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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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로부터 수증기가 솟고 있었다. 닫힌 블라인드 틈으로 햇빛이 느슨하게 쏟아져 탁자 위에 줄무늬를 만들었다. 병원은 조용했다. 이따금 복도로 간호조무사가 차트를 들고 여유롭게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메리엇 클락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진료기록을 살피는 중이었다. Appendicitis, 라는 것은 충수염이고, 더 간단하고 보편적인 단어로 치환하자면 맹장염을 뜻한다. 한 마디로 몸내부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고름이 터질 테고, 그럼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이다. 고름이 터지면 뱃속을 통째로 청소해야하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메리엇은 맹장이 터지기 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녀의 차는 아직 링컨스쿨의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고, 오후 8시쯤엔 그녀의 동생이 서랍 안쪽에 정리해둔 여분의 키를 가지고 그것을 몰아 메리엇을 데리러 올 것이다.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의 여동생은 말했다. “큰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네!” 메리엇도 동감했다. “그래, 훨씬 복잡해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차트에 사인했고 병원비를 지불한 후 금식에 대한 안내를 듣고 수술 일정을 조율했다. 그러고 나서, 학교에 연락을 넣었다.

“당신 괜찮나요?”

버튼 교감의 목소리는 꽤 사무적이었다.

“네, 괜찮아요. 의사 말론 충수염이라고 하더군요.”

“충수염이요?”

“맹장염 말입니다.”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니군요.”

“네, 아니죠.”

메리엇이 말했다.

“수술은 내일이고, 퇴원은 다음 주 수요일 이전엔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부 교과 교수는 누구로 신청하셨죠?”

“존 심슨이요.”

“그가 계약직 교수라 일정 조율이 자유롭지 않다는 건 알고 계시죠?”

“이미 그와 통화했어요. 일주일 단위로 조정할 수 있겠다던 걸요.”

“다행이군요. 그럼 다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입니까?”

“그렇습니다.”

“클락, 일은 유감입니다.”

버튼 교감이 덧붙였다.

“그래도 큰 수술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고맙군요.”

“복도에서 구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 그건 제가 아니에요.”

메리엇의 머릿속으로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린 채 바닥을 흘끔거리던 장면이 나열되고 있었다. 그녀는 수업 자료를 정리해 뒤늦게 교실을 빠져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복도가 소란스러워 코너를 돌았고, 중앙 복도에 빽빽하게 들어선 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누군가들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인파에 가려져 누군가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메리엇은 소리를 쳤다. ‘거기!’ 아이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워, 하는 소리와 함께 중심 부근에 서있던 몇몇의 학생들이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 허리를 숙이고 락카에 기대어 휘청거리고 있었다. 메리엇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날카롭게 외쳤다.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엇은 알렉스 스타일스를 보았다. 그는 락카에 기대선 학생을 마치 아이처럼 안아 올린 후, 등을 쓸어주면서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는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그녀는 알렉스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학생의 얼굴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는 토미 화이트헤드였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나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군요.”

메리엇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다음주에 해당 학생들을 불러 물어봐야겠어요.”

“큰일은 아닐 겁니다. 이미 몇몇 학생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냥 작은 말다툼이었다고 하더군요.”

“말다툼이요?”

메리엇은 토미 화이트헤드의 평소 태도에 대해 떠올렸고, 그것에 굉장한 이질감을 가졌다. 미스 메리엇이 기억하는 한 그는 어떤 불만사항이나 반발심이 있어도 결코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는 소시민적 태도를 고수하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문제에 있어 그는 극단적일 정도로 개입되고 싶지 않아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메리엇은 교사생활을 하면서 그보다 더한 엘리트들도 얼마든지 만나보았다. 그들은 대체로 재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 성실하고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놓는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분명 훌륭한 장학생 혹은 수석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될 것이다. 메리엇은 그 미래에 관해선 자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화이트헤드에 대해 뭐라 말하던가요?”

“그 부분에 관해선 저도 잘 모르겠군요. 전달받은 게 없어서요. 화이트헤드와 연관된 일인가요?”

“아뇨.”

메리엇은 우선적으로 뱉었다가 이내 덧붙였다.

“아마 아닐 겁니다.”

“그렇군요.”

버튼 교감이 말했다.

“그럼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클락.”

