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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웰컴투시카고»
2차/old 2019. 10. 24. 19:10

 1

 오후 11시 30분, 보잉777이 관제탑 지시에 따라 욘.F.케네디 국제공항의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기장으로는 조쉬 랜턴과 닐 버튼이 앉았다. 그들은 새벽 근무를 위해 몇 시간 전까지 충분한 숙면을 취한 상태였고, 커피를 마신 후 조종 대를 잡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은 집중력을 체감하고 있었다. 날씨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들을 제외한 326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이 항공기에 타고 있었다. 약 이십여 분 동안 꾸준하게 고도를 높인 보잉 777은 뉴욕 시내를 벗어났고, 오전 12시 무렵에는 오하이오 주 끝자락에 도달한다. 거대한 이리호수가 바퀴 아래로 펼쳐지자 대기는 더욱 잔잔해졌다. 구름들이 마치 찢어진 솜사탕처럼 곳곳에 걸려 있었다. 조쉬는 기내방송을 통해 승객들이 시트벨트를 풀고 이동할 수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안내 등을 켰다. 마이크를 끄기 전, 조쉬는 몇 가지 사족을 덧붙일 참이었는데-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혹은 좋은 밤 되세요, 혹은 해피 핼러윈-닐이 갑작스럽게 방송을 종료했다.

 “조쉬, 계기판 좀 봐.” 닐은 심각해보였다.

 조쉬는 계기판을 확인한 후 곧장 캐노피 앞을 점검했다. 그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반투명한 구름들을 제외하면 장애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대기는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계기판 레이더엔 분명 녹색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것은 보잉777의 반대방향으로부터 직진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추측컨대 여객기의 평균 속도였다-로 날아오는 중이었다.

 “관제탑에서 연락 받은 거 있어?” 조쉬가 물었다.

 “아니, 내가 그걸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닐이 대답했고,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계기판에 찍힌 녹색 점과 보잉777 사이의 거리는 이제 불과 15km도 채 남지 않았고,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선회하지 않는다면 몇 분 후 충돌할 것이라는 좌표 계산이 계기판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경고음은 울리지 않았다.

 “오류일까?” 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여태껏 이런 오류는 들어본 적도 없어.” 조쉬가 대답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캐노피 너머의 세계에는 구름과 별, 바람과 차가운 대기가 존재했지만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좌표 상의 거리를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계기판의 녹색 점이 6km 안까지 다가왔다. 조쉬가 다시 한 번 눈앞을 살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장인 모양이야.” 조쉬가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계기판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튀어 오르더니 녹색 레이더가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전방위 모니터가 워닝 사인을 깜빡이며 무수한 느낌표를 띄워 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닐이 퍼드득 뛰어올랐다가 조종석에 주저앉았다. “젠장, 놀라게 하네!” 녹색 점은 이제 코앞에 있었다. 그들은 잠자코 앉아 캐노피와 계기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10초, 9초, 8초……. 여전히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 가운데 계기판의 세계가 예고한 충돌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3초, 2초, 그리고……. 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기체 전면부에 큰 충격이 느껴지더니, 곧 파동이 기체를 꿰뚫었다. 기체 전체가 물고기처럼 출렁거리며 아래로 훅 꺼졌다가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조쉬가 비명을 질렀고, 닐은 창백하게 질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계기판에 뜬 녹색점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사고는 없었고, 비행기는 괜찮은 것 같았다. 보잉777은 문제없이 여전하게 이리호수 위를 지나고 있었다.

 잠시 조종석에 침묵이 흘렀다. 조쉬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오, 하나님……. 닐이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봤어?”

 “뭘 봐?” 조쉬가 물었다.

 “비행기 말이야!” 닐이 헐떡거렸다. “방금 바로 눈앞에 여객기 한 대가 있었다고! 오, 제기랄. 오-제기랄. 분명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어째서 여전히 살아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조쉬는 침착하려 애썼다. “아마 난기류 때문이겠지. 종종 이러잖아.”

 “난기류라고?” 닐이 흥분했다. “넌 진동 못 느꼈어? 우린 씨발 뭔가에 부딪혔다니까.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염병할 델타였다고.”

 “델타 항공은 오늘 이쪽 경로를 타지 않는데.” 조쉬가 대답했고, 곧 어떤 사건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잠시 1981년 7월 12일에 있었던 델타 항공사의 비극을 떠올렸고, 공중에서 산산조각 난 보잉727에 대하여 생각했다. 잠시 후, 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닐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난기류 때문인 것 같아.”

