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티스토리 뷰

알렉스토미 «물과 번개의 아이들»
2차/old 2019. 10. 24. 19:11

 어젯밤 토미는 공중으로 떠오른 램프를 보았다. 그것은 테일러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맞아 장만한 물건으로, 삼년 전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침대 협탁 위를 벗어난 적이 없던 전구였다. 그들 부부가 램프를 어찌나 애지중지 했는지 토미조차 만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그 둘은 가능한 한 아들을 침실에 들여놓지 않으려 애썼다. 토미가 전구를 깨뜨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램프는 공중에 정확히 0.4초가량 머물러 있었다. 코드 째로 뽑혀 올라간 램프는 마치 뿌리 채 뽑힌 상록수처럼 보였다. 끝에 흙 대신 전기가 묻어있다는 점만 달랐을 뿐 거의 그랬다. 희미한 오렌지색으로 깜빡이던 전구는 마침내 플러그에 남은 전류를 소진했고, 포물선의 정점에 도달한 그 찰나에 깜빡거리며 힘을 다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뚜름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테일러 부부의 램프-전구의 연약한 유리가 박살나고 필라멘트가 식탁 아래로 구르는 장면은 슬로우 모션처럼 프레임 하나하나 토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토미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어떤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졌고, 이번에는 접시가 날아올랐다. 접시는 램프보다 더 짧은 시간을 공중에 머물렀다. 접시 다음은 숟가락, 숟가락 다음은 전화기, 전화기 다음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은 공중에 저마다의 무게로 매달려 있다 말고 순식간에 추락했고, 조각조각 박살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테일러 부부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건 근래의 일이지만 서로의 물건을 집어던진 것은 지난밤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거실 복도 가장 첫 번째 방에서 자고 있던 열 두 살짜리 아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만약 가디가 여느 때처럼 문지방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그들 부부에게 컹컹 짖어댐으로써 침대 한구석에서 귀를 막고 있는 토미의 존재를 상기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틀 전부터 진행된 포켓몬센터 정기검진으로 인해 그들의 가디는 문지방이 아닌 센터 소속 몬스터볼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아마 이틀 뒤에나 다시 이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그 때 가디는 알아차릴 수 있을까? 집안의 몇 가지 물건이-아니 거의 대부분이 박살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거나 토미가 깨어난 것은 제 때 짖어줄 가디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토미는 두 부부의 언성이 높아지기도 전에 이미 반쯤 깨어나 있었다. 정확히는, 토미의 아빠가 “당신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린다! 젠장, 이렇게까지 고집을 못 꺾는 모습 정말 경이로워서 미치겠군.”이라고 비명을 질렀던 대목에서 번쩍 눈을 떴다.
 ‘또 싸우시는 거야.’ 토미는 생각했다. ‘기세를 보니 밤새 싸우시겠지. 나는 한숨도 못 잘 거야.’ 두 부부는 내일이 어떤 날인지도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는 연구소에서 열두 살이 된 아이들에게 스타팅 포켓몬을 나누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에는 열두 살이 된 아이들이 토미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있었는데, 스타팅 포켓몬은 예로부터 세 마리뿐이라 제 때 일어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테였다. 포켓몬을 받지 못 한 아이들은 대체로 스스로 포켓몬을 잡아 파트너로 삼거나, 아니면 떠나기를 포기하고 마을에 남았다. 물론 마을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세상은 열두 살 먹은 아이들에게 너그러울 정도로 작게 보이기 때문에 모험을 떠나기 적당한 나이인 것이다. 미적거리며 나이를 먹어봤자 좁아터진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뿔충이 유충을 돌보거나 연구소 목장을 돌보는 일뿐이다. 그런 일을 원하는 아이들은 없겠지. 토미도 마찬가지였다. 토미는 진작부터 마을을 벗어나면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포켓몬을 데리고 떠날 것인지도 마음속으로 정해놓았다. 토미는 이상해씨를 고를 생각이었다. 풀포켓몬은 여러모로 숲에서 지낼 때 유용할 것이다. 넝쿨채찍은 어떻고? 잎사귀를 날려서 솜씨 좋게 열매를 딸 수 있는 건? 이상해씨야말로 끝내주는 스타팅 포켓몬인 것이다. 물론, 이런 끝내주는 포켓몬을 노리는 사람은 토미 뿐만이 아니었다. 토미의 옆집-어릴 적부터 사사건건 토미를 간섭하지 않고선 못 버티는 숙명의 라이벌 알렉스도 이상해씨를 노리고 있었다. 무슨 수로 토미가 점찍은 포켓몬을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알렉스는 이틀 전 포켓몬 센터에서-토미는 가디를, 알렉스는 구구를 데리고 있었다-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이, 토미. 난 토요일에 8시부터 일어나서 이상해씨를 데리고 올 거야. 너 각오하는 게 좋을 걸!”
 ‘하지만 다 망했어.’ 토미는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린다가 램프를 집어든 것이다. 그 뒤 약 삼십여 분 동안 두 부부는 주거니 받거니 손에 집히는 물건은 그게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살림살이의 4분의 1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도로 침대로 돌아간 토미는 새벽 5시가 되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였다. 슬프거나 괴로운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일이면 포켓몬을 받을 테고 그럼 이 집을 떠날 수 있을 테니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요컨대 열두 살이면 모험을 떠나기 적당한 나이임과 동시에 마침내 자신의 부모에게 질릴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알렉스는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내복을 벗고 옷을 껴입었다. 셔츠 단추를 잠그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8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본 것은 갓난아이 이후로 처음이었다-알렉스 모 왈, 알렉스는 핏덩이일 적 새벽마다 깨어나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늦잠’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이후부터 알렉스는 그 개념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즐기기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굴었으므로, 알렉스가 기억하는 한 자신은 언제나 늦잠쟁이였고,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가히 인생역사의 위대한 첫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오늘에야말로 그의 숙적 토미를 제치고 이상해씨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그렇게 되면 토미 녀석의 얼굴은 정말 볼만할 것이다-생각해 몹시 들뜨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옷을 입는 내내 어깨를 으쓱으쓱 거리게 되었다. 심지어 외투까지 껴입었음에도 시계가 8시를 겨우 2분만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그야말로 ‘끝내주는 상태’가 되었다. 어찌나 뿌듯했는지 아침을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그래서 정말로 알렉스는 아침을 먹지 않았고, 포켓볼을 담을 작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언덕 너머에 있는 박사 연구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막 아침을 맞이한 거리는 신선한 초목의 공기가 가득했고, 두트리오가 꼭꼭거리며 하늘을 향해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잠시 멈추어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 울음을 만끽했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전율! 아침을 알리는 세쌍둥이 포켓몬 보다 일찍 일어난 알렉스 스튜어트! 이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나! 인생은 아름다워!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지는 토미의 허망한 미소와 이상해씨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이 그려지는 것 같다! 알렉스는 환희에 찬 숨을 뱉어내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달음박질하여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이상해씨요!” 알렉스는 연구소 입구에서부터 비명을 질렀다.