“네, 그러죠.”

메리엇이 대답했다.

전화가 끊어진 후 알림을 확인하니 그녀의 여동생으로부터 문자가 와있었다. 병원을 나서며, 메리엇은 잠시 알렉스 스타일스와 토미 화이트헤드의 연관성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둘은 정말이지 아무 연관도 없었으므로 곧 그만두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클랙슨을 울렸다. 그녀는 핸드백에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천천히 주차장으로 나아갔다.

 

지난 주말동안 토미 화이트헤드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gib22와 채팅하지도 않았고, Site에 접속하지도 않았고, 짐의 요리를 거부하기 위해 층계 위에서 무언의 시위를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전환을 위해 산책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방구석에 박혀 과제를 끝내고, 레포트를 작성하고, 교수에게 메일을 날리고, 시간이 되면 층계를 내려와 짐의 요리를 몇 번 끼적이곤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일상을 무탈하게 영위하는 것에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을 때, 토미는 침착한 얼굴로 가방을 들고 내려와 비장하게 짐의 차를 바라보며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Nevermind.’

링컨 스쿨로 향하는 동안 짐이 몇 가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지만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고, 그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를테면 최악의 시나리오들에 대한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의 사건으로 온 학교가 떠들썩할 것임은 분명하다. 중요한 건 알렉스 스타일스의 반응이다. 첫 번째, 그가 토미에게 화를 낸다. 이건 방어할 수 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말로 상대를 누르거나 납득시키는데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문제는 객관적으로 알렉스 스타일스의 잘못이 아닌가……(이 과정에서 토미는 상처받은 알렉스의 얼굴을 떠올렸으나 애써 접어두었다). 두 번째, 그가 토미를 완벽히 무시하고 새 애인을 찾아 학교를 쏘다닌다. 훨씬 좋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원래 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소문으로 요란스럽던 학교도 일주일이 지나면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 곧 싱거워질 테지. 알렉스의 새로운 가십이 시작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토미 화이트헤드의 이름은 그들의 관심사 밖으로 멀리 밀쳐진 채 발굴될 일 없이 영영 역사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PERFECT.

다행스럽게도 월요일 스케줄은 알렉스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겹치는 수업이 하나도 없었고, 토미는 점심시간에 알렉스가 있는 홀에 나가지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아침 수업, 그러니까 미스 메리엇의 물리학 수업이 미스터 심슨의 캘리포니아 지역 역사 수업으로 교체되기 이전까지 그는 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실로 들어오는 미스터 심슨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토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야만 했다. 

“이미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심슨은 파일철을 교사 책상에 얹어놓으며 말했다.

“클락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수술 일정으로 그녀의 이번 주 수업은 전부 캘리포니아 지역 역사 수업으로 교체되었어요. 아시겠지만 저의 수업은 총 두 반이 합석하여 진행되고 있으므로, 당분간 D반과 C반은 합동 수업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토미는 몸을 돌려 황급히 교실을 살펴보았다. 과연 낯선 얼굴들이 드문드문 껴있고-D반 학생들이었다-심지어 창가 근처에 앉은 제시 버크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토미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펜을 쥐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보이지 않았다. 땡땡이인가? 그럴 지도. 혹은 조퇴-아니, 첫 교시인데 그럴 리는 없다. 혹은 병결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마주칠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만세, 토미 화이트헤드!

그러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수업종과 함께 알렉스 스타일스가 앞문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섰다. 시선이 마주쳤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다소 급한 기색으로 책과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심슨은 그런 그를 상냥하게 맞아주었다.

“오늘은 지각을 체크하지 않겠어요. 남는 자리에 앉도록.”

수업 교체 안내를 뒤늦게 전해들은 D반 학생들이 교실의 앞문과 뒷문으로 허겁지겁 쏟아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심슨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후 토미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흘끔거리거나 노려보지도 않았고, 스쳐가면서 중얼거리거나 욕설을 뱉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알렉스 스타일스는 토미 화이트헤드의 ‘알렉스 가설 2’에 기반해 움직일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뻐해야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알렉스 스타일스가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그를 스쳐지나갈 때, 토미는 마음이 따끔거림을 느꼈다. 다소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잘도 자신을 이런 궁지로 몰아넣고 이제와 모른 척 한다는 게 짜증이 났던 걸지도 모른다. 교실의 시선이 일순 둘에게 집중되었다가, 알렉스가 토미를 스쳐 지나자 수그러들었다.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심슨이 교탁으로 나서자 다시 잠잠해졌다. 토미는 기분 나쁜 뒤통수를 한 채 애꿎은 노트만 노려보았다. 난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Nevermind. 