 “그래, 그렇게 생각해.” 조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무전을 보냈기 때문에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 기내방송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사족을 붙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피 핼러윈이라니. 그래, 오늘은 fuking 핼러윈데이였고 방금 일은 우연치곤 지나치게 오싹했던 것이다. 옆 좌석에서 닐이 긴장을 풀기 위해 백스트리트보이즈의 곡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2

 토미는

 갑자기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놀라서 시트에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는데 기내방송이 울렸다. 난기류가 있었고 기체가 크게 흔들렸는데 이제는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스튜어디스들이 좁은 복도를 분주히 움직이며 승객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토미는 단단히 틀어 막혔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미끄러지듯 시트에 등을 붙였다. 오렌지색 등이 은은하게 창가에 붙은 좌석을 줄지어 비추고 있었고, 잠들었던 승객 몇몇이 토미처럼 황급히 깨어나 있었다. 하나같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토미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몸은 그것보다 더 미세한 틈을 두고 떠오른 채였다. 이 모호한 진공의 세계에서 앞으로 두 시간은 더 날아야했다. 토미는 3만 피트 이상의 상공에 있었다.

 비행공포증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떠오르는 느낌을 좋아해본 적도 없다.

 라고 토미는 생각했다.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차가워지는 손끝과 발끝을 문지르다 말고 주먹을 쥐었다. 얼마 안 가 마른 땀이 새어나와서 허벅지에 손바닥을 비볐다. 먹먹한 귓속에 잔뜩 먼지가 쌓인 것 같았다. 그냥 먼지도 아니고 진공청소기 뚜껑을 열었을 때나 볼 수 있을 법한, 무작위의 소음과 흡입으로 잘 뭉쳐진 이물질 같은 것이다. 그런 게 귀에 끼어 있는 것 같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마침 복도를 따라 스튜어디스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토미는 몸을 일으키며 시트벨트를 풀다 말고 불현 듯 뭔가를 깨달았다. 변화가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다.

 토미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륙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복도 쪽 좌석은 비어있었다. 잠든 것은 그 이후니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옆 좌석의 누군가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비행기 안에서는. 어쩌면 좌석을 잘못 배치 받았다가 옮긴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도 있나?

 옆자리의 누군가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종이에 얼굴이 절반 이상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브루넷에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위로 빗어 올렸고, 왁스가 붙잡지 못 한 머리카락 몇 올만이 이마 위로 빼죽 늘어져 있었다. 손목에 찬 까만색 가죽시계는 구식 디자인으로 보였다. 남자는 다음 장을 넘기기 위해 신문을 반으로 접다 말고 토미의 시선을 눈치 챘다. 그가 고개를 틀었고, 토미는 피하지 못 했다. 눈과 눈이 속수무책으로 교환되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잘 닦인 녹주석 같았다.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볼록하게 솟은 이마를 따라 콧대가 시원하게 뻗었고, 눈썹은 짙고 속눈썹은 길고 섬세했다. 입은 꽤 크고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두툼했다. 그는 토미의 상사 테넘스 보다 잘생겼다고 자신할 수 있을 만한 미남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보조개까지. 부끄러움과 당혹감으로 토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음, 안녕하세요.”

 토미가 우물쭈물 인사하자, 남자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토미는 악수를 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며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알렉산더(Alexander)입니다.”

 “토마스(Thomas)예요.”

 토미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럼 Tommy(*토마스의 애칭)군요.”

 “당신은 Alex(*알렉산더의 애칭)겠고요.”

 토미가 응수했고, 알렉스는 손을 흔들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토미는 알렉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조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쾌하지는 않았는데 조금 미지근하고 간지러웠다. 둘은 꽤 오랫동안 악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토미가 먼저 슬그머니 손을 빼내자,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졌다. 앞좌석에서 부스럭거리며 칩을 먹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구두를 까딱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쭉 주무시고 계시더라고요. 피곤하셨나 봐요.”

 “대체로 비행 중엔 억지로 잠들기를 택해요.”

 방금 소동으로 깨어났지만.

 “멀미가 심하신가 봐요. 아니면 비행기공포증이라던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

 떠오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마도요. 토미가 덧붙였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토미는 그가 함부로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것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알렉스의 모든 제스처는 크고 부드러운데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거나 공감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토미는 손가락을 매만지다 말고 손끝이 아까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이 아까의 압박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렉스로부터 상쾌한 향수 냄새가 났다.