 “이상해씨!”
 “알렉수, 진정해. 너가 첫 번째야.” 깁슨이 말했다.
 “박사님은?”
 “블루시티에서 욘구하고 있던 윤겔라가 탈츌해서 급하게 떠나셧어. 오눌은 조수인 내가 노희에게 포켓몬을 나눠줄 고야.”
 깁슨은 알로라 지방-이곳 상록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방이다-출신의 외지인으로, 발음이 조금 어눌했다. 상록시티 연구소에 일손이 부족하여 몇 달 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는 박사 조수인데, 듣기로는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체육관 배지를 여러 개를 모은 실력자라고 했다. 알렉스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깁슨을 볼 때마다 가운을 잡아당기거나 발을 밟는 식으로 그를 놀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알렉스는 그를 놀리기 위해 발을 내밀어 깁슨의 왼발을 힘껏 밟았다.
 “이상해씨 줘!” 알렉스가 약 오르라는 듯 혀를 내밀었다.
 깁슨은 발톱 앞에서 깐죽거리는 쥐새끼를 평온하게 바라보는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구래. 9시가 되면.” 깁슨이 대답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연구소 B동 2번방에서 9시까지 죽치고 앉아 있었고, 마침내 시간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 깁슨으로부터 이상해씨를 받았다. 알렉스는 그 과정에서 굉장한 승리감에 취해 깁슨의 가운을 두 번 더 잡아당겼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올 토미 녀석의 얼굴이 패배감으로 물드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상하기 위하여 자리에 앉아 다른 아이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를 제외한 첫 번째 아이는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여유롭게 도착하여 파이리를 받아갔다. 두 번째 아이는 9시 반쯤에 왔는데, 자신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그 애는 포켓몬이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몹시 기쁜 나머지 어떤 포켓몬이 남아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애는 마지막으로 남은 꼬부기를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알렉스는 토미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남은 포켓몬이 없는데?’ 알렉스는 얼굴을 감싸고 끙끙거렸다. ‘하지만 토미 녀석은 늦잠을 잘 애가 아니란 말이야!’ 이건 뭔가가 잘못되었다. 토미가 포켓몬을 가지지 못 하다니. 그럼 경쟁을 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토미 녀석, 포기한 건가? 마을을 떠날 거라고 말했으면서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의 깃발을 흔들다니! 패닉에 빠진 알렉스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깁슨은 커피를 타다 말고 그런 알렉스를 한 번 내려다보곤 여유롭게 테이블로 돌아갔다.
 “너 안 갈 고니?”
 “잠시만… 잠시 만요.” 알렉스가 심각하게 대꾸했다.
 “제겐 시간이 필요해요.”
 그 때 연구소 문이 열렸다. 알렉스와 깁슨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토미가 아니라 이 마을의 가장 멀리서 살고 있는 마지막 열두 살짜리 친구가 서있었다.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진, 왜 네가 와?”
 “뭐가?” 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넌 왜 집에 안 가고 거기 죽치고 앉아있냐. 포켓몬 못 받았어?”
 “왜 네가 오냐니까! 혹시 오면서 토미 못 봤어?”
 “못 봤는데.” 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 알렉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았다.
 진은 깁슨을 한 번 쳐다보았고, 깁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부터 조러고 있오. 신경 쑤지 마.”
 “박사님은요?”
 “업어. 내가 대신 일을 보고 이찌.”
 “포켓몬이 남아있나요?”
 그러자 깁슨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혹시나 해서 와본 거예요. 어쩔 수 없죠. 풀숲에서 구구라도 잡을 수밖에.”
 진이 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데,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너 얘 가져라.” 알렉스가 이상해씨가 든 몬스터볼을 내밀었다.
 진은 황당한 눈빛으로 알렉스와 깁슨, 그리고 몬스터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라고?”
 “이상해씨 너 가지라고! 난… 됐어.”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진이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건 토미야!”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그는 진의 손에 억지로 몬스터볼을 쥐어주곤 올 때와 다름없이 텅 빈 가방을 메고 연구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숨에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후회 따위는 없어! 그러나 언덕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에는, 역시 잠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괜히 줬나?’

 토미는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눈을 떴다. 커튼을 치지 않아서 햇살이 가득 침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토미는 자명종을 집어든 후 오랫동안 바늘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고, 이를 납득하는 데에 조금 시간을 썼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떤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젯밤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순간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사실 하나가 현실로 다가왔을 뿐인 것이다. 토미는 한숨을 쉬는 대신 눈곱을 떼어내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토미는 방문을 조금 열어서 카펫 위로 어질러진 유리조각과 잡동사니를 확인하곤, 또다시 마음속으로 정리해야할 어떤 감정을 한쪽으로 치워두느라 멈추어 서있었다. 그런 후 토미는 날카로운 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발가락을 들고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향했고, 소매를 두 번 접은 후 세수를 했다. 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옷을 갈아입고 두꺼운 양말을 신었다. 그래서 거실로 나올 땐 발가락을 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토미는 식탁 위에 놓인 잼 바른 식빵을 보았다. ‘엄마가 해준 건가?’ 어쨌든 두 부부가 아들의 아침을 잊지는 않은 것이다. 토미는 식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조금씩 흔들거리며 푸석푸석한 식빵을 먹었다. 특별히 맛이 있지도,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다. 꼭 부모님의 사이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요컨대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하지만 가끔 싸울 뿐이다-상태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토미의 이상해씨는 이제 토미의 것이 아니게 된지 오래일 텐데.
 토미는 크로스백을 메고 바깥으로 나왔다. 연구소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포켓몬이 남아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대신 숲으로 갈 생각이었다. 토미의 집 주변에는 작은 숲과 연못이 있었다. 운이 좋다면 가디가 없어도 꼬렛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꼬렛도 잘만 키우면 레트라로 진화를 하고, 그럼 당분간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토미는 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장비했다. 마치 알렉스의 집에서 했던 게임 속 레벨 1짜리 탐험가처럼. 알렉스네 거실에는 게임 콘솔이 있어서 원하면 어느 때나 찾아가 이런저런 게임을 해볼 수가 있었다. 만약 토미의 집에 콘솔이 있었다면, 어젯밤 부로 수명을 달리 했을 것이고 그럼 알렉스가 몹시 슬퍼하거나 분하게 여겼을 것이다. 알렉스는 그런 시시한 일에도 곧잘 열을 내거나 눈물을 보이곤 했으니까 분명 콘솔이 사라져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자 토미는 알렉스가 부모가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치고 박고 싸울 사람이 집에 없다면 콘솔도 평생 무사할 테니 말이다. 알렉스는 큰 누나와 살고 있었다. 그리고 큰 누나는 콘솔을 때려 부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연못에 다다랐을 때, 바람이 불어서 숲속의 모든 나무가 쏴아아, 하고 울었다. 토미는 수면 위로 퍼지는 파동과 날리는 잎사귀들, 어딘가에 숨어 울고 있는 작은 포켓몬들의 움직임을 보았고, 어쩐지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까까지는 분명 부모님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기 위해 마음 한구석으로 이것저것을 치워놓았는데, 그래서 터질 것처럼 무언가로 가득 차올라 몹시 곤란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허전하게 느껴졌다. 꼬렛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토미는 연못 앞에 앉아 두 다리를 모으고, 숲 위로 흘러가는 거대한 구름의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흘러가는 구름들이 보였다. 구름들은 크거나 작았고, 자세히 보니 어떤 것을 닮아있었다. 토미는 마음을 집중했다. 그러자 구름의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구름들은 어젯밤 공중으로 떠오른 모든 것들을 닮아 있었다. 토미는 램프 구름을 보았다.