미스터 심슨이 토미의 바로 앞으로 교탁을 끌고 왔다.

“자리가 어수선한 것은 압니다. 제가 관여하지 않은 건 오늘 수업 이전에 새로운 자리 배치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죠.”

토미는 펜 끝을 씹으며 손가락으로 연거푸 공책을 두들겼다. 손톱이 바짝 깎여있었으므로 소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심슨은 산만한 그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일주일간은 둘 혹은 셋으로 짝지어 합동 레포트 수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제비뽑기로 진행할 계획이고, 자리는 조에 따라 새롭게 배치됩니다. 질문 있는 사람?”

토미는 고개를 들어 심슨을 바라보았지만 손은 들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했다. 교실의 누구도 질문하지 않자 심슨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교탁 위에 박스를 얹어놓았다.

“그럼, 앞자리부터 순서대로 나와 번호를 뽑도록 하세요. 총 마흔 명이니까… 스물한 번째 사람부터는 번호를 불러 자신과 같은 번호를 뽑은 친구의 옆 좌석에 앉도록 합시다.”

토미는 12번을 뽑았다. 제비뽑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내내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설마 그런 빤한 일이 일어나겠어. 그래도, 만약에 신이 지루한 나머지 알렉스를 자신과 가까운 자리에 데려다놓는다면……. 그런 일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었다. 신의 장난이 없어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였다. 

스물한 번째 학생이 번호를 뽑았다. 그는 큰소리로 자신이 뽑은 번호를 부른 후, 손을 든 학생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토미의 바로 뒷좌석이었다. 토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몇 번 더 두들기다말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대각선에 앉은 게이브를 조용히 불렀다.

“Hey.”

게이브는 고개를 들었다. 

‘뭔데?’

‘번호표 좀 바꾸자.’

토미가 시선으로 찡긋거리자 게이브는 얼굴을 구겼다.

‘내가 왜?’

‘지금 당장은 말고.’

‘레포트라도 대신 써주게?’

‘그건 불가능하지만 참고자료를 줄 순 있어.’

‘언제 바꿔주면 되는데?’

‘어, 그건 내가 신호할게.’

그러나 이 비밀스러운 거래가 성사되기도 전에, 제시 버크가 앞으로 나와 번호를 불렀다-“15번이요.” 미스터 심슨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15번 뽑은 사람이 누구지?”

게이브가 손을 들었다.

“오, 저요.”

토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게이브를 돌아보았으나 게이브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Sorry.’

제시 버크는 게이브의 책상으로 이동하면서 토미를 지나쳤고, 여전히 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며 돌아보았다. 그리곤 자리에 앉았다. 게이브가 활짝 웃으며 제시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토미를 노려보느라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게이브가 다시 고개를 돌려 토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미는 아까 게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Sorry.’

“12번을 뽑은 사람이 누구지?”

“어, 음. 저요.”

토미가 엉거주춤 손을 들다 말고 딱딱하게 굳었다. 알렉스는 종이를 쥔 채 토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뻔한 전개였으면서도, 심지어는 토미 자신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토미 화이트헤드는 그 순간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What the……?!’ 

교실의 모든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천천히 책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토미에게 흡사 1시간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속삭였다. 

“진짜 끝내주게 재밌겠다!”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기대에 찬 침묵 속에서 토미는 앞을 노려보았다. 앞만 보았다. 그러나 시야 바깥, 눈동자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흐릿한 영역으로 알렉스의 인영이 훤히 들어왔고, 토미는 도무지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불안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지난주 금요일로 돌아가 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와 함께 보건실에 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그 때 뭐라고 말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주말 내내 그 장면을 곱씹었으나 막상 현실의 알렉스를 마주하는 순간, 정말이지 아무 것도 뚜렷하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토미 자신이 지나치게 그 장면을 곱씹었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지난주 금요일 그들이 격정적으로 주고받았던 대화는 모두 물을 먹은 소리처럼 먹먹한 세계 저편의 것으로 느껴졌다. 토미는 심호흡을 했다. 진정해야만 한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토미 화이트헤드를 무시할 테고……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토미는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왜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 찜찜하지?