 “떠오르는 게 유쾌한 일이 아니라면, 그건 일종의 비행기공포증이 아닌가요?”

 알렉스가 물었다. 토미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비행기공포증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문제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토미는 선택적으로 정보를 선별했다. 제 상사가 말하길, 비행기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탈 수조차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전 뉴욕에서 아틀랜타로 날아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타로 날아간 적도 있으니 공포증은 아니란 것이죠. 그저 기분의 문제에 그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선 회사가 느슨해질 수 없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뉴욕에서 다시 시카고로 날고 있는 거고요.”

 “네, 그런 셈이죠.”

 “시카고엔 무슨 일로 가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저는…….”

 토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는 시카고로 발령을 받은 거예요. 책상을 옮긴 셈이죠. 새 사무실에서 실무를 보게 될 겁니다. 아마 못 해도 반 년 정도는 거기 머물겠죠. 제 표는 편도고, 왕복이 아니에요. 당분간 비행기를 탈일도 없을 겁니다.”

 아마 그럴 테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토미가 그렇게 덧붙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일정을 공지하면서 테넘스가 짤막하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토미. 이번 제안은 당신뿐 아니라 저, 그러니까 우리에게 분명 좋은 전환점이 될 겁니다.” 그는 us를 말할 때 혀에 힘을 빼서 재빨리 발음했다. 사무실 가장자리에 서서, 토미는 그 발음 속에 함께 돌돌 말려들어가다 말고 테넘스가 불쑥 서류를 들이대는 바람에 튕겨져 나오듯 돌아왔다. 상단에 적힌 ‘시카고’라는 지명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마지막 시도처럼 저, 비행기공포증이 있는데요, 라고 중얼거렸다. 테넘스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난처한 미소를 달고 고개를 젓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 다음에 나올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무게를 달아보았다. 토미가 가진 저울은 대체로 그런 류의 무게를 정확히 재는 편에 속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해서 꼭 비행기공포증이 아닌 것은 아니죠.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 것은 어때요? 저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알렉스가 말했다.

 “괜찮아요… 원래 출장이 잦은 일도 아니었고, 시카고에선 움직일 일이 더 없을 테니까요.” 토미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잘 된 일일까요?”

 토미는 물끄러미 알렉스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잘 모르겠지만,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잘 된 일이 아니군요.”

 “음, 그런 셈이죠.”

 토미는 긍정했고, 곧 서글퍼져서 혀를 깨물었다. 말로 내뱉고 보니 생생하게 와 닿는 게 있었다. 본사에서 시카고로 발령을 받고, 넓은 사무실을 잃었고, 트렁크에 짐을 챙긴 채 몇 시간이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눈앞의 낯선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이건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테넘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좋은 기회가 뉴욕 한복판도 아니고 시카고 부사에서 불쑥 솟아오를 리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창문을 깨고 상공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토미는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다고 시카고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 자신의 책상, 익숙한 사무실과 동료들에 둘러싸여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다. 의자에 앉으면 칸막이 너머로 이따금 복도를 걷는 테넘스가 보인다. 옆자리 메리엇은 거래처 담당 직원에게 스페인어를 쓴다. 책상 근처에 정수기가 있어서, 누군가 물을 마시면 물통 안으로 울컥 울컥 올라오는 두꺼운 물방울들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타자를 두들기는 소리, 전화벨 소리, 휴게실로부터 퍼져 나오는 인스턴트커피의 냄새와 샌드위치의 양상추가 아삭거리는 소리… 후각과 청각으로 저장된 무수한 기억들이 더는 일상일 수 없다는 것은 그를 슬프게 한다. 이제 토미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고, 마지막 기억 속에서 테넘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단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그렇지만, 토미. 당신은 이미 아틀랜타를 건너본 사람이 아닌가요?” 요컨대 비행기공포증이란 하늘을 건너지 못 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머리 위로 시트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등이 꺼졌다. 알렉스가 고개를 들어 확인하더니 다시 벨트를 찼다. 토미도 그렇게 했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아깐 계시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앉아있었던 거죠?”

 “오, 전 아까부터 여기 앉아있었는걸요.”

 알렉스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토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륙할 때부터요?”

 “당연한 소릴 하시네요.”

 “아닌데…….”

 토미가 확신하지 못 하고 말끝을 흐리자, 알렉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토미, 당신 몇 살이죠?”

 “스물여섯 살이요.”

 “와, 저와 얼마 차이가 없네요. 전 스물아홉 살이거든요.”