 “어이, 토미!”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상상 속에서도 알렉스는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
 토미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야, 토미!”
 한 번 더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짜증난다.’ 토미는 생각했다.
 “야!” 알렉스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토미의 눈앞으로 펼쳐진 구름들이 마구 흔들리더니, 모조리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토미는 퍼뜩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너 자꾸 무시할래?” 알렉스가 헐떡거렸다.
 토미는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멀리서부터 줄곧 달려온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토미네 집 가디가 공 던지기 놀이를 할 때면 저런 표정을 짓곤 한다. 토미는 알렉스가 이상해씨를 자랑하기 위해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상해씨는 귀엽던?” 토미는 눈을 흘겼다.
 “보지도 못 했거든.” 알렉스가 툴툴거렸다.
 “너 늦잠 잤어?”
 “어, 완전 늦잠 잤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좀 비켜 봐. 알렉스가 토미를 툭툭 치더니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잘하는 짓이다. 늦잠 자서 포켓몬도 놓치고. 어떡할래?”
 “몰라, 꼬렛이라도 잡지 뭐. 레트라로 진화하면 나쁘지만도 않을 걸?”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에 짜증이 나서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불어서 풀숲이 쏴아아 흔들렸는데, 그곳에서 어렴풋하게 찍찍거리는 소리가 났다. 꼬렛이겠지. 여하튼 알렉스가 꼬렛을 잡는다면 토미는 꼬렛을 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따라쟁이.’ 토미는 생각했다.
 “야, 내가 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누나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토미를 바라보았다.
 “너희 부모님 어제 엄청 싸웠다며? 너 집 나갈 거야?”
 토미도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뭐하게?”
 “아니,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여하차면 우리 집 남은 방에서 재워줄 수 있대.” 알렉스가 말했다.
 “집 나가도 너희 집은 안 가.”
 “왜? 우리 집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그건 게임할 때나 가는 거지.”
 “그거랑 그게 뭐가 달라?”
 “달라.”
 토미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지나가는 작은 개미 포켓몬들-이름은 몰랐다-을 바라보았다. 개미 포켓몬들은 한 줄을 맞추어 어딘가로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난 다른 애들이 나갈 때랑 맞춰서 마을을 떠날 거야.” 토미가 말했다.
 “포켓몬도 없이?”
 “가디를 데려가지 뭐.” 토미가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그렇게 나쁜 생각도 아닌 것 같았다.
 “가디를 데려가는 건 반칙이야!” 알렉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 맘이거든.” 토미는 혀를 내밀었다.
 “아, 짜증나!”
 분을 못 이긴 알렉스가 풀숲에 벌렁 드러누웠다. 토미는 한심하단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넌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울어? 피곤하게.”
 “너도 어젯밤엔 엉엉 울었을 거면서!”
 “안 울었어.” 토미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난 그런 일엔 울지 않아.”
 “야, 그럼 안 돼!”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토미는 알렉스의 어깨와 등에 듬성듬성 붙어있던 풀꽃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고, 그 중 하나가 자신의 발치를 지나는 개미 포켓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을 보았다. 토미는 꽃잎을 들어 포켓몬들이 마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야, 그런 일에는 울어야지!” 알렉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그런 것도 가르쳐줘야 해? 그렇게 멍청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
 “뭐?” 토미는 드물게 큰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알렉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넌 게다가 매일 나한테 지잖아.”
 “승패가 멍청함과 똑똑함을 증명하는 것만은 아니거든?”
 알렉스는 보기 드물게 달변가처럼 굴었다.
 “토미, 세상에는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 하는 일이란 게 있는 거야. 그런 걸 놓치면 넌 나중에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을 영영 모르고 살게 될 걸.”
 “다른 방식으로도 알 게 될 수도 있어. 난 지금도 너보다 뭐든 잘하잖아.”
 “아니야, 멍청아. 네가 뭘 알아.”
 알렉스는 씩씩거렸다.
 “정말이야. 토미, 네가 뭘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너 정말 짜증나는 거 알아?”
 “네가 더!” 알렉스는 벌떡 일어났다.
 토미도 따라서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알렉스가 덤벼들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렉스가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토미는 좀처럼 알렉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집에 가려고 하는데 네가 따라 일어난 거야.”
 알렉스는 토미가 덤벼들기 위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자세를 낮추며 대답했다.
 “뭐해? 덤빌 테면 덤벼 봐.”
 “그럴 생각 없어.” 토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렉스가 무언가 더 말하기 위해 입을 빠끔거리던 찰나,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들렸다. 둘은 다시 한 번 더 정지한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곧 알렉스가 자신의 백팩에서 울리는 진동소리를 깨닫곤 가방을 벗었다. 그리고 휴대용 포켓컴을 펼쳐서 연구소로부터 온 메시지를 읽었다. 잠시 알렉스는 자리에 서서 메시지를 두어 번 정도 더 읽었고, 마침내 토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깁슨이 연구소로 오래.”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우리한테 남은 포켓몬을 주겠대!”
 “남은 포켓몬이 있어?”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있으니까 연락했겠지. 가자!”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서 두 아이들은 연구소로 갔다.

 깁슨은 두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와 토미는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로 깁슨을 따라 연구소 안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깁슨은 B동으로 가지 않았다. 알렉스는 눈앞의 방문에 붙은 위치를 읽었는데, 그곳에는 C동 1번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왜 B동이 아닌데?” 알렉스가 물었다.
 “내가 노희에게 줄 포켓몬은 아직 안정된 친구들이 아니고든.” 깁슨이 대답했다.
 “C동은 아직 사람들과 지내기엔 힘든 포켓몬이나 유전자적으로 안정되지 않운 연구소 포켓몬들이 있는 곳이야.”
 “그럼 우리한테 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토미가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깁슨은 어깨를 으쓱이곤 차트 위에 무언가를 적었다.
 “괜차나. 얘네눈 난폭한 애둘은 아니야. 박사님이 노희에게 줘도 괜찮을 거라고 해써.”
