽였다. 쥐고 터뜨리고 꼿꼿하게 서서 시체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패널 티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유진이 원해서인지 살인에 대한 징벌인지 알 수 없었다. 숨구멍이 열리고 피가 쏟아지거나 땀구멍으로 핏물이 맺혀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나날이 계속됐다. 유진은 생각했다.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총성조차 안전과 생존의 신호가 되는 곳으로. 모든 게 마련되어 있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난장판이 될 수 있는 지점으로. 그 날 유진은 택시를 타고 다시 충정로로 향한다. 문을 두들기고 규혁을 기다렸다. 열어줘. 유진은 규혁에게 전가할 불면증을 들고 있었다. 내 앞으로 와줘. 그리고 규혁은 문을 열었다.

 

3.

유진이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생명선과 감정선, 운명선과 재물선… 손금은 가뭄에 드러난 고랑처럼 바싹 말라 갈라져 있다. 커튼 사이로 쏟아진 사각형의 빛줄기가 매트리스 위에 고여 있었다. 유진은 이불을 걷고 앉아 시뻘건 빛을 손바닥에 얹어 보았다. 짭조름하고 미지근한 감각이었다. 빛은 그의 마른 고랑을 채우며 손결을 타고 손마디를 넘어서 마침내는 지문에 도달한다. 손끝에 고여 뚝 뚝 떨어지는 빛 무리를 떠올리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불확실하고 형체 없는 것들은 종종 유진의 손바닥 위에 고였다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햇살이나 물 같은 것. 혈액과 단말마 같은 것. 유진은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사라지는지. 핏물은 왜 그렇게도 쉽게 스며드는지. 왜 아무리 벅벅 씻어도 비린내가 남는지……. 규혁은 옆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동안 해가 졌다. 커튼 친 방은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엉성한 단막극 같았다. 짧고 압축되어 있으며 개연성 없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진은 촉수처럼 그를 감았다. 구석구석 더듬으며 파고들었다. 규혁은 그에게 총성을 들려주기 위해 나타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폭력으로 응집된 소음이 생명으로 치환되는 현장에 모든 걸 마련해둔 채, 잠들지 못 하고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왜 그렇게까지 할까?

그러니까 유진은 묻고 싶었는데,

그러나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도망자였기 때문이다.

 

4.

어느 날 밤엔 홀로 깨어났다. 규혁은 오른쪽에서 잠들어 있었고 유진이 깨어났으므로 정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턱에서 도포자락이 밟혔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베란다로 나갔다. 어둠에 감싸인 가구들은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베란다 창문 아래로 놀랄 만큼 정갈하고 빛나는 풍경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유진은 기댄 채로 번화가가 끊임없이 전송하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교회 첨탑마다 얹어진 빨간 십자가와 가로등, 반짝이는 간판과 노래방 업소들… 불빛, 불빛들. 그것은 잠들지 못 하는 사람들이 돈을 쓰며 이 밤에도 자신이 머물 곳을 유지하는 것이고, 불면으로부터 화려하게 도망치는 것이고, 혹은 방랑하거나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다. 유진은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다. 느닷없었고 두려웠지만 동시에 안심되기도 했다. 규혁은 침대방 매트리스 위에 쓰러져 있었다.

몸이 차가워질 만큼 서있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뭐해요.”

아주 건조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마침표를 찍은 그 말은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베란다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 규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캄캄한 거실 안으로 조루한 夜景의 불빛이 쏟아지다가, 마침내 서늘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규혁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침대로 돌아갈 수도, 추락할 수도 있었다. 유진은 도망가거나 방랑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규혁은 어떠한가. 당신과 나의 불면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침대로 돌아온 유진은 커튼을 걷고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의식처럼 보이지 않았고 지극히 발작적이고 충동적으로 보였다. 규혁은 자리에 걸터앉아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길게 숨을 쉬었다. 입술에 담배를 끼워 넣고 불을 올렸다. 커튼을 아무리 걷어도 세상은 깜깜하기만 했다. 그 속에서 피어오른 불은 위태롭고 수상쩍어 보였다. 필시 밤이라서 그런 것일 테고 방이라서 그런 것일 게 분명했다. 천천히 연기를 뱉어내며 유진은 시선으로 규혁을 내다보았다.

“피울래요?”

하지만 규혁이 대답하기 전에 갑자기, 아주 갑자기. 유진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대체 무엇을 참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불씨를 짓눌러 꺼뜨렸다. 연기 속에서 유진이 그를 잡아 눌렀다. 짓누르고 올라탔지만 그가 밀어낼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규혁은 유진을 평생 내버려 둘 것이고 아무 것도 묻지 않겠지… 제발,

둘은 어둠 속에서 뒹굴었다. 불면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으나 화려한 도망은 아니었다. 세상은 여전히 깜깜했다. 밤이라서 그럴 테고 방이라서 그럴 테였다. 연기가 숨을 가로막아서 자꾸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유진은 조갈증을 느꼈다. 규혁의 혀를 자꾸만 빨아들였다. 애원해보았고 목을 졸라보기도 했다.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 됐다. 새벽이 오고 있었지만 유진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온통 어둠이었다. 온통 어둠이었다. 온통 어둠이었다. 빼앗아갈 수 없어. 하지만 그래도

새벽은 온다.

 

5.

철마가 달린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강에서 땅으로. 2호선은 언제나 붐볐다. 원한다면 언제든 떠밀리거나 섞여들 수 있었다. 유진은 대체로 그곳에 있었고 때때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 날, 베란다에서 뛰어들지 않았더라도 세상에 높은 곳은 많았으니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꼭 뛰어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죽음과 생의 경계. 극과 극의 이야기인 셈이다. 밤에는 나란히 누워 불면의 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규혁은 유진을 위해서라면 대체로, 아마 한동안은 방아쇠를 당겨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내일 당장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유진은 불확신을 확신한다. 하지만 규혁이 제공하는 확률은 유진에게 달려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게 나빠진다면 전적으로 유진의 잘못이다. 이번에야말로 규혁은 그를 탓할 수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사를 지나던 유진은 현수막이 떼어진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9호선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임금이 지불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확률은 유진의 소망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텅 빈 벽면을 지나치는 동안 느려진 발걸음이 마침내 완전히 멈춰 섰다. 유진은 좋은 말을 중얼거려 보려고 노력했다.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고 사람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눈가를 짓누르고 비비자 어두캄캄한 공간 속에서 몇 명의 두더지들이 떠올랐고 손끝에 피가 고이는 느낌이었다. 총성은 없었다. 유진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역에서 쏟아진 인파 사이로 성공적으로 평범해진 정수리가 빛에 감싸여 희미해졌다. 천천히 멀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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