 “세 살 차이네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전 방금 스물아홉 살이 된 참이니까요.”

 “와… 생일 축하드려요.”

 토미의 축하는 애써 무엇이든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그것처럼 들렸다. 잔뜩 쥐어짠 목소리를 들은 알렉스가 동그랗게 눈을 뜨다 말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턱을 뒤로 젖히고, 기분 좋게 목청을 떨면서 터뜨리는 소리였다. 맑은 종소리 같았고, 은은하게 퍼져가면서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었다. 토미는 움츠러들어야할지 아니면 따라 미소를 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알렉스는 잔기침처럼 몇 번 더 웃음을 뱉어내다 말고 토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고마워요, 토미. 정말 기쁘네요.”

 “음, 그렇군요.”

 “이런, 비웃음은 아니었어요. 정말 기뻐서 웃은 거예요. 생일을 축하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알렉스는 이번, 을 힘주어 말했고 그래서 그 단어는 형광펜 친 문장처럼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이번’이 괄호처럼 벌어져 알렉스의 생을 감쌌다. 그 괄호는 비행기를 타고 낯선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만을 껴안았다가, 알렉스의 전 생애를 껴안기도 했다. 토미는 지나칠 만큼 알렉스의 이번이라는 것에 대하여 곱씹어보았다. 후자라면 알렉스가 너무 가엾을 것 같았다. 평생에 걸쳐 생일축하를 해준 사람이 토미 하나뿐이라면. 스튜어디스 한 명이 복도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고 앞좌석의 남자가 손을 들어 콜라를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스튜어디스는 카운터기를 들고 있었는데, 사무적인 톤으로 간략하게 지금은 음료를 제공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런 후 그녀는 알렉스와 토미가 앉은 좌석을 지났고, 둘을 보며 버튼을 두 번 눌렀다.

 “당신의 시카고 생활이 무사히 풀리기를 기도해요. 오늘은 제게 있어 특별한 날이니, 그쪽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알렉스가 말했고, 토미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토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3

 테넘스 테이덤은 지난봄 뉴욕본사로 발령을 받아 들어왔다. 토미의 부서에 배정을 받았고, 나이가 젊어서 낙하산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헛소문이었다. 그는 일을 잘했다. 유능했기 때문에 올라온 것이다. 토미는 테넘스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지만 업무상의 이유로 자주 얼굴을 마주쳤고 얼마 뒤 친근한 동료 사이가 되었다. 여름 무렵에 그들은 이따금 같이 퇴근했고 사옥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기도 했다. 테넘스는 토미만큼은 아니지만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다소 낯을 가리기까지 해서 실상 사적인 장소에서조차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래도 유머감각이 있었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토미는 그가 여태까지 사내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해나갔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테넘스는 예의범절을 중시했고, 그래서 고지식한 면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결코 선은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토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마음을 먹고 보니 스스로 꽤 오래 전부터 그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테넘스가 자주 책상 근처로 어슬렁거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더 했던 것은 아니다. 토미는 게이가 아니었지만 남자를 사랑해본 게 처음은 아니었고 그러나 교제를 해본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모호한 헤테로로 남아 있었다. 자신을 헤테로라고 생각하려 애썼기 때문이었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어쨌든 가을이 되었을 무렵, 테넘스 테이덤은 토미가 아마 게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처음부터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토미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의 문제였고 테넘스 테이덤이 누구를 좋아할 수 있냐의 문제였다. 토미는 그의 바운더리에 없었다.