“Hey, 토미.”

알렉스가 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 한 채, 토미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음, 미안. 뭐라고?”

“너 레포트 초안 작성해야 한다고.”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토미의 책상을 두들겼다. 토미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미스터 심슨이 레포트 초안 양식을 배부한 모양이었다. 알렉스가 챙겨둔 것인지 얌전히 토미의 손바닥 아래에 깔려 있었다. 토미는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으로부터 그 어떤 저의나 의도도 읽어내지 못 했으므로 당황스러워졌다. 알렉스는 단지 해야 할 일을 막 마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토미가 펜을 쥐자, 알렉스 역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양식 란에 이름과 날짜를 적어 넣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토미는 자신의 뒤통수로 내리꽂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으나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잘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알렉스가 다시 토미를 불렀다.

“토미.”

“왜?”

토미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겨놓곤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에 당황해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뭐가 어떻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 레포트로 뭘 쓸지 주제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아?”

“어, 음.”

토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렇지.”

“너 설명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토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아마도.”

“오. 그래.”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 우린 지역 하나를 정해야해. 존나 당연하지만 켈리포니아주 안에 있는 곳으로. 관광명소보단 그 지역에 오래 전부터 있던 자연물로 정하는 게 좋다더라. 그리고 조사를 하는 거지. 발표는 공동으로 해도 되고, 한 사람이 해도 되고. 하지만 레포트는 같이 써야해. 같이 안 쓰면 감점이야.”

“음. 그래.”

토미는 스스로가 멍청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고마워.”

“그래서, 어떤 지역으로 할지 생각한 거 있어?”

“음.”

토미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봐야겠는데…….”

“그래, 내일까지니까 좀 여유를 가지고 고민해보자고.”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토미는 다시금 얼굴을 찡그린 채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얘가 왜 이러지? 그러니까, 토미는 그가 화가 나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지막에-토미 딴으론-격렬하게 싸웠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 했고, 분노했고, 진심을 주고받고 실망한 채로 헤어졌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지금 알렉스 스타일스는 마치 토미 화이트헤드와 정말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굴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데이트나 린다 같은 문제가 없었던 때로. 알렉스가 토미에게 플러팅 하기 이전으로, 토미가 알렉스의 설문지에 뭔가를 작성하고, 그것을 알렉스가 발견하기 한참 전으로.

알렉스 스타일스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토미는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없긴 했어도 어쨌든 그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음은 알고 있었다. 만약 토미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토미였다면… 아니, 생각할 필요는 없다. 토미라면 이렇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굴지는 않는다. 상처를 받거나, 분노한 이후라면.

토미는 고개를 기울인 채 미스터 심슨을 올려다보는 알렉스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다시 레포트에 시선을 처박았다. 그는 마치 린다 오스본에게 뺨을 맞은 지난주 월요일과 같은 얼굴이었다. 어떤 격렬한 일이 일어났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단 채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토미는 그게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알렉스가 입을 다물자 고민하기 시작하는 자신이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토미는 지금 필요 이상으로 이상하리만큼 알렉스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을 생각하자면, 알렉스 역시 마땅히 그래야했다. 그게 더는 긍정적인 의도가 아닐 지라도 그 역시 토미를 의식하거나 혹은 그 의식을 필사적으로 무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토미의 생각이 가로막혔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건드렸으니까. 

그래, 알렉스는 토미를 건드렸고, 토미 역시 알렉스의 무언가를 건드렸으니까. 토미는 그것을 느꼈고, 지난 주말 내내 고민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각오를 하고 온 참이었다. 그러나 알렉스 스타일스는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그들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토미 스스로가 알렉스는 자신을 알지 못 한다고 자부하고 있던 시절로 혼자 회귀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어떻게?

대체 왜?

심지어 알렉스 스타일스는… 친절했다. 정말로, 그랬다.

토미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똑똑, 알렉스가 책상을 두들겼다. 토미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알렉스는 한 번 더 두들겼다. 똑똑.

“……왜?”

“아까부터 하나도 안 쓰고 있어서.”

“어.”