 깁슨은 차트를 한쪽에 내려놓고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알렉스와 토미는 유리창 너머로 끊임없이 펼쳐진 거대한 서랍들을 보았고, 그 서랍 한 칸 한 칸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얹어진 몬스터볼들의 향연을 보았다. 토미는 깁슨의 차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트 위에는 알파벳과 숫자로 조합된 코드명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V-19, V-20 이라는 코드명 박스에 체크가 되어있었다.
 깁슨은 판넬에서 V를 누르고 숫자를 입력했다. ‘19’ ‘20’. 그러자 창가 너머의 서랍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사방이 웅웅거렸고, 기계는 V라벨이 붙은 서랍장에서 몬스터볼 두 개를 찾아 구멍으로 굴려 넣었다. 일련의 과정은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졌으므로 토미와 알렉스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깁슨은 몬스터볼 두 개를 집어 각각 한 개씩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깃써.”
 알렉스와 토미는 몬스터볼을 내려다보았다.
 “안 던져볼 고야?”
 그러자 알렉스와 토미는 깁슨을 올려다보았다.
 “안 물어.” 깁슨이 말했다.
 “노희들은 다칠 위험이 업서. 얘넨 순해.”
 토미는 머뭇거리면서 한손에 몬스터볼을 쥐었다. 몬스터볼은 따뜻했다. 그 말은 즉 안에 따뜻한 체온을 가진 포켓몬이 들어있다는 소리다. 물포켓몬이나 풀포켓몬은 아닌 것 같았다. 불포켓몬일까? 어쩌면 꼬렛처럼 노말포켓몬일 지도 몰랐다. 몬스터볼을 던질 폼을 취하는 토미를 보며 안절부절 못 하던 알렉스가 엉거주춤 따라 폼을 취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몬스터볼을 던졌다.
 작은 폭죽소리와 함께 빛 무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몬스터볼로부터 작은 존재가 튀어나왔다. 알렉스와 토미는 몬스터볼을 내리고 눈앞에 나타난 포켓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몹시 복슬복슬하고 귀가 길었다. 눈이 동글동글하고 반질반질했다. 목덜미에 털이 아주 많았다. 여우처럼 긴 귀를 가졌다. 가디만큼 말랑말랑한 발바닥과 작은 발톱을 가졌고 몹시 귀여웠다. 
 깁슨이 말했다.
 “얘넨 이브이라눈 포켓몬이야.”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알렉스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끝내준다!”
 토미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자신의 이브이를 안아들었다. 보기보다 이브이는 무거웠다. 이브이가 토미의 품안에서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토미는 이브이가 마음에 들었다.
 “이브이가 왜 사람들과 지내기 어려운 포켓몬인 건가요?” 토미가 물었다.
 “이브이는 사람들과 지내기 힘둔 송굑은 아니야. 이브이가 요기 있는 이유는 유전자적으로 불안종한 포켓몬이기 때무니야.” 깁슨이 설명했다.
 “구래서 얘네둘은 외부 환굥 요인에 따라 진화룰 해. 다룬 포켓몬들과는 조굼 다루지.”
 “이를테면요?” 알렉스가 물었다.
 “이룰테면 다른 포켓몬운 타입에 따라 사용할 수 잇눈 진화의 돌이 정해져 이써. 하지만 이브이는 어떤 돌을 사용해도 진화할 수 있찌. 이브이들의 유존자는 일반적으로 불, 물, 번개의 돌에 가장 반응하는 푠이야.”
 깁슨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알렉스는 이브이를 안아 올린 토미를 몹시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자신의 이브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알렉스의 이브이는 알렉스를 한 번 바라보더니 무시해버렸다.
 “제 이브이는 좀 건방진 것 같아요.”
 “이브이도 멍청한 사람은 싫어하나 봐.”
 토미가 작게 킬킬거렸다.
 “시끄러워 토미.”
 알렉스는 입을 삐죽 내밀곤 자신의 이브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브이는 알렉스가 다가오던 말던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피고 있었는데, 알렉스가 가까워지자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쟤는 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알렉스가 항의했다.
 “구렇지 안아, 알렉수. 너의 이브이눈 그냥 너랑 놀고 싶어 하는 고야. 활달한 고라구.” 깁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화의 돌을 사용하면 제 이브이가 바로 진화하게 되는 건가요?” 토미가 물었다.
 “구래.”
 “그거 사기 아니에요?”
 알렉스가 항의하며 자신의 이브이를 향해 다시 조심조심 다가갔다. 이브이는 이번에 제법 얌전히 알렉스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스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을 때, 폴짝 뛰어올라 그의 정수리를 밟고 반대편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저 지금 완전 짜증나요!”
 “깁슨 씨도 이브이를 진화시켜본 적이 있나요?” 토미는 알렉스의 비명을 무시했다.
 “웅. 나도 이브이가 잇엇거둔. 나눈 불의 돌을 사용해찌.”
 깁슨은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몬스터볼을 하나 꺼냈다. 깁슨이 중앙 버튼을 누르자, 몬스터볼은 그의 손안에 가득 차는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깁슨은 몬스터볼을 요요를 던지듯 바닥에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몬스터볼은 바닥에 닿았을 때 슬그머니 열렸다가, 빛 무리를 뱉어내곤 다시 닫힌 상태로 깁슨의 손바닥으로 돌아왔다. 두 아이들은 각자 이브이를 안거나 쫓다 말고 멈추어 서서 빛 무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굵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고, 빛 무리는 점점 형태를 갖추더니 이브이보다 조금 더 큰 몸집으로 변했다. 잠시 후 두 아이들은 연구실 바닥에 태평하게 앉아있는 붉은 털의 포켓몬을 볼 수 있었다.
 “얘눈 부스터라는 포켓몬이야.”
 아이들은 할 말을 잃고 눈앞의 환상적인 이브이 진화형 포켓몬을 내려다보았다. 부스터는 이브이보다 두 배는 털이 많아보였고, 그 말은 즉 한계까지 복슬복슬해보였고, 몹시 따뜻해보였으며, 목덜미 부근의 털은 거의 목도리처럼 보였다. 게다가 눈망울은 더욱 날카로워 졌으며, 더 반들반들하면서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부스터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불포켓몬이었다.
 긴 침묵이 있었고, 한참 후 알렉스가 작게 탄식을 뱉었다.
 “진짜 끝내준다!”
 “맞아.” 이번에는 토미도 긍정했다.
 그리고 두 아이들은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진화를 시켜야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토미는 줄곧 생각에 잠겨있었다. 알렉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몬스터볼을 매만지며 토미에게 시답잖은 말을 걸었는데, 토미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거나 간혹 “응” 혹은 “아닌데, 멍청아”라고 대답해주기만 했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걸었고, 토미를 성가시게 해서 마침내는 토미가 생각하기를 그만두게 만들었다.
 “너 정말 포기를 모르는구나.” 토미가 대꾸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알렉스는 토미의 언짢은 표정을 보고 이죽거리며 물었다.
 “그냥…….” 토미는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내 이브이를 진화시켜도 괜찮을지 고민하고 있었어.”