 고백을,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안 했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 날에는 잔뜩 취했다. 그들은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아틀랜타로 떠났다가 삼일 후 본사로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었다. 근처 레스토랑(이제는 단골집이 된)에서 짧게 저녁을 먹고 브랜디를 걸친 후 몇 가지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때의 대화 역시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바다에 드리운 낚시찌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곤 했는데, 막상 잡아당겨보면 아무것도 걸려나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떠올리고 싶다면 가만히 앉아 공을 들여야 했지만 토미는 수면 아래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토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긴장해 자꾸만 술을 퍼 넣던 자신과, 취한 자신을 택시에 태우던 테넘스, 다소 난처한 듯 머뭇거리며 등을 두들기던 손과 토미, 하고 부르던 목소리뿐이다. 다음 날 토미는 공항에서 테넘스를 만났고 테넘스는 캐리어 앞에서 애써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잠시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테넘스의 시선이 토미를 노골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질문해보고 답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찡그린 토미의 표정을 보며 마침내 어떤 답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토미는 간밤에 자신이 어떤 말인가를 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테넘스에게 어떤 말인가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앞의 상사가 성공적으로 웃고 있었고 일은 어설프게나마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가깝게 붙어 앉은 채로 날아올라야만 하는데 괜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토미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밀쳐놓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비행기를 타는 일은 거북해서 자꾸만 손에 땀이 났다.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되었다. 활주로를 따라 내달리던 비행기가 마침내 이륙하는 순간, 가벼운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토미는 세계가 자신을 밀쳐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육신은 안전벨트에 잡혀 있었지만 영혼은 몇 인치 정도 몸에서 벗어나 바깥에 머물렀다. 잠시 후 이명이 찾아왔고 빈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건조해진 기내 공기를 메우며 먼지가 돌아다녔다. 테넘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토미.” 토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테넘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토미는 그 온도의 무게를 쟀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난처함과 연민으로 감싸인 어떤 것이다. 라고 저울이 말해주었다. 요컨대 네가 바라는 것만큼 무거워질 일이 없는 세계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토미는 이미 마음속으로 심판을 내린 채 테넘스가 떠듬떠듬 꺼내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 근래 여자 친구가 저녁을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저녁 식사는 같이 못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여자 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녁을 먹자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토미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굳이 저울에 재보지는 않았다. 그는 충분히 알아들었고, 가느다란 힘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상사가 더는 난처해하지 않도록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예, 압니다.” “네, 다행이군요. 제가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최근의 일이지만…….” “네, 압니다.” 그런 뒤에 대화는 없었다. 기내는 조용했고 이따금 스튜어디스들이 물과 음료와 커피와 쿠키를 날랐다. 토미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빈속이 자꾸만 끓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먹을 쥐자 식은땀이 새어나왔다. 손이 자꾸만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가 했다. 비행은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뭔가를 새겼다. 토미의 영혼이 부재한 사이, 몸과 공백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뭔가를 심어놓았다. 비행기가 지상에 착륙했을 때, 기체가 덜컹거리며 앞으로 쏠렸고 풍선처럼 부유하던 토미의 영혼이 다시 퍼즐처럼 맞춰지기 위하여 육신과 같은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낯선 이물감을 느낀 그 투명한 존재가, 소스라치게 부르르 떨면서 튕겨 올라왔다. 그 때. 바로 그 때, 토미는 그것을 예감했다. 아, 나는 앞으로도 결코… 날 수 없을 것이다. 비행을 좋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제대로 자리 잡지 못 한 영혼이 헐겁게 덜컥거리고 있었다. 그게 꼭 결코 짜 맞춰지지 못 할 관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다물리지 못 한 채 평생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숨기고 싶은 어떤 것을 보호하지 못 하고 뚜껑을 열어젖힐 지도 모른다고.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음을 밀쳐놓으려 했는데 하필 비행기를 탔고, 그 중요한 순간에 세계가 흔들려서 토미의 몸과 영혼을 분리시켜 버렸고, 그래서 영혼을 밀쳐버렸고 중요한 것을 소실한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뭐라고 이름을 붙여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래서 토미는 이 책임을 보잉사에 묻기로 했다. 그러나 테넘스가 말하길, 그렇지만, 토미. 당신은 이미 아틀랜타를 건너본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이것은 비행기공포증도 될 수 없고, 사랑의 상처라고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실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토미는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답이 내려져 있었고 직장 상사이기 이전에 좋은 인연일 수 있던 사람을 잃었다. 예기치 못 한 소실을 만회하기도 전에 시카고로 이동되었다. 테넘스는 토미를 마치 화물 다루듯이 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결코 열어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실상 둘 다 알고 있었다. “압니다.” “네, 다행이군요.” 거대한 대륙을 가로질러 아틀랜타로 떠났던 두 사람은 뉴욕으로 돌아와선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고, 테넘스는 토미를 홀로 LA로, 유타로, 시애틀로 보냈다. 혼자 좌석에 앉아 붕 떠오르는 것에 대해 곱씹었다. 그럼 테넘스가 떠올랐고, 토하고 싶어졌다. 비행공포증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떠오르는 느낌을 좋아해본 적도 없다. 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

