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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왁자한 교실에서 힘썬은 쭉 뻗은 긴 다리와 부리부리한 인상의 얼굴을 보았다. 힘썬이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 그 애 역시 힘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힘썬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애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힘썬은 그 애와 대화하기 위해 특별히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젖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는 힘썬과 키가 거의 비슷했다.
  힘썬이 말했다.
  “걷고 싶다.”
  “그래? 그럼 걸어.”
  “너랑 걷고 싶어.”
  힘썬은 그 애의 긴 다리처럼 자신 역시 긴 다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다리 길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애가 당혹스러워 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그냥 이렇게만 덧붙였다.
  “복도를 조금만 걷다오지 않을래?”
  “음.”
  그 애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귀찮은데.”
  힘썬은 그 대답에 주눅 들어야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네 이름에 대해 물어보면 되겠구나.”
  힘썬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지 않을래? 이때까진 악수를 하지 않고 나를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악수를 하면서 통성명을 해보고 싶어.”
  그 애는 힘썬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순순히 손을 잡아주었다.
  “좋아.”
  “나는 힘썬이야.”
  “너 마법사야?”
  “그럼.”
  “나는 김혜나.”
  “오.”
  힘썬이 기뻐했다.
  “김 씨구나. 김 씨는 내가 한국에 내려와 가장 먼저 알게 된 성이야.”
  혜나는 어딘지 허탈하게 들리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겠지. 한국에서 제일 흔한 성이니까.”
  두 사람은 손을 몇 번 더 흔들었다. 잠시 후 혜나가 물었다.
  “이거 언제까지 흔들어야 돼?”
  “음, 이제 만족했어. 고마워.”
  힘썬이 정중하게 손을 놓았다. 혜나는 운동복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 힘썬의 정수리 부근을 쳐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지만 힘썬은 그것에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면 문제가 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힘썬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다가온 건, 우리가 눈이 마주쳐서야.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막 인식한 거지. 그래서 네 이름이 알고 싶었어. 혜나. 혜-나. 이름이 무척 좋아. 받침이 없잖아. 발음하는 게 좋아.”
  “어차피 성은 김 씨지만 뭐, 고마워.”
  힘썬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혜나, 놀랍게도 우리는 키가 거의 똑같은 것 같아.”
  “아.”
  혜나는 감흥 없이 대꾸했다.
  “그런 것 같네. 너 키 몇이냐?”
  “175cm야.”
  “비슷하네. 난 178임.”
  “맙소사, 오 정말 아깝다. 내가 3cm만 더 크게 만들었더라면, 우리 사이에 엄청난 공통점이 생기는 거였을 텐데.”
  혜나는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힘썬의 사고방식이 자신과 다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그녀는 대꾸하기 좋은 말을 찾는 것 같았고, 잠시 후 대답했다.
  “안 됐네.”
  힘썬은 혜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혜나가 아까부터 흘끔거리곤 하던 자신의 번개모양 머리 삔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혜나, 내 머리 삔 말이야.”
  “어. 귀엽네.”
  이번에 혜나는 갑작스럽게 주제가 바뀌었음에도 조금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힘썬이 머리 삔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슬쩍 꺾으며 조잘거렸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떼어내고 싶지만, 아직은 ‘조절’이 쉽지 않아. 그러니까 이렇게만 봐줘. 너는 번개모양을 좋아하니? 인간들은 빛에도 여러 심볼을 만들어서 사용하더구나.”
  “무슨 소린진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귀엽긴 해.”
  “네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니?”
  혜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응.”
  힘썬은 혜나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곧 그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혜나의 책상을 굴러다니던 볼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힘썬이 볼펜을 혜나의 미간 사이에 두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번개 모양을 줄게. 잘 될 거야.”
  혜나가 그 말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힘썬은 볼펜 끄트머리를 부드럽게 쥐고 ‘그것’을 만들었다. 힘썬은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손의 고랑을 타고 흐르는 그 에너지들이 정말이지 낯선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썬이 손을 떼어냈을 때, 그녀의 마법은 제대로 작동했다. 혜나의 볼펜 끄트머리에 힘썬의 머리 삔과 꼭 똑같은 번개모양이 생겨난 것이다.
  힘썬은 볼펜을 신중하게 돌리며 다각도로 그 번개모양을 점검했다.
  “으음, 잘 된 것 같아. 생각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졌지만.”
  혜나는 볼펜을 받았다. 그녀는 볼펜을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뒤집어보았다.
  “방금 마법쓴 거야?”
  “오, 그럼.”
  힘썬이 뿌듯하게 말했다.
  “오로지 너를 위해서 썼어.”

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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