 “뭘 그런 걸 고민하고 그래? 당연히 진화시켜야지!”
 알렉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토미를 흘겨보았다. 토미는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 없다는 얼굴이었고, 그건 몹시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알렉스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뭔가를 걱정하는 거야?” 알렉스가 물었다.
 “그래.” 토미가 대답했다.
 “만약 진화한 후에 내 이브이 성격이 달라지면 어떡하지? 지금은 얌전한데 진화한 후에 날 싫어하거나 난폭해질 수도 있잖아.”
 “깁슨의 부스터는 안 그랬잖아.”
 “내 이브이는 다를 수도 있잖아.”
 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네 옆으로 보이는 빨간 지붕의 작은 집. 어젯밤에 토미의 부모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웠고,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토미는 침대에 누워서 단 한숨도 자지 못 하고 뒤척였다. 뒤척이면서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화가 날 때 토스트기를 던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강해지는 걸까. 강해지기 때문에, 남을 미워할 힘 역시 강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힘이 강해지게 된다면 토미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지금처럼 무엇이든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버릴 수 있을까? 그러니까 슬픔이나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브이를 진화시켰는데, 이브이가 더 이상 토미를 좋아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거다. 린다와 조쉬처럼. 어느 부부가 사랑하다 말고 증오하게 되는 것처럼.
 알렉스가 다시 생각에 빠진 토미를 붙잡았다.
 “너 지금 너희 부모님 생각하고 있구나, 그치?”
 토미는 고개를 들었고, 생각의 그물에서 빠져나왔다. 토미는 알렉스를 잠시 바라보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아니.” 토미는 거짓말을 했다.
 “맞잖아.” 알렉스가 알아차리고 추격했다.
 “아니라니까.”
 “맞으면서!”
 “아니라고!” 토미가 으르렁거리며 알렉스를 떠밀었다.
 알렉스는 엉거주춤 피하다 말고 뒤로 쿵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알렉스의 손에서 튕겨나간 몬스터볼이 바닥에서 두 번 정도 굴렀고, 폭죽소리와 함께 이브이가 빠져나왔다. 이브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고 자신의 주인이 바닥에 엎어진 꼴을 보곤 팔짝팔짝 뛰었다. 토미는 어쩔 줄 모르고 이브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브이의 눈망울은 거울처럼 반짝반짝해서 토미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는데, 그 속의 토미는 얼굴이 빨개져서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겁쟁이!” 알렉스가 비난했다.
 “아니거든.” 토미는 뒤로 물러나며 말끝을 흐렸다.
 “난 단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알렉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다. 토미의 ‘드문 표정’을 봐서일 지도 모른다. 토미는 알렉스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애가 어떤 말을 하게 된다면 또다시 무슨 대답이든 해야만 하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응”이라던가, “아니야, 멍청아”라고 대꾸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토미는 뒤를 돌아 집까지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현관까지 단숨에 달렸다. 가로수와 드문드문 이어지는 집, 울타리 따위가 뭉개진 색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고리를 붙잡은 후에야 토미는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 날 저녁, 토미는 게임보이 통신으로 알렉스가 남긴 메시지를 읽었다.

네 마을에 잡초 쌓여서 아주 지저분하더라! 마을 지수가 C-던데! 난 네 마을에 들리긴 했지만 잡초는 안 뽑아줄 거야! 꼴좋다 토미!
- AlexTheBrave -

 토미는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알렉스의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삼십분 동안 열심히 잡초를 뽑았다. 촌장은 TommyTheHope의 마을 지수에 B+를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코멘트 했다. ‘마을이 아주 깨끗해졌구나! 하지만 뭔가 부족한 걸? 꽃이나 나무 같은 걸 심어보는 게 어떻겠나!’
 테일러 부부는 토미가 혼자 저녁을 먹고 있을 무렵 집으로 돌아왔는데,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각자 비척거리며 소파에 눕거나 방으로 들어갔으므로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토미는 그것을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어떤 싸움도 없겠지. 하지만 지난밤에도 저녁부터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새벽까지 무사히 지나가기를 마냥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린다가 지나가다 말고 토미의 그릇을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너 뭘 먹고 있는 거니?”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비프스튜요.”
 “아, 그래. 그게 있었지.”
 그런 후 린다는 소파에 누워 있는 조쉬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곤 침실로 들어갔다. 램프의 잔해는 여전히 치워지지 않은 채 소파 뒤편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토미는 비프스튜를 먹으며 자신은 거의 만져보지도 못 했던 동그란 알전구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 외엔 당장 떠오른 생각 중에서 기분이 괜찮아질 만한 주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날 밤은 몹시 쥐죽은 듯 했다. 정말 조용해서 슬그머니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풀벌레 포켓몬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토미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서랍 위에 올려둔 자신의 몬스터볼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이브이가 들어있었다. 토미의 포켓몬. 꼬렛이나 구구를 잡지 않아도 괜찮았다. 토미는 이브이와 함께 짐을 싸들고 마을을 떠날 수 있다. 이 집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토미는 그것을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벗어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토미는 이제 저녁으로 식은 비프스튜를 먹거나, 바닥을 치우지 않아서 조심조심 다녀야만 하는 거실을 매번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커튼이 흩날리며 밤의 안개처럼 부드럽게 흩날릴 때, 토미는 잠이 들었다. 두 부부는 오늘 싸우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토미는 어떤 염려나 불안 없이 성공적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코를 골기 시작했다. 지난밤 때문에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새벽 2시가 되자 토미는 완전히 잠들어서 뒤척이지 조차 않았다. 탁상 위의 시계가 새벽 2시 1분을 가리켰다.
 바로 다음 순간,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무거운 물건들이 쏟아질 때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둔탁하고 묵직한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토미가 침대에서 거의 반쯤 튀어 올랐다. 소리는 거실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토미는 드물게 공포를 느꼈다. 두 부부는 오늘도 여전하게 싸울 모양이었는데, 아들 때문에 서로 비명을 지르지 않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무섭고 이상한 일이 아닌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말없이 물건을 던지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토미는 침대에서 점프한 후 크로스백 안에 게임보이와 속옷을 쑤셔 넣고 탁자 위에 올려둔 몬스터볼을 집어넣은 후, 외투를 걸치고 허겁지겁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신발을 구겨 신은 채 거실 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자신의 현관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토미는 게임보이를 열고 통신을 활성화시킨 후 알렉스의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Y버튼을 난타했다-이렇게 하면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되어서 알렉스의 게임보이가 마구 울린다. 등 뒤로 집안 어딘가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린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들이 달아났다는 것을 깨닫곤 안심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토미는 모든 것이 슬프고, 정말 무서웠다! 잠시 후, 토미의 게임보이로 알렉스의 불만 가득한 메시지가 떴다.

이게 무슨 짓이야!!! 복수는 낮에 하라고!!!! 근데 애초에 넌 나한테 복수할 합당한 이유가 없거든?!