 갑자기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창가에 이마를 붙이고 있던 토미가 흠칫 놀라 일어났다. 얕은 잠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식을 허우적거리자,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면서 불 꺼진 기내가 눈에 들어왔다. 시트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안내 등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토미는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어둠 속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번에는 종이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서 옆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플라스틱 커튼을 치지 않은 덕분에 창문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일렁이며 둘의 좌석을 간간이 비추고 있었다. 기내는 조용했고, 이따금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거나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천천히 신문을 넘겼고, 종이가 소름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부스럭거렸다. 토미는 알렉스가 들고 있는 신문의 타이틀을 읽었는데, 뉴욕 타임즈였고 대서특필 된 헤드기사가 전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토미가 기억하기로 뉴욕 타임즈가 전면 기사를 내보내던 것은 1990년대 후반이 마지막이었다. 뉴욕 타임즈는 2000년대 초반부터 잡지 형식을 도입하여 보다 촘촘하게 기사를 꾸려나갔다. 그런 류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토미는 간행기사의 지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들고 있는 신문은 출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오래된 것이었다. 토미는 신문의 날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알렉스가 그 부분을 잡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찡그려 어렵사리 손가락 틈으로 년도를 읽어냈다. 19…81년. 신문이 치워져서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가 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녹색으로, 혹은 갈색으로, 또 보라색으로 반짝였다. 토미는 알렉스가 웃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비행기가 구름을 빠져나가며 달빛이 떨어져서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알렉스는 정말 웃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희미한 미소였고 어딘지 씁쓸해보였다.

 “토미, 이번에는 흔들리지도 않았는데 깨어났네요.” 알렉스가 말했다. “시카고까지 앞으로 삼십분 남았어요.”

 “음.” 토미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비볐다. “그래요… 얼마 남지 않았네요…….”

 대답하고 나서야 이상함을 눈치 챘다. 토미가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뭐 때문에 깨어난 건지 어떻게 아셨죠?”

 알렉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다가, 다시 신문을 들었다.

 “알렉스.”

 “이봐요, 토미. 제 신문이 궁금하지 않아요?” 알렉스는 화제를 돌렸다.

 “…오래된 신문 같기는 하네요.” 토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렉스는 신문의 다음 장을 넘기면서 눈썹을 찡긋거렸다.

 “아뇨, 토미. 이건 미래의 신문이에요.”

 알렉스는 장난스럽게 신문을 뒤적이더니 곧 기사 하나를 짚어 읽어 내려갔다. “2018년 1월 8일의 기사네요. 당신이 시카고 부사에서 승진을 했어요.”

 “전 별로 승진하고 싶지 않은데요.”

 “오.”

 알렉스는 개의치 않고 다음 기사를 읽었다.

 “그럼 좀 더 전으로 가볼까요? 2017년 12월 25일,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원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게 돼요.”

 “그거 정말 어색하겠네요.”

 토미는 테넘스의 어설픈 미소를 떠올리며 침침하게 대꾸했다.

 “별로 좋은 선택 같지도 않고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 쪽에서 찾아가는 걸 텐데, 제가 그런 미친 짓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면 아마 그 다음 날 리볼버를 입에 물 각오를 한 거겠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토미. 어쩌면 상대가 찾아가는 걸 수도 있잖아요?”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다음 장을 넘겼다.

 “2017년 11월 5일. 오, 당신은 원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게 돼요.”

 “진지하게, 미래의 저는 자살할 결심을 굳히는 걸까요?”

 “2017년 11월 2일. 당신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받네요. 아마 3일 동안 고민하다가 데이트를 나간 거겠죠. 토미 당신 너무 우유부단하네요. 애가 탈 상대를 생각해봐요. 요즘 시대에 누가 데이트 하나로 3일을 고민해요?”

 “제가 아직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받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군요.”

 알렉스가 킬킬거렸고, 이번에는 토미도 작게 미소 지었다.

 “2017년 10월 31일. 당신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음.”

 토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테넘스가 전화를 할까? 과연? 그렇다면 왜?

 “오, 토미. 표정 풀어요. 이 신문에 나쁜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적혀있지 않다고요. 미래의 당신은 좋은 전화를 기다리는 거예요.”

 “나쁜 일이 뭔데요?”

 알렉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고, 다음 장을 넘겼다. 신문이 반으로 접혔다. 마지막 장이었던 것이다.

 “2017년 10월 31일. 시간을 보니 오전 2시 경이네요. 당신은 시카고에 도착하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돼요.”

 토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고, 알렉스 역시 그를 보며 화답했다. 둘은 마주본 채 오래 시선을 주고받았다.

 “고마워요.” 토미가 말했다. “이런 식의 위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에요.”