토미는 자신의 텅 빈 레포트 양식을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가 이내 멍청한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치워냈다. 알렉스는 토미를 곁눈질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 당장 낼 거 아니니까 쓸 거 없으면 그냥 내려놔. 내가 몇 가지를 추려볼게. 나 켈리포니아의 몇 군데는 캠핑으로 다녀와 봤거든. 그 중에 택해도 되고, 뭐, 안 그럼 다른 걸 또 찾던가.”

“음, 그래.”

토미는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

“괜찮아.”

그런 후, 알렉스 스타일스는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토미는 시선으로 알렉스의 레포트 초안 양식을 훑었는데, 토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는 이미 초안의 절반 정도를 채워 넣은 상태였다. 토미는 진심으로 다소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한들 어쨌든 그들은 한 조였고 작성해야할 레포트가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 스타일스는 상황이 어떻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중이었다. 엉망인 건 토미 화이트헤드였다. 이런 건 전혀 그답지 않았다. 애초에 알렉스가 제대로… 레포트를 작성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던가? 그렇다면 이런 건 전혀 알렉스 답지도 않았다. 

복잡한 기분에 휩싸인 채, 토미는-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으면서도-자신의 레포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심슨이 머리위에서 자신의 보이스카우트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교실의 대다수는 졸기 시작했다. 알렉스와 토미 사이에 별 다른 대화가 오고 가지 않자 끝까지 그들에게 집중하던 몇몇도 곧 흥미를 잃었다. 결국 남은 건 토미와 알렉스였다. 그들은 레포트에 시선을 박은 채 끝까지,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칸을 채워나갔다. 캘리포니아주의 지명들이 종이 위로 빼곡하게 나열되는 동안 마지막까지 그들 사이를 관찰하던 뒷자리 학생마저 시선을 거뒀고, 이제 교실의 모두는 미스터 심슨의 보이스카웃 시절 따위 알 바가 아니게 되었다. 사실, 그런 건 언제나 알 바가 아니었다.

수업 종이 쳤을 때, 제시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알렉스는 벌떡 일어나 책과 프린트를 챙긴 후 나가버렸는데, 제시는 문을 나서기 전 토미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겁자!”

토미는 자리에 우뚝 멈춰서 자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죄의식을 느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거북했을 뿐이다.

‘내가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렇다, 그저 그뿐이었다.

 

제시 버크는 누구보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락커 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책 몇 권을 던져 넣은 뒤 레포트 하나를 꺼내고 문을 닫았다.

“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지만 제시는 고개를 저었다.

“걘 완전 의도적으로 너를 엿 먹인 거라구!”

“내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던 것도 있지.”

“일주일 내내 쫓아다닌 것도 아니고, 고작 반나절이거든! 싫으면 그냥 욕을 퍼붓고 물러날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런… 너의 지금 상황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냐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아니겠어?”

알렉스가 입 꼬리를 올리자 제시가 질색했다.

“맙소사!”

그들은 복도를 지나 D반으로 돌아갔다. 제시 버크는 복도를 걷는 내내 얼굴을 찡그린 채였다.

“걔가 호모포비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건 그래.”

알렉스가 수긍했다.

“본인은 호모포비아라고 불리기를 엄청 싫어하더라.”

“그게 나쁜 말인 줄은 아는 모양이지! 하지만 제대로 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린다 오스본을 가엾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제시는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난 이제 걔가 싫어! 알렉스, 너도 걔한테 앞으로 상냥하게 굴어주지 마. 본인이 잘못한 게 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고. 난 그런 순진한 얼굴을 한 호모포비아들이 제일 싫어. 걔넨 언제나 내가 왜? 같은 표정을 짓지.”

“음.”

알렉스가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미스터 심슨의 수업 내내 어딘지 불안해보였던 토미 화이트헤드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알렉스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알렉스, 농담이지?”

제시 버크가 그를 노려보았다.

“잘 봐, 알렉스. 걘 네가 너무 싫은 나머지 최선을 다해 널 엿먹인 거라구. 걘 진심으로 네가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길 바랐던 거야. 널 단념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너를 인간쓰레기로 매도한 거지. 만약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라고 말한 게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건 더 문제야! 걘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네가 잘못이 없단 걸 알면서도 네가 싫어서 널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상처주고 싶어 한 거라고!”