- AlexTheBrave -

 토미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렉스, 도와줘!
- TommyTheHope -

 그리고 토미는 기다렸다. 알렉스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의 방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가 났고, 토미는 쭈그리고 앉아 그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후 열린 창문 틈으로 이브이와 알렉스가 차례로 뛰어내렸다. 알렉스는 집 앞에 쭈그리고 앉은 토미를 보곤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 토미에게 조금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토미가 웃음을 터뜨리려고 할 때, 목구멍이 꽉 막히더니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난처할 틈도 없었다. 토미는 알렉스를 올려다보며 불가항력으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굉장히 정신이 없어보였는데, 심지어는 토미가 울기 시작하자 두 배로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서 등 뒤에서 벌어지는 테일러 집안의 혼비박산을 한 박자 느리게 깨달았다.
 “저게 다 뭐하는 짓거리래?”
 알렉스가 토미와 테일러네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미는 눈물을 쏟으며 화를 냈다.
 “말이라고 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토미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던 모양이다.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놓았던 어떤 것들이, 마치 코르크 마개가 튕겨져 올라오는 것처럼 뻥 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토미는 차오르는 분노와 공포를 손에 담고 벌떡 일어나 알렉스에게 주먹질을 했다. 알렉스가 펄쩍 뛰며 물러났다.
 “너 왜 날 때리려고 그래!” 알렉스가 억울하단 투로 항변했다.
 “내가 새벽부터 너한테 얻어맞으려고 뛰쳐나온 건 줄 아냐?”
 “알게 뭐야!”
 토미는 한 번 더 주먹질을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힘이 없어서 이번에도 알렉스가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자 토미는 주먹질을 관두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테일러 집안은 여전히 난리법석이고, 알렉스의 누나의 방에 불이 켜지고, 벌레 포켓몬들이 울고, 서늘한 새벽바람이 부는 가운데 토미의 울음소리는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샘처럼 터져 올라왔다.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콧물도 찔끔찔끔 나왔다. 토미는 여태껏 모아둔 눈물을 쏟아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서럽게 울었다.
 알렉스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토미의 앞에서 우물쭈물 했다. 알렉스의 이브이도 별 도리는 없는 것 같았다. 이브이는 발치에서 낑낑거리며 알렉스를 발로 밀고 있었다. 발길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해 봐, 짜샤!’ 그래서 알렉스는 정말 무엇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엉겁결에 손을 뻗어 울고 있는 토미를 껴안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토미는 알렉스를 밀쳐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울음을 그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듯 소리를 지르면서도 토미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러자 토미가 외마디 비명처럼, 혹은 최후의 단말마처럼 한 마디를 울음과 함께 헐떡이며 토해냈다.
 “엄마…!”
 와장창! 테일러의 집안에서 다시 린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토미? 토미! 너 어디 있는 거니!” 그리고 다음 순간, 조쉬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토미, 아들아! 너 대체 어디 있는 거니!”
 두 부부의 비명소리를 들은 두 아이들은 몹시 당황했는데, 심지어 토미는 단숨에 울음까지 그치고 말았다. 두 부부의 목소리가 도무지 서로 싸우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린다와 조쉬는 싸우기 시작하면 토미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야, 너희 부모님이 너 찾는 것 같은데?” 알렉스가 말했다.
 “싸우고 계신 게 아닌가 봐.” 토미가 코맹맹이 소리로 웅얼거렸다.
 두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나 곧 제정신으로 돌아온 토미가 알렉스를 힘껏 밀어냈는데, 어찌나 힘껏 밀었던지 토미 본인도 밀어놓곤 꽤 당황한 눈치였다. 알렉스는 아까와 똑같은 포즈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야!” 알렉스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토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토미는 대답하는 대신 크로스백을 지고 다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알렉스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알렉스의 이브이가 토미를 따라 펄쩍펄쩍 뛰며 테일러네 문지방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그러나 으름장이 무색하게도, 알렉스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멈추어 서고 말았다. 토미도 비슷한 상태였다. 둘은 얼어붙은 채 뻣뻣하게 서서, 거실의 난장판을-바닥에 엎드린 채 린다와 조쉬가 떨고 있었다-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창문은 모조리 박살나있고, 치우지 못 한 가구들이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광경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공중으로 떠오른 소파를 보았다.
 그건 절대로 추락하거나 포물선을 그릴 일이 없어보였다. 누군가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허공에 떠올라서, 그 상태 그대로 멈추어버린 것이다.
 토미 역시 보았다. 공중으로 떠오른 소파 옆에 TV가 통째로 뒤집혀 마치 시리얼박스처럼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제 아무리 화가 난 두 부모라도 던질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TV는 실제로 시리얼박스보다 몇 십 배는 무거웠다.
 알렉스의 발치에 웅크린 이브이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강풍이 불어 닥치더니, 허공을 지배한 살림살이들이 마치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시야가 트여 거실 창문이 통째로 보이게 되었다. 커튼이 마구 흩날리면서 창문 앞을 지키고 선 인영이 드러났다.
 그건 사람이라고 보기엔 키가 좀 작았으나 어린 아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토미와 알렉스는 입을 벌린 채 눈앞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포켓몬 같은 것을-아마 포켓몬이 맞을 것이다-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저처럼 보였다. 거의 그랬다.
 토미는 알렉스의 외투 주머니로부터 반쯤 솟아오른 포켓컴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았다. 포켓컴이 깜빡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강한 바람이 몰아쳤고, 린다와 조쉬가 비명을 질렀으며, 알렉스는 이브이를 향해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토미는 아득한 시야와 요란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알렉스의 포켓컴이 어떤 단어를 방송하는 것을 들었다. ‘윤겔라.’
 “저건 포켓몬이야!” 토미가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알렉스, 저 녀석은 박사님이 쫓고 있는 그 윤겔라야!”