 “위안이 아니에요, 토미.” 알렉스의 보조개가 깊고 아름답게 패였다. “이 신문에는 미래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으니까요. 전 그저 그대로 읽어준 것뿐이죠.”

 알렉스는 신문을 제대로 접기 위해 전면 부를 토미 쪽으로 잠시 펼쳐놓았고, 토미는 기사 헤드라인을 또렷이 읽을 수 있었다. ‘역대 최악의 여객기 충돌 사고. 시카고, 충격에 휩싸이다.’ 사진은 흑백이었고, 전면부가 심하게 일그러진 보잉 여객기 두 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진 아래 달린 주석은 너무 작은 글씨라 잘 보이지 않았다. 파편들이 땅을 뒹굴고 있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등을 보이고 서있었다. 토미는 날짜를 읽었다. 1981년 7월 12일. 바로 다음 순간, 신문이 접혀 들어갔고 알렉스는 그것을 세 번이나 포개어 양복 안으로 집어넣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번에도 알렉스는 상큼하게 웃어보였다. 머리 위로 시트벨트 안내 등이 꺼졌다. 비행기가 탈탈거리며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일어났다. 시트벨트가 그의 허벅지를 따라 미끄럽게 흘러내렸다. 토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움직이면 안 되지 않나요?”

 “오.” 알렉스는 새삼스럽다는 듯 머리 위의 안내 등을 확인한 후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돌아올 거예요.” 아마도요. 알렉스가 덧붙였다.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을 흉내 냈음을 알았지만 어쩐지 웃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알렉스는 시계를 확인한 후 다시 토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토미.”

 토미는 눈앞의 손을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비행기가 흔들거리는 가운데 몸이 앞으로 조금씩 쏠리고 있었다. 잔잔한 물처럼 담겨 있던 영혼이 기울어지며 마구 출렁거렸다. 언젠가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속에서 뭔가 덜컥거리는 것 같았다. 다물리지 못 한 마음으로, 이렇게 평생을 무방비하게, 숨기고 싶은 어떤 것을 보호하지 못 한 채로…….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토미가 물었다.

 알렉스는 기쁜 듯이 웃었고,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코끝을 털어냈다. “그럼요, 토미.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다른 방식으로든, 다른 시간으로든, 혹은 다른 공간으로든 말이죠. 하지만 장담컨대, 우리는 비행기에서 만나지는 않겠네요. 당신의 표는 편도고, 왕복이 아니니까요.”

 토미는 손을 뻗어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알렉스가 맞잡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깍지를 꼈다. 그것은 악수가 아니었기에 몹시 다정하고 상냥하게, 그리고 아주 따뜻하게 느껴졌다. 토미는 그의 향수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맞잡은 손 너머로 희끄무레하게 녹주석이 빛났다. 섬세하게 뻗은 속눈썹이 그 한 쌍의 보석을 조심스럽게 덮었고, 좁은 창을 투과한 달빛이 알렉스의 보조개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토미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 다음 순간, 어떤 온기가 맞물린 손가락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언젠가, 당신은 왕복을 하게 될 거예요. 가야할 곳과 돌아올 곳을 명확하게 알게 되겠죠. 길을 잃지 않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기사에서 읽은 말이 아니에요.” 알렉스는 토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토미.” 알렉스는 깍지를 풀고 다시 악수를 했다. 그리고 얼빠진 토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뒤,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와 걸어 나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스는 마치 유령처럼, 마치 거기 없는 사람인 것 마냥 취급되었고,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알렉스는 복도 끝으로 사라졌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토미는 시트벨트가 널브러진 옆 좌석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비어있었던 것처럼, 몹시 차가웠다.

 

 4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토미는 더 이상 기울어진다거나, 출렁거린다거나, 덜컥거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몸속에 무언가 꽉 들어찬 것 같았고 몹시 따뜻했다. 주먹을 쥐어도 식은땀이 새어나오지 않았고 속도 끓지 않았다. 발끝과 손끝이 줄곧 말랑말랑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활주로를 달리는 동안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토미는 그 무엇도 놓치거나 밀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붙잡은 채 거기 있었다. 아, 어쩌면 나는 앞으로……, 라고, 토미는 생각했다. 어떤 예언을 계시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 기분에 사로잡힌 채 아주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승객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내렸을 때, 카운터기를 들고 있던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구에 선 토미와 텅 빈 좌석 칸을 번갈아 살폈다.

 “승객 분, 마지막이신가요?”

 “네, 마지막이에요.” 토미가 대답했다.

 “이상하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 사람 놓쳤나?”

