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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1부 1화
2차/old 2019. 10. 24. 19:13

페스트, 오오, 페스트!

 - 일기 중에서

 

회고하자면 그 집안사람들은 전부 조금씩 미쳐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다 죽어도 다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광기였다. 인중에 붙은 죽음은 그들이 숨을 몰아쉴 때마다 조금씩 달랑거리며 매일 꾸준하게 그 숨구멍으로 기어 올라갔다. 도련님, 아가씨, 주인마님, 주인님, 하녀, 하인, 집사 너나할 것 없이 그 광기와 죽음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나 또한 그 때는 조금씩 미쳐있었다.

그 성은 탐욕스럽게 제 안에 발을 디딘 모든 것들을 먹어치웠다. 제네바 시민들, 실력 좋던 사냥개, 도처에 있던 슈테판 저택, 종국에는 찬란한 젊음을 가진 젊은이들까지도. 내가 죽지 않은 까닭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한다한들 그 성에 결코 완벽하게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한 번도 그 성에 매료되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미 나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저택. 그 길고 넓던 복도, 깨끗하고 섬세한 조각상들과 품위 있고 단단한 가구, 화려한 거울과 향수 냄새들! 나의 저택은 프랑스 남동쪽에 있다. 제네바에서 마차를 타고 종일 달려 삼일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프랑켄슈타인 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햇볕이 들었다. 하녀들은 아침마다 문을 열어 신선하고 깨끗한 바람을 들였고, 내 옷장에는 드레스가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나는 포도주를 흔들면서 빛깔에 대한 심미적인 감상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후가 되면 책을 읽었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정원에 나가 산책을 했다. 아가씨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소위 그렇게 하듯이. 나에게는 안온하고 조금은 따분한 일상이 늘 도처에 준비되어 있었다. 죽음은 없었으며, 행복했다.

나의 고모는 주말마다 저택 문을 열고 사람들을 들여 소규모의 파티를 열었다. 친분이 있던 부인들이 매주 가슴에 꼭 끼는 드레스를 바꿔 입고 남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이 빙글빙글 돌 때마다 드레스 겹겹이 외국제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집안은 사치스러운 편이 아니었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고, 그 위에는 부유한 지방 자제들이 응당 거쳐야 할 것들―이를테면 무용한 낭독 회나 지루한 파티들을 어떻게든 저질러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가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잘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나를 괜찮은 아가씨로 만들었을 테니까. 맞는 짝을 찾으면 그 성질머리도 조금씩 죽을 거라고 아버지는 늘 나에게 호언장담을 하곤 했다. 그러니 얼른 사랑에 빠져오라며 호통을 쳤지. 아버지는 정략결혼이나 집안 간 교류를 위한 형식 절차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는 꽤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다. 죽을 때조차 그는 가장 아름다운 비석에 대해 고민하느라 절절맸다.