알렉스는 제시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어쩐지 토미의 의도가 둘 다인 것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둘 다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뭐, 나는 이제 호모포비아 같은 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알렉스가 대답했다. 

D반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제시가 먼저 멈추어 섰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쭉 뺐다. 제시는 인파 속에서 A반 아이들, 린다의 친구들을 발견했다.

“알렉스, 무슨 일인지 보여?”

제시가 물었다.

“모르겠는데.”

알렉스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며 대답했다.

“이 봐, 니네 여기서 뭐해?”

바로 그 순간, 알렉스의 머리 위로 무엇인가 쏟아졌다. 끈적끈적한 계란물이 눈앞을 덮는 동안, 알렉스는 제시 버크가 분노와 경악으로 뒤엉킨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곧이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딘가로 부터 밀가루 뭉치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홀에 들어섰다. 한손에 짐의 샌드위치를 낀 채였다. 그는 재빨리 홀의 전체를 훑어 알렉스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했다. 알렉스가 있었더라면 토미는 당장에 홀을 빠져나와 교실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거기 없었다. 

토미는 짐의 샌드위치를 잔반통에 버린 후 매점에서 작은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더럽게 맛없는 땅콩 샌드위치보다 조금 더 비싼 햄 치즈 샌드위치로. 지난주 금요일 사건으로 인해 토미는 매점 땅콩 샌드위치만 보면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지불한 후 구석자리에 앉아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서 무언가를 먹는 일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곁에 앉는 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토미는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로는 거의 혼자였다. 마땅한 친구도 없었고, 점심시간을 같이 보낼 좋은 선후배 사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토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학기 초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토미 화이트헤드는 그 모든 것이 거북했다. 사교가 시작되면 언젠가는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지점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토미가 매일 타고 오는 차의 주인을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토미는… 사람들에게 별로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상태로 학교생활을 보낸 후 대학교에 들어가 새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고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이곳을 떠나리라. 그 때가 되면 연애를 해보거나, 혹은 커밍아웃 비슷한 걸 해볼 수도 있겠지. 토미는 오래 전부터 그 일을 꿈꿔왔다. 그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이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트집을 잡힐 일이 하나도 없어야만 누군가는 간신히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것. 그의 어머니도 그 때쯤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자립한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전화로 욕을 퍼붓는 정도가 아닐까. 

샌드위치를 쥔 손이 조금 떨려서, 토미는 그냥 포장지 째로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그냥 버리고 돌아가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다. 일전에 토미는 짐의 요리를 먹고 싶지 않아 점심을 굶은 적이 있었는데,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꼬르륵 소리를 내어 당혹스러워졌던 기억이 있은 후로는 꼬박꼬박 무엇이든 챙겨 먹었다. 짐은 토미가 배고픈 상태라는 걸 눈치 챘을 때 몹시 슬픈 눈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긴 했지만 말이다. 그 눈을 누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까? 덕분에 토미는 배부르다는 핑계로 저녁을 먹지 않을 수도 없었고, 먹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용기도 잃어버렸다. 짐에게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토미 스스로 곤욕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알렉스 스타일스처럼. 그렇다, 알렉스 역시 짐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거부하거나 싫어할 구실을 찾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지난 학기 내내 알렉스 스타일스의 방탕하고, 제멋대로고, 수시로 애인을 갈아치우는 작태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자신이 그에게 일종의 열등감-커밍아웃에 대한 것 말이다-을 느끼고 있으며 그 부수적인 사항들은 토미가 못마땅해 하거나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결론만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고백하자면 토미는 린다 오스본의 사건이 터졌을 때, 은밀하게 다소 흡족해하기까지 했다. 그는 알렉스 스타일스를 싫어할 객관적이고도 타당한 이유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마음껏 퍼부어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남은 건 찝찝함뿐이고, 오히려 토미는 자신이 비난받는 처지가 된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가 주말 내내 싸워온 것은 바로 그 예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바로 그것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의 딜레마.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혹은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둘 다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선택지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최악인 것은, 토미는 전혀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입맛이 완전히 떨어진 토미는 결국 애써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 문 뒤 포장지에 싸서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홀이 시끄러워지지만 않았어도 당장에 일어나 출구로 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더니 곧 와글와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토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건 당연하지만-알렉스 스타일스일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토미는 홀로 들어오는 알렉스의 몰골을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