 화물을 내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토미는 시계를 확인했다. 벽면에 붙은 무수한 세계의 지명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시카고. 새벽 1시 52분. 토미는 B칸으로 이동한 후 작은 트렁크 하나를 기다리면서 5분 정도를 지체했다. 그의 트렁크는 오래 걸리지 않고 컨테이너 벨트 위로 올라왔다. 토미는 그것을 끌고 관광객 라인을 지났고, 줄을 서지 않고 자국민 라인을 통과했다. 입국장으로 이어지는 자동문까지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에 힘을 주어 걸었다. 입국장에는 많은 이들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줄지어 서서 누군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미는 그들을 지나쳐 공항 내부로 들어섰고, 열린 문으로 새어나오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핼러윈 팻말을 단 카페와 베이커리가 보였고 공항 바깥에 드문드문 택시가 서있었다.

 출구의 기둥 근처를 지나던 토미는 닫힌 안내 데스크와 휴대폰 대리점 사이에 작게 마련된 어떤 공간을 보았다. 거기에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토미는 트렁크를 끌고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작은 기념관이었다. 벽면에는 신문과 사진이, 전면부에는 작은 전시용 모니터가 붙어있었다. 공간 한가운데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비석보다 조금 낮은 곳에 일종의 단(團)이 있었는데 거기에 백합꽃들이 얹어져 있었다. 꽃들은 차곡차곡 시간을 두고 쌓인 것 같았다. 가장 아래쪽에 깔린 꽃잎들은 갈색으로 말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에는 꽃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크고 작은 액자들도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남자, 여자, 아이, 혹은 때때로 가족 단위이기도 했다. 모두가 그곳에 놓여 추모를 받고 있었다. 토미는 벽면에 붙은 신문 기사를 읽었다. ‘역대 최악의 여객기 충돌 사고. 시카고, 충격에 휩싸이다.’ 뉴욕 타임즈가 걸어놓은 사진은 낯설지 않았다. 이번에 토미는 사진 아래에 달린 주석을 읽을 수 있었다.

 

 끔찍한 사고. 7월 12일 오후 9시 10분 경 시카고 상공을 날던 보잉 727이 반대편에서 날아오던 보잉 717과 충돌, 전면부가 격파되고 총 415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 델타 항공은 관제탑의 혼선을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번 일은 역대 최악의 여객기 사고로 기록될 것입니다.” - 허프 댈런드 더스터스.

 

 사진을 둘러보던 토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꽃으로 파묻힌 사진들 중에 낯설지 않은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미는 눈을 깜빡였고, 녹주석을 떠올렸다. 사진 속의 알렉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음, 저희 큰아버지시죠.”

 등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토미는 고개를 돌렸고,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사진 속의 알렉스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눈앞에 서있었다. 토미는 잠시 뻣뻣하게 굳은 채 남자를 노려보다시피 했고, 조금 정신이 든 후에는 사진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알아요. 정말 닮았죠. 저희 아버지께서도 늘 말씀하셨어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저희 아버지를 닮은 거예요. 큰아버지와 제 아버지는 쌍둥이셨거든요. 아무튼…….” 남자는 액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가끔 이곳에 와요. 뭔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가족이란 그런 거죠.”

 토미는 여전히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다소 경악에 차있었다-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남자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곤 어, 하고 운을 뗐다.

 “시카고는 어떤 일로 오신 거죠? 업무 차? 아니면 이사? 이전에도 시카고에 와보셨나요?”

 “아뇨.” 토미가 작게 대답했다. “아뇨, 처음 와요.”

 “그렇군요.”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토미는 남자의 볼에 파인 작은 볼우물을 볼 수 있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고, 왼쪽 턱 아래에 점이 하나 있었다. 알렉스는 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눈앞의 남자는 토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음.” 남자는 우물쭈물하다가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어, 우리 인사를 할까요.”

 토미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 말고 힘주어 잡았다. “네, 그러죠.”

 “제 이름은 알렉산더 스튜어트고, 그쪽은…….”

 “토미.” 토미가 말했다. “토미 테일러입니다.”

 “토미.”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저도 알렉스라고 할까요.”

 둘은 그런 채로, 아주 오랫동안 악수하고 있었다. 알렉스에게서 희미한 향수냄새가 났다. 어떤 징조가, 몸속을 흐르던 따뜻하고 상냥한 기운이 부나비처럼 튀어 올랐다.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토미는 알렉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조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웰컴 투 시카고.” 알렉스가 말했다.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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