 그러나 다음 순간, 토미는 한 쌍의 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몹시 느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곁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토미가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도 전에 하나의 소음이 되어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이 마치 한순간에 저편으로 밀려난 것처럼, 공간 자체가 소실되더니 거대한 암흑이 이어졌다. 토미의 눈앞으로 몇 가지 영상이 아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공중으로 치솟았던 토스트기와 숟가락, 수화기와 접시가 보였다. 그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머리를 쥐어뜯는 부모도 보였다. 모든 것이 되감기 되었다. 바닥을 구르던 산산조각 난 램프 부품들이 슬금슬금 하나의 지점을 향해 후진하더니 다시 동그란 전구로 합쳐졌다. 그 다음 순간 램프는 온전한 모양 그대로 공중에 치솟은 채 0.4초간 허공에 멈추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손에 끌어당겨진 것처럼 협탁으로 하강했다. 토미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 램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지난밤의 일만 되감기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굉장히 빠르고 간단했다. 토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어린 시절의 토미는 아주 작았고, 모든 순간마다 혼자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알렉스가 반드시 끼어들었고, 토미가 만끽하는 중이었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했다. “어이, 토미!” 알렉스는 늘 그렇게 불렀고, 때때로 승부를 요청했다. 그리고 항상 처절하게 패배했다. ‘왜 어느 순간에서든 알렉스는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 토미는 생각했다. 마침내 토미의 과거가 하나의 필름처럼 돌돌 말려 들어가더니, 작은 점이 되었다. 더 이상의 영상은 없었다. 토미는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자신의 인생사-그건 몬스터볼보다 작았다-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동그라미는 잠시 그 상태로 토미의 눈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사라졌다. 그러자 영원한 어둠이 이어졌고, 토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으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뜬 것이나 감은 것이나 캄캄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혼자”라는 것은 전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밀쳐 내거나 밀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미는 생각했다. 혼자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혼자라는 것은, 결국 혼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혼자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사람들은 홀로 살아가면서 조차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겠구나. 토미는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몹시 슬퍼졌다. 왜냐하면 토미가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것이 부모님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픔이나 분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져있었다. 비슷하지만 분명 달랐다. 토미는 이 어둠속을 무엇으로든 채워 넣고 싶어졌다. 토미는 그것을 쓸쓸함이라 부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이제 토미는 정말 혼자가 된다는 것이라던가, 쓸쓸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서 금세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 하나도 슬프지 않아! 하나도 화나지 않아! 하지만 쓸쓸함이라는 것은 슬프거나 화가 나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 토미는 제 안에 이렇게 큰 울음이 있다는 것이 몹시 놀랍다고 생각했다. ‘나는 울보였던 모양이지.’ 그리하여 토미는 보았다.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어떤 그림자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갈퀴 같은 꼬리를 달고 있었고, 새파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날카롭고 반질반질했다. 목덜미에 지느러미가 돋아 있었다. 이브이보다 차갑고 완전했으며,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토미는 그것이 자신의 포켓몬임을 알았다.
 눈을 감자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미, 세상에는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 하는 일이란 게 있는 거야. 알렉스가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걸 놓치면 넌 나중에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을 영영 모르고 살게 될 걸.
 나도 알아, 라고 토미가 대답했다. 나도 알아, 알렉스.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진 거야.”
 갑자기 세상이 마구 흔들리더니 물이 좌우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유영하던 토미의 포켓몬이 화들짝 놀라 소용돌이와 함께 저편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되감기 되었던 모든 시간이 도로 내뱉어진 것처럼, 눈앞으로 수만 개의 영상이 의식을 추월하며 토미의 공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스의 패배 연대기가 재빨리 눈앞을 스쳐가고, 가디가 짖고, 부부가 소리를 지르더니 물건이 사방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램프가 날아올랐다.
 “어이 토미!”
 토미는 퍼뜩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고,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토미, 너 괜찮냐?”
 토미는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둘은 현관에 앉아있었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거실은 온통 난장판이었는데, 가운을 입은 사람들 몇몇이 토미의 부모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거실 유리창은 깔끔하게 박살나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텅 빈 거실로 커튼이 천천히 흩날렸다. 근처 숲에서부터 풀벌레 포켓몬들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깁슨은 현관 복도 앞에 서서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말고 두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토미, 깼구나.”
 “어떻게 된 건가요?” 토미가 물었다.
 “윤겔라의 짓이지.” 깁슨이 대답했다.
 “알렉수의 포켓컴이 반응해서 연구소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달려와써. 나참, 블루시티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우리가 도착해쓸 때, 너희 둘은 쓰러져 있었서. 알렉수가 먼저 깨어낫찌.”
 “저는 이상한 영상을 봤어요.” 토미가 말했다.
 “나도.” 알렉스가 토미와 깁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건 윤겔라의 ‘꿈’공격이야. 최면술의 일종인데, 포켓몬이나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공격이야. 어떤 사람둘은 윤겔라의 최면술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든 기술이라고 말하곤 하지. 하지만 아무도 그것울 밝혀내지는 못 해써. 윤겔라가 ‘꿈’공격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드물거둔.”
 깁슨은 두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노희는 어떤 꿈을 꾸엇는데?”
 “완전 이상했어! 분명 아까까진 현관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시간이 되돌아가는 거야!”
 알렉스가 흥분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엄청 깜깜한 공간에 있었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어!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렇게 혼자 있어본 게 처음이었던 거지. 그래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해봤는데… 완전 기분이 이상하더라니까! 무서운 건 아니었어. 아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무척 심심해하고 있었어.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던 거야. 나는 여태껏 심심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심심한 적이 거의 없다니, 정말 난 대단한 놈이지 않아? 그런데 역시 심심하기만 한 건 엄청 견디기 힘들었어.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디선가 번개가 번쩍 튀어 오르더니…….”
 “번개?” 잠자코 듣고 있던 토미가 되물었다.
 알렉스가 잔뜩 흥분한 채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번개 말이야! 사방이 번쩍번쩍하고 불꽃이 튀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완전 끝내줬어! 야야, 토미, 이 다음 이야기는 너도 못 믿을 걸. 내가 거기서 어떤 포켓몬을 봤는데 말이야… 무슨 번개 맞은 이브이처럼 생겼는데 이브이보다 더 크고…….”
 “알렉수 너 지금 쥬피썬더 말하는 고니?”
 “맞아, 그 포켓몬에게 이름이 있다면 분명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알렉스가 말했다.
 “쥬피썬더는 이브이의 전기타입 진화형이야.”
 “물타입의 이브이 진화형도 있나요?” 토미가 불쑥 물었다.
 “구럼. 물의 돌을 사용하면 이브이는 샤미드가 되지.” 깁슨이 대답했다.
 “샤미드는 멋진 포켓몬이야. 물속에서 정말 아름답거둔.”
 “그러니까 나는 진화하는 꿈을 꾼 거구나.”
 알렉스는 신이 났다. 깁슨은 들뜬 알렉스를 흘끔 내려다보곤 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미 너는 무순 꿈을 꿧니?”
 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진화하는 꿈을 꿨어요.”
 “따라쟁이!”
 “너야말로!” 토미가 말했다.
 두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의 누나가 들이닥치며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녀는 오밤중에 뛰쳐나온 알렉스와 옆집에서 일어난 소란을 목격하곤 몹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으나, 상황을 전해들은 후에는 두 아이들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특히 그녀는 토미를 아주 오래도록 껴안아주었고, 남은 밤 동안은 토미가 알렉스의 방에서 함께 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알렉스는 침대로 돌아와서 이브이를 껴안았다. 알렉스는 이브이를 몬스터볼에 집어넣지 않았다. 알렉스의 품안에서 이브이가 기분좋게 뽁뽁거렸다. 토미는 자신의 이브이를 몬스터볼에서 꺼냈다. 그리고 힘껏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다시 한 번 토미가 자신을 따라한다며 비난했지만, 이번에는 토미가 정말 알렉스를 따라한 쪽이 맞았으므로 “시끄러워”라고 대꾸하기만 했다.

