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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솟구치는 것»
1차/old 2019. 10. 8. 23:32

  그 세계에는 빛 덩어리들이 지능과 재능을, 개성과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과 윤리를 알고 문명과 역사의 기록을 기억하고 있었다. 썬은 높게 날던 빛이고 무척이나 따뜻한 편에 속했지만, 모든 빛들이 항상 치솟거나 번개처럼 번쩍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하는 한 염은 게을렀다. 그래서 높게 부유하지 않고 종종 바닥에 가라않고는 했고, 바닥에서 간신히 떠오른 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으로 모든 일과를 대신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종종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썬은 그를 좁은 지형이나 어둠이 고인 깊은 고랑에서 찾아내고는, 마치 잔소리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온몸을 부풀렸다. 썬은 염을 보살피는 주요한 마법사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조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썬은 종종 엄숙하게 선언하듯 염에게 말하곤 했다. “정말이야, 그렇게 바닥에서 간신히 떠오르기만 해서는 솟구치는 법도 잊어버릴지 모른단다.” 염은 그 말에도 태평했지만, 썬은 처음 염이 바닥에만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솟구치는 법을 모르는 빛일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을 거라고 염려한 적도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썬 역시 염이 그저 게으르고, 어둡고 좁은 곳을 좋아하는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염뿐만의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들 모두가 제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썬은 염과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마법사였고, 유희를 위해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여타 부지런한 마법사들처럼 부지런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몹시 아주 무척이나 부지런한 편이었다. 그래서 종종 바깥으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여러 세계와 행성을 경험하곤 했다. 염이를 자주 보살펴줄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래도 썬은 탐사를 다녀오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피고 있는 어린 마법사들을 위해 방문지의 공기를 이루는 입자, 작은 미생물, 암석 따위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염은 게으르고 반응이 다소 느릿한 편이기는 했지만 썬이 가지고 오는 것들에만큼은 무척이나 빠른 감정의 변화와 태도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썬은 염이 새로운 세계로부터 오는 물질들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꿈틀거리며 빛의 입자를 마구 뱅글뱅글 돌리는 것을 보았고, 그 애가 관찰하고 사고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동이 굼뜨다고 해서 사고의 속도마저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솟구치는 법을 잊어버릴 빛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부터 썬은 염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차원에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린 마법사들이 분주히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며 새로운 외교의 장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썬은 이번만큼은 염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부터 썬은 잔소리가 많기는 했어도 일정 이상 개입하지는 않고 선을 지키는 편에 속했지만, 인간사회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고 어두운 고랑에 박혀있을 염을 생각하자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어린 마법사들이 1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상황에서 과연 염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고랑에 틀어박힌 그를 찾아줄 이들이 얼마나 될까? 마법사들은 이타적이고 사려 깊은 존재였으나 그만큼 개성이 뚜렷하고 개개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 스스로 원해 바닥에 붙어있는 빛에게 있는 힘껏 개입하거나 잔소리를 늘어줄 이들은 아마 썬처럼 부지런하며 유난인 마법사를 제외하면 정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썬 외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로, 썬은 어른 마법사들에게 염을 외교대사로 추천했다. 어차피 어린 마법사들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썬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염은 반드시 그곳에 내려가야만 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썬이 행동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가 되기로 결심한 썬이 ‘그’ 혹은 ‘그녀’가 될지도 모를 염을 ‘그’와 ‘그녀’가 존재하는 세계로 끌어당기는 일. 썬은 염의 이름을 추천하고 돌아오는 길에 쪼개진 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고 있는 익숙한 빛을 보았고, 쏜살같이 바닥으로 내리 떨어졌다. 염은 썬을 보자마자 온몸을 움츠리면서 하품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썬에 대한 인사였으므로 썬 역시 반갑게 몸을 부풀렸다.

  썬이 말했다.
  “너 이제 지구에 가게 될 거야.”
  염은 잠깐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염이 물었다.
  “왜?”
  “인간들하고 지내게 될 어린 마법사가 필요하거든.”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썬은 공중으로 붕 떠오른 다음, 염이 자신을 따라 나올 때까지 빛을 환하게 내뿜었다. 얼마 뒤 썩 탐탁찮은 기색으로 틈 사이에 박혀있던 염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난 정말 괜찮은데….”
  “오, [ ]. 부디 그러지마.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느낄 수 없어.”
  “나는 [ ]이 가지고 오는 미생물로도 충분히 다른 행성을 느끼고 있는 걸.”
  “직접 느끼는 것과는 달라.”
  썬은 상상과 현실에 대한 낙차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이 상상보다 더 높이 부유할 수 있다는 것도. 부유하지 않는 네가 부유하는 법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염이 대답했다.
  “으음.”

  그게 대답이었지만 썬은 염이 자신의 말에 대꾸했으므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임을 알았다. 비척비척거리고, 다소 느리게 움직인다고 한들 염은 호기심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욕망이 염에게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염 역시 마법사였으므로 어떤 무료함, 마법사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루함과 공허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염이 이토록 권태로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썬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게 괴롭기 때문이지만 염은 그 반대가 아닐까. 결국 우리들은 같은 문제에서 다른 방식으로 해결방안을 찾아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썬은 이번에는 염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보기를 바랐다. 자신이 때때로 염을 이해하기 위해 고랑에 누워, 가만히 빛을 죽여 보는 것처럼.

  염이 말했다.
  “응, [ ].”
  염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알겠어….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썬이 빙글빙글 돌더니 염을 끌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는 방식이었지만 염은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부유하는 법을 잊지 않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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