고모는 아버지를 내 다섯 살 동생과 함께 큰 나무 아래에 묻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공동묘지에 가는 건 영 꺼림칙하다면서 저택 바깥으론 발도 들이지 않았다. 고모는 전염병이 시체로부터 옮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장례는 고모와 나, 그리고 우리 저택을 아버지 젊은 시절부터 지키던 집사와 함께 치렀다. 그 무렵 우리는 집안을 돌아다니던 하녀와 하인 대부분을 해고하고 텅 빈 저택을 정리하고 있었다. 관을 옮기는 일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하인 둘이 끝까지 남았다. 그들은 퇴직금과 함께 수당을 더 받아 챙기곤 장례가 끝나자마자 마차를 잡아 부리나케 우리 마을을 떠나버렸다. 전염병은 어떻게든 이 고장 사람들을 자꾸 줄여나가고 있었다. 죽여 버리거나, 쫓아내거나. 아버지는 죽여 버렸을 뿐이고, 그 하인 둘은 쫓아냈을 뿐이고. 병에 대해 크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 나는 다만 살아남은 사람이었고, 병의 원인을 알아내기도 전에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나는 앞으로 살아남는 데에 더 진중한 고민을 해야 했다. 텅 빈 마을, 밤마다 지붕들 아래서 뒤섞이는 탄식과 울음이 주는 음울함. 전염병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고 왔고 집안의 사업은 완전히 주저앉았다. 고모와 나는 마주 앉아 텅 빈 저택에서 얼마 남지 않은 차를 우려 마셨다. 우리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택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도. 그 무렵의 우리는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전염병은 학살을 멈췄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터전을 단 한 곳도 남기지 않았다. 고모는 내가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저택을 팔고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 나리’를 만난 것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독감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는 우리 저택에 머물며 어머니를 극진하게 보살폈다. 꽤 괜찮은 의사였다. 용모가 수려해 하녀들은 그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저들끼리 헤죽헤죽 웃어댔다. 아버지와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했던가. 나는 문 뒤에 숨어 그가 어머니의 맥을 짚는 것을 때때로 구경하곤 했다. 그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내저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는 치료 도중 환자와 환자 가족이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모는 그에게 추천장을 썼다. 추천장이 아니라 편지에 가까웠지만, 여하튼 내용을 보자면 추천장이었다. 집안 사정은 간략했고, 나를 고용했으면 한다는 내용이 길고 수더분하게 편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아버지와의 옛 인연에 호소하는 문장들은 웃기게도 귀족적이었다. 고모는 그런 편지들밖엔 써본 적이 없던 것이다. 후에 집사가 고모의 편지 중 일부를 고쳐주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고모는 셋만 남은 하녀를 데리고 와 나를 가르쳤다. 그 이주일 간, 나는 허리를 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을 배웠다. 드레스보다 얇고 잘 구겨지는 천을 수선하는 법, 재질 따라 빨래하기에 적절한 물의 온도, 시트를 개는 법, 바닥의 얼룩을 지우는 법, 물청소를 할 때 주의할 점, 집안사람들에게 쓰는 높임말과 하녀들 사이의 은어들. 나는 내 앞에 놓인 삶의 궤적을 그려보았고, 썩 유쾌하지 않음에 가끔 서글퍼했다. 하녀들은 나에게 정성껏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자 몹시 어려워했다. 그들은 몸에 밴 대로만 움직이지 일정을 짜놓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남은 일주일 동안은 내가 그녀들이 움직이는 걸 따라다니며 구경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직접 말로 배우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이주일 간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자면 내 기억 속 하녀들에겐 얼굴이 없었다. 한참을 궁리한 후에야 나는 그들이 내 앞에서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집안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하녀의 덕목’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켄슈타인 성으로부터 답장이 왔을 무렵, 나는 대부분의 일은 눈대중으로 어찌어찌 해볼 수 있는 하녀가 되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가씨에서 하녀로 신분 추락이라니, 젠장.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신경질적으로 침대 위에 짐 가방을 얹어놓고 나는 그렇게 푸념했다.

그러나 뭐 그런 일도 있는 것이다.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은 진작부터 포기하는 것이 맞다. 포기하라고 있는 일이니까. 나는 포기하는 일이 없는 삶을 살아왔었지만, 이제부터의 삶은 아주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고모는 추천장을 다시 썼고(이번엔 제대로 써냈다) 제네바까지 가는 마차를 구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짐을 쌌다. 단정하고 움직이기 편한 단색의 드레스, 앞치마와 얇은 잠옷 두 벌. 앞으로 내가 가져야 할 신분을 상징하는 옷들이 거기 있었다. 고모는 내게 아름다운 드레스 한 벌 쯤은 남기라 충고했다. 과거의 너를 기리는 일쯤은 괜찮지 않겠니. 그녀는 팔지 않고 남겨둔 목걸이와 향수를 내밀었다. 가지고 가렴. 나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받아들였고, 그건 내 가방 가장 안쪽에 둘둘 말려 들어갔다. 

떠나는 날도 화창했다. 나는 아버지와 동생의 무덤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마차는 저택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고모는 나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편지하렴. 정착하게 되면 프랑켄슈타인 성으로 편지를 보낼 테니, 그 주소로 답장을 주면 될 거야.”

“고모님은 어디로 가시나요?”

“집사 일을 배우고 있어. 프랑스를 떠나진 않을 거야.”

“건강하세요.”

“죽지 마라, 일라인.”

나는 추천장을 들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짐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볕 아래에서 말들은 푸르륵 숨을 토해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나의 저택은, 햇빛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이 한 움큼도 남지 않은 그 거대한 집. 그 앞에 선 고모는 점점 멀어지고, 또 멀어지고, 또 멀어지고, 그리고 마침내는 사라졌다. 고모가 손을 흔들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차는 덜컥거리며 프랑스 국경 지대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다가를 반복했다. 눈을 뜰 때마다 주변의 풍경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밤이냐 낮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후가 중요했다. 날씨가 자꾸만 흐려지고 있었다.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나는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리나요?”

마부는 대답했다.

“이틀.”

나는 가까워지는 마을과 버려진 집들을 세며 눈을 감았다. 프랑켄슈타인 성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한 번도 성을 본 적 없는 나는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대신 아버지의 무덤이 떠올랐다. 내 어린 남동생의 무덤도. 그러자 갑자기 조금 눈물이 났다. 창가에 이마를 댄 채로, 나는 조금 울었다. 내 나이 열 살에 나는 그렇게 나의 저택을 잃은 것이다. 영영,

아주 영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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