 다음 날, 토미는 포켓몬센터에 들려 가디를 데리고 왔다.
 “가디는 아주 건강하단다. 조심히 가렴.” 간호사가 말했다.
 가디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바닥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킁킁거리며 복도를 시작으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고, 마침내 거실 창가 앞에 도달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가디는 고개를 번쩍 쳐들곤 헥헥거리며 한참 멈추어 서 있다가, 창가를 향해 한 번 크게 짖었다. 토미는 가디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았는데, 집안의 살림살이 대다수가 엉망진창이 되었으므로 그럴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집밖으로 나왔을 때, 알렉스는 토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미는 현관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알렉스를 바라보았고, 알렉스도 토미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잠시 후 알렉스가 고개를 돌리며 운동화 코로 흙바닥을 콕콕 찍었다.
 “뭐해, 가자.”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서 둘은 숲으로 갔다. 토미가 앞서서 걷고, 알렉스가 따라 걸었다. 토미는 크로스백을, 알렉스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둘은 호숫가까지 걸었다. 날씨가 좋았다. 호수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수십만 개의 파편으로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유리조각이나 소파, 혹은 램프와는 달리 빛과 물은 날아올라도 누군가를 아프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호수는 언제나 아이들을 기쁘게 해준다.
 두 아이들은 멈추어 서서 각자의 가방을 내려놓곤 몬스터볼을 던져 이브이들을 풀어주었다. 토미의 이브이와 알렉스의 이브이가 빛 무리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두 이브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곤, 이내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풀숲을 뒹굴기 시작했다. 꼬렛이 소란에 놀라 황급히 반대편 수풀로 달아났다. 토미와 알렉스는 자리에 앉아 이브이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즐겁게 뿍뿍거리고, 행복하게 뛰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서 호수의 수면 위로 부드러운 물결이 그들이 앉은 곳에서부터 반대편으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알렉스가 불쑥 말했다.
 “너는 곧 떠날 거지?”
 “응.”
 “나도 떠날 거다.”
 토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음, 우선 회색시티로 갈 거야.”
 알렉스가 떵떵거리는 투로 말했다.
 “회색시티에 번개의 돌이 있대. 나는 내 이브이를 쥬피썬더로 진화시킬 거거든.”
 토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토미는 갈색시티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는 물의 돌이 있다.
 “그리고 블루시티로 가는 거지.” 알렉스가 말했다.
 “블루시티에 윤겔라가 산다잖아. 나는 윤겔라를 잡을 거야. 진짜 멋진 포켓몬 아니냐.”
 토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두 다리를 껴안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발치에 개미포켓몬들이 없어서, 달리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 했다.
 “…따라쟁이.” 토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알렉스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토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항상 넌 나를 너무 따라해.”
 알렉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토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너도 이브이를 진화시키고 윤겔라를 잡을 생각이었던 거지!” 알렉스는 신난 것처럼 조잘거렸다.
 “아무렴! 아이고, 어떡하냐, 토미? 내가 선수 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너 진화 같은 거 안 시키겠다고 겁쟁이처럼 굴지 않았냐. 생각이 바뀌었나보지? 내가 너무 멋진 계획을 세워버려서 마음이 동했건 거지, 그렇지?”
 ‘진짜 유치해.’ 토미는 생각했다.
 “왜, 내가 너보다 잘할까 봐 쫄리냐?” 토미가 물었다.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아, 뭐래!”
 “맞잖아. 너 늘 나한테 지니까 아득바득거리고.”
 토미는 알렉스를 향해 혀를 쭉 내밀었다.
 “약 오르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아주 미약한 바람이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 파동이 호수 끝에 채 닿지 못 하고 흩어졌다. 토미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알렉스가 토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애가 토미의 혀를 입술로 깨물고 있었다. 풀꽃이 흩날리면서 토미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평생을 걸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있어. 토미는 생각했다. 이브이들이 근처 풀숲에서 뽁뽁거리며 뒹굴고, 그 바람에 풀이 사방으로 꺾이는 소리가 났다. 토미는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았고, 그 사실을 눈치 채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왜냐하면 눈앞이 온통 캄캄한데도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슬픔이라던가, 분노라던가, 혹은 조금 다르면서도 아주 비슷한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므로, 그리하여 조금도 그 어둠속을 채워 넣을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마냥 어둠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채로 엉거주춤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토미는 생각했다. 적어도 이것을 혼자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그러자 손가락에서부터 바짝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물벼락 대신 온통 불이었다. 홧홧하고 날뛰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 닮아있었다. 벼락처럼,
 알렉스! 토미는 눈을 떴다.
 알렉스의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처음이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귓불이 부스터의 털 색깔보다 두 배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너 방금 뭐한 거야?” 토미가 물었다.
 “약 올라서 복수.”
 알렉스가 재빨리 떨어지면서 대답했다. 토미는 알렉스가 고개를 돌리고 불만스럽게 “무드는 알아서 귀신같이 눈은 감고……”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너 귓불 완전 빨개.” 토미가 말했다.
 “지는!”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그래서 토미는 자신의 뺨에 두 손을 가져다대보았다. 그러자 어쩌면 자신의 얼굴이 알렉스보다 더 불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지막지하게 뜨거웠다. 상상을 초월하게 뜨거웠다.
 “너 날 못 이겨먹겠으니까 키스하는 거야?”
 그 말에 알렉스가 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얘가 뭐래! 키, 키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마!”
 “뭐. 내가 모를 줄 아냐?”
 토미가 입을 삐죽거렸다.
 “나도 그 정도는 다 알아.”
 알렉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토미를 내려다보며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둔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지?”
 “뭐래, 머리통도 돌멩이 같은 게!”
 “야, 내 몸에서 돌멩이 같은 것은 오로지 주먹뿐이야. 주먹 맛 좀 볼래?”
 그러나 알렉스가 정말 주먹질을 하지는 않았다. 토미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얼굴에 주먹질을 하는 건 못 할 짓이다. 주먹이 돌멩이가 아니라 젤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알렉스는 끙끙거리다 말고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뭘 알아.” 알렉스가 구시렁거렸다.
 “넌 정말 하나도 몰라.”
 “하지만 알게 될 거야.”
 어떤 확신에 찬 목소리로 토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질 거야.”
 그런데 언젠가 이런 말 하지 않았나?
 알렉스가 다시 기울어졌으므로 토미는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램프마냥 삐죽삐죽 치솟았다. 0.4초보다 오래오래 머물렀다.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알렉스가 자신의 뺨을 주욱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토미의 마음은 통째로 기울어졌다. 슬픔이라던가, 분노라던가. 가령 쓸쓸함이라던가. 어떤 것들을 기분 좋게 상실하였다. 키스! 두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이브이들이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호수의 물결이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달려 나가고, 가디가 짖고 불꽃이 튀어 올랐다.
 ‘끝내준다!’ 두 아이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알렉스토미 게스트북 원고였다
부제목 : 찌릿찌릿하거나 축축한

2018/01/25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