그는 밀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토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입구 문 위에 양동이가 거꾸로 뒤집어져 있고, 아래로 뚝 뚝 점액질의 무엇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경악 혹은 흥분으로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이 들러붙은 덩어리들을 닦아냈다. 토미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문을 박차고 제시 버크가 허겁지겁 들어오다가, 알렉스의 꼴을 보곤 그대로 멈춰 섰다. 토미는 제시가 알렉스의 이름을 비명처럼 내지르는 것을 들었다. 인파에 섞여 있던 남학생 서너 명이 박장대소를 하며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린다의 친구들이었다.

린다가 밀가루덩어리가 된 끈적끈적한 알렉스의 어깨를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렉스, 너 괜찮니? 맙소사… 쟤네 전부 신고해버릴 거야!”

아이들 대다수는 이 상황을 곤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동정의 눈빛이 알렉스 스타일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알렉스는 태연하게 웃으며 얼굴을 장난스럽게 찡그렸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던 까닭에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그는 천천히 홀을 지나치며 제시를 향해 힘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꼴론 점심은 못 먹겠네. 나가서 좀 씻고 올게.”

알렉스가 토미 화이트헤드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칠 때, 토미는 순간 긴장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이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토미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느릿느릿 그를 지나쳐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질척거리는 밀가루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제시가 훌쩍거리며 뒤를 따르다말고 토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토미를 향해 주먹을 쥐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너, 너!”

제시가 으르렁거렸다.

“이제 만족하니? 어때, 아무 잘못도 없는 애를 곤란하게 만든 기분은?”

토미는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다고 해명하려고 했지만,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왜 저러는 거야?”

제시는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손을 휘젓다가 토미의 멱살을 쥐었다.

“넌 이 와중에도 알렉스의 행실 타령이니? 걘 그냥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거야, 이 얼간아! 너 알렉스가 너한테 평소처럼 군다고 해서 네가 잘못이 없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알렉스가 린다를 찾아가서 들쑤신 것도 다 너 때문이라며? 걔랑 데이트하기 싫었으면 차라리 욕을 퍼붓지,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일을 만들 건 없잖아!”

“내가 뭘?”

토미가 얼굴을 찡그린 채 린다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쨌든, 내가 아니었어도 걘 오스본에게 사과해야 했었어. 그래도 이런 일을 바란 건 아니야.”

“걔가 왜 린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데?”

제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사과를 해야 하냐고?”

토미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야말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화이트헤드?”

제시가 으르렁거렸다.

“알렉스가 전 애인이 남자였다는 걸 왜 린다에게 사과해야 하는지 설명해 봐!”

“난 그걸 말한 게 아니었어.”

토미가 신경질적으로 제시의 멱살을 붙잡아 떨어뜨렸다.

“그럼 뭔데?”

제시가 소리를 쳤다.

“넌 왜 자꾸 린다를 가엾게 여기는 건데?”

“린다는 임신했잖아!”

참다 못 한 토미가 버럭 질렀다. 

긴 침묵이 있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분노로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이 충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정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얼빠진 얼굴로 변하는지를 코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시 버크는 천천히 물러났지만 턱을 다물지는 못 했다. 

“Fuck.”

한참 뒤, 제시가 중얼거렸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제시가 말했다.

“린다 오스본이 임신했다고?”

“그래.”

토미가 대꾸했다.

“정말 환장하겠군.”

제시는 이마를 짚고 끙끙거리다가 토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럼 넌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문 때문에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간 거야?”

“오스본이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도 들었어.”

토미가 불안하게 덧붙였다.

“오스본 입으로.”

“오, 그러시겠지. 퍽이나! 난 이제 갈래.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난 네게 해명하거나 너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추어도 없어.”

제시가 질린 듯이 대꾸했다.

“린다 오스본 씨가 생명을 잉태했는지 알고 싶어서 병원에 손수 다녀오신 건 맞아. 에이즈 세포도 생명이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런 후, 제시는 테이블을 박차고 떠났다. 토미 화이트헤드가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토미가 벌떡 일어났을 때, 제시 버크는 밀가루 발자국을 따라 출구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이번에는 결코 nevermind, 라고 중얼거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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